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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도 청년 '박달'과 충청도 처녀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 울고 넘는 박달재 |
- 여강 최재효 作 |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에 얽힌 사연을 중편 소설로 다루었습니다. 본 작품은 제천 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 경상도 총각 박달(朴達)과 충청도 제천 처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비련(悲戀)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울고 넘는 박달재-40
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爲不善者 天報之以禍. 공자가라사대. 선(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福)으로 갚고, 불선(不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禍)로서 갚느니라. “서방님, 이 식혜 좀 드시면서 공부하세요. 그리고 너무 방에만 계시지마시고 가끔 바람도 좀 쐬시면서 공부하세요.” 아지가 소반에 식혜를 한 그릇 받쳐 들고 박달의 방을 찾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주막에 손님이 뜸했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신경을 너무 쓰는구려.” “서방님, 그럼 말씀하지 마세요. 지난일은 다 잊으시고 무조건 과거 공부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번 봄에 있을 별시에 서방님께서 꼭 입격하실 거라 믿습니다. 아무 생각하지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오로지 공부만 하세요.” 아지의 얼굴에 도화(桃花)가 함빡 핀 듯 발가스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거려 바람 좀 쐬려고 했어요.” 박달은 식혜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주막을 나섰다. 방금 전에 지나 가는 말로 아지의 염원을 듣고 그의 심사가 우울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처지가 괴롭기만 했다. 그는 새로 꺼내 신은 미투리를 바라보았다. ‘어르신이 만들어 준 미투리지. 고마운 어른이신데,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주막에서 세월을 보내야 하다니…….’ 박달은 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금봉을 생각하였다. ‘어찌하나? 잠시 벌말에 다녀올까.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어르신도 나를 나쁜 놈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무슨 팔자를 타고 났기에 가는 곳 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 박달은 나루터를 향해 걸었다. 한양에 온 지 서너 달이 되도록 제대로 강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거리에는 응달을 제외하고 눈이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바람은 불지만 차지 않았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거리는 장작과 옹기를 잔뜩 실을 우마차와 장사치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니 마포나루가 나타났다. 강이 얼어 눈이 쌓인 강 위로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웬만큼 추워도 얼지 않은 한강이었다. 고기잡이배와 나룻배들이 얼음 속에 갇혀 마치 감옥에 있는 죄수들 같았다. 강이 얼마나 단단하게 얼었는지 달구지도 얼음 위로 다니고 있었다. 마포 나루 근처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양지 바른 집 앞 마당에 아이들이 나와서 제기차기와 자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강 서쪽으로 길게 이어진 하얀 모래사장이 양화진(楊花津)까지 끝없이 이어져 아득하게 보였다. 그때 박달의 머리 위로 한 떼의 기러기들이 남녘을 향해 날고 있었다. 박달은 그 기러기들이 부러웠다. 점심때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그런지 사방이 어둑해 졌다. ‘내가 저 기러기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봉이가 보고 싶다. 지금 쯤 나와 헤어진 뒤 수시로 이등령에 올라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의 무심함을 탓하고 있을 텐데……. 기러기들아, 답답한 내 심정을 제천 시랑산 아래 평동 벌말에 사는 금봉이에게 꼭 전해다오. 내가 그녀를 보고 싶기도 하고, 걱정이 되어 하루도 마음편한 날이 없다고. 마음은 늘 그녀의 곁에 있고 밤마다 몽도(夢道)를 걸어 벌말을 향해 가고 있다고. 그리고 이번 별시에 급제하면 곧바로 벌말로 달려가겠노라고 꼭, 꼭 전해다오.’ 박달은 기러기 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남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하구려. 내 비록 마음에도 없는 여인의 뒷바라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늘 그대에게로 달려가고 있다오. 바보 같은 이 남자를 원망하여도 달게 받겠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이번 별시에 꼭 입격하여 그대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리다.’ 박달은 기러기 떼가 사라진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금봉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장승처럼 한동안 서있었다.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진눈깨비는 다시 이슬비로 변하였다. 금방 마포나루 일대는 질척거리는 거리로 변하였다. ‘이런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우산도 없는데…….’ 박달은 서둘러 나루터 근처에 있는 허술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아지가 운영하는 주막에 비하면 규모는 보잘 것 없었다. 주점 안은 이슬비를 피하기 위하여 들어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바람을 쐬겠다고 빈손으로 나온 박달은 아차 싶었다. 두루마기 주머니를 뒤져 보니 다행히 엽전 몇 푼이 있었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만 주시오.” “알았수, 잠시 기다리슈. 주문이 밀려서 그러우.” 후덕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박달을 흘낏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금봉 생각에 마을이 울적해진 박달은 탁주로 어지러운 심사를 달래고 싶었다. 별시를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던 술이었다. 박달은 술잔을 앞에 놓고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불철주야 자신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과 금봉생각에 그는 그만 울컥하고 서러움 치밀어 올랐다. 탁배기 한잔 놓고 멍하니 겨울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겨울비 내리는 마포나루 한 잔술에 타향의 설움 잊으려하는데 나그네 눈가에 이슬만 맺히네 고개 들어 남녘 하늘 바라보고 있노라면 풍산의 노모(老母)가 생각나고 고개 숙이면 제천 평동의 임 아른 거리네 타향 나그네 창공을 나는 저 기러기 같지 않으니 몽도(夢道)가 고운 모래길 될 때 까지 밤새 산 넘고 강을 건너오고 가리라 박달은 신세를 한탄하며 즉석에서 시를 지어 흥얼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해 보였는지 주모와 다른 손님들은 박달을 훔쳐보며 자기들 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눈 쌓인 험준한 산길을 걷다 금봉은 몇 차례 넘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미투리가 젖고, 버선이 젖어 발이 꽁꽁 얼었다. 이등령 고개 마루가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금봉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서방님. 이등령 마루에 왔어요. 바람은 차지만 서방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기 아득하게 뻗어 있는 일망무제(一望霧堤)의 산들을 넘어 한양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서방님, 어서 오시어요. 서방님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어요. 저 눈이 다 녹으면 오실건지요. 그때는 제가 상사병이 너무 깊이 들어 있을 지도 몰라요. 오늘은 늦었어요. 저는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서방님, 내일이라도 벌말로 오세요. 저는 오늘밤도 뜬눈으로 지새울 거에요.” 금봉은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산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등령 마루에 서서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돌이 이등령 마루에 도착하였다. 그는 먼젓번처럼 길가 숲속에 숨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당당하게 다가갔다. 갑돌이를 발견한 금봉이 깜짝 놀랐다. “갑돌아, 여기 웬일이야?” “네가 걱정돼서 왔어.” 갑돌이 식은땀을 닦으며 겸연쩍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 그녀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태산 같았지만 그는 꾹 참고 있었다. “혹시 우리 엄마가 보냈어?” “응,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네가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고 하시면서 걱정하시기에 내가 이등령을 다녀오겠다고 했어.” 갑돌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엇하러왔어? 금방 내려갈 건데.” “네가 먼젓번처럼 넘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 그냥 있을 수 없었어.” “넘어지긴 애들도 아닌데…….” “금봉아, 이제, 그 사람 그만 잊으면 안 돼? 너를 찾아 오겠다고 약속한 기간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갑돌은 금봉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박달님을 잊으라고? 말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는 소리야. 그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금봉은 정색을 하며 갑들을 쏘아 보았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갑돌은 그만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봐. 그 박도령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벌써 찾아왔을 거 아니니. 그런데, 아직도 꿩 구워 먹은 소식인데, 언제까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갑돌의 말에 금봉은 얼굴빛이 변했다. “너 자꾸만 그 분 헐뜯는 소리하려면 먼저 내려가. 난 더 있다가 갈 거야. 나는 잠시라도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야 답답한 내 심사가 안정이 돼. 집 안에 있으면 머리만 아프고 괜히 우울해져.” 그녀는 불룩하게 나온 배를 양손으로 감싸 안고 북녘을 바라보았다. ‘계집애, 그 남자에게 얼마나 홀렸기에 저러는 거야.’ 갑돌은 차마 말은 못하고 끓어오르는 원통함에 가슴을 쳐댔다. “아,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갑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그 이상으로 금봉이 박달에게 미혹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로구나. 그 사내 어디가 그리 좋아서 단 며칠 사이에 푹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로다.’ 갑돌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금봉은 그런 갑돌이 안 되었다 싶었는지 그에게 미안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갑돌아, 나를 걱정해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미안해. 네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나도 네가 싫지 않았고, 지금도 너를 멀리하려는 마음은 없어. 다만, 다만 그 분에게 내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래. 나를 용서해 줘. 이 상태에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갑돌아, 나를 못된 년이라고 욕해도 좋아. 네가 그 어떠한 욕을 하더라도 달게 받을게. 이 자리에서 나를 나쁜 년이라고 큰소리로 욕을 해. 난 너에게 욕을 먹어도 싸. 너의 순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전 처음 본 과객에게 한 순간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너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어. 너에게 욕을 먹고, 얻어 맞고 싶어. 그렇게 해서 나에대한 서운함과 분노를 삭힐 수 있으면 좋겠어.” 금봉은 흐느끼며 자책하고 있었다. “아냐. 너를 욕하고 싶지 않아. 다만, 용기 없었던 나 자신이 미울 뿐이야. 그 무수한 시간 동안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라고. 요즘 나는 죽지 못해 살고 있어. 밤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어.” 갑돌이 울면서 자신의 속내를 토해내고 있었다. “갑돌아, 그러지마. 자신을 학대하거나 비관하지 마. 세상에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니잖아. 제천이나 봉양에만 나가면 발에 차이는 게 여자래. 나 같은 산골 소녀가 무에 좋다고 그러니?” 금봉은 그 동안에 갑돌이 보여준 행동에 대하여 고마워 하면서 그의 순정을 받아 주지 못한데 대하여 진심으로 미안해 하였다. “금봉아, 하나만 물어볼게.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물어봐. 무엇이든지.” 그녀의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만약에?” 갑돌이 무슨 엉뚱한 말을 할까 그녀는 불안하였다. “만약에 박달도령이 이 벌말에 오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거니? 한양에서 다른 여인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리거나 또는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이곳 평동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 놓은 거야?” 갑돌이 진지한 물음에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말도 안 돼. 박도 령님은 나하고 약속했어. 절대로 나를 배신할 분이 아니야. 박달님이 안 오신다면 분명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신 걸 거야. 무슨 사정이 생겨서 못 오고 계실거야.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결되면 나를 보러 오실거야. 난 요즘 매일 밤마다 박달님 만나는 꿈을 꾸고 있어. 어젯밤에도 도령님 만나는 꿈을 꾸었어. 도령님께서 임금님이 하사한 어사화 꽂은 모자를 쓰고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서는 꿈을 꾸었어. 조만간 저 산을 넘어 벌말로 달려 오실거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에 오실 수도 있어.” 금봉은 박달이 온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녀의 신념은 천지신명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갑돌은 그녀의 대답에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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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잘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