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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소크라테스의 산파술
1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 철학의 아버지다. 그는 항상 대결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소크라테스 본인은 글 한줄 쓴 것이 없다. 그 제자인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하고 있는 말, 그것을 소크라테스의 것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초기, 중기, 후기 세 시기로 나뉜다. 똑같이 소크라테스가 나오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 플라톤이 젊을 때 쓴 것이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에 가깝겠고 후기는 아마 자기생각일 것이다. 그렇게 재구성된 모습이 소크라테스다. 이른바 4대성인, 예수, 부처, 공자는 자기가 직접 쓴 것이 없다.
2 소피스트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늘 소피스트들과 싸우고 있다. 소피스트란 어떤 사람인가. 철학, philosophy는 philos+sophia다. philos는 ‘사랑한다.’는 것이고 sophia는 ‘앎’이다. 소피스트 Sophist는 sophia를 다루는 사람들이다. 앎을 다루는 사람, 선생이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테네가 융성기로 들어가던 시기인데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던 시기다. 젊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큰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 다들 아테네민주정치에 참여해서 정치적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던 시대였다. 그런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소피스트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최소한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교양과 웅변술이다. 웅변술과 수사학을 가르치던 것이 소피스트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기법, 테크닉을 가르쳤다. 이른바 기승전결 혹은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논증적인 구조를 닦는 것이 소피스트다. 여기서 논리학이 발전한다. 논리적인 테크닉, 특히 수사학적인 테크닉이 발전하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3 스승과 제자의 패러독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제자가 스승 소피스트에게 배우고 실력이 늘었다. 소피스트가 이제 마쳐도 되겠다고 하면서 거액의 수업료 청구서를 보낸다. 그런데 제자가 그것을 보고는 자신이 배운 게 없는데 왜 돈을 내야 되냐며 재판을 한다. 당시는 본인들이 직접 자신의 주장을 하고 배심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판결을 내렸다. 스승이 말한다. ‘불쌍한 놈아, 네가 어차피 나에게 돈을 내야 된다. 내가 재판에서 이기면 어차피 돈을 받을 것이고 만일 진다고 해도 네가 돈을 내야 된다. 왜냐면 내가 지면 네가 나보다 훨씬 말을 잘한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능가할 정도로 배운 게 많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제자도 질세라 말한다. ‘불쌍한 스승님, 나는 어차피 돈을 안 내도 됩니다. 내가 이기면 당연히 돈을 안 내도 되고 내가 지면 내가 말을 못해서 진 거니까 별로 배운 게 없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돈을 내겠습니까.’ 일종의 딜레마를 이용한 논법이다. 이 시기에 논리적인 테크닉들이 굉장히 발전한다.
4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소피스트들이 그런 테크닉을 가르치고 고액의 돈을 받고 따라서 귀족자제들이 소피스트들에게 배웠다. 소피스트와 아테네의 귀족층은 일종의 하나의 인맥을 형성하는 그런 구조가 되었다. 그런 때 혼자 외로이 떠돌던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부자여서 안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길에 보이는 사람에게 묻고 다녔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은 귀납적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직접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본인이 스스로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자신의 철학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했다. 산모의 출산을 돕듯이 본인이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이가 돈을 내려고 하면 소크라테스는 가르쳐준 것이 없다며 돈을 받지 않았다. 대신 술상을 차리라고 해서 만날 잔치를 벌였다. 그 잔치가 바로 심포지엄symposium이다. 그렇게 함께 모여 앉아서 먹고 마시며 대화를 했다.
5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 선생이 필요한 이유
저자는 교과과정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철학공부가 아니라고 한다. 진짜 철학 선생은 소크라테스처럼 문제를 던지는 사람이다. 문제를 푸는 건 본인 자신이다. 그게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고 그래서 철학은 본인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이란 말의 뜻은 앎을 ‘배우는’것이 아니고 앎을 ‘사랑’하라는 얘기다. 선생이 하는 역할은 문제를 던지는 거다. 문제를 푸는 건 누군가. 본인이 풀어야 된다. 그게 바로 소크라테스산파술이고 그래서 철학은 본인이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이란 말의 뜻이 앎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앎을 사랑하는 얘기다. 에로스신화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빈곤과 풍요, 충족과 결핍 그 사이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사랑의 본질은 뭐냐면 빈곤에서 풍요로, 결핍에서 충족으로 끊임없이 가려는 특성, 그게 사랑이다. 그래서 앎을 스스로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것, 그것이 철학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원형이다. 철학은 어떤 면에서는 정답이 없다. 앎을 ‘추구’하는 거지 앎을 ‘획득’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가 정답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철학의 운명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philos란 표현을 쓴다. 끊임없이 채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자기생각을 점검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같은 과정을 통해 철학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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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일화는 소크라테스는 질문만 넌지시 던지고 상대방에게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산파술이 숨겨져 있다. 산파'란 아이를 낳을 때 산모를 돕는 사람으로 대개의 경우 나이 든 여성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산파술'이란 '대화술(변증법이라고도 불린다)'와 함께 소크라테스의 중요한 교육방법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태어나고 나서야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데아의 세계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이데아의 세계란 참된 것들, 완전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들이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영혼은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들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에 살고 있던 영혼이 실수를 범하게 되면 지상으로 추락하여 육체 속에 갇히게 된다. 지상으로 추락하던 영혼은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강물을 마시고 이데아의 세계에서 이미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잊게 된다. 하지만, 알고 있던 것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기억이 되살아나는 수가 있다. 지상에 살고 있던 인간들이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방식이 바로 기억이 되살아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을 '상기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스스로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힘겹게 되살리거나 스스로는 되살릴 수 없다. 교육이란 기억을 스스로 되살리기 힘들거나 스스로는 되살릴 수 없는 사람들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억은, 아무리 잊었더라도,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의 머리 속에 이미 들어있던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란 새로운 지식을 머리 속으로 집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머리 속에 들어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을 끄집어내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 산모의 경우에도 아이는 이미 산모의 몸속에 있다. 산모의 몸속에 있는 아이가 쉽게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산파이다. 이미 학생의 머리 속에 있지만 잊혀져서 머리 속 어디에 있는 모르고 있는 지식을 학생이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자를 산파에 비유한 것이 소크라테스의 '영혼산파술'이다.
7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흔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법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문답법의 정수는 무지의 지이다. 즉,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거 쉬운 것 같아도 무지 어렵다. 교육계에서 차용하고 있는 문답법이란 기존의 일방향식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정답>을 찾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화>나 <토론>의 정의, 그것을 완전히 뒤엎는다. 일단 결론에 있어서 <정답>을 찾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무지> 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무지의 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가 끝나려면 <모른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논쟁은 <정답>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결론이 나면 자리를 터는 것이다. 이상한 토론이다. <모른다.>가 종착역인 토론이라니. 모른다는 것은 시작점이다. 그런데 왜 토론이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아니다. 사람들은 <모른다.>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안다>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안다>에서 시작하는 대화란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처럼 더 진도 나가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간파하고 첫 시작을 <마음 비우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문답법이란 결론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점으로 소급해 간다. 진도 나가는 것 같은데 사실은 회항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맨 처음. 씨앗이 싹을 틔우기 전. 아기가 처음 생긴 그 시발점. 그래서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산파술이라 하는 것이다.
8 산파술 -1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출산으로 보았다. 입체적이다. 언어자체가 산파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안에 뭔가가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면 된다. 그러나 잡아당기면 되겠는가? 그렇다 유도해야 한다. 왜곡되면 안 된다. 산파는 그 아이의 주인이 아니다. 돕는 자여야 한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려면 처음부터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화"라는 아기의 그 처음은? <무지.> 즉, 모른다, 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모른다, 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 아기 같은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깨달음의 학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학문은 항상 죽임을 당한다. 예수가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피타고라스학파가 그랬다.
소크라테스는 왜 고발되는가. 그것은 오해의 두 가지 메커니즘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로서 문답법 토론을 할 때. 상대는. 또는 제3자는. 아주 큰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이미 정답을 들고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무지가 아니라 유지의 무기를 뒤로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혹은 상대를 혹하는 어떤 언어의 마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정말 무지에서(순수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매순간 무지할 수 있는 자다. 매순간 순수할 수 있는 자다. 그에게는 정말 학문(철학)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극단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와 토론을 하다 결론에 이를 때쯤이면 인간 그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사실 사람들은 진실과 진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소크라테스는 개념적인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대화를 하며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단지 <사랑이 무엇이냐> 이런 것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와중에 사랑이 몸에 배여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산파술이다. 실제로 아기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의 토론에서 결말쯤에 가면, 즉 무지의 지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 사람 자체가 <우정>이나 <사랑>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중도에 도망가지 않고 소크라테스와 토론을 끝까지 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마는)
소크라테스는 강력하다. 아니 산파술은 강력하다. 그것은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강력하다. 그는 실제적인 사람이며, 그의 언어는 실제로 그것이 생기게 한다. 예수 역시 산파법의 대가다. 그는 실제로 <사랑>이 태어나도록 산파의 역할을 해냈다.
산파법 -2
그러나 이 희한한 대화법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공포로 작용한다. 그것이 실제적이라는 이유로, 사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도운 것뿐이다. 본인의 문제를 본인에게 돌려준 것뿐이다. 그것도 크나큰 사랑으로, 그 문제가 진정한 답이 되도록 그 자신의 자궁 안에다 그 자신을 안전하게 돌려보낸 것뿐이다. 원인치료다. 원인치료는 진짜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짜를 원하지 않는다. 이게 문제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진짜 자신의 문제가 치료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서> 심각하게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진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겁나는 일이다. 억수같은 비는 창 밖으로만 봐야 하지 실제로 비 맞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실제로 아이를 낳아 버린다. 겁난다.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발을 묶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독살 당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발이 묶였다.
산파법 3
그것은 슬픈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대안 역시 산파법뿐이다. 왜냐하면 산파법이란 <개념>이 아닌 <실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열 달 아기를 받아내는 인내와 지혜로, 기어이 완성하겠다는 산파의 심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모른다.>의 지, 무지의 지를 터득한 자다.
9 주제 파악하기
① 글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일 : 문학공부의 최종목표
② 작품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생각
③ 마음으로 다가오는 느낌
④ 글에서 얻어지는 교훈
⑤ 작가의 생각 - 기계적이거나 기술적인 암기는 아니다
<예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돌로 조각품을 만드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아이 낳는 일을 도와주는 산파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나 멋진 조각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고 자랐다. 어느 날 아버지의 일터를 찾은 소크라테스가 돌무더기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상해요. 어머니는 어떻게 이웃집 아주머니네 가서 그렇게 예쁜 아이를 만들어 낼까요? 없던 아이가 갑자기 생겼어요.” “아니다. 이미 아주머니 뱃속에 아기는 있었어. 다 자란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답답하다고 우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나올 수 있게 도와준단다.” “아버지는 거칠고 흉한 돌덩어리로 어떻게 사자, 여신상을 만들어요?” “사자도 여신도 돌덩어리 속에 살아 있단다. 내가 멋진 사자를 만들까 하면 돌덩어리 속에서 사자가 ‘답답하니, 나를 자유롭게 해주시오’하면서 울부짖는단다. 그러면 그 외침에 따라 사자를 자유롭게 해주려고 그를 가둔 돌덩어리를 깬단다. 그러면 그 흉한 돌덩어리 속에 갇힌 사자가 제 모습을 드러낸단다.”
뱃속에 든 아이가 자연스럽게 세상에 나오도록 도와주는 어머니와 돌덩이 속에서 사자와 여신을 만들어내는 아버지처럼 “너는 아무 것도 몰라.” “이건 이거야.” 라고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공부하는 사람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을 사용하여 제자를 가르쳤다(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데 힘씀).
⑥ 마찬가지로 글 속에서 주제를 찾는다는 것은 이미 글 속에 존재해 있는 작가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밖으로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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