철거의 추억, <노을>을 낳은 평택의 비극
내가 유년을 보냈던 산골집.
#1. 10대 철거의 기억
어린시절 우리집은 청계산 깊은 곳에 있었다. 사방은 산과 시냇가였고, 어디를 봐도 민가는 없었다. 산 좋고 물 좋으며, 조용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보신탕 집을 했다. 보신탕뿐만이 아니라 토종닭이나 오리탕도 팔았다. 그래도 우리집 최고 인기 음식은 바로 개고기였다.
산골에 홀로 있던 우리집은 참 예뻤다. 꽃 피는 봄이나 흰눈이 내린 겨울이면 많은 화가들이 우리집을 그리러 찾아왔다. 그 예쁜 집과 보신탕이 잘 어울리는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보신탕집 막내아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집이 있던 곳은 그린벨트였다. 당연히 보신탕 가게를 하는 건 불법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불법을 합법으로 가장해 장사를 잘도 하셨다. 손님도 엄청 많았다. 그러다 가끔씩 '공무 수행'이라 적힌 차량을 탄 사람들이 우리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는데, 아버지는 그들이 공무원이라고 했다.
이들은 순식간에 아버지가 만든 평상과 장사를 위한 도구 등을 마구 부쉈다. 난 이들이 들이닥치면 무서워서 아버지 뒤로 숨었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힘을 발휘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무기력했다. 공무원들은 그런 아버지 앞에서 시원스럽게, 아버지의 살림을 작살냈다.
작살을 끝낸 공무원들은 희색을 띠며 돌아갔고, 만신창이가 된 집에 남은 아버지의 얼굴은 사색(死色)이 됐다. 어른들의 희색과 사색 사이에서 어린 나는 질색을 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나는 '공무 수행'이라 적힌 차량만 보면 겁이 났다. 그런 공포에서 자유롭게 된 건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13일 국방부는 대추리와 도두리의 빈집을 모두 철거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촬영)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웃 달동네가 개발되어 아파트들이 들어설 때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어디로 떠났는지 한 번쯤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궁금해했던 그 사람들 중의 몇몇이 바로 이곳으로 흘러들었고, 이제 이곳에서도 그들은 떠나야 한다. 어디로 떠날 것인가." - 공선옥, <유랑가족> 중. 재개발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희색으로 만든다. 반면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눈에 빨리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단장해야 할 누추한 달동네도, 어떤 이들에게는 세상의 모진 바람에 지친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재개발은 누군가에는 대박을, 어떤 이들에게는 피눈물을 안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철거촌을 드나들었다. '철거민'이라 이름 붙여진 어떤 이들과 밤에는 함께 마을을 지켰고, 낮에는 각종 '무기'를 만들었다. 철거민을 쫓아내고 마을 부수기 위해 찾아온 용역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조폭이라는 말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이들은 언제나 뒤에 경찰을 달고 철거촌을 찾아왔다. 그리고 경찰이 보는 앞에서 철거민을 때리고 이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부쉈다. 그 무렵 나는 철거촌이 너무도 싫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철거촌을 찾아온 내게 부침개를 부쳐 주던 한 아주머니는 철거 반대 싸움을 하다가 망루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리고 또다른 아줌마는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여러 아저씨들은 감옥으로 갔다. 학생 시절 잠깐 만났던, 달동네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20대에 겪은 타인의 철거는 여전히 내게 공포 그 자체다.
13일 국방부는 대추리와 도두리의 빈철을 모두 철거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촬영) '공무 수행'에 겁먹던 10대를 거쳐, 철거촌을 드나들던 20대의 다리를 건너, 30대의 언덕에 도착한 나는 가끔 철거촌을 취재했다. '공무 수행'이 적힌 차량을 타고 온 사람들의 당당함은 여전했고, '조폭'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뒤에 선 경찰들이 폭력을 방관하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너지는 자기의 집과 살림살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과거 내 아버지의 그것처럼 사색이었다. 대추분교는 지난 5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박살났다. 수십년 동안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폐교가 된 뒤에는 주민들의 쉼터가 되었던 학교가 무너지는 모습은 잔인했다.
지난 5월 4일 박살난 대추분교(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촬영) 무너지는 대추분교를 보고 오열하는 할머니.(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촬영) 그리고 오늘 평택에서는 대규모 철거가 진행됐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 십년 동안 사람이 살았던 빈 집 90여 채가 대형 포크레인에 의해 금방 무너졌다. 하루 빨리 미군기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 집들은 하루 빨리 쓸어버려야 할 쓸모 없는 낡고 초라한 공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첫날밤을 보냈을 것이고, 첫 아이를 낳고 키웠을 것이며, 한 생을 다한 사람의 영혼을 저 멀리 저승으로 떠나 보낸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직 마을을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집은 비록 텅 비었을지라도 옆에 있는 든든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성장하며 나이테를 남기듯, 사람은 늙으며 자신의 육체 곳곳에 주름을 남긴다. 집 역시 그 안에 살았던 사람의 흔적을 간직한다. 나이테처럼 그리고 주름처럼. 그런데 철거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거세한다. 어떠한 의식도 없이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요는 <노을>이라고 한다. 그 <노을>은 평택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그러나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던 들에는 지난 5월 철조망이 쳐 졌고, "초가지붕 둥근박 꿈 꾸"던 집은 화창한 9월 박살났다. 그리고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에, 색동옷 갈아 입은 가을 언덕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설 것이다. 오늘의 철거는 그 서곡이다. 잔인한 서곡. 무너진 대추분교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촬영) *1984년도 mbc 창작동요제 대상곡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애창하는 동요로 꼽히는 ‘노을’의 가사는 1984년 당시 교사로 부임해 평택에 오게 된 이동진씨가 군문리 다리 위에서 바라 본 대추리 들판의 노을에서 영감을 얻어 잉태됐습니다. <노을>은 평택성동초등학교 안호철선생님 작곡으로 권진숙어린이가 불러 1984년 제2회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ㅡ 우덜 ㅡ
#2. 20대 철거의 추억
#3.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던" 대추리의 비극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족히 50년은 넘었을 대추리 노인분들은 박살나는 대추분교를 보며 오열했다. 이 땅의 공동체에서 학교가 차지하는 의미를 떠올려보면 그 노인분들의 오열은 십분 이해된다.
★ 위의 게시글은 블로그(곰배령 가는 길)님의 글입니다. ㅡ 우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