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선 타고
(88.10. 9)
조 흥 제
“따르릉.”
“아빠. 전화 받으세요.”
막내가 건네주는 수화기를 받으니
“나, 김재일입니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반가운 목소리. KBS 8기생 드라마작가 회장의 전화였다.
“선배님 오늘 바쁘십니까?”
“아니, 별로. 어제 야근하고 와서 지금 자고 있는 중입니다.”
“아, 그럼 안 되겠군요. 하도 좋은 가을 날씨라 어디 교외에 나가 술이라도 한 잔 하려고.”
이렇게 모인 사람이 남녀 9명이었다.
수색에서 교외선 열차를 탔다. 이 열차는 서울역에서 신촌, 수색, 능곡, 벽제, 일영, 장흥, 송추, 의정부를 연결하는 서울 북부 외곽 철도이다. 그 전에는 주민의 발이 되어 의정부에서 북한산, 도봉산 너머로 서울과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으나 지금은 자동차에 밀려 제 구실을 못하고 먼 옛날의 향수를 실은 도시인의 멋과 낭만의 대상이 되었다.
나도 자동차론 몇번 다녔지만 교외선 열차는 처음 타 본다. 수색역에서 출찰구를 빠져 나오자 시야에 들어오는 객차 3량이 전부다. 좌우로 전철과 같이 의자가 벽에 일자로 붙어 좌석에 기대 앉아 밖을 내다본다.
하나같이 모두 상기된 얼굴의 승객들. 덜커덩 덜커덩 이리 씰룩, 저리 기우뚱 하면서 3등 완행열차는 달린다. 6‧25 직후 50년대 중반 대전~서울간을 5시간 달리던 완행열차도 이보다는 나았다. 수원~인천 간 협궤열차는 이제는 교통수단보다도 옛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시인들의 관광열차로 탈바꿈한지 오래고 이곳 교외선도 역시 그렇다.
지난번 수해에 침수되었던 논에는 벼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고, 접경을 벗어난 논에는 황금물결이 일렁여 더할 수 없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였다. 철로 가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하늘은 높푸르고 고추잠자리는 철로 가를 날고. 들녘에는 농부들의 풍년가가 울려 퍼진다. 산업화니 뭐니 해도 역시 우리는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자연 속에서 살 때 삶의 참맛을 느끼며 희열을 느끼는 심정은 인간의 고향이 흙에서 비롯되어서가 이닐까? 조그마한 간이역에 차가 서면 빠이빠이를 웨치며 손을 흔드는 창밖의 미소는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장흥역에서 하차. 차표를 받는 집표원도 집찰구도 역사도 없다. 시발역에서 팔고 내릴 때는 그대로 자기의 기차표를 가지고 내린다. 탈 때도 역시 개표도 안하고 그냥 탄다. 종착역이 가까워 오면 차장이 요금을 걷고 미처 못 걷은 사람은 수색역 집찰구에서 요금을 받는다. 그것이 더 재미있다. 승객이 알아서 내고 집표원이 알아서 받고. 거기에는 악착스런 다툼도, 약삭빠른 잔꾀로 이름 지워지는 시체말로 까진 사람의 요령도, 필요 없는 철저히 서로 믿고 행동하는 신용사회와 룰이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유지돼 온 우리의 순수한 풍속과 같이.
장흥역에서 내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조금 가니 조각공원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못 들어가 보다. 옥외에 조각을 해 세운 곳이라고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동동주와 파전을 들고 계곡 가 넓은 암반에 자리를 펴 놓고 담소. 해가 서산에 꼴깍 넘어갔다. 앞에는 청류계곡,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소(沼)가 이무기가 나올것 같다.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터이지만 여럿이 있는데 그까짓 이무기가 문제인가. 옆에 출렁다리에는 청춘남녀들이 발로 쿵쿵 구르면서 깔깔댄다.
귀로에 철길로 올라 와 레일 위를 걷다. 이것은 극히 위험한 행동이지만 이미 회원들은 체면과 질서를 일탈한 사람들이다. 나도 레일 위에 올라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이리 젓고 몸을 비틀며 행진을 하였으나 몇 발짝 못 가 추락, 역앞 넓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 남은 동동주와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또 술잔을 기울이니 땅금이 깔린다.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아기별이 하나 둘 등장한다.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 둘, 어렸을 때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부르던 동요를 불렀다. 우리네 기억에 무수한 추억을 간직한 별들. 그러나 바쁜 생활 속에서 바라 볼 여유조차 없었는데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둠 속에서 잔이 얼만큼 차는지 몰라 조심조심 따르다 기차가 와서 술병을 들고 승차. 바삐 타느라고 술잔을 놓고 왔다. 잔이 없어 건너편에 앉은 사람에게 빌려 딸아 먹고 수색역에 와서 내려보니 객차 2량이 전부다.
‘빠이,빠이~.’ 누구에겐가 모르게 손을 흔들면서 외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