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기적은 사실인가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1.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한 모세의 기적
창세기 37장 이하와 출애굽기는 족장시대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대강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다른 어느 형제들보다도 부친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샀고,형제들은 요셉과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다. 요셉은 미디안인(또는 이스마엘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료의 차이이다) 대상에 팔려 이집트의 파라오의 신하이고 경호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된다. 얼굴이 아름답고 풍채도 좋은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으나 그것을 물리쳤기 때문에 억울한 죄를 뒤집어 쓰고 투옥된다. 그리고 같은 감옥에 갇혀있던 파라오의 시종장이며 술잔을 드리는 시종장과 빵을 구어 올리는 시종장의 꿈을 해몽해 준 인연으로 파라오 앞으로 불려나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여 7년의 대풍작과 7년의 기근을 예언하여 결국 파라오의 대신으로까지 출세한다. 그리고 가나안에 남아있던 야곱의 일족은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오고 요셉은 책략을 써서 그들을 곤경에 빠지게 하고, 결국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부친 야곱을 포함한 온 가족을 이집트로 오게하여 이스라엘인은 이집트에서 크게 번영하게 된다. 야곱의 수명은 147세,요셉은 11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후 이집트에서는 요셉을 모르는 왕이 즉위하고, 그 새왕은 이스라엘인의 번영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건축 공사 등의 고역에 흑사하고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모세는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파피루스로 만든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가에 버리지만,다행히 이집트 왕녀가 주워다 길러 성인이 된다. 어느날 모세는 동포 한 사람이 이집트엔에게 학대받은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타살하고 시체를 모래 속에 묻고 파라오에게 도망하여 시나이로 가서 미디안 사제 이드로에게 몸을 의탁한다. 모세는 그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다. 어느날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에서 불꽃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던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에로 학대받고 있는 동포 이스라엘인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모세는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를 돌아가 파라오에게 동포를 해방하라고 교섭한다. 그들은 파라오 앞팡이를 뱀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파라오는 이스라엘인의 해방을 완강히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에 여러가지 재앙을 내려 이집트인을 괴롭혀서 드디어 이집트 전국의 처음 난 아들과 짐승을 하룻밤 사이에 죽이는 대재앙을 내린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만은 이 재앙을 면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유대인 사이의 중요한 축제로서 지켜지고 있는 <과월절>의 기원이다. <과월>의 개념의 시작은 분명하지 않으나, 유목민이나 양이나 산양의 첫 새끼를 잡아 그 피를 천막 입구에 발라서 악령의 침입을 방지하는 관습에서 유래한 것 같다. 파라오는 결국 굴복하여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나가는 것을 허가했으나 다시 마음의 변화가 생겨 전차와 기병을 출동시켜 그들을 추격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430년간이었으나, 이것은 사제적 사료층의 기록이며,그 숫자의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수에즈만 북쪽의 호수<갈대의 바다>)(홍해가 아니다)기슭까지 추격 당한 이스라엘인 앞에서 바다는 좌우로 갈라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그곳을 지나 도망했으나 추격해 온 이집트군이 그곳에 들어서자 바다가 본래대로 합쳐졌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물속에 빠져 죽고 만다. 이것이 그 유명한 <출애굽>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인을 갈대의 바다에서 인도하여 시나이의 황야로 행군해 나갔으나 이집트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젖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불평하여 모세를 곤란하게 한 하나님은 식량이 부족할때는 하늘에서 이슬과 함께 만나를 내리게 하고 백성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메추라기를 보내는 등 여러가지 은혜를 베푼다. 비루인에서는 오늘날도 만나를 수확하고 있다. 이것은 6월에서 7월에 걸쳐 위성류(Tamarisk)교목 가지에 생기는 반짝반짝 빛나는 물방울 같은 달콤한 나무의 분비물이며, 타마리스크의 수액을 많이 흡수한 여러가지 패각충에 의하여 분비되는 것이다. 만나는 꿀과 버터와 같이 빵과 함께 먹을 수 있으며 <안개가 걷히면 광야 지면에 마치 흰 서리가 땅을 덮듯이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출애굽기 16장 14절) 모세가 인도하는 일행은 드디어 거룩한 산 시나이산 기슭에 도착하여 머문다. 모세는 단신 시나이산으로 올라가서 번개와 천둥이 치고 나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가 새겨진 두 장의 석판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기록된 석판이었다고 한다. 모세가 산 중에 있는 동안에 산 아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물려와서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것을 예배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 자들은 구제할 수 없는 백성이 구나>하고 분노하였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없는 유일신 야훼의 선민이 되어 <십계>의 석판을 넣은 계약궤를 모신 천막을 성전으로 삼고 아론을 비롯하여 레위족이 사제가 되어 40년간 하나님의 약속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가나안을 찾아 광야를 유랑하였다. 그 동안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바위에서 솟게하고 구리 뱀을 만들어 뱀에 물린 사람을 치유하는 등 여러가지 기적을 베풀었다. 여행 도중 아론을 비롯해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의 제1세들은 모두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민수기 10장 11절이하 33장 16절),카데스바르네아(신명기 1장 19절)를 거쳐 모압 평야에 도착하여 오랫동안의 광야의 표류여행을 마치는 것이다(민수기 33장 48절),모세는 대망의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죽는다(신명기 34장1-6절).가나안 정복은 다음 대 여호수아에게 맡겨지게 된다.
2. 모세의 생애는 재현이 가능한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 모세의 출생은 다음과 같다. <레위 가문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같은 레위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아내가 아기를 배어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너무나도 잘 생겨서 석달동안을 숨겨서 길렀다. 그러다가 더 숨겨 둘 수 없게 되자 왕골상자를 얻어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속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숲속에 놓아 두었다. 그리고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형편을 살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나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하나를 보내어 건져다가 열어 보았더니 사내 아이가 울고 있었다.(출애굽기 2장 1-6절) 모세의 출생은 다른 제왕과 마찬가지로 전설에 쌓여있다. 기원전 30세기 후반의 아카드왕 사르곤 1세 (BC24세기)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나는 위력있는 왕, 아카드의 왕 사르곤이다.나의 모친은 비천한 몸이었고 나는 부친을 모른다. 나의 부친의 형제는 산 속에 살고 있었다. 나의 고향은 유프라테스강 강변의 이즈피라스이다. 비천한 모친은 나를 잉태했다. 그녀는 나를 남몰래 해산하여 갈대 광주리에 넣고 겉에 역청을 발라서 나를 강에 버렸으나 강은 나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강은 나를 띄워서 관개자 아키에게 실어갔다.... 관개자 아키는 나를 자기 아들로 삼아 길렀다. 모세의 출생은 이와 비슷하지만 이것이 모세 전승을 형성하는데 직접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이집트의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는 이집트인에게 학대받고 있는 동포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서 사제의 집에 의탁한다. 그 사이에 모세는 시나인 산(=호렙산)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고 동포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의 압정을 피해서 이스라엘 동포를 탈출시키는데 성공하고,드디어 홍해의 기적을 베풀어 승리를 거두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 된다. 여기에서 모세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시나이 계약>이라고 한다. 이 시나이 계약은 광야를 표류하던 시기의 사건이며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의 출발점이다. 이 지도자의 역할을 완수한 것이 모세이다. 그후 모세는 40년간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굶주림과 노고로 갖은 역경을 헤치며 광야의 생활을 계속하여 요르단강 동쪽까지 도달했으나, 그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느보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상이 출애굽기,민수기에 기록된 모세의 생애의 골자이지만, 그 재현은 극히 곤란하다. 신약성서에는 모세는 옛 계약의 중개자로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그리스도와 대비해서 묘사하고 있다.
3. 이집트 탈출의 연대는 언제인가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모세 5경 뿐이나라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취급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학의 분야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논쟁을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이집트 탈출을 포함해서 모세에 관한 이집트 측의 사료는 전혀 없으며,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서 인용한 문헌 이외에는 이 사건을 입증한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연대에 관해서도 결정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서는 대별하면 <기원전 15세기설>과 <기원전 13세기설> 두가지가 있다. 첫째 설은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 것이다. 그 구절은 <솔로몬 왕(BC 961년경-922년경)이 그의 치세 제4년,이집트 탈출후 제48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기럭이다.그러나 르호보암(유다왕국)과 여로보암(이스라엘왕국)에 의한 왕국의 분열은 아마도 기원전 922년이든가 그보다 조그 ㅁ후의 일이며,솔로몬은 40년간 통치한(열왕기상 11장 43절)것으로 돼있으니 솔로몬은 기원전 961년경에 즉위한것 같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기원전 958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기원전 1483년경의 일이 된다. 둘째설은 출애굽기 1장 11절의 <그리하여 그들은 공사 감독들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를 세웠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킬로미터에 있는 텔.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가 언급하고 있는 하빌의 활동이나,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여리고의 발굴 조사 등에 의하여 <기원전 15세기설>이 유력해 졌으나, 근년의 여러 발굴 조사에 유력한 증거가 나타나 현재로는 <기원전 13세기설>이 유력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13세기의 어느 해를 이집트 탈출의 연대로 잡느냐 하는 것은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울브라이트는 기원전 13세기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기원전 13세기말로 추정하고 있다.
4.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한 왕은 누구인가
출애굽기 1장 11절(J 사료층)에 보이는 라므세스는 <라므세스 2세의 가문>을 의미하는 펠.라므세스이고,그것은 또한 현재의 나일강의 지류 동쪽 강변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어촌 아바리스.타니스를 가리킨다고 추정된다. 그 땅은 1929-32년에 D.몬테가 발굴해서 비석과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제19왕조 라므세스 2세(BC 1304년경-1237년경)는 타니스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현재의 카르틴 부근에 호화로운 벽돌이 조각으로 장식된 왕궁을 가진 왕도를 건설했다. 이 아바리스는 힉소스의 축출(BC 1570년경)후에 포기되었다가 제19왕조 세티 I세(BC 1318경-1304경)에 이르러 겨우 재건된 것이다. 보통 힉소스의 수도는 나일 델타인 산.엘.하갈의 위치에 있으며,그 땅은 아바리스(BC1300년경-1100년경) 마지막으로 타니스(그리스 이름)또는 소안(BC 1100년경) 마지막으로 타니스(그리스 이름)또는 소안(BC 1100년경이후,민수기 12장 22절, 시편 78편 12,43절,이사야서 19장 11,13절,에스겔서 30장 14절 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 기원전 1438년경의 직전에 그 부근에서 대건축 사업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라므세스와 비돔의 두 도시는 앞에서 말한 제19왕조의 라므세스 2세가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인이 노예 생활을 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대한 다른 해석은 이스라엘인이 더 이른 시기에, 아마 힉소스에까지 소급되는 시기에 이들 도시에서 노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라므세스라는 명칭의 사용은 시대를 잘못 계산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우리는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이 후대의 가필이거나 시대를 잘못 계산한 기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제 19왕조의 세테 1세나 라므세스 2세가 이스라엘인을 압박한 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W.F. 울브라이트는 라므세스 2세의 기록과 그 왕이 건설한 비돔과 라므세스의 양 도시의 발굴 조사에 근거해서, 특히 그 왕이 델타에 거주하였고 그 치세 초기에는 오직 타니스에서의 건축공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이 전승의 역사성을 지지하고 있다.특히 그 라므세스는 전술한 것처럼 힉소스 시대의 수도 아바리스 .타니스를 말하며 그 도시가 라므세스라고 불린 것은 기원전 1300년경에서 1100년경에 이르는 기간 뿐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전승의 진실성과 연대가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인이 광야를 이동하면서 가나안으로 갔다는 전승도 지리학 고고학적 연구가 진보한 결과, 그 실질적인 역사성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전승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받아 들일 여지가 없다고 했다. 한편 M.노트는 <모세의 전승>을 울브라이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관된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여러개의 독립된 테마의 전승에 모세라는 인물이 결합되어 전체적으로 일관된 설화가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5. 오리엔트를 석권한 이집트 왕은 누구였는가
국경의 수비 도시 비돔과 라므세스를 건설한 제19왕조의 라므세스 2세의 왕자이며 그 왕위를 계승한 메렌프타하(BC 1236년경-1226년경)는 즉위 당시 이미 고령이었으나, 그는 델타 서부에 침입한 리비아인이나 지중해인과 용감하게 싸웠고.또한 가나안인이나 시리아 지방까지 북상 원정하여 크게 세력을 떨치였다. 이는 기원전 13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는 치세 제5년,기원전 1232년경에 제18왕조의 아멘호텝 3세(BC 1417년경-1397년경)가 세운 거대한 흑생 화강암 비석을 이용해서 그 위에 전승비문을 새겼다. 이 비석은 1896년에 W.M.F.피트리 경에 의하여 테베의 메렌프타하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메렌프타하 비문>이라는 것이다.카이로 박물관 소장, 높이 3미터이상, 폭 약1미터).상부에는 신 아멘과 왕의 모습이 좌우에 한쌍씩 조각돼 있으며, 좌측 왕 뒤에는 아멘의 아내 여신 므드가, 우측의 왕 뒤에는 아멘과 므드의 아기인 달의 신 콘스가 서있다. 그 아래 28줄의 비문이 새겨져 있고, 리비아인에 대한 전승을 축하하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피정부 이방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시 한 수로 끝을 맺고 있다. 비문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평화를>하고 말하면서 모든 왕들이 엎디었다. 아홉 궁족(이집트의 전통적인 아홉 적들) 중에서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테하느는 파괴되고 하티는 평정되고 가나안인의 나라는 모든 재앙을 약탈되었다. 아쉬케론은 빼앗기고 게젤은 정복되고,야노암은 흔적도 없는 자가 되었다.이스라엘의 백성은 버려지고 그들의 자손은 없으며, 프르(팔레스티나)는 이집트에게 있어서 과부가 되었다. 모든 나라들은 통일되고 평정되고, 모든 옳지 못한 사라은 태양신 라아처럼 생명을 받은 왕 메렌프타하에서 날마다 사로잡히고 있다.
6. 왜,이집트 탈출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가
37항의 비문은 테헤느(리비아),하티,가나안,아쉬케론,게젤,야노암,그리고 이스라엘 등에 대한 메렌프타하의 위력을 찬양한 승리의 노래이다.이 승리의 노래는 이집트의 비문 중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유일한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알려진 사료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서 극히 중요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은 이보다 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브라이트는 이 전승비가 새겨진 시기를 메렌프타하의 치세 제5년 경으로 보며, 그 글에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해 간 이스라엘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보이는 그들의 40년 간의 광야생활을 계산해 넣으면 이집트 탈출의 연대는 기원전 13세기 초기, 즉 라므세스 2세의 초기가 되는 기원전 1280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연대에서 출애굽기 12장 40절(p사료층)에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머무는 것은 430년 동안이었다>는 말대로 소급하면 기원전 1710년경이 되며, 이것은 힉소스가 이집트에 침입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힉소스 중에 셉어족에 속하는 이스라엘인의 조상이 섞여서 이집트에 들어왔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이것은 전혀 우연한 일치이지만 참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목민 힉소스는 기원전 1700년경에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해서 델타지방에 정착하여 말과 전차의 사용을 이집트에 전했다. 이상과 같은 문헌 사료와 고고 사료와의 다소 안이한 결부에 반해서, 노트는 전승비문을 새긴 시기에 가나안에 있던 <이스라엘>이 도대체 누구였을까.그것이 이미 구약성서의 전승으로 알려진 이른바 12부족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이었는지,아니면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가졌으나 더 오래 전의 통일체였는지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양자의 견해 차이는 연구 방법의 차이는 물론이지만 개인적인 역사관의 차이이며, 그것은 이른바 앵글로 색슨학파와 도이치학파의 학풍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필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기 1장 11절의 기록과 <메렌프타하 비문>의 기록에서 출애굽의 연대의 윤곽이 점차 밝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인 검토로 밝혀질만한 그 시대의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스라엘인의 출애굽의 정확한 연대를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이집트로 들어간 연대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것도 현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사료의 기록이 잘못 되어있는지, 또는 시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은 제 19왕조의 라므세스 2세(BC1304-1237년경) 치세에 있었던 것이라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7. 출애굽의 경로는 어디인가.
그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러 야훼를 찬양하였다.
"나는 야훼를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높은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야훼는 힘있게 나를 붙드시어
나를 살려 주셨다.
내 하나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으랴.
나의 선조의 하나님이시니
어찌 우러르지 않으랴..."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출애굽기 15장 1-2절.21절)
이것은 유명한 <갈대바다의 노래>이며 마지막 21절은 출애굽 전승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래이다. 여기서 노래한 <바다의 사건>은 그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신앙의 방향을 결정지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델타의 라므세스를 출발한 (출애굽기 12장 37절)이스라엘 백성은 지중해 연안에 가까운 페르시테 가도를 피하여(출애굽기 13장 17절)수꽂과 에담을 지나(출애굽기 13장 20절,위치불명),믹돌<망루>라는 뜻,위치 불명)과 바다 사이에 있는 비하리롯 근처 바알스본 앞 해변에 진을 쳤다(출애굽기 1장2절,바알스본은 헬레니즘-로마시대에 성소가 있던 곳이며 페리시테 가도 북쪽의 지중해 해안에 따라 실보니스 개펄의 서쪽이라고 한다. 이 바다에서 이른바 <홍해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들은 이집트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출애굽기 14장 16절이하).<홍해>(13장18절)라는 것은 <갈대의 바다> <개펄의 바다>라는 의미의 <얌스프>를 오역한 말이며 그것은 홍해가 아니라 수에즈만 북방의 호수이다. 이집트 탈출 후의 경로는 <남하설>과 <북방설>이 있다. 전자의 설에 의하면,시나이 반도를 남쪽으로 우회하여 카데슈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추정된다. 그 근거는 전통적인 시나이산의 위치가 중요시된 것이다. 그곳은 다음 40항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시나이 반도의 남단의 높이 2640미터나 되는 화강함의 깍아지른 산 속에 있으며 시나이산 기슭에는 성카타리나 수도원이 세워져 있고, 1844년에 C.티센돌프에 의하여 유명한 <시나이 사본>(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 소장)이 발견된 승원이기도 하고,지금도 순례자의 하나가 돼있다. 후자의 설에 의하면,실보니스 개펄 북쪽을 지나 카데슈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경로가 추정되고 있다. 이집트 탈출의 경로는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인 시나이 반도의 중앙을 지나 남부 시나이산을 경유하는 험한 길보다 시나이 반도의 북쪽의 평탄한 길을 지나갔다는 <북상설>이 유력하다. 시나이 북쪽은 모세에게 있어서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최단 거리였을 것이다.
8. 계약의 땅과 시나이산은 어디에 있는가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사이에 있는 삼각형의 반도이며, 홍해의 두 팔, 즉 동쪽의 에이라트 만과 서쪽의 수에즈 만으로 싸여 있다. 이 반도는 <출애굽>의 주요 무대가 됐다. 반도의 북쪽은 낮은 언덕이 연속된 사막의 고원이고, 남쪽은 높이 2640미터나 되는 화강암의 산맥으로 돼 있다. 기후는 건조하고 연간 강우량은 북쪽이 65밀리미터,남쪽이 40밀리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시나이산은 성서에서는 호렙산으로도 불리고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은 산으로 유명하다. 시나이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가 않다. 시나이산의 위치의 확인은 이집트 탈출 후의 전로의 확인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므로 옛부터 성서지리학 상의 난문제로 돼 있다. 이것을 간단히 소개하자.
전통적으로는, 시나이 반도 남부의 산중에 있는,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306-337)의 황태후 헬레나가 작은 교회를 세운 장소라고 전해지고 있는 곳에 527년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스 1세(527-565)가 알렉산드리아의 순교자 성카타리나라를 기념하여 세운 성카타리나를 기념하여 세운 성카타리나 수도원의 뒷쪽에 솟아있는 <제벨무사>(아라비아어로 <모세의 산>이라는 뜻,높이 2285미터,수도원은 제벨 무사의 서북 기슭,높이 1529미터)라고 하는 산이 그것이라고 하며, 오늘날에도 유력한 설이다. 이 산의 8부 쯤 올라간 곳에 있는 암벽에 계약을 기념하는 대리석판이 끼워져 있으며 영어로 신명기 5장 2절의 새겨져 있다. 최근의 이스라엘 학자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일 델타의 라므세스에서 지중해와 발다빌 호수(실보니스 개펄) 경계의 사주를 통과해서 동진했다고 여긴다. 이 설에 의하면, 시나이산은 엘리 아리슈 남쪽 카디슈 바르네아의 서쪽 약 140킬로미터의 평안에 솟은 높이 890미터의 <제벨.엘하랄>이라고 하는 제단을 닮은 암산이라고 여긴다. 제2의 설은, 카이로에서 아라비아의 메카로 향해서 시나이 반도를 정동으로 황단하여 아카바만 북단에 이르는 통로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 16절 이하의 화산의 폭발을 생각하게 하는 정경의 묘사에서 시나이산을 아라비아 반도 서쪽에 있는 사회신대로 여기는 생각과 합치한다. 제3설은,델타의 라므세스에서 남진하여 수에즈만 입구 근처에서 시나이 반도 서안을 따라 남하하여, 제1설의 제벨.무사에 이르는 통로라고 여긴다. 이 밖에도 신명기 33장 2절, 판관기 4-5장에서는 시나이산이 에돔 가까운 세일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솟게 한 메리바가 민수기에서는 카디슈로 돼 있는 것으로 해서 시나이산의 위치를 카디슈.바르네아 부근의 산으로 보는 설도 있다. 아무튼 오늘날에는 시나이산의 바른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인의 주 관심은 시나이산의 정확한 위치 보다도 하나님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서 계약을 맺었느냐 하는데 있다. 따라서 시나이산이 호렙산이라고 불려지는 것도 그 까닭이다.
9.모세의 십계명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다.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제1계명: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제2계명: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제3계명:너희는 너희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야훼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제4계명: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사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사업에도 종하사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 뿐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제5계명: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제6계명:살인하지 못한다.
제7계명:간음하지 못한다.
제8계명:도둑질하지 못한다.
제9계명: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제10계명: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출애굽기 20장 1-17절)
이것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모세의 십계명>으로 오랫동안 지켜온 계명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 후 3개월 만에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그 산에서 하나님 야훼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이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 야훼의 백성이 되었다. 이 계명은 처음에 두장의 석판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야훼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전에 모세에게 나타났고 지그 여기서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과 쌍무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시나이산 계약> (출애굽기 19장 25-24장8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십계명>이라고 하는 말은 직역하면<열조목>또는 <열가지 조문> (출애굽기 34장28절,신명기 4장 13절10장 4절) 이며, 원래는 ()안에 부연 설명한 부분을 제외한 열 조문의 극히 짧은 금지 형식의 굴이었다고 생각된다.
10. 십계명이 폭로하는 당시의 사회상
모세 시대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약이 맺어지고, 그 계약 아래 공동체가 형성된 사실이다. 41항에서,원래의 십계명의 부분과 후일에 부연 설명한 글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구별해 두었다. 이 부분은 에로히스트 사료층(BC 9-8세기경)에 속하는 것으로 출애굽기 34장 10절 이하의 <제사적 십계> 에 대비해서 <윤리적 십계>라고 한다. 십계의 내용은 제 1게명 하나님의 유일성(3절),제2게명 우상의 금지(4절),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의 신성성(7절),제4계명 안식일의 성별 (8절),제5게명 부모에 대한 존경(12절),제6계명 살인의 금지(13절) 제7계명 간음의 금지(14절),제8계명 도둑질의 금지(15절),제9계명 위증의 금지(16절),제10계명 탐욕의 금지(17절)이고, 하나님에 대한 계명(제1계명-제4계명)과 이웃에 대한 계명(제5계명-제10계명)으로 나뉘고, 이것들은 탄언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제 5계명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하는 계명이 아니라 성인에게 하는 계명이며 <늙은 부모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부모는 노인이라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보시자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5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이웃에 대한 계명을 연결시키는 계명이다.
십계명은 제4계명과 제5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형이며 이것은 부정적인 단정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않는다>는 말로 돼 있다. 십계명의 근본적 전제가 돼 있는 전문에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다.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2절)라고 돼 있으며, <너희>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개개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너희는 이집트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됐으니까><너희는 살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근년에 십계명의 대부분은 계약과 관계가 없었으나 후대의 가장이나 지도자들이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금지 명령(예레미야서 35장 6,7절)으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나,아직 정설이 돼 있지는 않다. 십계명은 일상 생활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교와 도덕의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다. 모세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율법은 후대에 가서 된 것이지만 십계명은 그 형식에서도 다른 고대 오리엔트 제국의 법들과 다른 이스라엘 고유의 오랜 율법이며 그 원형은 모세시대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출애굽기 20장 1-17절,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돼 있는 <고전적인 십계명>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는 윤리적 사회적 질서의 헌장으로 삼고 있다. 십계명이 지향하는 사회상은 하나님을 존중히 섬기는 동시에 이웃의 기본적인 모든 권리를 지키는 사회이다.
11.눈은 눈으로,이는 이로
<사람들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밀쳐서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사고만 없으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배상액을 재판관의 조정 하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이는 이로,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굽기 21장 22-25절). 이것은 그 유명한 <복수율>또는 <동해 보복법>이라고 하는 것의 일부이다. 출애굽기 20장 22절에서 23장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법규집은 24장 7절에 의하여 <계약서>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법규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21장 1절-22장17절에 수록돼 있는 민법과 형법은 아마도 가나안법을 받아 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계약서의 법형식은 십계명(20장1-17절)과 같은 <단정법>과 <결의법><...할때는>,<만약...하면>하는 조건에 따라 판결하는)는 양쪽이 섞여 있다.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민법과 형법(21장2절-22장17절),사회 윤리(22장21-27절,23장1-9절),종교적 제 규정(20장23-26절,22장18-20,28-31절,23장10-19절)으로 나뉘어 있다. 민법과 형법에 속하는 제 규정은 금세기 초에 발견된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제2차 대전 후에 발견된 다른 고전 오리엔트의 제법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계약서에 들어 있는 법의 사회적 배경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훨씬 소박하고 가나안 정주 이후의 농경 사회이다. 그리고 계약서의 법규는 복잡한 사회 생활의 제 문제를 모두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원전 30년대 말로 소급되는 법전 계열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12.입법자 함무라비는 어떤 나라를 통치했는가
바빌론 제1왕조 6대왕 함무라비(BC 1792년경-1750년경)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의 하나이다. 그 치세의 많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함무라비의 통치와 기원전 18세기의 바빌리노아의 사회 경제사적 배경의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즉 그 첫째는 <함무라비 법전>과 <연명표>이고,둘째는 함무라비의 서간집. 셋째는 당시의 법률 문서 및 경제 문서 등이다. 함무라비의 43년에 걸친 치세에 관해서는 그 1년마다의 기록인 <연명표>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상당히 상세히 알 수가 있다. 그는 즉위 후 각 도시와 싸우면서 그의 기반을 굳히고 제9년에는 <풍요한 함무라비>라고 하는 대운하를 개설하여 양강 지방의 굴지의 문화적 선진지역의 경제적 번영과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후 약 20년간은 국내의 통치에 전력했다. 제30년부터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해서 예순나국을 맹주로 하는 북방의 연합군을 비롯해서 제31년에는 라르사의 왕 리므신을 격파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지배종류의 머리를 정복하고, 제36년에는 당시 스발투라고 불리는 티그리스강 중상류 지역까지 수중에 넣고 여기에 함무라비는 사상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앗시리아를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주요부분을 통일 지배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북쪽 앗슐,서쪽 스발투,동쪽 에람,남쪽 슈멜,앗카드를 지배하는 <사계의 왕>이 된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전성시대가 여기에 세워진 것이다. 함무라비는 아무르인의 민족 이동의 결과를 총합해서 이른바 바빌론 제국을 건설한 점에서 후대의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768-814)에 비교된다. <함무라비의 정의의 법>으로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그의 만년, 즉 메소포타미아의 통일 직후에 포고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존의 <우르.남 법전>(BC 22세기).이신 왕의 <리피트. 이 법전)(BC19세기).(에ㅅ나국 법전)(BC18세기) 및 제반판례등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편찬 성문화시킨 것이며,<함무라비 법전>중에는 선행하는 슈메르 법보다도 더욱 조직적인 것이며 도이치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1903-14년에 앗시리아의 고도 앗슐에서 발견(1920년 공표)된 후세의 <앗시리아 법>(HBC 15-12세기)보다 더욱 정리되어 있다.
13. 세계 최고의 성문 법전(함무라비 법전)의 발견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겨울에서 다음 해 봄에 걸쳐서 프랑스 학술조사대에 의하여 에람(이란)의 고도 스사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높이 2.25미터,하부의 둘레 약 1.9미터 크기의 흑색 섬록식 돌기둥이며,상부에는 함무라비 왕이 정의의 신 샤마슈에게서 법전을 받고 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그 하부에는 49란,약 3000행에 걸쳐 쐐기꼴 글자 앗카드어로 법전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쐐기꼴 글자는 각 행이 위에서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샤마슈 신의 도시 시파르(앗카드의 도시,함무라비의 거성)에 세워진 것을 기원전 12세기경에 에람 왕 슈트르크 나푼테가 바빌론을 침략했을 때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이다(루브르 미술관 소장). <함무라비 법전>은 1902년에 프랑스인 L.V.슈유에 의하여 번역되고 현존하는 최고의 성문 법전으로 여겨져 왔으나 현재는 이보다 앞선 세가지 법전이 알려졌다. 즉 <리미피트 이슈탈 법전>(1947년 발견), <에ㅅ나국 법전>(1947 년),<우르,남 법전> (1953년)등의 발견 해독에 의하여 세계 최고의 법전이라는 명칭은 빼앗겼으나,어느것이나 후대의 사본이며 단편이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의 지위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법전의 시행 범위가 넓다는 것, 연구가 진보되어 있다는 것, 동시대의 법률 문서나 경제 문서가 많이 현존하여 그 시대 상황이 해명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후대에 영향이 컸다는 것 등으로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법제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샤료가 돼 있다.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과 후대의 이스라엘의 제 율법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으며, 이것은 양자가 공통된 배경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긴 서문과 282조의 법문과 발문의 세 부분으로 돼 있으며, 전면 211란 중 약 5란이 결손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에람 왕 슈트르크 나픈테에 의하여 삭제된 것이지만 현재는 여러 사본에 의하여 그 대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법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민법에 관한 부분이며, 가족 관계의 법률은 특히 많아서 68조가 있고 법전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된다. 서문에는 신들에 의하여 온 땅의 지배권을 맡은 함무라비 왕이<정의를 나라 안에 빛내고 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않도록><악한 자를 멸망시키기 위하여>이 법전을 받았다는 것이 기록되고,다음에 왕이 국토와 인민의 번영을 위해서 행한 여러가지 업적을 든 뒤에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법률과 정의를 나라말로 규정하고 이것을 포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82개조의 배열은 다음 별표와 같다(G.R.드라이버, J.C.마일즈에 의함)
14. <함무라비 법전>의 구성은 어떻게 돼 있는가
@ 서문
@ 법문
(1) 법 집행에 대한 범죄 무고죄(1-2) 위증죄(3-4),판결의 변경(5)
(2) 재산에 대한 범죄 절도범 및 도품의 수수(6-13) 유괴(14),도망 노예의 은닉(15-20)
불범 침입과 강도(21-24),화재 도적(25)
(3) 토지 가옥 가록의 보유권(26-41),대추 야자원의 손질(60-A),가옥에 관한 범죄(B-K)
(4) 무역과 상업, 상인에게서 빌린 돈 (L-T),상업 대리인 (V-107),술집의 관리(108-111)
운반인의 횡령(112),채무에 의한 인신 저당(113-119) 관리 및 기탁(120-126)
(5) 결혼,가족,재산,여사제 또는 <남의 아내>에 대한 중상(127),아내의 정의(128)
간통(129-132),남편 부재 시의 재혼(133-136),이혼(137-143),첩으로서의 여자 농예(144-147),
병 중 아내의 부양(148-149),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증여(150), 부채에 대한 부부의 의무(151-152),
남편의 살인(153) 근친 상간(154-158),약혼 불이행(159-161),아내 사후의 상속(162-166),
장자에 주는 증여(165),남자의 상속(166-167),상속인의 페적(168-169),인지(170),과부의
재산(171-174),자유인의 딸과 노예의 결혼(175-176),과부의 재혼(177), 여승(178-184),양자와
유아의 양육(185-194)
(6) 살상과 동해 보복형 아비에 대한 구타(195),사람의 살상(196-208),
유산(209-214)
(7) 기능직 와과의사 (215-223),수의 (224-225),이발사 (226-227),목수(228-233),
조선가와 선원(234-240)
(8) 농업 소(241-252),밭지키는 사람의 불법 행위(253-256),농부의
고용(257-258),농구의 절도(259-260),소몰이이의 고용(261) 목자의 의무(262-267),가축과
마차의 임차(268-272),계절 노동자의 고용(273)
(9)보수 수공업자의 임금(274) 배의 임금(275-277)
(10) 노예의 되찾음(278-279),외국 노예의 매입(280-282)
@ 발문
고대 제법전의 유사례
계 출애굽기 21장 29절
약 만일 그 황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어 그 임자에게
서 주의를 주었는데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든
구 여자든 사람을 받아 죽었을 경우에는 황소만 돌로 쳐
약 죽일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죽여야 한다.
함무 251조
라비 만일 어느 사람의 황소나 뿔로 받으며 시회가 그에게
법전 뿔로 받는 것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뿔을 짧게
자르지 않고, 그 황소가 귀족의 한 사람을 받아 죽게 했을
경우에 황소의 소유자는 은 2분의 1마나를 줘야 한다.
에ㅅ 54조
나국 만일 어느 황소가 항상 뿔로 받는것은 것을 알고, 또한 당국자가
법전 그 소유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황소의
뿔을 자르지 않아 그 황소가 사람을 받아 죽게 했을 경우에는
황소의 소유자는 은 1마나의 3분의 2를 지불해야 한다.
고대 제법전의 성립 연대
법 전 성립연대 잔존상태(해독가능)
신화.전승 BC 25세기경
법 전 성립연대 잔존상태(해독가능)
슈메리어 사본
슈메르 법문집 BC 25세기경
슈메르 사본
슈메르 주술문집 BC 25세기경
슈메르어 사본
우르카기나 개혁비문 BC 24세기 서문,5조,발문
슈메르어 원문
판례 집성 BC24-20세기
슈메르어 사본
우르.남 법전 BC 22세기 서문,5조
슈메르어 사본
슈메르 법전 BC22-21세기 26조
(<슈르기 법전>)
슈메르어 사본
리피토.이슈탈 법전 BC 19세기 서문,38조,발문
슈메르어 사본
에ㅅ나국 법전 BC 18세기 61조
(<빌라리마 법전>)
앗카드어 사본
함무라비 법전 BC 18세기 서문,282조,발문
앗카드어 원문
15.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어떻게 정주했는가
이집트를 탈출한 일군의 사람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제 부족의 가나안 이주의 경위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전진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전승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가 없다. 여호수아기 1장-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인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군사적 지휘 아래 전 부족이 참가해서 요르단강 서쪽으로 들어간 뒤 가나안의 중부 남부 북부 순으로 진격하여 무력으로 그 성읍들을 단번에 공략하여 기브온 부근의 성읍을 제외하고 각지의 주민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신명기 저자의 역사관에 의한 기록이다. 이스라엘 제 부족의 가나안 이주는 판관기 1장의 기록처럼 오랫동안 복잡한 경과를 거쳐서 달성된 것이다.그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제 부족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시기는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해서 기원전 13세기 후반이나 그 이후로 생각되고 있다. 고고학의 발굴조사의 여러 성과 및 사회학적인 관점에 의한 제 연구의 면밀한 검토와 종합이 필요하다. 가나안 이주 흐의 이스라엘 제 부족은 예루살렘의 북쪽 약 65킬로미터, 전 가나안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그리심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중요한 성읍 세겜(지금의 텔.엘.바타라.<떡갈나무의 폐허> 의 뜻. 구약성서의 세겜에 관해서는 창세기 12장 6절, 35장 4절 참조)의 집회에서 하나님과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과 맺은 <시나이 계약>을 갱신하고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과제와 방향을 찾았다. 여호수아기 24장에 의하면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의 부족에 대해서(아마 요셉족을 중심으로 한 몇몇 부족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시나이 계약의 갱신과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충성을 권고하고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결단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겜 계약>에 의하여 전 부족 연합 형성의 기초가 굳혀지고 이스라엘 부족 연맹(안픽티오니)이 실제로 출발됐다고 생각된다. 여호수아기 24장1-3절은 다음과 같은 귀절로 시작되고 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지파들을 세겜으로 소집하였다.이스라엘의 장로,어른,법관, 공무원들이 그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서자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말씀하셨소 .옛적에 너희 조상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저편에 살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나는 그 강 건너 저편에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다가 이 땅을 샅샅이 밟게하고 많은 후손을 보게 해주었다."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비밀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새로운 하나님 앞에 동포 이스라엘 백성을 규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계약 공동체를 이루었다. 새로운 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한다. 이것은 모세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야훼 하나님에게서 조상 전래의 하나님을 재인식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야훼는 이집트의 신이 아니라 분명히 사막과 산악지방의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자는 야훼를 남쪽 네게브 지방과 아카바만 사이 지방에서 알려져 있던 신의 이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야훼는 헤브라이 글자 4자음 YHWH(모두 자음이고 모음이 없다)로 표기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약 6800번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고유명사 야훼 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야훼는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 hayah(어두의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가 변화한 말이며 <있게 하는 자><살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신관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 학자들은 자음만의 말에 모음표를 붙여서 성서의 바른 독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24장 11절의 계명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이것을 읽어야 할 때는 <아도나이> (<나의 주>의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후에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과 아도나이를 표시하는 모음이 합해서 <여호와>라고 발음되었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붙인 것이다. 단,제1모음은 제1자음,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 따라서 그것이 16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 의하여 Yehowah라고 잘못 읽히고, 이 독법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져서 그리스도교도가 구약성서를 읽을 때에 이것을 <여호와>라고 읽었다. 근년의 여러 연구에서는 이 Yehowah는 <야훼>로 읽는 것이 바르다고 알게 되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야훼는 이스라엘인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신 구원의 하나님이며 창조자이신 유일한 인격신이다.
17. <자색의 나라> 가나안에는 어떤 신들이 있었는가
가나안은 9항에서 말한 것처럼 시리아.팔레티나 지방의 고대 이름이며 성서의 이야기가 전개된 무대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레바논 공화국,이스라엘 공화국 및 요르단 왕국에 걸친 여러 지방을 주 무대로 하고 있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지중해 특산인 호네 조개(학명 무렉스)에서 만들어 낸 자홍색염료와 관계가 있으며 <자색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나안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로이며 <육교>라고도 붙인다. 가나안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 시대까지 소급된다. 기원전 4천년대 초기에는 셈어족이 가나안에 정착하였고 지원전 3천년대에는 상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의 문화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 아래 발달하여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절정에 이르러 염색, 직물,도기,건축,알파벳의 발명 등으로 기원전 13세기 중엽 이후에 사막의 신,유일신 야훼를 모시고 가나안에 이주정착한 이스라엘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페니키아를 통하여 그리스 문화에도 큰영향을 주었다. 우가리트, 비프로스,듀로스,아코 등의 도시들이 일찍부터 발흥하였다. 종교는 고대 오리엔트 공통의 다신교적 자연 종교였다. 시리아 북부 해안에 람.샤므라(거룩한 곳)이라는 뜻라고 하는 언덕이 있고, 이곳에서 출토된 점토판 문서들 <우가리트 문서>라고 부른다.에서 엘(남신)과 그의 아내 아세라(여신),그의 아들 바알(남신)과 그의 아내 아나드(여신),그리고 다곤(우가리트에서는 바알의 아버지로 숭배되고 있었다. 셈족의 신이며 원래는 곡물신, 구약성서에서는 BC12세기에 가나안 연안지대에 정착한 폐르샤인의 신이며, <삼손과 들릴라>이야기에도 나온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애 투쟁 신화나, 생식과 풍요의 제사의식이 각지의 성소에서 거행된 것이 알려져 있다. 유일신 야훼를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이런 종교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옛날부터 큰 발견은 우연한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아마르나 문서>(1886),<그노시스 문서>(1946 또는 1945경우라고도 한다) <사해 문서>(1947년,또는 1945년)의 경우가 그렇고 <우가리트 문서>의 발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8년 5월에 언덕 부근에서(항구 도시의 북쪽) 시리아인의 한 농부가 자기 밭을 갈고있을 때 그의 팽이가 우연히 무덤 자리를 찍은 것이 발달이 되었다. 다음 해 1929년부터 프랑스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제2차 대전 반발시까지 계속되고 전후에는 1950년에 재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아직 폐허와 같이 일부를 발굴 조사한데 불과하지만, 이것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굴 조사의 하나이다. 우가리트에서 출토된 점토판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은 슈메리어,앗카드어,푸르리어,힛타이트어,이집트어,우가리트어, 그리고 에게 음절 문자로 표기된 언어이다. <우가리트 문서>는 문학,행정,외교 문서 등으로 돼있다.
18.우가리트 문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가리트 문학은 두 가지 중요한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즉<신화>와 <서사시>(epic)이다. C.H.고든에 의하면, 신화라는 것은 풍요에 관계되어 있는 기본적인 양상(예를 들면, 비나 이슬)등의 자연 현상이나 인류의 복지(예를 들면, 평화나 건강이나 번영) 영향을 주는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야기이고, 서사시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영웅담에 해당한다. 이것들은 모두 운문(poetry)으로 써있다. 전자로는 <바알과 아나도에 관한 신화),후자로는 <케레트 서사시>등이 있다. <우가리트 문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전 2천년대 후반,특히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번영하고 있던 우가리트는 기원전 14세기 전반에 왕위에 있던 니크마드 2세(?-1345년경)의 시대에는 남쪽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북쪽의 힛타이트에도 조공하고 있었다. 또한 우가리트 왕국의 국가 구조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강대한 왕권을 가진 오리엔트 형의 국가 구조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문서 가운데 있는 시가의 단편들은 구약성서에서 이교의 신으로 악평을 받고 있는 농업신이나 영웅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전하고 있다.
우가리트 문학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이주하기 이전의 가나안의 농경 종교의 양상을 아는데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우가리트어는 헤브라이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구약성서의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골든은 그의 저서<우가리트 문학과 고대 세계>라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가리트에서 출토된 점토판 문서들은 20세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 사료이다.이것들은 구약성서의 제반 연구에 혁명을 가져왔고 그와 함께 헤브라이학의 착실한 발전을 촉진해 왔다. 우가리트.텍스트가 기원전 2천년대 말엽의 그리스와 레반트의 영웅시대의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한 사실은 오리엔트학 뿐 아니라 그리스학(classics)에 대한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19. 동부 지중해 세계에 어떤 역사가 숨겨져 있는가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서 후반에 걸쳐 동부 지중해 주변의 여러 지역(이집트,시리아 ,팔레스티나,소아시아,그리스,크레테 등)에서 발전 단게를 달리하는 여러 종족이나 민족이나 국가가 서로 교류하고,또는 지배와 종속관게를 맺고,또는 전쟁과 평화 속에 경합하며 하나의 역사적 세계를 이루어 간 것이 밝혀지고 있다. 역사적 산물인 이 세계는 <동부 지중해 세계>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 의하여 형성되고 일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붕괴된 세계이다. 골든은 이 동부 지중해 세계에 전개된 문화 복합체를 기원전 14세기 전반에 이집트 제 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BC 1379경-1362년경)의 치세에 일어난 종교 개혁의 중심지 현재 이름 텔.엘-아마르나를 따라 <아마르나 통합체>Amarna Synthesis라고 불렀다. 골든은 구약성서와 호메로스의 작품 사이의 이집트,우가리트,이스라엘,크레테 및 그리스의 문화적 친근관계를 원문에 근거해서 실증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골든의 논증 과정에는 비판도 있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서 후반에 걸쳐서 동부 지중해 주변의 여러 지역에 하나의 문화 통합체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부저할 수 없는 사실이 돼있다. 이하 간단히 골든의 학설을 소개하자.
그의 기본적인 견해는, 종래 서양 문명의 2대 원류로서 대극적으로 파악해 왔던 넓은 의미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하나의 공통의 모태로서 역사적 세계 안에 나타난 것을 우가리트 출토의 텍스트를 근거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우가리트 문서> 서사시 중에 있는 셈족 요소 뿐아니라 그리스적 요소에도 주목하여 외교문서나 서간 등에서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시대를 중심으로 해서 우가리트 왕국이 아나토리아-에게세계와 셈 세계와 또는 이집트의 문화와의 접촉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리적 역사적 위치에 놓여있으며, 각 나라들과 교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밝혀 냈다. 그리고 호메르스의 세계와 구약성서의 세계와의 유사는 우연이 아니라 그리스와 이스라엘 양쪽을 움직인 공통의 역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솔로몬 이전의 우가리트,그리스,이스라엘의 문학에 있어서의 서사시 중의 공통 테마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나 고대 오리엔트에 가까웠던 것을 시시하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동부 지중해권 안에 이스라엘과 함께 넣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서양인에게 있어서 문명의 기본이 되는 성서와 호메로스의 작품의 유사는 보편적 모티브라는 식의 우연이 아니라, 그리스 문명과 헤브라이 문명의 공통 유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것을 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출토한 텍스트들,구약성서,호메로스의 작품 및<우가리트 문서>특히 그 문학작품 텍스트의 연구에 근거한 모든 성과를 가지고 밝히고 있다.
20. 동부 지중해 세게가 서양 문명의 기원인가
골든은 원 텍스트에 근거해서 일관해서 서양 문명의 기원 문제, 특히 그리스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밝히려고 한다. 그 구상은 웅대하고 거시적인 사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18항에서 언급한 <우가리트 문학과 고대세계>의 의도도 원서명 및 부제가 가리키는 것처럼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의 우가리트 및 크레테의 비문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 속에서 서양 문명의 기원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책은 전 항에서 소개한 저자 골든의 종래의 주장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본서의 독자성은 우가리트 문학 비문의 해독과 크레테 출토의 선문자(linea) B의 해독의 성과를 결합시키면서 종래의 주장을 전개시키고 있는 점에 있다. 언어학자인 동시에 구약성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헤브라이트인 저자의 문제 의식 안에서의 우가리트 문학의 위치는 서사시 텍스트의 번역이 이 책 전체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제1장 우가리트 문학과 그 중요성,제2장 우가리트 문학과 그레코 헤브라이의 유연 관계 제3장 미노아 문명기의 크레테,제4장 우가리트 시가,제5장 우가리트 산문 텍스트,제6장 결론으로 돼 있다.
제4장은 골든의 지금까지의 실증적 연구의 모든 성과를 근거로 한 새로운 번역이다. 이 책은 골든의 텍스트 연구가 기초가 돼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골든은 영웅 케레트를 중심으로 한 서사시들 속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구약성서의 창세기의 족장 설화를 결부시키는 고리를 찾으려 한다. 이 서사시에서 비와 풍요의 신 바알과 전사의 여신 아나도를 둘러싼 신화,그리고 영웅 케레트가 빼앗긴 아내 프르라이를 되찾는 <아내 탈환 이야기>등을 찾아내고 이스라엘이 반발한 가나안의 풍습을 지적하고 있다. 골든의 구상에서 중요한 것은 <케레트 서사시>이다. 이것은 1930년에서 다음해 1931년에 걸쳐서 발견된 것이며, 석 장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순서에 따라서 IK IIK IIIK라는 약호를 붙였다. IK에서는 이야기의 주인공 케레트가 빼앗긴 아내 프르라이를 되찾는 광경이 기록되고, IIIK 에서는 케레트와 아내 프르라이의 결혼에 대한 신들의 축복과 자손의 약속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고, IIK에서는 IIIK에서 약속된 케레트의 아이가 출생하여 병을 앓는 케레트가 건강을 회복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골든은 아내를 잃은 왕 케레트가 아내 프르라이를 되찾는다는 모티브는 트로이의 헬레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모티브와 공통된 것으로 보고, 우가리트 문학은 호메르스의 <일리앗>과 구약성서의 족장 설화와를 결부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 결론에 중요한 관계가 있는 크레테 문명의 성격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선문자 B의 음가를 크레테 출토의 선문자 A의 부호에 맞추어, 선문자 A의 부호 중 약간이 그 부호의 근거가 된 것을 나타내는 서북 셈어의 어두움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선문자 B(BC 1450년경-1200년경)가 사용되기 이전의 크레테인이 서북 셈어계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봤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비문에도 적용하여 선문자 A를 서북 셈어로 해독하는 방법을 가리키고 있다. 근년에 특히 선문자 A의 해독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것을 인도 유럽어계의 말의 하나인 힛타이트어로 해독하려는 시도와 골든처럼 서북 셈어 (페니키아어나 헤브라이어와 같은)로 해독하려는 시도가 있다. 어느쪽이나 난점이 있으며 아직 언어 진단의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골든의 주장은 개연성이 높은 가장 유력한 설이라고 한다. 선문자 A의 해독을 둘러싼 논의는 크레테의 주민 구성이나 시리아, 소아시아 지방의 언어와 관련된 제관계에 대해서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사시들의 공통된 모티브는 공통의 문화권이 존재했다는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서 후반에 걸쳐 미케네,크레테,우가리트,이집트,그리고 힛타이트 등을 포함한 <동부 지중해 세계>라고 하는 세계, 문화 복합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출처/컴퓨터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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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