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33~34장 숙곳과 세겜 성 정복) |
34장입니다. 33장 이전까지의 내용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얍복 강을 건너고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수여받은 이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려고 합니다.
비록 얍복 강에서의 환도뼈 위골을 당하여 신령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리고 변화하여 에서에게 앞서 나아가서 몸을 구부렸고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로 화해되어 가나안 땅 세겜 성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적이며 전적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문이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은 세겜이 디나를 강간하고 야곱에게 통혼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등장합니다(1절). 디나는 레아가 야곱에게서 낳은 딸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야곱의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이며 그리고 야곱이 그곳에서 거주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거주 현황을 확인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지금 야곱 가족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①가나안 땅 안에 있지만 일개 유목민으로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②야곱 당시의 가나안 땅 주인들은 가나안 토착 원주민 족속들입니다(창15장19~21절). ③야곱 가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주 상황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에서 당시 거주하던 원주민 족속의 땅을 구입하여 거주하고 있습니다(33:19).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야곱 당시는 아직 가나안 땅을 정복한 때가 아니고 큰 일곱 족속이 주인으로 있는 땅에 들어가서 눈치보며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정복은 민수기 21장부터 요단강 동편 땅이 시작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합니다(1,2절). 디나가 히위족속 하몰의 아들이며 그 지역의 추장 세겜이라는 자에게서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디나의 강간당하는 표현을 2절에서 ‘끌어 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라는 것으로 동사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세겜이 디나를 보고서 걷잡을 수 없는 욕정으로 급박하게 진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는 디나를 사랑하여 그녀의 마음을 사려고 했습니다(3절). 여기서 ‘그 마음이 깊이~~디나에게 연연하여’라는 것은, 세겜의 마음이 디나에게 밀착되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라는 것은, 세겜이 디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격려해 주려 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를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도 하였습니다(4절). 고대 근동에는 가문을 대표하는 자나 부모가 혼사의 문제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겜은 아버지 하몰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의 요청은 아버지께 정중한 부탁의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얻게 하여 주소서(히,카흐 리קח־לי)‘ 라는 명령형을 사용하므로써(KJV, Get me) 억지와 함께 디나를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위 족속은 가나안(함)이 낳은 아들 중에 하나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할례 받지 못한 족속입니다(창10:15~17). 그래서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이 언약자손 야곱의 딸을 아내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방 족속에 속한 자가 언약 자손의 딸을 연모하고 사랑한다 해서 아내로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딸 디나를 세겜이 더럽혔다 함을 들었지만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합니다(5절). 고대 근동에서는 당시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장성한 아들들의 동의나 의견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창24:29 참조). 또한 고대 유목민들은 통상 부모와 처자가 머무는 중앙 장막을 중심으로 각자 흩어져 목축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모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없는 집에서 딸 디나의 일로 비통한 마음 가운데 답답하고 안한 마음과 함께 아들들이 돌아오기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은 것입니다. 이는 ‘잠잠하였고’(5절)에서 확인이 됩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신중한 듯하지만 신앙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들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귀먹어리처럼 잠잠한 것입니다.
그때에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아들 세겜의 요청을 받아 야곱에게 말하러 왔습니다(6절). 이는 당시 혼인의 당사자가 직접 구혼하기보다는 그 가문을 대표하는 자가 상대방 가문의 대표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몰은 본문에서 확인되는 바는, 아들의 잘못을 사과하려는 말투는 전혀 없고 아들의 요청대로 혼사의 일로 온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디나의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는데 이는 하몰의 아들 세겜이 동생 디나를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7절,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본문에서 아들들의 마음을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라는 표현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근심하고‘는, 누이의 강간당한 소식을 듣고서 아들들의 마음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계속 마음속 깊이 상처가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하고, ’노하다‘는, 참기 힘든 맹렬한 분노가 겉으로까지 확연히 드러난 상태를 뜻합니다.
위의 7절에서 특별한 단어 하나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에게~‘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수여받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창32:28). 이는 야곱 개인의 이름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공동체를 말하며 이들은 세상을 뛰어넘은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을 여호와께서 허벅지 관절이 위골된 야곱에게 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얍복 강 이후 한 번도 부르지 아니하다가 처음으로 디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는 것은, 이 사건을 개인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을 대항하는 민족적 차원에서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디나의 사건을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섞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몰은 아들 세겜의 요청을 받아 야곱과 들에서 돌아온 아들들에게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청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고 합니다(8절). 본문에서 ‘연연하다’는 것은, 디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하몰의 아들 세겜의 마음 상태를 뜻하며 이로서 ‘아내를 삼게 하라’는 것은, 디나와 항상 함께 있고 싶어하는 세겜의 강한 욕망과 애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몰은 야곱과 아들들에게, 서로 섞여 통혼하여 함께 거주하며 매매하고 재산을 늘려서 자리를 잡고 지내라고 제안을 합니다(9,10절). 디나를 세겜의 아내가 되게 허락하라는 요청을 하면서 아직 유목민인 야곱과 아들들에게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한 것입니다. 하몰은 저들 집안이 추장의 가문으로 이같은 제안을 하면 아직 세겜 지역에서 유목민으로 거주하며 혈혈단신인 야곱과 아들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고 장담한 듯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야곱의 입장에서 충분히 유혹을 받을 만한 조건들입니다. 야곱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세겜에서의 삶을 생각한다면 참 유리하고 충분한 조건입니다. 당시 야곱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밭을 샀으며 거기서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역시 저들에게서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방인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창33:19).
그래서 ‘통혼’은, 고대로부터 통혼을 통해 서로의 활동 영역을 넓혀 왔기에 야곱으로서는 귀에 솔깃한 큰 도움의 제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의 집안이 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를 생각하면 하몰의 유혹은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서 소돔성에서의 롯은 두 딸을 위기에 처한 두 사람(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종)을 구하고자 대신하여 동네 불량배들에게 내어 놓고자 했었습니다(창19:8).
또한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부자가 되는 데에 이용을 했습니다(창29장,30장). 이처럼 당시의 가정에서는 딸들을 아들처럼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섞이면 안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섞이고 또 섞이게 됩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며 자기 목적을 위해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머물고 있으나 세상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하나님 말씀과 성도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야곱과 그 아들들은 세겜 땅에 안주할 수 있는 정착권과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경제권이 안정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0절의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소유하라, 붙잡아라/연합의 의미)’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또한 자신들에게 혼인 예물을 청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제의 역시 충분히 유혹할 만도 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몰에 이어 디나를 연모하는 그 지역 추장이었던 세겜 역시 야곱과 아들들에게 연이어 제안을 합니다.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11,12절). 본문에서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는 것은 부드러운 눈과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좀 보아달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에서 ‘혼수’는 당시 고대 농경 사회나 유목 사회에서는 인력 의존도가 매우 컸고 이 가운데 딸을 결혼시킨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동력 손실을 의미하므로, 통상 신랑 측이 신부 측에 신부의 몸값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던 것으로 사용된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예물’은 상대의 호의를 얻기 위해 주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언약자손 야곱은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인간적인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벗어나서 승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야곱은 하몰의 달콤한 제안에 먼저 아들들과 디나의 강간에 대해 의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의 문장을 보아서 살육하는 보복에 관해서는 의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3절부터 24절은 하몰과 세겜이 속아서 백성으로 할례를 받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렵혔음이라”(13절). 본문에서의 ‘속여’는,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을 속였다는 것이며 이 속임의 내용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과의 연합 공동체 표징인 할례를 이용하여 저들에게 보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하였으니’라는 말은, 거듭 강조하고 반복하여 말을 한 것을 뜻합니다.
즉 이 본문의 뜻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요구를 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디나가 당한 봉변에 대하여 복수를 하고자 계략을 꾸미는데, 하몰과 그들 모두의 남자들이 야곱의 아들들인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세겜에게 줄 것이며 그리고 땅을 사고팔며 함께 하겠다고 저들을 속여 대답을 하고서는, 그러나 만약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리고 이곳에서 떠나겠다고 강경하게 대응을 한 것입니다(14~17절). 즉 할례를 하는 조건으로 속여 승낙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그런즉 이같이 하면’이라는 것은 ‘이 조건으로’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와 같이 할례를 모든 히위 족속이 시행하면 하몰과 세겜의 말대로 동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동의에 대한 추가적인 강조의 뜻으로 ‘주며...거주하여...되려니와’(16절)라는 말로 덧붙입니다. 이는 동의에 대한 심화되는 점층법을 사용한 단어들인데, 조건에 의한 적극적인 동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16절에서 ‘한 민족이 되려니와’라는 것은, 야곱의 아들들은 히위 족속들이 할례를 받기만 하면 결국 야곱 가문과 히위 족속이 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하몰과 아들 세겜이 믿도록 하는 데에는 매우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민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עם)’은 ‘합치다’, ‘집합하다’는 뜻이 있는 ‘아맘’에서 유래되어 ‘매우 강한 결속력을 지니는 집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를 지닌 ‘한(히,에하드אחד)’이란 말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되려니와’란 말은 완료형으로서, ‘이제 된 것이나 마찬가지’란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언약 자손의 표로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 족속과는 통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몰을 속이고자 너희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우리와 같이 되면 서로 통혼을 하고 한 민족이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받지 못한 자가 할례만 받는다고 언약자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의 그 족속들을 속여 복수를 하고자 함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조건적 제안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좋게 여기서(18절)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19절). 본문에서 ‘이 소년’은 세겜을 일컫는데, 세겜이라 하지 않고 ‘이 소년’이라고 한 것은 장성한 남자이며 정욕이 가득 한 남자의 표현으로 그것을 더욱 드러내고자 세겜이라는 이름보다 ‘이 소년’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앞의 ‘이 소년’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행위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소년’인 세겜은 성의 주민 전체를 설득하여 할례받는 일에 동의를 구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신분의 사람 즉 추장으로써 가장 존경받는 위치였다는 것을 연이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몰과 세겜이 디나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 야곱의 아들들의 요구대로 지체하지 아니하고 함께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남자로 할례를 받게 합니다(20~24절). ‘성문’은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공포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문으로 급하게 가서 공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친목하고’(21절)는 하몰 부자가 야곱 집안이 제시한 할례를 시행해야만 서로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안전 논리로 주민들을 설득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는, 하몰 부자가 주민들에게 이 땅과 함께 장사하면서 돌아다니게 하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는 하몰 부자가 세겜 성 주민들을 안전 논리에 이어 경제 논리로 설득하는 내용입니다. 즉 야곱 집안의 세겜 성 거주와 상업 교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계산해 볼 때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큰 이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형성을 위하여 저들의 조건에만 응하면 모든 것이 순탄하며 야곱과 아들들이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다고 하몰 부자는 주민들들게 말로 설득하였습니다(22절). 그리고 이어진 23절에서 ‘그렇게 하면’이라는 말로 결론적 설명을 하는데,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23절)고 하며 성의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인구에 비해 땅이 넓었던 고대 사회에 있어서 부동산의 가치보다 본문에 나오는 ‘가축’이나 ‘재화’ 같은 동산의 가치 비중이 더 컸었으므로 세겜은 이러한 것들을 주민들에게 최종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세겜이 디나와 결혼하고자 하는 동기가 순수한 사랑만이 아니라 야곱의 경제력과 재물을 탐내고 그것을 빼앗으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세겜은 자신이 연모하는 디나를 취하고 그리고 그 백성들은 야곱의 재물에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몰과 세겜은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남자로 모두 할례를 받게 하는데, 여기서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24절)는 장성한 자들로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속은 것입니다.
25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을 쳐서 디나를 구출하는 내용입니다. 할례를 행한 자들이 사흘째 날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에(25절),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그들 중에 들어가서 모든 자를 칼날로 죽이고(26절) 또한 모든 형제들이 가서 가축들과 들에 있는 것과 재물과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모든 물건을 다 노략하여 나옵니다(27~29절).
할례 후 셋째 날은 ‘위기의 날’이라고도 불려졌습니다. 그만큼 할례를 받은 지 삼일째 즈음이 되면 염증과 고열로 인한 통증이 가장 심하고 거동도 가장 불편할 때입니다. 이날까지 기다렸었던 시므온과 레위, 디나와 같은 어머니인 레아에게서 태어난 형제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복수를 시작했던 것입니다(25절).
그들은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칼로 쳐서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옵니다(26절).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의 형제들이 그들의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을 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자기들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입니다(27절). 야곱의 아들들이 살인을 하고 노략하는 정도가 남김없이 철저하고 잔인했음을 28절과 29절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잔인하고 잔혹한 야곱의 사건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까지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 자손인 야곱에게 있어서 감추고 숨기고 싶은 이 사건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왜 공개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신권 통치 역사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첫째는, 야곱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언약과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은 은혜를 입고 변화를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증하는 본문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입니다. 죄 가운데 있고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언약을 지키셨으며,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은 변치 않으시고 언약 자손들과 다윗을 보호하사 언약하신 혈통따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지게 하셨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의 일로 말미암아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의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은 멸망하리라”(30절)고 염려합니다.
본문에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은 히위 족속에 가까운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금방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일들이 저들로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악취를 피웠습니다(25~29절).
그러나 세겜 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과 자손에게 주시기로 언약된 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언약자손 야곱의 아들들로 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죽임을 당할까 걱정을 합니다.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시키시고 얍복 나루에서 간구한 것을 들어 주시고 이곳까지 오도록 해주셔서,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여 주셨음에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은 이스라엘이 망하지 아니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믿어지지 아니하니까 걱정 근심 염려 불안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야곱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이 세겜 성을 멸하였으나 자기가 그 주변 족속들의 주목을 받아 공격을 당하여 죽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나는 수가 적은 즉’이라는 말로 자기 집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망하고 흥하는 것이 군사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있음을 야곱은 당시까지만 해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과의 길르앗에서의 만남(31:25)과 형 에서와의 만남(33:1)에서도 야곱과 아들들이 죽을 수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야곱의 집을 결코 망하지 않게 하십니다(35:5 참조).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 야곱의 염려에,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31절). 이들은 아버지 야곱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채, 아직도 누이 디나가 당한 것에 대하여 강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35장으로 넘어가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다시 야곱을 찾아오시고 위로하시며 벧엘로 올라가도록 하십니다.
야곱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걱정 근심으로 쌓여 있을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찾아오십니다. 이는 야곱과 계속적으로 동행하셨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