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과 문용형과 親日> 後世가 先代의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선 안된다 문용형은 함흥농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보통학교 졸업 뒤 흥남읍의 고원(雇員)으로 취직하여 서기나 계장으로 승진했을 수도 있다. 이영훈(前 서울대 교수) *유튜브 '이승만TV'에 실린 '백선엽과 문용형'의 원고입니다. <백선엽과 문용형> 지난 9월 6일 국회 정무위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민주당의 모 의원이 박민식 보훈부장관에게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인 것은 관련 특별법과 위원회가 내린 결론인데, 장관은 무슨 근거로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박민식 장관은 국가가 역사적 진실을 규정할 수는 없다. 노무현정부 당시의 특별법과 위원회 활동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 1949년 당시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로 수사한 사람은 600여 명이며, 당시 백선엽은 없었다. 그런데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제정한 특별법에 의해 백선엽이 친일파가 되었는데 이것이 잘못이다. 예컨대 해방 당시 나이 25세의 만주국 중위인 백선엽이 친일파라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 문용형은 같은 나이 25세로서 일제하 흥남시의 농업계장이었는데, 이 역시 친일파가 아닌가. 이상과 같은 박민식 장관의 대답은 일정기의 말단 공무원이라고 친일파라 할 수 없듯이 만주국의 하급 장교인 특정 인물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그런 취지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해프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9월 12일 경남 양산에서 은퇴해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박민식 장관을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라고 매도했다는 이유로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박민식 장관은 “백선엽 장군이든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친이든 그 삶을 함부로 규정지어선 안 된다. 일제 강점기라는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는 같은 기준, 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진심마저도 왜곡하면서 전직 대통령이 법적 공격을 통해 또다시 반일 대 친일의 정쟁으로 몰아가는 행태에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2004년 노무현정부가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2005년부터 동 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을 선정한 작업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 직후 1949년 반민특위가 수사 대상으로 삼은 688명보다 317명이나 많은 수입니다. 이 추가된 인물에 백선엽 장군을 위시하여 이승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닌 김성수, 문교부 장관 백락준,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노기남 추기경,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소설가 김동인, 시인 서정주 등, 일제하에서 민족의 실업, 교육, 언론, 문화에 힘쓴 분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저는 초대 정부가 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하고 처벌한 사업보다 60년이 늦은 세월에 그 시대를 알지 못하는 후인들이 벌인 이 같은 역사 청산 작업이 법리에서나 역사 이론에서나 크게 잘못되었다고 비판해 왔습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부친의 명예와 관련하여 박민식 장관을 고소하였기에, 또 박 장관이 이를 계기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했기에, 저로서는 침묵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멍석이 깔렸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면 진정한 광대라고 할 수 없지요. 백선엽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군에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백선엽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하여 1939년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에 입교하여 1942년 소위로 임관했으며,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간도특설대에 근무할 당시 중국공산당 소속 팔로군의 게릴라 부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백선엽은 북한으로 돌아와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잠시 일하다가 서울로 월남하였습니다. 이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의 전신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1949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으로 복무하다가 6·25전쟁을 맞이했습니다. 6·25전쟁에서 백선엽 장군이 최후의 방어선인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백척간두에서 선 이 나라를 구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분이 친일파가 된 것은 앞서 소개한 2005∼2009년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하급 장교이지만 근무한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였다는 것입니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속한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에 조선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조선의 독립군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같은 백 장군의 회고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는 조선인 독자의 부대는 없었습니다. 있었던 것이라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해서, 주로 공산당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영토 회복과 혁명을 위한 군대였습니다. 1939년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벌였으며, 그 결과 1941년 이후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은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북항일연군에 소속한 김일성의 소부대는 연해주 소련령으로 피하였습니다. 이후 만주에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소속한 게릴라 부대의 소규모 활동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전투를 벌인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조선인이 속해 있었지만, 그것을 두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독립군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조선인은 통일적인 독립운동의 조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상적으로도 크게 분열해 있었습니다. 당시 조직이나 이념의 면에서 하나로 잘 통합된 조선인의 정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환상입니다. 이념적으로 조선인들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로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조선인 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조선인이 거주한 모든 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소개할 문재인의 아버지 문용형이 살았던 국내의 함경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주,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함경도는 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대규모 일본 자본이 투하되어 가장 급속히 공업화하고, 그에 따라 많은 수의 조선인이 자산계층으로 성장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법에 따라 공산주의 활동을 극력 억압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물러간 뒤 미군정은 공산당의 활동을 합법화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립은 전국적 범위에서 전면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남북한의 분단을 가져오고 나아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6·25전쟁은 그 성격이 복잡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론 조선인의 이념적 분열에 따른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 내전이 1940년대 전반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와 역시 다수의 조선인이 포함된 팔로군 부대 사이에서 조기적으로 벌어진 셈입니다. 역사적 맥락이 이러하므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활동을 친일반민족행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백선엽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웠을 뿐입니다. 2005∼2009년 노무현 정부가 벌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고 백선엽에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것은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이 자유 진영의 인사들에 씌운 프레임 그대로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박민식 장관의 발언은 이 같은 노무현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었음을 지적한 위에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소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건립되고 발전한 이 나라의 자유시민이라면 이 같은 박 장관의 소신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문재인의 아버지 문용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는 1920년 함경남도 함주군 운전면 운성리의 솔안마을이란 해변가 마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27년 이후 이 지역에는 천지개벽과 같은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일본의 신흥재벌인 ‘일본질소’가 이 지역에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질소비료’는 연간 비료 생산량이 세계 제5위인, 실제론 3위와 다를 바 없는, 대규모 화학공장이었습니다. 비료 생산에는 대량의 전기가 중간재로 소요되었습니다. ‘일본질소’는 일본에서 대량의 전기를 확보할 수 없자 함주군 흥남에다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질소’의 노구치라는 유명한 사업가는 함주 북쪽 고원의 부전강과 장전강에 풍부한 전력 자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압록강으로 흐르는 두 강을 댐으로 막은 다음, 강물을 함주 방향으로 뚫은 터널로 역류시켜 낙차 200m의 수력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개발한 전력 자원은 ‘조선질소비료’ 공장뿐 아니라 북조선을 관통하는 송전망을 통해 평양으로 나아가 경성으로까지 공급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걸쳐 조선의 공업화가 크게 촉진된 데에는 이 같은 전력 자원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1927년 이후 흥남은 조선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예컨대 1939년 흥남읍을 포함한 함주군의 인구는 23만 8,041명으로 경성부와 평양부에 이어 전국 제3위이며, 부산부보다 많았습니다. 흥남읍만의 인구는 11만 명을 초과하였습니다. 그렇게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와 더불어 지역의 땅값이 급등했으며, 그에 따라 땅을 많이 소유한 조선인 가운데 상당한 재력가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함주군 운전면 운성리에 거주한 남평 문씨 가문에서도 그러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문근형입니다. 이 사람은 1937년과 1939년 동아일보가 선정한 흥남읍의 20∼25명에 달하는 조선인 유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898년생인 그는 1930년부터 흥남읍의 유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930년과 1935년에 흥남읍회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나아가 함주군농회 평의원, 흥남금융조합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협력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흥남금융조합 평의원은 6명인데, 그중에 3명은 일본인, 3명은 조선인이었습니다. 흥남의 유지로서 문근형은 지방의 교육 발전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1932년 흥남공립보통학교 설립, 1935년 흥진학원 교사 신축, 1935년 흥남 천기리에 있는 또 하나의 공립보통학교 설립에 적극 관여하여 기성회 회장, 부회장, 평의원으로 활동하고 많은 기부금을 출연하였습니다. 1939년 그의 장남은 도쿄의 게이오대학에, 차남은 교토중학교에 유학 중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문근형은 월남하여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신흥 자산계급으로서 총독부에 협력한 그가 공산 치하에서는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근형을 중심으로 한 함주 운전면의 남평 문씨 일족도 대개 같은 처지였으며, 문재인의 아버지 문용형이 월남한 것도 크게 보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용형은 문근형과 4촌 간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문재인의 운명』에서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때 함흥농고를 나왔다. 함흥고보와 함께 함경도 지역의 명문이었다. 아버지는 인근에서 수재라는 말을 들었다. 졸업 후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북한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했다. 그때 공산당 입당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버티고 안 했다고 한다. 유엔군이 진주한 짧은 기간 동안 농업과장도 했다. 그리고 피난을 내려왔다.” 그런데 인터넷상의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같은 사전류에서 문용형을 검색하면 함주군 흥남읍 출생으로서 1936년 함흥농고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후 흥남읍의 농업계장으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흥남읍의 서기로 근무했다고 쓰여 있어서 그 내용이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정보는 2013년 이후 문재인 씨가 두 번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세간에 널리 퍼진 것을 취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번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박민식 장관을 고소한 것은 자신은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흥남읍의 농업계장으로 근무한 것이 ‘해방 후’라고 했는데, ‘일제 하’로 잘못 이야기하여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말단이기는 하나 총독부의 관리였다면 큰 범주에서 친일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여러 매체에서 문용형이 1941년 함흥농고를 졸업한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흥남읍의 계장이나 서기로 복무했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을 보고 이루어졌을 박 장관의 발언이 과연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여기서 문재인이 그의 자서전에서 소개한 아버지의 이력 자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를 따져보겠습니다. 그것은 역사학의 본질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조차 불분명하거나 잘못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함흥농업학교(이하 함흥농교)를 졸업했다고 하였습니다. 입학 연도는 여러 매체가 1936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발원은 역시 문재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1936년 3월 18일 동아일보를 보면 동년 함흥농교에 합격한 학생들의 명단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중학교 진학은 적령기 소년 인구의 1%에 불과한 엘리트 코스였으며, 그로 인해 각종 중학교의 입학생 명부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1932, 34, 35, 36년 함흥농교 입학생 명부가 신문 기사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1936년 기사를 보면 “함흥농업교 지원 354명 중 53명 합격”이란 제목하에 그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문용형은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1937년 이후의 합격생 명단은 신문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여러 매체가 기술하는, 문용형이 1936년에 함흥농교에 입학하여 41년에 졸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문용형의 함흥농교 졸업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1937년 이후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집안의 역사라고 해도, 심지어 아들의 아버지에 관한 회고라 해도, 그것이 정확한 기록에 근거하지 않은 이상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재인 씨는 아버지가 함흥농교에 입학한 정확한 연도를 혹시 소지하고 있을지 모르는 학적부 등을 통해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앞서 같은 친족인 문근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용형의 집안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용형의 아버지는 문정기입니다. 흥남읍에서는 1930년대에 걸쳐 조선인의 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932년 흥남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모금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때 기부금 5,000원 모집을 목적으로 하여 면내 자산가들 약 140명이 10원 이상에서 200원까지를 기부하였습니다. 그 140명의 명단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문씨 문중에서도 문근형을 포함하여 11명이 기부를 했는데, 그 가운데 문정기는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1935년 6월에는 문근형이 자신이 후원회 회장으로 있는 흥진학원의 교사를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약 61명의 면내 유지가 출연을 했으며, 그 가운데 12명이 문씨 일족이었습니다. 거기에도 문정기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흥남읍 천기리에 또 하나의 공립보통학교 교사의 증축 공사가 착수되었는데, 읍내의 기부자는 도합 63명이었습니다. 문정기는 거기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문용형의 집안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월사금이 3원 정도나 되는, 1년이면 입학금을 포함하여 40∼50원의 학비가 드는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의문도 제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용형이 재주가 출중하여 문중의 다른 재력가가 그의 중학교 진학을 후원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문재인은 아버지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고 했습니다만, 이것의 의미도 상당히 불투명합니다. 일정기의 공무원 시험이라면 연간 100여 명을 선발하는 보통문관시험을 가리킵니다. 그에 합격하면 판임관 이상의 직급에 임명됩니다. 이에 흥남읍의 서기였던 문용형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을 리는 없습니다. 인터넷 매체에 따라 문용형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읍면의 경우 읍면장은 총독부의 관원입니다만, 그 아래의 서기나 고원은 리원(吏員)으로서 총독부 소속의 관원이 아닙니다. 총독부는 매년 『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을 발간했습니다. 지금도 고스란히 잘 전하는 그 직원록에 읍면의 리원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읍면의 리원은 읍면장이 보통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학교장의 추천을 받거나 간단한 필기시험을 통해서 재량으로 선발하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여러 신문에 면서기 시험의 합격자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리게 됩니다. 전국의 2,325개에 달하는 모든 읍면이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학교장의 추천이나 지인의 소개로 읍면장이 재량으로 선발했습니다만,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는 전형이라 하여 간단한 필기시험을 거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문용형이 합격했다는 공무원 시험은 아마도 흥남읍장이 재량으로 시행한 전형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1941년 당시 흥남읍사무소의 편제나 소속 리원의 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참고로 동년 함북 성진읍을 보면, 당시 성진의 인구는 6만 2,000명으로서 흥남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성진읍 역시 일찍부터 일본 자본이 진출한 유수의 공업도시였습니다. 읍사무소의 편제를 보면 읍장, 부읍장 이하에 서무계, 내무계, 회계게, 재무계, 사회계, 호적계, 시가계획계 등 7개 계가 있었습니다. 농업계는 없었는데, 아마도 공업도시여서 그러했을 겁니다. 7개 계에 배속된 리원을 보면 서기 20명, 기수 1명, 촉탁, 4명, 고원 8명, 임시고원 9명으로서 도합 42명이었습니다. 이에 비춘다면 성진읍보다 훨씬 공업화된, 인구가 두 배인 흥남읍에 속한 리원은 서기 40명 정도를 포함하여 70∼80명에 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은 대개 보통학교 졸업생으로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거나 읍장이 재량으로 실시하는 전형을 통해 고원으로 선발된 다음, 능력과 품행을 인정받아 서기로 나아가 계장으로 진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참고로 신문에 보도된 1934년 함흥농교 졸업생의 진로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졸업생 31명 중 관청 취직은 9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교원, 금융조합, 북선전기, 불이흥업 등 대우가 훨씬 좋은 곳으로 취업하였습니다. 1941년이면 공업도시 흥남의 발전상은 더욱 높은 수준이어서 지역의 최고 엘리트인 함흥농교 졸업생이 보통학교 졸업생들과 경쟁하면서 읍의 리원 전형에 응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또한 문재인은 그의 부친이 해방 후 흥남시의 농업계장을 했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그 점조차 확실치 않다고 의심합니다. 전국 제일의 공업도시 흥남읍은 1944년 흥남부(시)로 승격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성진읍의 경우를 보아 흥남부 청사에 농업계가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라 하더라고 그것이 기록과 문서에 근거하지 않은 이상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문용형은 함흥농교에 진학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보통학교만을 졸업한 뒤 흥남읍의 고원으로 취직하여 서기나 계장으로 승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그의 아들의 회고는 흥남읍이 재량으로 실시한 전형인 듯합니다. 어쨌든 그가 일제하에서 흥남읍의 서기로 복무했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계장으로 승진한 연도가 해방 후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 전일 수도 있고 그 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문재인 씨가 관련 기록을 제출하여 증명하는 도리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은 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저는 역사란 본래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0년 전반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읍면의 서기는 총독부의 전시동원을 말단에서 수행하는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쌀을 공출하고 놋그릇 등 군수물자를 징발하고, 나아가 노무자를 동원하는 일 등이 모두 읍면 서기의 몫이었습니다. 흔히들 노무 동원이라 하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것만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보다 훨씬 대규모인 국내 동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선에서는 곳곳에 철도, 공장, 비행장, 방공호 등의 토목공사가 대규모로 진행 중이었고, 그를 위해 남선에서 수십만의 청년이 몇 개월씩 동원되었습니다. 이 대량의 노무 동원과 감독에 문용형을 비롯한 흥남읍의 관리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어선 읍면의 서기는 한동안 주민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구타를 당하여 사망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좋은 예를 소설가 박완서의 회고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박완서의 삼촌은 개성읍의 서기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삼촌은 피신해 없는데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와서 집안의 세간살이를 부수고 장독대를 박살 내고 갔다는 겁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함경남도 함주군 운전면 운성리에 터전을 둔 남평 문씨 일족으로서 문근형이나 그의 족친인 문용형은 일제하에서 성장한 신흥 자산 또는 중산계층으로서 지역의 실업과 교육에 힘썼으며, 그런 면에서 총독부에 협력하는 계층이었습니다. 해방 후 문근형이 남쪽으로 내려온 것도, 문용형이 소련군 치하에서 공산당의 입당 권유를 물리치고 6·25전쟁 도중에 월남한 것도 그의 일족이 북한 공산 치하에서 생존하기 힘든 계급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문근형이나 문용형이나 그의 일족을 친일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출생한 그들은 총독부에 협력했지만, 동시에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서고 봉사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속성에서 반공진영에 속했으며, 그래서 해방 후 또는 6·25전쟁기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월남한 배경이나 동기는 백선엽 장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백선엽과 문용형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그 역사적 배경이나 속성이 동질적인 부류입니다. 그들을 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함은 참으로 당치 않은 작태입니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사업의 문제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주동 인물이었던 강만길, 이만열 같은 역사학자들의 역사관이나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를 여기서 논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들은 후세에 태어났다는 단지 그 하나의 권리에 입각하여 그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초라하고 편향된 것인가를 부끄러움 없이 폭로하였을 뿐입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역사조차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문용형에 대한 아들 문재인의 회고가 그 점을 잘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듯이 후세에 태어났다는 권리 하나만으로 선대의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곤란합니다. 더구나 정치가 특정의 동기를 가지고 역사에 개입하는 것은 언제나, 반드시, 커다란 폐해만 초래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민식 장관이 국가라 해도 역사적 진실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정당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가 얼마나 무식한 지를 모를 정도로 무식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
[ 2023-10-03, 08:4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