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34. [역경의 열매] 이양구 (1-20) 하나님과 소통의 도구 된 ‘메모’… 인생의 나침반 삼아
고교 때 작심삼일 습관 고치려 시작
힘들고 반성할 일 있으면 기록·정리
30년간 큐티 노트하며 영적 습관 돼
이양구 우크라이나 전 대사는 30여년간 메모를 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했다. 메모는 1993년 큐티를 시작하면서 메모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에 가장 강하다고 여겼다. 경험의 볼륨만 다를 뿐이지 고통의 순간을 겪으며 스스로 생존 비결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늘 가진 생각이 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이 살아온 걸 한번씩 정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나 역시도 과거의 기억을 적는 ‘백서’에서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청서’까지 기록해 보고 싶었다. 백서와 청서 그리고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메모가 습관이 되면서다.
기록의 필요성을 느낀 건 고등학생 때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는데 작심삼일에 그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터득한 방법이 3일마다 다시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후 힘든 일이 있거나 반성할 일이 있으면 기록했고 글로 쓰면 정리가 됐다.
본격적인 메모의 시작은 큐티였다. 큐티는 2등 서기관이던 1993년 모스크바의 주러시아한국대사관에 부임하면서 하게 됐다. 이후 30년간 이어온 큐티는 영적 습관이 됐다. 큐티 노트에 빽빽하게 메모도 했다. 국제제자훈련원의 리더십핸드북을 보면 세월의 흔적처럼 메모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2012년, 2014년, 2017년….
메모가 빼곡히 적힌 큐티책.
큐티와 함께 기록의 4단계 원칙도 만들었다. 첫 단계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관찰이다. 여기서 그친다면 사실과 경험을 나열하는 일기일 뿐이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관찰한 걸 해석하는 단계, 해석과 유사한 사례나 경험을 연관시키는 단계, 이를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단계다.
하나님은 4단계를 거친 메모로 뜻밖의 선물을 주시기도 했다. 똑바로 살고 있는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게 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메모는 반성문이 됐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 줬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도구가 됐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나 달란트를 메모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교관이 됐을 때 나는 내가 잘나서인 줄 알았다. 그러다 메모 속 나를 돌아보니 주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나를 외교관의 길로 이끌었음을 알게 됐다.
2011년 4월부터는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별 외교행사, 영성일기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특히 영성일기엔 한국 국가발전과 기독교 역할에 대한 단상부터 2019년 독일에서 열린 유럽코스타에 참석한 소회, 기독교인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 ‘대영광의 그날을 위하여’ 감상문까지 다양한 주제와 소재의 글을 올렸다.
메모는 습관이 됐지만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망설여졌다. 그러다 가끔 모르고 지나쳤던 기억을 발견하게 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확인하게 했던 기록의 힘을 떠올리게 됐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남은 내 삶이 좀 더 내실 있고 알차게 될 거라는 기대와 설렘도 생겼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는 누구건 간에 거룩함이 있고 기록은 그 거룩함을 꺼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약력=1959년 출생,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외무고시(18회), 외교부 러시아CIS과장, 국무총리실 외교안보심의관, 중앙공무원교육원 국제교육협력관, 주우크라이나 대사, 현 경상국립대 산학협력중점교수, 현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K블루존 상임대표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 하나님과 소통의 도구 된 '메모'… 인생의 나침반 삼아
* [역경의 열매] 이양구 (2) 내 삶의 울타리 돼 준 '천사' 형과 할머니의 사랑
* [역경의 열매] 이양구 (3) 삶의 지평 열어준 어머니… 늘 나눔과 섬김 실천
* [역경의 열매] 이양구 (4) 맹장 수술로 전교 석차 떨어져… 10년 암흑기 시작
* [역경의 열매] 이양구 (5) 아내와 운명적 만남… 결혼과 고시 같은 해 모두 패스
* [역경의 열매] 이양구 (6) 군대와 의전과에서 경험, 외교관 임무 수행에 큰 도움
* [역경의 열매] 이양구 (7) 책·영화로 좋은 기억 있던 러시아… 가장 많은 인연 맺어
* [역경의 열매] 이양구 (9) 교육부터 농업까지 배움의 시간 된 해외공관 생활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0) "원하는 곳에 가라" 축복기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1) 저평가된 우크라이나에 농업 실크로드 비전 구상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2) '삼수'로 개입하신 하나님… 좌절보다 꿈 위해 도전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3) 36년 외교관의 삶… 힘이 돼준 취미와 특기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4) '농업전도사' 삶 살며 농업을 최대의 미래산업으로…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5) 동북아 미래 달린 극동 러시아… 유라시아 비전 제시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6) SDGs는 하나님의 작품… 선교적 사명감 가져야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7) 오래 주재한 러시아·퇴직 근무지 우크라 전쟁 충격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8)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제2 태안반도의 기적' 구상
* [역경의 열매] 이양구 (19)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장 든든한 지원군
* [역경의 열매] 이양구 (20·끝) 최선의 삶 기록 '백서' '청서'… 주님 앞 당당히 설 수 있길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양구 (2) 내 삶의 울타리 돼 준 ‘천사’ 형과 할머니의 사랑
대구 전학과 비인가 중학교 입학 막는 등
늘 어려운 순간이 올 때면 앞서서 해결
‘보이지 않는 손’ 통해 하나님 임재 경험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축복 받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고백한다. 세 살 무렵 이 전 대사(가운데)가 ‘천사’라고 불렀던 형(왼쪽), 섬김의 삶을 알려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내 삶에 꽤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개입하신 것 같다. 두세 살 때였을까. 어머니와 함께 찾아간 곳에 나에게 형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형은 나보다 10살 많았고 아버지는 달랐다.
형의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셨다는 걸 훗날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 시절 남편 없이 여성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형의 조부모에게 형을 맡겨두고 어머니는 재가하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형의 본가와 내 집은 경남 함양 읍내에 있었고 불과 4㎞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형님이 가끔씩 어머니를 보러 오셨지만 어머니는 두고 온 큰아들을 늘 그리워하셨다. 결단을 내리셨다. 나의 아버지와 헤어져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셨다. 형과 형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 본가로 들어가게 됐다.
나야 워낙 어릴 때라 기억도 못하지만 형이나 할머니는 내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나는 그저 생면부지 아이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런 환경에서 내 삶 역시 편치 않았을지 모른다. 얼마나 눈칫밥을 먹어야 했을까. 얼마나 구박을 받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 덕이었는지 나는 구김살 없이 컸다. 긍정적이었고 콤플렉스도 없었다. 형과 할머니의 보살핌 덕이었다. 무엇보다 형은 늘 내 편이 돼줬다. 나는 그런 형을 ‘천사’라 불렀다. 할머니도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우셨지만 내 앞에 힘든 순간이 올 때면 막아주셨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환경이었다.
옛일들을 더듬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쯤 대구로 전학을 갈 뻔했다. 어린 마음에 시골인 함양에서 도시인 대구로 전학 간다니 마냥 신이 났다. 어머니는 내 보따리를 싸주셨고 100원짜리 지폐도 쥐여줬다. 학교에서도 대구로 전학 간다고 인사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취소됐다. 어린 마음에 대구 간다고 친구들한테 실컷 자랑까지 했는데 취소됐으니 말 그대로 충격이 컸다.
대구 전학이 무산된 이유를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지난 후다. 형의 고모들은 늘 내가 눈엣가시였다. 할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계신 대구로 보내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고모들을 막을 수 없었다. 대구행을 막은 건 형이었다. 고모들 때문에 내가 대구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불 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고모들도 자기 오빠의 아들만큼은 어려웠나 보다. 결국 대구행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형님이 내 삶의 울타리가 된 일은 또 있다. 어머니는 나를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비인가 중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셨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곳이라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들어가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어머니는 어차피 농사나 지을 텐데 정규 중학교에 가서 뭐하나 싶었다고 하셨다. 그때도 형님이 “동생 양구는 정규 중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며 어머니와 싸우셨다.
형님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대구로 갔을지 모른다. 대학교는커녕 중학교 학력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러면 내 삶은 어떻게 됐을까. ‘천사’ 형과 할머니, 어머니는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던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3) 삶의 지평 열어준 어머니… 늘 나눔과 섬김 실천
어려운 이들에 물질적 지원과 위로·격려
신앙 갖게 되면서 전도 통해 섬김에 최선
나에겐 긍정과 희망의 가치관 심어주셔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어머니 하판순 권사를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배웠다. 사진은 이 전 대사가 1989~9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연수받던 시절 어머니(왼쪽)가 교회 성도와 함께 인근 해변에서 사진촬영하는 모습.
무엇보다 내 삶의 보이지 않는 손 중 가장 큰 손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늘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셨고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다. 넉넉지 않은 살림인데도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다. 우리 집이 함양 읍내에 있다 보니 5일장이 열릴 때면 특히나 손님들이 많이 오셨다. 그때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외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장터에 오려면 큰 결심이 필요했다. 장 열리기 하루 전에 와야 다음 날 장터에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그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걸 제공하셨다.
물질적 지원만 하시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그러니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나에게도 어머니는 긍정과 희망의 가치관을 심어주셨다. 태몽 등 꿈 이야기를 하시며 “넌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아라” 라며 용기를 주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높아졌다.
신앙이 없던 어머니를 교회로 이끈 건 형이었다. 당시 교회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문화 공연을 경험하는 장소였다. 뜨거운 신앙의 회복도 일어났다. 형을 통해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게 됐고 할머니도 전도했다.
어머니 하판순 권사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섬김에 더 많은 열심을 내셨다. 평생 새벽기도를 멈추지 않으셨고 전도에도 힘을 썼다. 나도 어머니의 전도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 예배당에 앉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웠다.
교회에 관한 기분 좋은 기억도 있다. 주일예배나 부흥회에 참석하고 늦은 밤 예배당을 나오면 밖은 깜깜했다. 읍내에 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 가로등도 없을 때였다. 어린 나이에 캄캄한 밤길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골목이 떠나가라 불렀던 찬양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고향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함양은 내 삶에 소중한 영향을 줬다. 앞서 이야기했듯 대구로 전학 가는 줄 알고 마냥 좋아할 정도로 도시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전학이 무산돼 시골에서 자란 건 큰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고향에서 나는 어머니 농사일을 도왔다. 한여름 밤이면 원두막에서 수박밭도 지켰다. 농촌의 삶을 통해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경험했고 자연 친화적 성품을 갖게 됐다.
야성도 고향이 준 빼놓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별다른 놀 거리가 없었다. 전쟁놀이를 하고 여름 장마철에 물이 불어난 냇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비 오는 여름밤이면 친구들과 공동묘지 다녀오기를 하며 자신의 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인성과 사회성을 키운 곳도 고향 함양이었다. 시골은 워낙 좁은 사회여서 어른들께는 예의를 지키고 친구 관계는 원만히 해야 했다. 훗날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고향은 어른이 돼서도 나를 격려하는 곳이었다. 외교부에 들어갔을 때는 축하를 건넸고 대사나 총영사로 부임할 때면 마을 어귀에 플랜카드를 걸어 함께 기뻐해 줬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는 건 삶 속에 동기부여가 된다. 내가 고향을 택한 것도 아닌데 내가 받은 혜택은 늘 차고 넘쳤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진 일이 아닐까.
***[역경의 열매] 이양구 (4) 맹장 수술로 전교 석차 떨어져… 10년 암흑기 시작
주초고사서 전교 400등까지 떨어지자
서울법대 합격해 출세하겠다는 꿈 요원
한양대 정외과 다니며 삼수했지만 실패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중학생 때부터 방학만 되면 서울에 있는 형님 집으로 친구들과 놀러왔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이 전 대사(왼쪽)가 친구와 함께 당시 외교부가 있던 서울 종로구 정부청사 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
형님 덕에 정규 중학교엔 입학했지만 노는 게 좋은 아이였다. 공부와 담을 쌓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러 다녔다.
이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또 다시 내 삶에 개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친구다. 공부를 제법 잘하는 이 친구는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읍내 우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등교하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공간에서 친구는 공부하고 나는 그 옆에서 잠을 잤다. 시간이 가니 왠지 모를 치기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나도 공부하게 됐다. 덕분에 나는 1975년 명문고인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천하를 다 잡은 듯 자신감이 충만하던 이때부터 10년에 걸친 내 인생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배가 아파 진주제일병원에 갔더니 급성맹장이었다. 수술하고 입원해 일주일에 한번 보던 주초고사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추락을 경험했다. 주초고사를 보면 그 전에 본 시험 성적까지 합해 평균으로 석차를 매겨 복도에 붙였다. 전교생 600여명 중 400등이었다. 당시 서울대 입학이 목표인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나는 촌놈이 출세해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 뿐이라 여겼다. 의사는 생각도 못했고 외무고시는 알지도 못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단아처럼 살았다. 수학시간엔 영어 공부하고 영어시간엔 국어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하면서도 무슨 자신감인지 ‘서울대 간다’는 생각만큼은 굳건했다.
서울대 도전은 실패했고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취업한 형님 집에 머물며 입시학원에 다녔지만 잘 될 리 없었다. 두 번째 입시에서도 서울대엔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후기대인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삼수를 준비했다. 또 실패였다. 관악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서울대 합격자 명단은 지금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가능성도 없는 것에 혼자 욕심내고 도전하며 상처받았다.
대학생활은 앞서 말 한 대로 암흑기였다. 개인적으로도 힘들기도 했지만 시대적으로도 불우한 때였다. 대학에 입학한 1979년엔 10·26과 12·12가 있었고 이듬해엔 5·18이 있었다. 힘들 때면 보통 신앙을 붙드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다 1980년 운명처럼 외무고시라는 걸 알게 됐다. 형님 댁에서 한 방을 쓴 또 다른 형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형의 처남이었고 나에게는 사돈이었다. 그 형이 내 전공 등을 고려해 외무고시를 제안했는데 이상하게 와 닿았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기억을 되돌려 보니 외교관은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직업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유독 만화와 영화를 좋아했다. 만화가게 주인조차 외상으로 만화책을 빌려줄 정도로 나는 VIP 손님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엔 진주의 5개 극장에서 동시 상영하는 영화란 영화는 다 봤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영화 사랑은 계속됐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서울 중앙극장에서 본 ‘닥터 지바고’다.
취미인 영화와 만화로 나는 상상력을 키웠고 넓은 세상을 봤다. 그리고 외무고시는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5) 아내와 운명적 만남… 결혼과 고시 같은 해 모두 패스
졸업여행 대신 고향 찾았다 아내 만나
공부와 연애 병행하며 외무고시 합격
외교부에 근무하다 현역 장교로 복무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1984년 2월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9개월 뒤 결혼식을 올렸다. 이 전 대사는 태어나 잘한 일 세 가지 중 하나로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1984년은 나에게 10년의 암흑기가 끝나는 해인 동시에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2월 외무고시에 합격했고 11월엔 결혼도 했다.
요즘 간증할 때면 얘기하는 게 있다. 내가 태어나 제일 잘한 세 가지다. 하나님 영접, 집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것,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84년에 이뤄졌다.
무엇보다 아내와의 만남은 기적 같았고 운명적이었다. 82년 4월 대학 졸업여행에 갈 마음이 없어 홀로 여행을 떠났다. 덕유산을 넘어 고향인 함양에 머물다 지리산을 오르는 일정이었다. 고향 누님과 함양 인근 목장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다. 그곳엔 서울 일정을 마치고 온 아내가 있었다. 고향 누님은 자신의 동생 친구인 아내와 아는 사이였다. 나도 자연스럽게 인사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교제를 시작한 건 그해 12월이었다. 고향 모임에서 다시 아내를 만났고 그때부터 연애가 시작됐다.
연애하고 공부하며 고시에 합격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외무고시를 쉽게 봤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외무고시가 잘 맞았던 것 같다. 외무고시는 책 하나를 깊게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고르게 공부해야 했는데 이런 특성이 나에게 맞춤이었다.
대학 졸업식의 해프닝도 있었다. 학사 경고로 졸업에 필요한 140학점을 채우지 못했다는 걸 마지막 학기 때 알았다. 어머니와 형님에게 코스모스(늦여름) 졸업을 말할 수 없었다. 83년 2월 나는 아침 일찍 학교로 가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받은 뒤 동기들 사이에서 졸업장 없는 졸업식을 했다. 지금 졸업 사진을 보면 혹여 어머니와 형님에게 들킬까 봐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있다.
83년 9월엔 입대 영장이 나오기도 했다. 연기되지 않으면 11월 군에 입대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마침 대구에 계셨고 병무청과 협의해 입대는 연기됐다.
덕분에 극적으로 84년 외무고시에 합격했고 연수를 받은 뒤 12월부터 외교부 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듬해 3월엔 군에 입대했다. 고시에 합격한 군 미필자는 군에 들어가야 했고 현역 대상이면 장교로 복무하게 돼 있었다.
영천 3사관학교에서 3개월, 광주 보병학교에서 4개월 등 훈련을 받는 7개월은 군 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 훈련 기간엔 외박과 면회가 제한돼 있어서다. 25세 젊은 가장이었던 나는 두고 온 아내와 갓 난 아들이 걱정됐다.
이후 임진강 근처 경기도 파주시 101여단 소대장으로 배치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나마 늘었다. 아내가 부대 인근에 집을 구했기에 가능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태어났다.
3년간 군 생활을 하며 배운 것도 많다. 북한이 바로 앞에 있으니 국가관, 안보관은 자연스럽게 생겼다.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사고도 갖게 됐다. 소대장으로 있으니 리더십도 절로 생겼다.
특히 안보와 외교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외교가 뚫리면 전쟁, 전쟁이 끝나면 안보를 위한 외교가 필요했다. 예견되는 위기를 찾아 예방하고 대응하며 관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군 생활을 하며 외교적 역량을 키운 셈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6) 군대와 의전과에서 경험, 외교관 임무 수행에 큰 도움
3년 군생활서 ‘위기관리와 예방’ 배우고
외교부로 복직 군에서 배운 것을 세분화
‘6개 프로세스’ 운용, 실전 통해 경험 쌓아
이양구(오른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1988년 군 제대 후 외교부에 복귀해 발령받은 의전과에서 동료들과 찍은 사진.
모든 환경은 나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는 순간 배울 게 있어서다. 관건은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느냐다.
나는 군대와 직장인 외교부라는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때의 배움이 훗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3년의 군 생활에서 학습한 건 위기관리와 예방이었다. 전쟁의 위기를 막는 최고의 방법은 예방이고 예방에 실패해 위기가 생기면 신속히 대응해야 했다.
당시 여단장인 김길부 장군이 알려준 게 있다. 시각화(Image War)였다. 끊임없이 위기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 이를 해결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린다면 실제 위기가 닥쳤을 때 적절한 방법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침공을 예방하지 못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예방과 대응이 아쉬운 이유였다.
외교부 의전과에서도 배움은 계속됐다. 의전과는 군 생활을 마치고 외교부로 복직하자마자 발령받은 부서였다. 그곳에서는 통상 ‘6개의 프로세스’로 크고 작은 행사를 추진했다.
나를 의전과로 부른 김하중 과장은 나보다 더 6개 프로세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김대중정부부터 MB정부까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중 대사, 통일부 장관까지 지낸 분이다.
6개 프로세스는 행사별 기본계획 구성, 업무분장·일정별 추진계획 수립, 체크리스트 작성,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컨틴전시 플랜, 행사 시나리오 작성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컨틴전시 플랜은 군대에서 배운 위기관리와 예방, 대응과 유사했다. 프로세스의 마지막은 컨트롤 포스트(CP)에서 행사 진행, 행사 후 잘한 것과 못 한 것을 돌아보는 사후평가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대통령 해외 순방, 수교기념 행사 등 대형 행사부터 작은 행사까지 6개 프로세스를 동일하게 적용했다. 1년간 같이 있으면서 김하중 과장을 부른 별칭이 있다. 타이거 김이다. 완벽주의인 데다 주말에도 야전침대에서 자며 일하는 분이었다. 그는 덜렁대는 나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걸 배웠다.
두 번째로 모시게 된 김광동 과장은 전임 김하중 과장과는 다른 선생님이었다. 브라질 대사를 지낸 김광동 과장은 예술가처럼 자유로움이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프랑스는 전쟁을 예술처럼, 독일은 공학처럼 한다는 말이다. 김광동 과장이 전자와 같은 분이었다.
그렇게 의전과에서 외교부 에이스인 두 분의 과장과 대통령 행사 등을 치르면서 세상의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다. 아울러 남들이 보는 나를 객관화하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배운 건 또 있다. 리더십이다. 리더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상황을 봐야 하며 전략적 전술적 사고를 해야 하는 자리다. 관심 있다고 리더십이 생기는 게 아니다. 실전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 역시 군과 외교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군과 의전과에서의 경험은 이후 해외에 나가 외교관으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지금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도 힘이 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7) 책·영화로 좋은 기억 있던 러시아… 가장 많은 인연 맺어
의전과 어학연수에서 선택한 러시아어
당시 비수교국이라 미국서 원어민 수업
한·소 정상회담 공식 의전으로 첫 임무
이양구(오른쪽) 우크라이나 전 대사는 1993년 주러시아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간 모스크바에서 주말이면 직원들과 함께 분위기 활성화를 위해 크로스컨트리를 했다.
외교관 생활을 하며 가장 많은 인연을 맺은 나라는 러시아다. 의전과에 있던 중 1989년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동기 20명 중 절반은 영어권, 나머지는 비영어권 국가로 가게 돼 있었다. 토플 성적순으로 언어권을 선택할 수 있는데 군 제대 1년밖에 되지 않으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언어가 러시아어였다.
당시는 소비에트 연방체제가 붕괴되기 전이지만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됐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만나지 못한 미국 등 서방 국가와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88서울올림픽에서 만난 직후였다. 한·소 수교 움직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러시아의 기억이 좋았다. 청소년기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책을 읽었다. 서울 중앙극장에서 본 영화 ‘닥터 지바고’는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였다.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소련과 수교 돼 있지 않아 러시아어는 미국에서 배웠다.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의 국방외국어대학교에선 전 세계 언어를 원어민에게 배울 수 있었다.
91년까지 러시아어를 배우는 와중에 역사적 장소에 불려가기도 했다. 언론은 90년 12월 13일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소련 공식 방문'이라고 기록했다. 나는 의전을 위해 미리 모스크바로 향했다. 6개월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한·소 정상회담에 참여한 데 이은 것이다.
겨울이 없는 미국 서부에 있다가 갔던 모스크바에서 눈에 들어온 건 자작나무와 눈 덮인 공항이었다. 낯선 풍경인데도 포근함을 느꼈다.
나는 차량 담당이었다. 수십 대 차를 움직여야 했고 운전기사도 관리했다. 도로는 돌발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만큼 무전기를 들고 철저히 준비했다. 운전기사에겐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주며 교제했다. 맥도날드는 그해 1월 모스크바 푸시킨 광장에 1호점 문을 열었다. 한 달 새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에게 정이 들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모스크바 꿈을 꿀 정도였다.
3년 6개월이 지난 93년, 주러시아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러시아 모스크바를 다시 찾았다. 2년 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지만 러시아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때로는 정부군이 국회의사당 내 공산당 저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발포할 정도였다.
군대와 의전과를 거치며 위기관리를 배웠고 이를 러시아에서 활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외교관 생활은 쉽지 않았다. 외교는 협상인데 똑같은 말도 다르게 해석했다. 오리발을 내밀기도 했다. 합의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협상에 나선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써야 했다. 외교부 직원들 사이에서 러시아는 아무리 잘해도 50점밖에 안 되는 나라였다.
그나마 수습이 되는 위기라면 다행인데 그게 안 되면 책임은 컸다. 러시아 대사 출신 외교부 장관이 3명이나 탄생했지만 반대로 러시아로 인해 물러난 외교부 장관도 3명이나 됐다. 러시아가 외교부 인사권자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왔다.
어려움 속에서 힘이 된 건 러시아에 오면서 시작한 큐티(말씀묵상)와 진심을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따뜻함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많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9) 교육부터 농업까지 배움의 시간 된 해외공관 생활
법·기회보다 능력 평등의 교육 시스템과
권리와 책임, 자유의 가치 경험한 프랑스
카자흐선 자원외교·농업 중요함 깨달아
이양구(왼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있으면서 평등과 권리, 책임의 가치를 경험했다. 이 전 대사가 파리 몽마르트르의 한 카페에서 아내,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배울 게 있다는 건 해외 공관 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프랑스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있을 때다. 프랑스에 대한 첫인상은 격하게 표현해 ‘개판’이었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G7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며 제국이 됐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교육에 그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프랑스는 능력의 평등을 법과 기회의 평등과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특히 교육은 개인의 역할과 실력에 맞는 옷을 입혀줬다. 엘리트는 그에 맞는 교육을 받았고 이들은 프랑스 행정과 경제를 이끌었다. 천편일률적 교육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주인은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 종들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맡기고 이를 극대화하는지 보는 게 성경의 메시지였다. 만약 주인이 능력에 상관없이 평등이라는 틀에 갇혀 동일하게 달란트를 맡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양성과 역동성은 죽을 수밖에 없고 발전의 동력마저 잃게 된다는 걸 알려 줬다.
프랑스에서 권리와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도 학습했다. 미국 워싱턴의 한국 전쟁 추모 공원에는 ‘프리덤 이즈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가 쓰여 있다. ‘자유에는 공짜가 없다’는 이 말은 권리와 책임이 같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자유와 방종이 구분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사회는 차별금지법, 동성애 합법 등을 두고 뜨겁다. 자유만 강조하기보다 이를 먼저 합법화한 프랑스 사례를 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2007년 카자흐스탄에서 3년간 있으면서 ‘전문가의 함정’도 경험했다. 전문가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 분야를 깊게 파는 전문가와 넓은 시야로 보는 전문가다. 객관성 있게 사안을 보려면 깊이와 너비의 시각이 만나야 한다. 그런데 카자흐스탄에선 깊이 파는 전문가의 의견만 수용하는 게 보였다.
MB정부 시절 자원외교가 활발했던 그때 유전 지대인 악타우에 갔다. 유전은 광구 지역 탐사, 광구 개발 그리고 생산 등 세 단계로 개발해야 한다. 먼저 지질학 등 전문가를 투입해 광구에서 석유가 얼마나 나올지 탐사한다. 최소 10년 걸리고 우리나라가 성공할 확률은 25%에 불과하다. 비용도 엄청나게 소요되는데 유전만 터진다면 말 그대로 ‘로또’다. 탐사를 마치면 광구를 개발하고 생산한다.
외국의 경우 광구 탐사부터 개발, 생산까지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가 우리와 달랐다. 협상 법률 지질 전문가 등이 팀을 이뤄 의견을 수렴하니 실수는 최소화했고 결정은 빨랐다. 덕분에 자원외교의 중요성과 방법을 알게 됐다.
카자흐스탄에서 중요성을 알게 된 건 또 있다. 바로 농업이다. 농업이 에너지 환경 바이오로 연결된다는 걸 현장에서 지켜봤고,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꿈꾸는 계기가 됐다. 지정학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농업과 실크로드 비전 등을 통해 이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할 때 실크로드 비전을 구상하며 구체화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0) “원하는 곳에 가라” 축복기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
은퇴 전 우즈벡 공관서 마지막 보내려다
갑작스러운 우크라 대사 제의에 고민
오정현 목사 기도에 흔들리던 결심 굳혀
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된 첫 해인 2016년 4월 이양구 전 대사가 오데사를 방문해 이 지역 자랑거리인 오페라 극장 앞 태극기를 단 대사 차량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015년 11월 하순의 일이다.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출근했더니 인사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갑작스럽게 우크라이나 대사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예정에 없던 인사를 진행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보자는 여럿인데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이 나를 추천했다고 전했다.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해외 공관장 자리로 생각한 곳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그곳에서 대우받으며 마무리할 줄 알았다.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뒤 지인 20여명에게 전화를 돌려 의견을 구했다. 10명 중 9명은 반대였다. 1년 전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 등 분쟁이 있었고 전쟁 가능성이 높아 외교관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공감했다.
그 와중에 다른 얘기를 한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김도현이라는 외교부 후배는 우즈벡이 골목대장만 할 수 있는 지역 무대라면 우크라이나는 세계정세를 좌우할 글로벌 무대라고 했다. 유라시아를 잘 아는 내가 가는 게 낫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들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서쪽은 우크라이나, 동쪽은 한반도를 꼽았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의 책 ‘그랜드 체스 보드’에서 우크라이나 없는 러시아는 절대 제국으로 부상할 수 없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쪽으로 가느냐, 서방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힘의 균형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도 했다.
나의 외교부 멘토이자 신앙의 멘토셨던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위험이 있는 곳에서 도전하며 섬기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두 사람의 말에 흔들리던 내가 결정적으로 결심을 굳힌 건 전날 있었던 일 때문이다. 사랑의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정현 목사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엔 나를 비롯해 외교부 출신 교회 성도들이 참석했다. 인사 시즌을 앞두고 있던 터라 저마다 인사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오 목사님은 나를 위해 “원하는 곳에 가라”며 축복기도를 했다. 축복기도까지 받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대사 제의가 들어왔으니 더 이상 재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싶었다.
우크라이나에 가기로 결심하면서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 먼저 외교와 외교관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다음은 강대국의 대외 정책을 파악한 뒤 우리가 생존,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을 찾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양국 관계를 가장 우호적으로 조성해 좋은 사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가기를 잘했다. 지정학 개념의 창시자인 할포드 맥킨더는 심장지대 이론(Heartland theory)에서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나라가 세계를 제패하고, 유라시아 심장부를 대표하는 나라가 유라시아를 대표한다고 했다. 유라시아 심장부는 동유럽이다. 나는 4000만명 이상의 인구,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우크라이나가 심장부 중의 심장부(Heartland of Heartland)라는 걸 알게 됐다.
2016년 3월 운명의 땅,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그리고 3년 2개월간 그곳에 있으면서 국제 정치를 협소하게 본 나의 시야는 넓어졌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1) 저평가된 우크라이나에 농업 실크로드 비전 구상
식량과 자원 많은 잠재력 있는 나라지만
지정학적 위험 이유로 대부분 투자 꺼려
주변국 농토 연결 인프라 투입 계획 세워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2018년 3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올해의 인물상’ 시상식에서 ‘2017 올해의 외교관상’을 수상한 뒤 아내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사로 간 우크라이나는 묘한 매력을 지닌 나라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2021년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다. 그런데 대사 시절 이 나라를 찾은 다른 나라 경제 관료나 기업인들은 2만 달러로 고평가하는 걸 봤다. 실제 우크라이나는 밀 보리 등이 자라는 곡창지대로 전 세계 식량 바구니라 불리는 데다, 철광석 티타늄 등 자원이 대거 매장된 자원 부국으로 잠재력을 갖춘 나라였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성실하고 착하면서 자존감이 높았다. 동양 사람을 존중했고 특히 한국 사람에겐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저평가되는 나라’라는 게 안타까웠지만 저평가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가적 위험과 지정학적 위험이었다. 부실한 법 제도, 고위급의 부정부패 등으로 국가 신용등급은 낮았고 러시아 등 위험 요소는 상존했다.
우리나라는 정부와 기업 모두 우크라이나에 대한 투자를 꺼렸다. 이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다른 선진국과 글로벌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투자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식과 이론만으로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다 보니 본부인 외교부도 싸울 무기는 주지 않고 알아서 싸우도록 했다. 결국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표적인 게 실크로드 비전이었다. 이 비전의 시작은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영국 작가 피터 홉커크의 책 ‘그레이트 게임’을 읽었고 지정학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책은 지정학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도 제국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줬다. 지정학을 공부했고 여기서 내린 결론은 총칼로 싸우던 군사제국주의 대신 경제제국주의 문화제국주의 구축이었다.
실크로드 비전은 경제와 문화제국주의를 합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 광활한 땅을 갖고 있는 국가의 토지를 연결해 농업의 실크로드를 만들면 스마트팜 빅데이터 유통 등 기술과 인프라를 투입해 멀티플 실크로드로 발전시키자는 구상이었다.
처음엔 ‘하늘에서 별 딴다’고 반응하던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노력을 우크라이나가 알아봤다. 2018년 현지 민간재단인 ‘올해의 인물’을 통해 ‘2017 올해의 외교관상’을 받았다. 턱시도 차림으로 드레스를 입은 아내와 함께 시상식장 레드카펫을 밟았다. 외교부 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대사 부임 후 2년 재임 기간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이 단체는 정부 간 경제협의체를 구성하고 문화·학술·스포츠 등의 행사를 개최해 양국 관계를 증진한 공로를 외교관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농업 프로젝트 추진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게 우크라이나 대사로 2019년 외교관의 삶을 마감했다. 가끔 사람들은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를 다닌 나에게 이런 질문을 건넨다.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고. 외교관이라면 어디를 가건 본분과 사명을 담아 그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나라라면 우크라이나라고 말한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지금 나에게 슬픔이고 아픔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2) ‘삼수’로 개입하신 하나님… 좌절보다 꿈 위해 도전
대입 ‘삼수’로 겸손의 자세 갖게 되고
서기관 ‘삼수’로 평생 신앙 초석 쌓아
원치 않던 IT분야, 인생 큰 변화 경험
이양구(가운데)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2002년 정보화 담당관 시절 정보화 전략계획 수립에 필요한 컨설턴트 등을 받기 위해 동료 직원들과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우크라이나 대사를 끝으로 외교관의 삶을 마무리했다. 돌이켜 보면 36년 외교관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 재수도 아닌 ‘삼수’다. 한 번에 된 적 없이 재시도를 되풀이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다 하나님이 ‘삼수’의 방법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셨음을 알게 됐다. 동료 백악관 직원들의 기도와 도움에 감동받아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전향한 찰스 콜슨은 자신의 책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역설적 진리를 얘기한다. 고난과 역경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역설적 진리가 위대한 삶을 살게 해 준다는 내용이다. 나 역시 삼수의 과정을 통해 전환점을 경험했다. 고난과 역경으로 더 강해졌고 겸손해졌다.
대학 입시부터 삼수의 삶이었다. 만약 세 번의 도전 끝에 서울대에 들어가 외무고시에 합격했다면 외교부의 주류가 됐을 거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고 나는 비주류가 됐다. 지금은 서울대 안 가기를 잘했다 싶다. 아니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다. 그 덕에 겸손의 자세를 갖게 됐고 차별화된 경쟁력을 쌓으려고 더 노력했다.
이미 얘기한 대로 1993년 러시아 공관에 서기관으로 간 것도 세 번째 도전만이다. 삼수의 시간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메시지를 발견했다. 다니엘서를 통해 평생 신앙의 중심과 초석을 쌓았다.
2002년엔 원하던 러시아 과장 대신 정보화 담당관으로 갔다. 서기관인 내가 차관에게 ‘내가 러시아 과장이 돼야 할 이유’를 설명하며 인사에 항의하는, 말도 안 되는 행동도 했다. 그제야 인사과장이 정보화 담당관으로 가 있으면 1년 뒤 러시아 과장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간 곳에서 인생의 큰 변화를 경험했다. IT의 ‘아이(I)’도 모르는 내가 외교부 정보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공부부터 했다. 기업을 찾아가 전문가 의견을 들었고 카이스트 전자정부 고위과정, 전국경제인연합회 리더십 과정 등 들을 수 있는 수업은 모두 들었다. 정보화 시스템이 잘 구축된 기관과 국제기구를 보려고 미국 프랑스 캐나다 영국 독일 벨기에 등을 찾아갔다. ‘개안(開眼)’이라는 말처럼 눈이 열리고 새 세계가 보였다.
2000쪽의 정보화 전략기획안은 정보화 시스템 구축에서 나아가 조직 전체의 혁신을 담았다. 훗날 들은 얘기가 있다. 기획안을 본 당시 기획관리실장은 “저 자식 맛이 간 거 아니야”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IT로 외교 정보화의 글로벌 리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2002년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가장 자신 없는 분야에서 즐겁게 일하니 자신감도 생겼다. 울면서 간 곳에서 웃으며 나왔다.
늘 고난이 있진 않았다. 관심 있고 잘할 수 있는 걸 찾기 위해 현재 국립외교원인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외국어 교육과에 자원했다. 6개월간 일하며 리더십과 외교 역량을 키우기도 했다.
꿈과 비전은 바로 생겨 이뤄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씨앗이 자라듯 꿈이 실현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좌절해선 안 된다. ‘삼수’의 과정은 꿈과 비전의 씨앗이 성장하듯 꿈을 위해 도전하면 된다는 걸 알려줬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3) 36년 외교관의 삶… 힘이 돼준 취미와 특기
만화 영화 등 취미, 세계로 시야 넓히고
등산 통한 리더십은 외교부 생활에 자산
‘지영학’으로 성경적 관점서 외교 바라봐
이양구(오른쪽 두 번째)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1992년 10월 자신이 리더로 있는 등산모임의 멤버들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외교부 생활을 하면서 의도치 않은 요소가 힘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취미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만화책으로 상상력을 키웠고 영화를 보며 세계로 시야를 넓혔다. 이는 외교관의 삶과 맞닿아 있었다.
또 다른 취미인 등산도 마찬가지였다. 등산은 가장 힘든 때 시작했다. 원치 않는 대학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힘들었고 정치적 상황도 불안정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였던 1980년 6월 고향 근처 지리산을 올랐다. 그때부터 힘들고 어려우면 산을 찾았고 이제는 취미가 됐다. 등산의 매력은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이다. 오를 때는 생각할 틈 없이 힘들고 정상에선 성취감이 있었다. 지난 4월엔 마흔한 번째로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등산은 외교부 안에서 특기가 됐다. 91년 미국 연수를 끝내고 복귀하니 외교부에 등산 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당시 외교정책기획실장이던 권병현 대사가 ‘산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리더로 낙점했다. 말이 좋아 리더이지 모임의 막내인 나는 일꾼이었다. 이후 권 대사는 외교부 안에서 나를 끌어주셨다. 이 모임을 통해 리더십도 배웠다. 지금도 권 대사는 나를 만날 때면 ‘리더십 있었던 막내’라며 높이 평가하신다.
외교부에 있으면서 특기도 생겼다. 거시적 시야다. 만약 은퇴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생각해 본다. 러시아, 우크라이나만 바라볼 일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서방 국가들이 한국의 입장을 눈여겨볼 게 분명했다.
국가 간 충돌을 이야기할 때 지정학 지경학과 함께 논해야 할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00년인가 모스크바 코스타 수련회에서 경북대 경제학 교수의 강의를 들은 뒤 떠올린 단어, ‘지영학’이다. 나는 성경적 관점에서 경제를 설명하던 그 교수처럼 성경적 관점에서 외교와 외교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종교가 그 나라의 가치관 국가관 세계관을 좌우할 수 있었다. 또 국가가 어떤 종교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를 나는 지영학이라 명명했다.
처절하게 자기 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배웠다. 88년 군 제대 후 발령받은 의전과에서 혹독하게 현업을 가르친 김하중 과장이 일본 참사관으로 갈 때다. 정부종합청사를 나서는 김 과장을 쫓아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답은 “이 친구야 잘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그 한 마디는 외교관 생활의 길라잡이가 됐다. 다시는 그 말을 듣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이후 어디를 가든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인정을 받으니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36년 외교관의 삶에 아쉬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2년 정보화 담당관 시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외교부 혁신을 2010년 다시 실행할 기회를 잡았다. 국장급인 외교부 조정기획관이 되면서다. 그러나 외교부 내부 상황으로 결국 혁신은 미완으로 끝났다. 2020년 1월 정년퇴임식 때 퇴임사에서도 아쉬움 중 하나로 꼽은 단어가 ‘혁신’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4) ‘농업전도사’ 삶 살며 농업을 최대의 미래산업으로…
카자흐서 지정학과 농업의 가치 재인식
에너지 환경 의료 물류 연결한 농업벨트
러시아와 우크라서 멀티 실크로드 확장
이양구(왼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광활한 우크라이나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 유엔 산하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해바라기씨유 수출국 1위다.
36년의 외교관 시절을 끝내고 나는 전도사가 됐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농업 전도사, 유라시아 전도사, 지속가능발전목표(SDG) 전도사가 됐다는 뜻이다.
농업 전도사란 말은 농림부가 나한테 한 말이고 유라시아 전도사는 2014년 한 경제지와 인터뷰를 한 뒤 기사에서 언급된 말이다. 그중 농업 전도사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인 함양에서 어머니 농사일을 도우며 자연의 변화를 경험했다. 철없던 시절 도시의 삶을 부러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자연 친화적 성품을 준 시골이 나에게 축복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 잊고 있던 농업의 가치를 다시 인식한 건 2007년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하면서다. 카자흐스탄의 농토는 한여름 밤 원두막에 앉아 망을 보던 수박밭과 큰 차이가 있었다. 워낙 광활하니 토지 단위부터 달랐다.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다. 40도 술이 아니면 술이라 말하지 말고, 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라 말하지 말며 4000㎞가 아니면 거리라고 말하지 말라. 나는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4만ha 땅이 아니면 땅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땅이 2만8000ha인 김제평야다.
카자흐스탄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구축한 프로젝트는 이름부터 남달랐다. ‘100만ha 프로젝트’다. 100만ha는 100억㎡이고 약 30억3000평이다.
카자흐스탄은 땅만 넓은 게 아니라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19~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두고 패권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렀다. 20세기 초 영국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동명의 소설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소설의 배경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이른바 탄(tan) 5개국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지정학에 눈을 뜨고 농업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면 농업의 실크로드 비전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한 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크라이나에서다.
농업을 에너지 환경 의료와 물류로 연결하는 멀티 실크로드로 확장시켰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대규모 영토가 있는 나라들을 연결해 농업 벨트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 우리나라는 AI 빅데이터 스마트팜 등 과학 기술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농산물을 가공해 부가가치를 올릴 뿐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 바이오, 물류 등 새로운 영역까지 연결할 수 있었다.
농업을 최고의 미래 산업으로 본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다. 대표적 인물이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 혁신국가로 만든 고(故) 시몬 페레스 대통령이다. 그는 “농업은 95%가 과학과 기술, 5%가 노동”이라고 했다.
요즘 들어 멀티 실크로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환경문제 등으로 식량 위기 우려가 나온 데다 최근 러시아가 전 세계 빵바구니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다. 멀티 실크로드의 축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재처럼 식량도 확보해야 하는 시대를 앞당긴 셈이 됐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5) 동북아 미래 달린 극동 러시아… 유라시아 비전 제시
북 중과 국경 맞대고 있는 지리적 요충지
안보와 미래자원 확보에 꼭 필요한 곳
개발 가능한 협력 방안·정책 정부에 건의
이양구(가운데)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2012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 시절 추코트카주를 방문했을 때 민속 극장에서 특별공연을 본 뒤 출연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유라시아 전도사의 비전을 키운 건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 7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에서 총영사로 있을 때다.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관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극동 러시아 8개 주를 관할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를 묶어 부르는 유라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중요하다. 유라시아 철도를 꿈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동쪽 끝이다. 러시아 국가 문장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장 속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는 러시아 전통의 계승과 중앙 권력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달리 해석된다. 독수리 머리가 각각 서쪽 유럽과 동쪽의 아시아를 바라보는데 동쪽 끝이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총영사를 자원한 건 단순히 블라디보스토크만의 지리적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미래에 극동 러시아가 중요하게 될 거라는 전략적 판단에서다. 먼저 극동 러시아는 북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안보 차원에서 우리나라에 중요하다.
‘FEW’라 불리는 미래자원 확보에도 필요한 곳이다. FEW는 현재도 미래도 중요 자원인 식량(Food) 에너지(Energy) 물(Water)의 앞글자를 조합한 용어다. 나는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 극동 러시아가 FEW를 확보할 수 있는 주요 지역이 될 거라 봤다. 기온이 올라가면 연해주 등은 지금의 한반도 기후가 되고 그러면 동토인 극동 시베리아에서 농사를 짓고 얼어붙어 활용하지 못했던 북극해가 물류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시베리아와 가까운 사할린 캄차카 등을 찾아 기후변화 정책을 고민했다.
역사적으로도 극동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의미 있는 곳이다.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가 많고 임시정부가 세워진 우수리스크도 있다. 많은 고려인들이 사는 연해주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상징적 장소였다.
이렇게 중요한 지역인데도 러시아는 극동 러시아를 개발할 여력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다. 대신 개발할 나라는 주변 국가뿐인데 중국이나 일본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한국이 개발에 적격이었다. 우리 정부도 관심을 기울였다. 총영사로 있던 시절 MB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해 삼각협력, 박근혜정부는 유라시안 이니셔티브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자연히 내가 할 일도 많아졌다. 남·북·러 삼각협력을 포함한 극동 러시아와의 다양한 협력 방안과 정책을 정부에 건의했다. 통일 문제를 보려고 북한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100여명의 국회의원들과 만나기도 했다. 201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는 의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모스크바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선 누가 대사고 누가 총영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은 길을 만들고 이를 보는 길라잡이이자 위험한 순간을 빠르게 알리는 경고자 역할을 한다. 북한의 나진, 중국의 훈춘과 연결된 ‘골든 트라이앵글’ 추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활용할 필요성도 생각했다. 북한이 안 한다고 손 놓지 말고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블라디보스토크를 이용하자는 얘기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6) SDGs는 하나님의 작품… 선교적 사명감 가져야
번영 평화 지구 사람 파트너십, 5P를
전 세계에 심을 수 있는 것이 SDGs
기독교인들이 SDGs 실천 앞장섰으면…
이양구(오른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2월 경상국립대에서 열린 ‘UN SDGs 및 ESG 기반의 지역상생 발전 모델 수립을 통한 글로벌 확산 및 상호 협력’을 위한 협약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0년 정년퇴임 후 농업, 유라시아 분야와 함께 내 삶에 터닝포인트가 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국제연합(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다.
인생의 전환점은 신앙을 갖게 되거나 사람을 만나고 고난을 겪을 때 찾아온다. 새로운 이슈나 어젠다를 만났을 때도 있다.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UN SDGs였다. SDGs란 UN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국제사회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해 세운 공동 목표다. 빈곤 질병 교육 등 인류의 보편적 문제와 환경문제, 경제·사회 문제 등 17개 분야를 채택했다.
나는 퇴임하고 잘 아는 인적자원(HR) 회사 대표를 통해 SDGs 참여를 권유받았다. 자비를 들여 HR과 비즈니스 등 두 개의 SDGs 마스터플랜도 만들었다. 이후 SDGs와 관련해 UN조달기구(UNOPS)와 활동하고 지역발전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경상국립대에 합류한 뒤로는 대학 차원의 SDGs 확산에도 힘썼다.
SDGs 전도사로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꼽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 먼저 솔루션이다. 한국은 일자리와 성장동력, 국가브랜드 제고 등 도전할 게 많다. 이를 해결해 줄 게 SDGs라는 얘기다.
한국에 SDGs가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국가 발전의 경험이 있는 데다 지금도 IT 의료 등 다양한 분야를 실험하고 있어 SDGs 노하우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국제 정세에서 미들 파워인 한국이 SDGs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미국 중국 등 글로벌 강국들은 SDGs를 시도해도 믿지 않는다. 최근 미국 주도로 한국과 일본 등이 참여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가 출범한 걸 두고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분명 미국은 ‘경제’라고 했는데 중국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미들 파워인 한국이 나서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한국은 SDGs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학자들은 서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한국을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화약고라 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한국이 SDGs를 이끌어야 하는 건 SDGs 실행 이유인 5P를 전 세계에 심을 수 있어서다. 5P는 번영(Prosperity) 평화(Peace) 지구(Planet) 사람(People) 파트너십(Partnership)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들면서 균형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SDGs를 하나님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5P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나눔과 섬김, 사회적 가치 등 성경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해관계가 다양한 UN 국가들이 어떻게 SDGs를 어젠다로 채택했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 기독인들이 선교적 사명감을 갖고 SDGs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최근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전후 재건에 SDGs를 접목하면 어떨까 싶다. 일단 UN에서 좋아할 것이고 러시아를 설득하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를 다룬다’는 외교와 SDGs는 묘한 교집합이 있다. 내가 SDGs 전도사가 된 이유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7) 오래 주재한 러시아·퇴직 근무지 우크라 전쟁 충격
러시아의 인류 보편가치에 대한 도전
완악한 바로의 모습에 푸틴이 오버랩
공산권을 변화시키려는 역사 깨달아
이양구(오른쪽 다섯 번째)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3월 6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우크라이나를 위한 연합 기도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은퇴 후 농업 전도사, 유라시아 전도사, SDGs 전도사로 살던 나는 지난 2월 24일 세상의 부름을 받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날 전 세계가 놀랐고 나 역시 놀랐다.
이전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은 있었지만 국지전 정도였지 전면전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출석하고 있는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께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가능한 지원 방안을 찾아 달라는 문자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외교관 생활을 가장 오래한 러시아와 외교관 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시대적인 크고 작은 사건을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성경적 관점에서 사건 사고를 보려고 했다. 작은 사건도 아닌 세계적인 사건이니 분명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나님의 빅픽처가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조금씩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초 러시아는 사나흘이면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점령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우크라이나의 결사 항전이 시작됐고 서방 국가의 지원이 계속 이어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자유 민주주의와 인류 보편 가치에 도전했다. 이는 성경적 가치에 도전한 것으로 연결됐다. 하나님이 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걸 알게 됐다. 우크라이나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이끄시면서 동시에 잠자고 있는 유럽을 깨웠다. 나는 하나님이 우크라이나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러시아로 확산시키는 것은 물론, 중국과 북한까지 확장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출애굽기 14장 말씀이 떠올랐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마주했다. 뒤에선 바로와 그 군사가 쫓아오는데 앞에는 홍해가 있었다. 바로를 보며 푸틴이 떠올랐다. 완악하게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바로의 모습에서 푸틴이 오버랩 됐다.
지난 3월 6일 사랑의교회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한 대규모 연합 기도회가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8분간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간증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하나님의 신적 개입이 있습니다. 바로처럼 푸틴 대통령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건을 잘 처리하면 홍해의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잘못 처리하면 아마겟돈의 서곡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또 우크라이나의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 역시 행동에 나섰다. 외교관 생활로 축적된 경험치를 십분 발휘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방송에 출연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알렸고 특강에 나섰으며 기고도 많이 했다. 3월 28일엔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도 발족했다.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전문가들과 우크라이나의 인도적 지원에 필요한 전략을 구상해 그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8)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제2 태안반도의 기적’ 구상
기름유출사고 때 보여준 한국교회 역량
국가발전 모델로 ‘리틀 코리아’ 꿈꾸는
우크라의 재건과 질서 정립 동참 기대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지난 3월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동부라이온스 클럽이 주최한 행사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우리 대응 전략’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36년간 녹아든 외교관 기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긴급 구호에 이어 다음 비전을 그렸다. 먼저 우크라이나의 전후 재건 사업이다. 전쟁 중 종전을 얘기한다는 게 뜬구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미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뉴마샬’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셜 계획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황폐화된 동맹국을 위해 미국이 계획한 재건, 원조 계획이다.
우크라이나도 국제 사회에 재건 방식을 제안했다. 각 나라가 특정 도시나 주를 전담, 재건하는 방식이다. 이미 영국은 키이우주, 벨기에는 니콜라예프시 재건을 고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우크라이나에 비극이지만 또 다른 미래를 그리게 하는 듯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이 나라에 전 세계가 관심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 재건 사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후 질서를 정립하는 데 동참할 수 있다. 나는 농업 전도사,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전도사로서 우크라이나 재건 그림을 그려봤다. 우크라이나가 한국을 국가 발전 모델로 삼고 있는 만큼 한 지역에 ‘리틀 코리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리나라의 역량을 고려해 정보통신기술 기반의 스마트도시 스마트공장 스마트농장 중심의 도시 재건이다. 정부와 공기업 민간기업 NGO가 팀 코리아를 구축하면 시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다. 1만명 평화봉사단 파견, 10만 서포터즈를 확보해 제2 태안반도의 기적을 만들자는 구상이다.
여기서 한국교회와 기독교 단체의 역할도 기대할 만하다. 2007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 때 한국교회가 보여준 사회적 기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고아와 노인 등 소외당한 이웃을 도왔던 한국교회의 역량이 우크라이나 재건에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았던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를 돕는 기회가 되는 동시에 전 세계 국가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우크라이나가 이상적인 전후 복구 모델이 됐으면 한다.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우리와 좋은 친구가 됐으면 한다. 우리나라는 최근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를 유럽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는데 이들보다 매력적인 나라가 우크라이나다. 내가 대사로 있을 때도 이미 유럽의 대기업들은 우크라이나에 생산 기지를 만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매력은 유럽 시장과 육로로 이동할 수 있고 유럽과는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관세 부담도 덜 수 있다는 점이다. 저렴한 인건비에 비해 IT 등 신기술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생산 물류 수출 기지로 매력적인 나라라고 생각했다. 제2의 베트남도 가능하다고 봤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는 곡물부터 원자재까지 원료 조달이 자체적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와의 협력이다. 푸틴 대통령 등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나쁘지 러시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 유라시아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는 러시아를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그들도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19)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장 든든한 지원군
남편 따라 낯선 외국서 제한적 생활하며
날 대신해 가정일 도맡은 아내의 노력과
늘 새로운 환경 적응해준 아이들에 감사
이양구(오른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믿음의 일가를 이룬 건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했다. 이 전 대사 부부와 세 자녀 부부, 손주 등 10명의 대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돌이켜보면 내 삶에 가장 든든한 힘이 된 건 가족이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고백한 게 있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아내에겐 늘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다. 외교관은 명암이 엇갈리는 삶을 산다.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한다는 좋은 점은 어둠이 되기도 했다. 아내는 그 명암의 삶을 나 때문에 함께했다. 아니 어둠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아내는 낯선 외국에서 단조롭고 제한적인 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가정에 신경을 못 쓰는 나를 대신했다.
1남 2녀, 세 아이의 아버지란 점도 감사한 일이다. 나는 유일하게 있었던 형님이 일찍 서울로 가면서 늘 혼자 집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결혼하면 자녀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지만 반대로 아이들은 외교관 아버지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전학을 밥 먹듯 했다. 말이 전학이지 나라를 옮겨 다녔다. 새로운 문화 언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아이들에게 생존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이해하며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해 줬다. 외교관 생활 36년 중 10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이마저도 이해했다.
그런 이유로 아내는 아이들을 미국 학교에 보낼까 고민하는 나에게 “떨어져 산 시간이 많고 돈도 없다”며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이들도 부모의 결정을 따랐고 모두 한국에서 학교에 다녔다.
무엇보다 믿음의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 지난해 막내딸이 결혼하면서 나는 10명의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결혼식장은 내가 1993년 열정을 갖고 성경 공부하던 국립외교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결혼식 인사말을 하며 아브라함의 5가지 축복을 말했다. 자녀와 땅의 약속,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약속, 하나님이 동행하겠다는 약속,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약속이다. 우리 가문이 이런 축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랑의교회를 만난 것도 하나님 은혜다. 사실 노마드처럼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사는 외교관에게 모 교회 개념은 없었다. 사랑의교회를 알게 된 건 모스크바행 도전이 연달아 실패하던 1993년이다. 그사이 살고 있던 집의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났다. 당분간 살 집을 구하던 중 지인인 한 교수님에게 옥한흠 목사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살 집이 정해졌다. 옥 목사님을 따라 교회 인근 집을 구했고 6개월 뒤 모스크바로 떠났다.
사랑의교회를 다시 만난 건 96년부터 미국 LA 총영사관에 근무할 때다. 출석하게 된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님이 지금의 사랑의교회 담임인 오정현 목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모 교회가 된 사랑의교회는 외교관의 역할을 존중해 줬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때부터 나를 전문인 선교사로 파송했다. 우크라이나 대사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신의 책 ‘영역 주권’에서 각자의 직업과 일이 선교라고 했다. 나 역시 외교는 선교였다. 덕분에 나는 전문인 선교사의 사명감으로 외교에 임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양구 (20·끝) 최선의 삶 기록 ‘백서’ ‘청서’… 주님 앞 당당히 설 수 있길
신앙은 인생의 근원과 가치 구분의 기준
하나님 통해 유라시아 꿈과 비전 키웠고
그 비전 실현하는 전도사의 사명 다할 것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선교적 사명으로 36년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믿음의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사진은 이 전 대사의 세 자녀와 사위 며느리가 그의 환갑 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만든 감사패.
‘역경의 열매’를 시작할 당시 다짐은 과거의 기억을 모아 ‘백서’를 적어보자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외교관이라는 소명을 평생 품고 살았고 하나님은 그 세월을 통해 내 마음에 유라시아라는 지역을 주셨으며 그 안에서 꿈 비전 아이디어를 키우게 하셨다. 현직에 있을 때 은퇴를 어떻게 준비할까 고민한 적이 있다. 고민의 답은 현직에 있을 때 잘해 은퇴 후에도 현직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민간인이지만 외교관 시절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지역과 그 지역을 향한 비전을 품고 일하는 걸 보면 은퇴 준비는 꽤 잘했나 싶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의 전후 복구를 비롯해 유라시아 지역의 꿈과 비전,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청서’를 기록하려고 한다. 농업 전도사, 유라시아 전도사,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전도사의 삶은 청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 같다.
SDGs와 농업을 통해 남북과 러시아를 넘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멀티 실크로드를 구축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무엇보다 한국은 실크로드의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희망한다. 숱한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거치며 많은 노하우도 축적됐다.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SDGs 로드맵도 구현하고 싶다. UN조달기구와 함께 2024년 남북한이 SDGs 엑스포를 공동 개최하는 상상도 해본다. 2024년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해엔 우리나라에서 2024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대회와 기독교 올림픽이라 하는 국제로잔대회가 열린다. 글로벌 빅 이벤트들이 한국에서 열리는 해에 남북이 함께하는 SDGs 엑스포를 추가하면 좋을 듯했다.
아울러 농업·유라시아·SDGs 전도사의 삶을 유라시아 복음의 전도사로 연결하고 싶다. 세계적인 국제 정세 분석가인 조지 프리드먼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년을 2011년에서 2020년이라 했지만 나는 2021년에서 2030년이라 봤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 기후변화 등 대전환기를 맞아서다. 격동의 시기엔 본질을 붙들어야 한다. 나는 그 본질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인생의 근원은 신앙이었고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도 신앙이었다. 신앙을 통해 돈 권력 명예의 가치 대신 나누고 섬기는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게 됐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인이 종에게 맡겨 놓은 달란트를 결산할 때처럼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 내 인생을 정산할 때 나는 고개를 들고 당당히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수 있겠느냐는 상상이다.
외교관 시절 해외 공관 임기를 마칠 때면 결산을 내는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결산의 방법은 복귀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모스크바 근무를 마치고 비행기를 탔을 때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임기를 마치고 비행기를 탔을 때도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우크라이나 대사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뿌듯함을 느꼈다는 건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만 했어도 큰 후회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선 혹은 차선의 삶을 기록한 백서와 앞날을 기록할 청서는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의 결산을 위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