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의 삼백 용사
(하나님께 숫자는 무의미하다)
사사기 7:1-8
사사기의 특징
본문은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반역과 심판, 구원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반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방 민족을 통해 심판합니다. 이방 민족의 압제가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렇게 반역, 심판, 구원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특징입니다.
기드온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살만하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사기 6:2절을 보면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나옵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을 이스라엘을 미디안을 통해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
사시기 2:1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을 섬겼습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자 여호와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었고,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겨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그들의 괴로움이 심했습니다.
같은 여호와의 손인데, 순종하면 복이 되지만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여호와의 손은 어디로 가든지 승리하게 하시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어디로 가든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사무엘상 7:13절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무엘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았다”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의 소명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로 인해 산과 웅덩이와 굴과 사선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파종할 때면 미디안 사람뿐만 아니라 아멜렉과 동방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진을 치고 토지소산을 탈취해 갑니다. 먹을 것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통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고난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지만, 지혜가 있다면 고난을 예방해야 합니다. 고난을 만나서 기도하지 말고, 고난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셨고,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케 했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자 이스라엘 전역에서 미디안과 싸우려고 나온 군사들이 3만 2천 명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먼저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주변에는 마르게 해 달라는 것과 또 양털은 마르고 주변에는 이슬이 있게 해 달라는 두 가지 양털 시험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위해서 그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 알고, 믿음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음의 부작용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모였는지 알았습니다. 비록 적군이 13만 5천 명이고, 자신들은 3만 2천 명, 4분의 1 전력에 불과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고, 이스라엘 군사를 부르는 이유는 승리는 주시기 위함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승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3만 2천 명 중에 모인 대 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나라를 위한 애국 충절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이 전쟁은 하나님께 반역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전쟁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두려움의 문제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서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돌아간 백성이 2만 2천 명이었습니다. 만 명만이 남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말씀합니까? 두려움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문제입니다.
전쟁터에 나온 사람들에게 찾아온 두려움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막상 전쟁터에 와 보니, 이스라엘은 하롯 샘 곁, 이스라엘 평지에 위치 있는 하롯 샘 곁에 진을 치고, 미디안 군사는 북쪽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전투 지형을 볼 때도 매우 불리해 보입니다. 샘 곁에 있는 진과 골짜기에 있는 진, 군사력도 매우 불리한데 전술도 불리해 보입니다. 이때 바보가 아니라면 금방 누가 우세할 것인가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두려움이란 무엇입니까? 처음에 가졌던 긍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변화된 결과입니다. 초심을 잃으면 두려움에 빠집니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직장 생활에 두려움에 느낍니다. 왜냐하면 처음 생각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된 생각은 염려와 걱정, 때로는 공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
창세기 15장을 보면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하고 있는 두려움이 두 가지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방패라는 말에서 알 수 있고,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에서 알수 있습니다.
방패라는 말은 보호,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을 정복한 후에 롯을 비롯한 소돔 사람들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동맹군을 모집해서 그돌라오멜군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비롯한 소돔 사람들과 재산을 다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아마도 재차 그돌라오멜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했습니다. 충분히 이해되는 장면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서 너를 지켜 준다고 약속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두 번째 지극히 큰 상급은 15장에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사로 다메섹 종인 엘리에셀을 생각해두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 몸에서 난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소수의 의미
두려워하는 자들 2만 2천 명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만명 남았습니다. 13:1의 전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가지 시험 기준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을 걸렀습니다. 시험 내용이 무엇입니까?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먹게 하는데, 개가 핥아 먹는 것 같이 혀로 핥아 먹는 자와 무릎 끊고 먹는 자를 구분했습니다. 이 구분으로 인해 9,700명은 돌아가고, 300명만 남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설교자는 혀로 핥아 먹는 행동과 무릎 끊고 먹는 행동에 대해서 비교합니다. 전쟁에 임한 자세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자기 일군으로 사용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좌우를 살피는 자는 정신을 차린 자이고, 용감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이고, 반면 무릎 끊고 물을 먹은 사람은 좌우로 살피지 않고, 정신이 없고, 용감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말합니다. 일리는 있지만 본문은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남은 만 명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이들은 군사로서 자격이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전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최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중에 삼 백 명만 남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삼 백 명이 9천 7백 명보다 나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처음부터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숫자
OX문제를 낼 때는 출제자는 의도를 가집니다. 그 의도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답 보다는 오답으로 갈 수 있는가입니다.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소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먹을 때 무릎 끊고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사 기드온을 통해서 승리를 약속했고, 이 전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도는 300명 보다 더 작은 숫자가 남아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6: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기드온에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미디안 군사 13만 5천 명은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관점 차이입니다. 기드온이 이 약속을 믿고 있다면, 3만 2천에서 만 명으로 만 명에서 300명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300명은 큰 수가 되고, 300:1로 숫적 우세입니다.
오병이어
예수님은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일으키기 전에 제자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빌립은 돈을 조금씩 거둔다고 해도 300데나리온이 부족하고, 돈이 있다고 해도 이 많은 떡은 어디서 구하겠냐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온 어린아이 도시락을 손에 들고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관점
내가 이 돈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돈을 벌려고 합니다. 숫자가 크게 보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숫자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어떻게 살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때로는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믿음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 만 명이 모인다고 해도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어 살아나게 할 수 없습니다. 만 명이 아니라 천 만 명이 모인다고 해도 하나님 한 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마른 뼈에 생명을 주어 큰 군대를 만들 수 없고, 마른 지팡이에 살구 열매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시체가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말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하자 죽은 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live와 재방송
우리가 연약할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객관적인 전략에서 열세라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 믿음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역전한 게임을 재방송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면 그 경기는 한국이 4대 3로 역전승한 게임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전반전에만 3대 0으로 지고 후반전을 시작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전에 4골을 넣어 4대 3으로 역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라이브는 불리해 보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이 승리한 게임이 Replay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백전백승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마귀는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예수님은 마가복음 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했다면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된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정탐꾼 12명 중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모든 백성도 한 편이 되어 하나님을 반역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브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상황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뚜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5절에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비록 눈앞에 메뚜기 떼와 같이 모인 13만 5천 명이 모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약속대로 한 사람 치듯 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끝까지 가졌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원합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