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 영웅인 채명신(蔡命新, 예비역 중장) 前 주월 사령관이 2013년 11월 25일 향년 87세로 소천했다. 蔡 전 사령관은 1965년 초대 주월 사령관을 맡아 1969년 귀국할 때까지 용맹스런 국군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주역이다. 蔡 전 사령관은 베트남에서 복귀한 뒤 2군 사령관을 지냈다. 육사 5기로 군에 입문해 11연대장, 3사단 참모장, 제2훈련소 참모장, 38사단장, 5사단장을 역임했으며, 5·16혁명 당시 '혁명위원회 5인 멤버'로 활동했다. 유력한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끝까지 반대, 1972년 6월 예편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으며 태권도 보급(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에 공을 세웠다.
채명신, 그는 인간으로서 과연 누구인가? 그분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아름다운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채명신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외조부 박진준 장로는 구한말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평남 중화군 신흥면 대기압리에 3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복음 전파, 미신 타파, 금주, 금연, 절제 운동을 펼쳤다. 채명신은 이런 가정의 분위기에서 자라 참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다.
채명신은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평양사범을 나와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 1947년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어릴 때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공산주의의 잔악함을 보면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군인의 길을 택한다. 1949년 육사 5기로 졸업한다. 주월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전투에 가담했다.
전쟁에 참전하면서 수 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채 장로는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군인이 된 것도, 수 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증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랑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도 베트남 선교협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기 전부터 베트남 선교를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채명신은 직언을 할 줄 아는 충직한 충신이었다.
채명신이 아홉 살 연상인 박정희를 처음 만난 건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다닐 때다. 1947년 그는 생도였고 박정희 대위는 후보생 중대장이었다. 6・25 전쟁 중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채명신은 천신만고 끝에 남하, 강릉 9사단 사령부에서 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재회한다. 박정희의 언제 보아도 늠름하고 강직해 보이는 매력에 이끌린다.
5ㆍ16 군사정변 때 채명신은 철원의 5사단장이었다. 그는 서울에 인접한 사단 병력을 완전히 장악해 쿠데타 진압 작전의 여지를 일찌감치 차단했다. 하지만 그가 쿠데타에 가담한 건 박정희에 대한 신뢰와 우국충정 때문이었지,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 그게 두 사람의 차이였다. 결국 박정희의 구심력과 채명신의 원심력이 마찰을 일으킨 건 1972년이다. 유신헌법을 추진하던 박정희에게 채명신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집권 연장을 하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이라며 충언을 하였다.
채명신은 이후 대장 진급에서 탈락해 예편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계심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끝까지 그를 내치지 않고 예우하고 후원했다. 그 이후 채명신에게 대사직(스웨덴, 그리스, 브라질)을 부여하고 챙긴 것도 박정희의 진심이었을 것으로 본다. 채명신 역시 단 한 번도 박정희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전우들과 함께 있길 원한 고 채명신 장군은 이제 사병 묘역에서 저 멀리에 자리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채 장군은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하긴 했지만, 유신 독재를 반대해 군복을 벗을 정도로 강직하고 충직한 군인이었다.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하는 참된 군인이었다.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을 자낸 그가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 파월 장병과 함께하고 싶다"는 유언을 유족에게 남겼다. 이에 따라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로 장군이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 신분으로서 장군 묘역 안장 혜택을 포기하고,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사자와 함께하겠다는 고인의 숭고한 뜻과 월남전에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 안장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장군 출신으로 장군 묘역 안장의 혜택을 포기하고, 사병 묘역에 안장이 된 것은 채 장로가 처음이라고 한다. 장군 묘역은 26.4㎡(8평)를 사용할 수 있지만, 사병 묘역은 3.3㎡(1평)만을 사용할 수 있다. 묘비 역시 장군들은 높이 90cm, 가로 36cm의 묘비를 세울 수 있지만, 사병들은 높이 76cm, 가로 30cm 정도의 묘비만 세울 수 있다.
톨스토이의 단편들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러시아에 바흠이라는 한 농부가 있었다. 바흠은 평범하지만 별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던 한 소작농이었다. 어느 날 바흠은 우연한 기회에 땅을 조금 얻게 되었다. 그런데 땅을 얻은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욕심이 자꾸 생겨 땅을 계속 넓혀 가야만 성이 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흠은 어떤 지방에서 땅을 싸게 판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게 되었다. 이 지방은 땅을 파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했다. 하루 종일 자기 발로 걸은 만큼의 땅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효가 되었다.
바흠은 이 계약에 동의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땅을 얻기 위해 출발했다. 계속 걷다 보니 욕심도 생기고 자기 앞에 있는 땅들일수록 더 비옥하고 탐스럽게 보여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반환점을 돌아야 했을 시점인데도 바흠은 욕심 때문에 계속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마음이 급해 바흠은 장화도 옷도 벗고 달리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했지만 조금이라도 멀리 가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이렇게 해서 해가 막 떨어질 무렵에 출발점으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지만 바흠은 그만 심장이 터져 그 자리에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바흠의 하인이 그를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은 겨우 2m가 조금 넘는(1평 정도) 규모의 땅이었다. 정작 그에게는 단지 한 평 남짓의 땅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채명신 장군은 아무런 허세와 욕심이 없이 한 평의 땅에 사병인 전우들과 같이 묻혔다. 그가 부하 사병들을 부하라 부르지 않고 전우라고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넓은 땅 높은 비석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같이한 병사들과 함께하는 의리였고 소금과 빛으로 살고 죽어야 한다는 신앙인의 본이었음을 알게 된다.
펌글
첫댓글 둘레길 걷다가 잠시 휴식 틈을 이용 방문ㆍ 전시 기록을 실감 나게 읽어 본적이 있지요ㆍ감사감사 합니다ㆍ전나무숲 ㆍ
저도 내일은 휴일이라 바쁠것 같아 오늘 회사에서 근무중 많이 올렸는데 들러 주셔 감사합니다
채명신 장군은 장성이라는 직책보다는 같이 동고동락한 병사들을 먼저 생각하고 현충원에 묻힐때
같이 전투하고 생활한 동료라 생각하고 장군묘 자리을 반납하고 병사들 자리에 묻어달라는 그마음은
병사들이라 하지않고 같이 동고동락한 전우라 생각해서 같이 있겠다고 하는 그마음이 정말 가슴을
웅끌하게 합니다 현직 장성 군인들도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