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석에 기록된 마송(馬訟) 굴득(掘得) 묘지(墓誌)
서기(西紀) 1766年 조선(朝鮮) 영조(英祖) 임금님 42년 을유년(乙酉年)에 광노자(狂奴子) 휘(諱) 정광로(鄭光露) 公,의 묘지(墓之)를, 발굴하여" 묘지석(墓誌石)을, 얻었다. 장흥 토반인 백진사(白進士)의, 사위가 된 정광로(鄭光露)는, 슬하에 아들 셋과 딸을 두었다. 정변소(鄭變韶) 정치소(鄭致韶) 정지소(鄭之韶) 3형제 였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이을 소(韶) 자를 이름속에 까지 넣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백진사(白進士)의, 도움을 받아서 장흥 남쪽 성밖에 터를 다듬어 분가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광로(鄭光露)는, 본관(本貫)도, 없이 속칭 남박 정씨(鄭氏)로, 행세를 하며" 살게 되었다. 그때 까지도 정광로(鄭光露)는, 자식들 에게 자신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 환갑을 넘기고, 몸이 쇠약해 지면서 언젠가는 자식들 에게 자신의 신원을 알려줘야 겠다는 생각을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정광로(鄭光露)는, 세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자신의 과거인 진주정씨(晋州鄭氏) 가문(家門)의, 내력과 그간의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큰아들 변소(變韶)를, 따로 불러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지석(誌石)에, 글로 적어서 자신이 죽거든 묘지(墓之) 속에 진주정씨 선대(先代) 사적을 지석에 적어서 묻도록 유언을 하였다. 그리고 밝은 세상이 올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지키도록 자식들 에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세아들 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가문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제서야 그간의 모든 의문들이 한순간에 걷혀졌다. 그러나 사실을 안 충격에서 벗어날 사이도 없이 정광로(鄭光露) 公,은 임종(臨終)을, 맞았다. 정승(政丞) 가문(家門)의, 외아들로 태어나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많은 일생을 피눈물로 살아오며" 오로지 존사지효(存祀之孝)를, 몸소 실천하고, 가문(家門)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름을 감추고, 숨겨서 이제 아들 3형제를 남기고, 저세상 으로 가신 것이다.
변소(變韶) 읍혈(泣血) 근지(謹誌)
큰아들 정변소(鄭變韶) 公,은 아버지 정광로(鄭光露)公, 께서 임종(臨終) 하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고령토를 채취하여" 지석판(誌石版)을, 만들고, 그 지석(誌石)에, 선대(先代)가, 누구이며" 증조부(曾祖父) 이신 문정공(文定公) 휘(諱) 정이오(鄭以吾) 께서 아버지가 태어 나실때 하신 말씀이며" 할아버지 우의정(右議政) 휘(諱) 정 분(鄭 苯) 께서 낙안(樂安)에, 유배되어 사사(賜死) 되신 일이며" 아버지가 장흥에 피신하여" 은거 하시던 내력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불초자(不肖子) 변소(變韶)가, 피' 눈물을 흘리면서 이' 지석(誌石)을, 적었다고, 글을 끝맺었다. 그 지석(誌石)을,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묘소(墓所)에, 몰래 묻어 두었다. 아버지 묘소(墓所)는, 백진사(白進士)의, 유언에 따라서 백진사(白進士)의, 묘지(墓之) 아래에 모셨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처가의 선산에 묻힌 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생전에 백진사(白進士)의, 유언이 있어서 백씨문중(白氏門中) 서도 따르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정변소(鄭變韶)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동생들을 불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주의를 하여야 할일들을 이르고, 나서 장손(長孫)인, 자기는 어떻게 되든지 이곳 장흥부 충렬리 에서 살터 이니" 둘째 동생 정치소(鄭致韶)는, 구례 방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살게하고, 셋째 동생 정지소(鄭之韶)는, 서쪽 구(舊) 무안군 현(現) 함평군 으로 내려가 살도록 하였다. 가문(家門)의, 비밀은 어느 누구에게 함구 하도록 단단히 일렀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하여" 흩어져 살게 한것이다. 그리고 아들들이 장성을 하면 이러한 일들을 유언을 하리 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큰아들 정 적(鄭 積)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둘째 아들 정 근(鄭 瑾)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유언을 미루고, 있다가 정변소(鄭變韶) 자신도 갑작스럽게 생을 마치고, 말았다. 둘째 아들 정 근(鄭 瑾)이, 장손(長孫) 가문을 이어 받아서 둘째 아들 정희장(鄭希章)을, 형님이신 정 적(鄭 積)의, 후사로 입적을 시켰다. 당시에 설사 선대(先代)의, 일을 알고 있는 후손(後孫)이, 있었더라도 역적의 후손(後孫) 임을 누구에게 말할것 이며" 정승(政丞)의, 후손(後孫) 인들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 세월이 흘러 100여년 후" 장흥의 남박 정씨는 벌족한 씨족으로 번성해 갔다. 과거급제(科擧及第) 한후 관리로 등용(登用)된, 후손(後孫) 들도 늘어갔다. 독곡공(獨谷公) 휘(諱) 정명세(鄭名世) 청안공(淸安公) 휘(諱) 정명원(鄭名遠) 온성부사(隱成公) 휘(諱) 정명진(鄭名振) 셋째 동생 휘(諱) 정지소(鄭之韶)公, 후손(後孫) 동암공(東庵公) 휘(諱) 정현보(鄭賢輔) 신재공(愼齊公) 휘(諱) 정 감(鄭 瑊)등,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충신효자(忠臣孝子) 열녀(烈女) 학자(學子) 등이 많이 배출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대(先代)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만 정광로(鄭光露) 公,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본관(本貫)도, 없이 장흥부 남박 정씨(鄭氏)로, 통하며" 살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 난후 200년 후에 숙종(肅宗) 임금님때 부터" 일기 시작한 복관상소(復官上疏)가, 영조(英祖) 朝에" 이르러 드디어 밝은 해가되어, 떠올랐다. 단종대왕(端宗大王) 朝에 일어난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재평가를 받아 그들의 행위는 왕권 찬탈을 위한 모반 행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3정승(三政丞)과, 사육신(四六臣)등, 수많은 충신(忠臣) 들이 복관(復官)이, 되고, 그들의 후손(後孫)을, 찾아 녹용(錄用) 할것을 영조(英祖) 임금님께 상주 하였다. 영조(英祖) 임금님 께서 대신들과 논의하여" 쾌히 윤허 하시고, 그들의 후손(後孫)을, 찾아서 은전을 베풀도록 하명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 분(鄭 苯)은, 충장(忠莊) 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 졌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 되었으며"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전라도 장흥부에 하명 되었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이, 하사(下賜) 되었다. 3상(三相) 중에서 영의정(嶺議政) 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 公,의 후손(後孫)은, 찾아서 녹용(錄用)을, 하였으나 우의정(右議政) 휘(諱) 정 분(鄭 苯)의, 후손(後孫)은, 찾을 길이 없었다. 우의정(右議政) 증시(贈諡) 충장공(忠莊公) 휘(諱) 정 분(鄭 苯) 께서 복관(復官)이, 된지 13년이 되던 해에 충청도 연기군에 산다는 연기정씨 일족들이 우의정(右議政) 정 분(鄭 苯)의, 계자손(系子孫) 이라고, 주장하는 상소(上蔬)을, 하였다. 그들은 우의정(右議政) 이신 휘(諱) 정 분(鄭 苯)의, 후손(後孫)이, 없어서 목사공(牧使公) 정효안(鄭孝安)의, 아들 정지산(鄭之産)을, 계자(系子)로, 입적을 시켜 후대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러자 그 이듬 해에 경상도 진양군 금곡면 송곡에 사는 진양정씨(晋陽鄭氏) 일족들이 자기(自己) 들이 충장공(忠莊公) 정 분(鄭 苯)의 직계 후손(後孫) 이라고, 상소 하였다. 예조(禮曹) 에서는 양측을 조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력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어느쪽이 진짜 혈손 우의정(右議政) 휘(諱) 정 분(鄭 苯)의, 후손(後孫) 인지를 가려서 상보 하라고, 하명 하였다. 당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는, 영남감사(嶺南監司) 조 엄(趙 儼)公, 에게 명하여" 이일을 조사케 하였다. 당시 영남감사(嶺南監司) 조 엄(趙 儼) 公,以 양측의 문적을 대령하게 하였으나 어느쪽도 아무런 문적이 없었다. 양측을 불러서 자세이 조사 하였으나 자손(子孫) 임을 증거 할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여" 누구를 충장공(忠莊公) 정 분(鄭 苯)의, 후손(後孫) 이라고, 단정을 할수가 없었다. 양측이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 양측을 공히 퇴척함이 마땅 하다고, 당시 영남감사(嶺南監司) 조 엄(趙 儼) 公,以 상주(上奏) 하였다. 이에 당시 영의정(嶺議政) 홍봉안(洪鳳漢) 公,은 주상(主上)께, 아뢰어 윤허를 받아서 경상도 진양정씨(晋陽鄭氏) 정 준(鄭 遵) 후손과 충청도 연기정씨 정지산(鄭之産) 후손 등, 양측을 다갇이 퇴척을 하였다.
마송(馬訟)
단종(端宗)朝, 충신(忠臣) 으로 우의정(右議政) 이신 증시(贈諡) 충장공(忠莊公) 휘(諱) 정 분(鄭 苯) 께서 복관(復官)이, 되신지 19년째 되던 해 였다. 그즈음 전라도 장흥부 지방에는 백씨(白氏)와, 마씨(馬氏)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은 막강 하였다. 충신정려(忠臣旌閭)를, 하사를 받은 남밖 정씨(鄭氏)도, 어엿한 성씨(姓氏)로, 똘똘 뭉쳐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루는 시골 사랑방 에서 정씨(鄭氏)와, 마씨(馬氏)가, 서로 다투다가 선대를 욕하는 일로 인하여" 시비가 일어났다. 마씨(馬氏)의, 말인즉" 정씨(鄭氏)의, 중시조(中始祖) 정광로(鄭光露)는, 백씨 집안의 종으로 특히 미친 종으로 저승에 가서 까지 종으로 부리기 위하여" 백진사(白進士)가, 자기 묘(墓) 하에 묘지(墓之)를, 쓰게 한것이다. 라고, 말을 하였다. 정씨(鄭氏) 들은 이말을 듣고, 분개하여" 그말이 그렇게 모욕적 일수가 없었다. 장흥마씨(長興馬氏) 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정씨(鄭氏) 들은 그데로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선대(先代)를, 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급기야 싸움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양문중 간의 집단 패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일이 점점커져 관가에 까지 알게 되었고, 결국 장흥부사(長興府使)의, 재판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그당시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仁煐) 公,은 양측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싸움의 발단이 사소한것 이라고, 생각하여" 화해를 시켜보려 했지만 한가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씨족 사회의 풍습중 에는 자기 문중(門中) 선산에 사위의 묘지(墓之)을, 쓰지는 않았다. 즉" 백씨의 선산에 그의 사위 정씨(鄭氏)의, 묘지(墓之)가, 있다는 것이 이해 할수가 없었다. 더구나 장흥 토반인 백씨(白氏) 묘전(墓前)에, 타성인 정씨(鄭氏) 묘지(墓之)가, 있으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좋은 날을 잡아서 묘지(墓之)를, 파묘(破墓) 하여"묘지석(墓誌石)이, 있는지 정씨(鄭氏)들, 에게 증험해 보라고, 권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仁煐)은, 정씨들과 좋은 날을 택하여" 관군(官軍) 십여명을 대동하고, 아침 일찍 정광로(鄭光露) 公,의 묘소(墓所)가, 있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차동에 이르렀다. 정씨(鄭氏)와, 백씨(白氏)의, 후손(後孫) 들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당시 광노자(狂奴子) 정광로(鄭光露)公, 묘소(墓所) 주위는 서기(瑞氣)가, 빛나서 무지개 처럼 영롱한 빛이 사방을 훤하게 비췄다고, 전한다.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仁煐) 公,의 독려하에 발굴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정광로(鄭光露) 公,의 묘전(墓前) 에서 실로 놀라운 물건이 나왔다. 고령토로 구운 지석(誌石) 2편(二片)이, 나온 것이다.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公仁煐) 公,은 물론이고, 주위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줄 몰랐지만 그 지석(誌石) 이야말로 정광로(鄭光露) 公,以 충장공(忠莊公) 휘(諱) 정 분(鄭 苯)의, 적자임이 확인되는 그리고 290년 동안이나 긴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남박 정씨(鄭氏)가, 진주정씨(晋州鄭氏)로, 다시 탄생하는 놀라운 물건 이었던 것이다. 지석문(誌石文)을, 읽어본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仁煐) 公,은 그동안 조정(朝廷) 에서 찾고, 있던 충장공(忠莊公) 휘(諱) 정 분(鄭 苯)의, 후손(後孫)이, 바로 휘(諱) 정광로(鄭光露) 公,의 후손(後孫) 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급기야 조정(朝廷)에, 이 사실을 보고를 하고, 지석(誌石)을,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예조(禮曹) 에서는 지석(誌石)을, 감별하고, 봉람하여" 그 지석에 적힌 글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청천후(菁川後人)인, 진주정공(晉州鄭公) 묘지(墓誌)로, 시작된 광노자(狂奴子) 묘지석(墓誌石) 원본이 발굴이 된 것이다. 중국(中國) 명(明) 나라 연호(年號)인, 홍치(弘治) 9년 병진(丙辰) 1월 25일 변소(變韶) 읍혈근지(泣血謹誌) 불초자(不肖子) 변소(變韶) 읍혈근지(泣血謹誌) 라고, 쓰여진 지석(誌石) 2편(二片)이, 출토가 되었다.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 조 엄(趙 嚴) 公,은 6년전에 영남감사(嶺南監司)로 있을때" 연기정가(燕岐鄭家)와, 진양정가(晋陽鄭家)의, 상소 사건을 조사한 일이있는 사람으로, 이 지석문(誌石文)을, 남달리 자세하게 관찰 하였으고, 전(前) 영의정(嶺議政) 서지수(徐志修) 전(前) 영의정(嶺議政) 유척기 장흥부사(長興府使) 황인영(黃仁煐)등, 여러 명사들이 정광로(鄭光露) 公,의 묘지(墓之) 발문(後敍)을, 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