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4💜
■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코튼에 유채, 236cm×172cm, 개인소장)
■ 베버/무도에의 권유
https://youtu.be/Vf0on9TKtB4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김영은(청아출판사)ㅡ27
13. 김환기(1913~1974)/한국 현대 미술의 좌표(2)
해방과 한국전쟁 등으로 혼란한 시대에 작품에 매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피난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힘든 상황을 오히려 낭만적으로 승화시켰다.
[판잣집], [피난 열차], [뱃놀이] 등에서는 그가 지닌 예술적 낭만성이 풍부하게 배어 나온다.
1956년, 김환기는 작품 활동을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도 그는 한국적 소재들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하고자 끊임없이 연구했고, 1959년 귀국할 때까지 파리, 니스, 브뤼셀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서구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잃을 것을 우려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귀국한 후에는 유네스코 국제 조형 예술협회 한국 본부 회장, 홍익 대학교 미술학부장 및 홍익 미술대학(홍익 대학교가 1961년 대학 정비령에 따라 일시 홍익 미술 대학으로 개칭) 초대 학장을 역임했고, 대한 미술협회 부이사장, 한국 미술협회 이사장 등 바쁘게 활동하면서 한국 미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1963년, 그는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자 브라질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구, 특히 국제 미술의 주류로 발전하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바쁜 활동으로 작품을 소홀히 했던 데 조급함을 느낀 그는 붓을 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서 김환기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추상 세계를 확립하고 이전 작품들과 형식적,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른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화단은 추상 표현주의가 심화되는 단계에 있었고, 팝아트가 화단의 주류로 여겨졌다.
이런 경향 속에서 그는 미국적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편, 한국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적인 세계를 그려냈다.
뉴욕에 도착한 이듬해 그는 첫번째 개인전을 열고 [산], [신월], [야상곡] 등을 선보였다.
이 무렵까지는 색과 면을 이용한 추상화를 작업했으나,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독창적인 방식의 점화(點畵)를 제작했다.
1970년, 김환기 작품세계의 절정이라 일컬어지는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탄생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은 단색톤의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한국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해 제1회 한국 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검은색, 회색, 청색 등의 절제되고 통일된 톤으로 화면을 가득 수놓은 점들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공간, 우주를 창조하며 보는 사람에게 신비로운 감정과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이후 김환기는 대작 점화에 몰두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만년의 대표작에서는 자연의 외형은 사라지고 활형과 직선으로 점들이 교차되는 형태가 두드러지는데, 이를 통해 화면 공간은 확장되고 우주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자연과의 정신적 합일, 한국적 감수성이 물씬 드러난다.
1974년부터 그의 건강이 점차 나빠져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김환기는 죽는 순간까지 초인적인 창작 욕구를 발휘해 [09-05-74], [07-VII-74] 등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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