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야기의 전편은 [그의 사고방식]입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 불안감이 살짝 들어서 소개했습니다.
** 다소 거친 표현들은 살포시 용서해주세요.
D.Gray-Man parody
[ Noah Allen + Tikky ]
story by. 이랑
악마의 방문
―티키경 편―
신체포기각서-그것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빚을 졌을 때 그 빚 대신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으로 질 나쁜 사채업자들이 빚을 재때에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서명하도록 강요하는 무서운 각서다. 여기에 서명한 것이 여자인 경우는 사창가로 팔리거나 돈 많은 귀족의 후처로 팔려가기도 하고 남자인 경우는 각 신체 장기를 떼어버리거나 탄광이나 오지같은 곳에 팔려간다. 한마디로 지옥으로 가는 열차 티켓과도 같은 것이 바로 이 신체포기각서였다.
그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머리카락 색과 동일한 은회색 눈동자의 소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악덕 사채업자들이나 지니고 있을 법한 이 무시무시한 각서를 왜 어린 소년이 들고 있는 것일까. 소년은 그런 궁금증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명란에 휘갈겨진 주저한 흔적이 보이는 서명을 보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 Lavi
아마도 사채업자의 횡포에 걸려든 불우한 사람의 이름인 모양이다. 소년은 각서를 곱게 접어 품 안에 집어 넣고는 가볍게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팔을 벌리며 발을 떼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무렇게나 정리한 짧은 검은 머리 소녀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발랄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알렌, 백작의 호출이야.”
소녀는 소년, 아니 알렌의 목에 매달리며 그의 하얀 뺨에 입술을 맞춘다. 알렌은 소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입술이 알렌의 붉은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는 소녀는 손에 들고 있는 잔소리쟁이 우산을 뱅글 뱅글 돌리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두운 복도로 떠밀려진 알렌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갔다.
어느새 그의 곁에 체크 무늬가 새겨진 문이 나타났다. 알렌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세게 밀었다. 어두운 복도와 달리 문 안쪽은 공중을 부양하는 수많은 촛불덕분에 미세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에 몸집이 커다란 남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서 스웨터를 뜨고 있는 모양이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던 알렌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스웨터의 끝에 『Allen Worker』라고 붉은 색실로 새겨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샛노란 색 바탕에 붉은 글씨라니-알렌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 만약 백작이 저 스웨터를 선물로 준다면 절대로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서 와요, 워커군♡”
백작은 뜨고 있던 것을 옆으로 황급히 숨기며 알렌을 돌아보았다. 작게 헛기침을 하고 금새 미소를 띈 얼굴로 표정을 고친 알렌은 정중하게 백작에게 허리를 굽히며 앞으로 다가갔다. 백작의 커다란 몸 뒤에 숨겼음에도 여전히 미완성인 스웨터의 끝자락이 보인다. 알렌은 그것을 애써 못 본 척 외면하며 맞은편 자리에 놓여 있는 하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막 다리를 꼬고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를 안경 너머로 살핀 백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건 임무가 아닙니다♡”
“........ 미리 말씀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워커군은 제가 입을 열자 마자 비용 계산을 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알렌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수행 중이라는 티키경을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전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손버릇 나쁜 떠돌이가 무슨 수행인지는 모르지만, 알아서 돌아올 겁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천년공.”
“지난 번에 워커군이 실패한 임무를 맡기고 싶어서 찾는 겁니다♡”
“실패라뇨, 별로 듣기 안 좋습니다. 그저 그와 난 상호 협정을 맺은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내 먹이에 손을 대는 건 댓가가 좀 많이 비쌀 겁니다, 천년공.”
실패라는 단어에 알렌이 묘하게 신경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계약 위반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작성된 공증된 계약서에는 계약 위반 시, 4배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때문에 임무에 실패하면 미리 받은 선금을 물론이고 계약금의 4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위약금으로 백작에게 내야 했다. 한푼이라도 더 주머니에 채워넣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리는 그에겐 최악의 상황이다.
물론 지난 번에는 대출혈을 감수하고 계약을 위반해야 했다. 위약금 4배보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어드벤타지가 조금 더 크다는 계산에서 내린 결단이었지만,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갈 때는 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만큼 괴로워서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제 일을 방해하시겠다는 겁니까, 워커군?♡”
“내 먹이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난 아직 천년공의 모든 계획에 동의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부디 날 당신의 부하정도 따위로 생각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 시선을 부담스럽게 하는 백작의 뒤에 숨겨진 스웨터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런 그의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백작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돌아 나가는 그의 등을 배웅했다.
방을 나온 알렌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샛노란색에 붉은 색 글씨라니, 최악이다-!! 백작은 10살 꼬마도 입지 않을 저런 스웨터를 자신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알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를 여러번 흔들고 나자 머릿속에서 스웨터의 악몽이 조금 걷힌 것 같았다.
“뭐, 할 일도 없으니 한번 찾으러 가볼까?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도 좀 해주고.”
백작에겐 시큰둥하게 이야기했지만 알렌 역시 티키의 존재가 신경이 쓰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는 커다란 방에서 잔소리쟁이 우산인 레로와 놀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 로드에게 인사를 하고 가볍게 길을 떠났다. 로드가 팔을 흔들며 알렌의 등 뒤에 소리를 치며 인사했다.
“돌아올 때 막대 사탕 많이 사와!!!!”
검은 비로드 자켓과 보석 장식이 된 단추, 단정한 검은 실크 넥타이, 자켓 목덜미를 덮는 고고한 은회색 머리카락의 알렌은 어디서나 시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녹주석을 깍아 만든 셔츠의 단추를 매만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을에 나온 지는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난 임무에서 백작에게 거액의 위약금을 물고 난 뒤로 잠시 신경성 위괘양을 앓았기 때문에 자택에서 요양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요양 중에 로드의 놀아달라는 공격을 받아 좀처럼 쉽게 쉴 수 없긴 했지만.
알렌은 오랜만에 느끼는 인간들의 거리를 흠뻑 즐기며 번화한 상점가의 외곽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상인들의 호객행위 소리가 멀어져가자 술 냄새가 섞인 담배 냄새와 짙은 화장품 냄새가 풍기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투명한 은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떼는 알렌의 앞에 덩치가 큰 사내가 길을 막아 섰다.
“여긴 꼬마들이 오는 곳이 아니야!”
“누가 꼬마라는 겁니까? 이렇게 보여도 15살이나 먹었습니다.”
15세라면 충분히 어리다. 하지만 알렌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없었다.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알렌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밀어내려했다. 순간, 알렌의 왼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붉은 빛이 감도는 왼손이 남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내는 비명과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알렌은 움켜쥐고 있던 사내의 팔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 붙이고는 냉소적인 미소를 얼굴에 담았다.
“누가 꼬마라는 겁니까?”
“드, 들어가십시오.”
사내의 행동이 고분고분해졌다. 이런 세계에서는 대개 폭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불가 15세인 알렌 워커는 그것을 3년 전인 12세 때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방해할 것이 없는 거리를 휘적거리며 걸어들어갔다. 거리 안 쪽 곳곳에는 홍등이 걸려 있었고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음에도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허벅지를 드러낸 체 남자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알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조금 더 깊숙이로 걸음을 옮겼다. 짙은 화장냄새가 담배냄새에 묻혀 느끼는 것 조차 힘들어 질 때 쯤, 알렌은 익숙한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그것은 카드를 섞는 소리였다. 그는 무의식 중에 그 소리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한 자리를 차지 하고 앉아 이미 한 번의 게임을 끝내버린 상태였다.
알렌은 오픈된 제 패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Four Card, 오랜만의 실전 경기였지만 아직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기량이 발전한 것 같았다. 카드를 섞는 동안, 자신이 필요한 카드를 재빨리 숨길 수 있는 속임수라던가,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쓸모없는 패를 버리고 다른 패로 갈아 치우는 속임수라던가, 그리고 쓰레기같은 패를 들고도 허세를 부릴 수 있는 배짱까지도. 알렌은 마지막 판를 ‘Q 풀하우스’로 이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중년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덤벼들었다.
“포커는 어디까지나 실력과 운, 그리고 배짱입니다.”
알렌은 포커에서 와일드 카드로 가끔 사용되는 조커를 흔들며 그 자리를 떴다.
도박장은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고급 비로드 자켓에까지 그 매캐한 냄새가 베어버린 느낌에 알렌은 옷깃을 잡아당겨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이미 담배 냄새에 익숙해진 후각은 좀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 괜찮은 판을 찾아 헤매던 알렌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티키경,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이런 워커군이 여긴 무슨 일이지?”
수행 중이었다면서 여기였던 건가, 여태까지 티키의 수행 내용을 몰랐던 알렌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자신과의 게임에서 백이면 백 전부 졌던 것이 억울하긴 했던 모양이다. 카드를 섞던 티키는 잠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알렌을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깊이 생각해보면 알렌이 도박장에 있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참새는 방아갓을 그냥 못 지나가니까, 하지만 어째서 자신과 같은 곳에 있는지 티키는 이 이상한 우연에 의아해했다.
“수행 중인 티키경을 잡아오라는 천년공의 특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보수는 티키경에게 받으라고 하시던데요?”
“뭐!!!”
지독하게 자원봉사를 싫어하는 알렌이었다. 물론 백작은 그런 말은 일절 한 적도 없지만 티키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를 터였다. 알렌은 투덜거리는 티키의 옆 자리에 허리를 붙이고 앉았다. 마치 한 판 끼려는 분위기다. 그 모습에 티키는 금새 경악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련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여러 상대를 이겨왔지만 아직 이 타짜 소년과 붙을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알렌은 뒤로 주춤하는 그에게 싱긋 웃으며 자리를 권한다.
“멤버가 3명이신 것 같아서, 꼈는데 괜찮죠?”
“아, 방금 한 친구가 빠져서 말이야. 그 친구 올인이었지, 아마?”
“그러게. 믹군, 자네에게 완전히 다 털렸어.”
현재 탈모가 진행 중인 듯한 남자와 챙이 좁은 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웃는 소리를 내며 알렌의 참가를 환영하는 듯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어쩔 수 없이 티키 역시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카드를 섞었다. 카드가 각자에게 돌아가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유쾌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져서 자신의 패에 집중한다. 서로 곁눈질을 하며 상대방의 패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알렌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어린 꼬마가 겁 없이 카드판에 끼어든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힐끔거리며 제 카드를 살피는 티키는 불안감에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알렌은 그러한 와중에 이미 제 카드를 ‘ 로얄 스트레이트 플래시’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스페이드 모양의 A,K,Q,J,10이 쭉 연결된 모양. 그것은 거의 예술의 경지다.
“우와- 저 운이 좋은가 봐요.”
카드를 오픈한 후, 알렌이 던진 말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패에 상대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티키는 여전히 순진한 척 하고 있는 알렌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그 시커먼 속을 있는대로 다 경험한 그로서는 알렌의 순진하기만 한 표정이 오히려 가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판의 카드 게임이 진행되었고 그 때마다 알렌은 ‘운 좋게’ 승리를 차지하며 그 판을 싹쓸이 해나갔다. 결국 별 생각없이 이 타짜 소년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과 함께 일어나려던 티키를 알렌이 붙잡았다.
“티키경을 찾아다니느라 쓴 경비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영수증 첨부했으니까 확인하고 정산해주세요. 그리고 가족의 정을 생각해서 보수는 받지 않을께요. 제발 천년공의 속 좀 그만 썩이고 돌아오세요.”
알렌에게서 두둑한 종이를 받아든 티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의 속을 썩인다는 건지, 이것이야 말로 사돈 남 말한다고 하나. 어쨌든, 넘겨진 종이 뭉치를 넘기던 티키는 맨 마지막 장에 적혀진 어마어마한 금액에 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금액의 절반 이상은 위조된 영수증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차릴 리 만무하다. 망연자실하게 자릿수조차 파악하기 힘든 숫자를, 티키는 그저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천연덕스럽게 우유를 빨대로 빨아 넘기고 있는 알렌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은 모습은 영락없이 15세의 소년이다.
“티키경이라면 요정같은 곳에 은거하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 저기 좀 다녔더니, 금액이 많이 들었네요. 어떤 수행인지 미리 말씀하셨으면 경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아니, 애당초 레슨비만 재대로 챙겨주셨으면 제가 수제자로 키워드릴 수도 있었는데 왜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건지 의문이네요.”
“이봐, 알렌. 가족인데 좀 깍아주면 안되나?”
“가족의 정을 생각해서 보수는 받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경비문제는..... 천년공에게 언젠가 했던 말인데, 티키경에게도 해드릴까요? ”
우유를 다 마셨는지, 빨대를 가지고 장난을 치던 알렌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던 티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언젠가 알렌과의 포커 게임에서 호되게 졌을 때 팬티까지 벗겨지지 않았던가. 가족과 게임하면서 팬티까지 벗겨가는 녀석은 이 녀석 뿐일 것이다. 티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한 48계월 할부는 안될까?”
“할부는 이자가 붙지만, 이번엔 특별히 감해드릴께요. 대신 다음에 딴 소리 안 하게 계약서에 서명이나 하세요.”
울며 겨자먹기로 이 엄청난 금액을 4년 안에 갚겠다는 계약서를 쓴 뒤, 티키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곳에서 알렌은 만난 것은 정말 악운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라도 만난 것은 다행이려나- 경비가 더 늘어났다면 4년은 고사하고 10년간은 이 사채업자 꼬맹이에게 온갖 구박을 당하고 살지도 모른다. 순간, 한기에 온 몸이 떨렸다.
만족스러운 듯 계약서를 접어 품 안에 집어 넣은 알렌은 피식 웃었다. 조금의 의심없이 그 큰 금액을 떠맡는 티키의 순진한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난달까. 향후 4년간은 아무런 문제없이 고정수입이 생긴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알렌은 담배 냄새로 지끈거리던 머리가 싹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테니,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돌아오세요. 만약 제가 또 찾으러 나와야 하는 일이 생기면 분명히 경비가 늘어난다구요.”
“아, 알았어.”
티키는 뜨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경비가 늘어나는 건 절대로 안된다. 그는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알렌과 함께 도박장을 나왔다. 예쁜 아가씨들의 손짓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걸어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곧장 백작에게로 돌아갈 모양인 것 같았다. 그 뒤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어쨌든 이미 계약서는 깨끗하게 티키 믹경의 필체로 작성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알렌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않는 이상, 티키는 그저 그 거액을 얌전히 갚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갑자기 떠안게 된 거액의 빚에 대한 충격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티키에게 갑자기 걸음을 멈춘 알렌이 말을 걸었다.
“참, 상환일은 어기지 마세요. 분명히 계약서에는 어길 시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될 꺼라고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못난이 쌍둥이처럼 나중에 날 못된 사람 만들지 말고요.”
재대로 읽지 않고 대충 서명을 해버린 계약서에는 정말 그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맨 가장 자리에 다른 글씨들의 절반만한 크기로 적혀 있었지만 어쨌든 적혀 있긴 했다.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상황마다 다르지만, 못난이 쌍둥이는 한 일주일동안 내 전용 장난감 말신세가 되었습니다만.”
“말?”
“네, 말이요. 그 때 내가 기분이 정말 안 좋았거든요. 아마 쌍둥이의 무릎이 다 까질 때까지 타고 다녔던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 로드랑 같이 말이죠.”
티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기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알렌과 로드를 등을 태우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쌍둥이를 생각하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는 애써 헛기침으로 표정으로 감추며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서 만약 내가 상환일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질문을 던지고 나서 문득 알렌의 표정을 살핀 티키는 숨을 꿀꺽 삼켰다. 건들여서는 안되는 것을,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댄 느낌이었다. 알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티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가만히 흝어 보았다.
“그럼 얌전히 내 침대 위에서 다리나 벌려 주세요.”
그냥 건달들이나 흉악한 사채업자들의 입에서 나왔어도 입이 쩍 벌어질만한 이야기가 15세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가진 소년의 입에서 쏟아졌다. 티키는 턱이 빠진 사람처럼, ‘알았죠?’하고 묻는 듯한 알렌의 생긋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어, 어이....... 알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알만큼 아는 사람이 무슨 순진한 척이예요? 어쩌면 티키경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역시 무릎이 까질 정도로 말 노릇을 시킬지도 모르죠. 참, 도망갈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말아요. 그 때는 가족이고 뭐고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뼈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어버릴 테니까.”
하얗고 순진한 얼굴로 내뱉는 대사가 어째서 오싹오싹하다. 티키는 숨을 꼴깍 삼키며 목이 갑갑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렀다. 알렌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제발 가족끼리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티키경.”
이럴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해야 끄덕끄덕. 알렌은 굳어버린 티키의 얼굴을 툭툭 치며 상쾌하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알렌에게 팔을 꺽였던 남자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 곳에서 알렌은 티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듯 허리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 순진한 얼굴로 어둠의 말들을 내뱉는 알렌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티키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거리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럼 이젠 내 사랑스러운 장난감이나 보러 갈까요.”
두둑해진 주머니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알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후기
1. 사채업자에서 사기꾼으로 진화한 알렌군입니다.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모양이....... 사채업에, 사기도박에, 그것도 부족해서 이젠 영수증 위조까지. 위험 수위를 오가는 중이네요. 하하;;
2. 이야기가 살짝 알렌 x 티키 풍으로 흘러가려고 했었습니다. 뭐, 언젠가 악마같은 알렌에게 뼈까지 잘근잘근 씹히는 티키경이 엉엉 우는 걸 볼 수 있을지도요. 사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지만요.
티키경이 부디 상환일을 까먹지 않게 잘 지켜서 알렌에게 이런 저런 일을 당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명복을 빌어요, 티키경.
3. 타짜 알렌, 정말 좋아하는 편입니다. 올인 만세!!!
4. 사실 눈토끼쓰다가 전부 날아가서 완전 기분 다운입니다. 기분 전환 좀 하려고 썼는데, 티키경에겐 사실 조금 죄송합니다.
** 라비편은.... 차후 계속?!
첫댓글 저도 타짜알렌 꽤 좋아합니다, 올인만세!!
카르테님 안녕하세요! 저도 올인 만세!! 알렌의 타짜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인의 슬픔을 안고 일어서야 했을까요? 아무렇지 않게 옷까지 받아 챙기는 알렌이니 그 사정 다 알만합니다만. 감상 감사합니다.
우왓 알렌티키는 처음봅니다 /ㅂ/ !!! 기대할게요오 ~
수이님 안녕하세요. 저도 알렌티키는 처음입니다. 사실 쓰면서도 '이런 극악 마이너같으니'라고 자신을 잘근잘근 씹으며 썼습니다. 그래도 기분 전환은 캡이었습니다. 하하하! 감상 감사합니다.
와앗, 이런 알렌~너무 좋아요☆ 블랙알렌도 꽤나 오묘한 맛이 있네요, 쩝쩝<응? 그의 사고방식 찾느라 애좀 먹었어요, 이참에 아예 이랑님 소설을 쫘악ㅡ훑을 생각입니다!! 라비편 기대할게요!!
다크님 안녕하세요. 아, 그의 사고방식(제가 위에 잘못 써두었군요..;;)... 좀 오래된 글이죠. 저야 뭐, 언제나 어두운 알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 그래도 라비편에서는 조금은 착해진 알렌으로 돌아와주지 않을까 싶은 약간의 희망이 있습니다. 감상 감사합니다.
우후후후// 얌전히 다리를 *려달라니(발그레) 사실 티키수도 싫어하지 않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라비편이 차후에 계속된다니.. 기대하겠습니다(번뜩)
제뉴얼님, 그러게 제가 좀 말이 험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사실 그것도 많이 순화시켰어요. (원래는 좀 더 천박했...;;) 티키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마이너과에 속하죠. 뭐, 제가 원래 그런 어둠에 묻힌 쪽을 좋아합니다만. 그래도 싫어하지 않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후의 라비편에서 다시 뵐께요. (과연?) 감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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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아하브님 안녕하세요. 에, 은근히 '개그로 가볼까'하고 여기저기 개그포인트를 집어 넣었는데, 아무래도 알렌의 그 대사가 많이 쇼킹했던 모양입니다. 후후- 저도 티키알렌이라면 별려 안 땡기는데 알렌티키라면 막 땡기더라구요. 저 역시 어둠의 자식인 겁니다. 감상 감사드려요.
블로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악 알렌 너무 좋아요. 이대로 가는 겁니다.
아스르님, 이대로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볼까봐요. 이젠 사채업자에 사기도박꾼에 사기꾼에.... 살인은 좀 그러니까 도둑질까지만 해볼까요? 괴도 알렌 탄생!!!(목표물 1호는 겁에 질린 토끼 한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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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es님 안녕하세요. 3년 가까이 험한 방랑생활만 한 알렌이니, 어디서든 건강하죠.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삼촌뻘인 티키의 등까지 쳐 먹고. 뭐, 사기당안 티키도 잘못입니다만. 알 거 다 아는 우리 티키 삼촌도 어벙벙하게 만들었는데 순진하고 귀여운 라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알렌의 블랙 수위를 조절해야 할 듯.... 싶어요. 감상 감사드립니다.
와악!!!! 알티키다!!!! (감격의연속피토[?) 우후후후후... 이랑님, 정말로 사랑해요오- 막 쓰시는 글마다 제 취향이고..(피토) 그나저나, 알렌의 장난감은 깜찍한 주황토끼인가요. (오호호) 아무튼, 라비편을 기다하겠어요. 하악하악. 랄카, 쓰던게 날아간다니... 그런 캐안습적인 말이....!!!! 저도 당해봐서 잘알아요...(엉엉) 아무튼, 열심히 하세요!!
안녕하세요, 읍강님. (읍강이라면 태상노군의 따님???)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드릴 뿐이죠. 알렌의 장난감은 이전 이야기에서 이미 '라비'라고 결정되어버렸어요. 귀여운 주황토끼인 거죠. 슬슬 토끼사냥(!)도 준비를... 아, 쓰던 글이 날아가면 정말 슬퍼요. 제 마음까지 날아간다니까요. 흑흑- 감상 감사드립니다.
헉헉 이랑님, 알렌티키가 좋아지려고 해요.............스웨터를 뜨는 천년공에서는 정말 웃다 넘어갔습니다ㅎㅎ 라비편도 기대만빵입니다!! 힘내세요 이랑님!
coral reef님, 알렌티키요. 저도 막 좋아지려고 하더라구요. 예전엔 그래도 이왕이면 티키알렌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그것도 바가지긁는 알렌과 비굴한 남편 티키..랄까요?) 취향은 변하는 겁니다. 천년공의 스웨터는 저도 절대 입기 싫을 것 같아요. 아마 그 선물 받으면 로드만 입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감상 감사드립니다.
티키수버닝한지 하루만에 이런 걸작을만났군요, 감사합니다.
재빵님 안녕하세요. 아, 티키수 좋아하시는군요. 사실 티키수는 별로 없죠. 저도 꽤 오래 디그레 좋아했었지만 정말 하나도 못 봤어요.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우오오- !!!!! 노알티키 !!! 사랑해요 님 !!!!! (어라.<<<) 하아하아하아 ㅜㅜㅜㅜㅜㅜ 알렌 대사 하나하나가 진짜 마음에 들어요 !! 이런 긁강분 ㅜㅜㅜㅜ 내 마음에 불을 지르셨슴 <<
블랑즈님 안녕하세요. 더 이상 다크해질 수도 없는 알렌군의 대사에, 즐거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치만 실제 알렌군은 이런 아이가 아니니까요. 퓨어군도 예뻐해줘야 할텐데 말이죠. 자꾸 다크군이 땡기는 건 제 성격의 문제(?)... 흐흐, 감상 감사드립니다.
노,노알티키…아름답군요. 아름다워요 . [눈물질질] 칸다티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 헐 , 아냐 , 그럴 수는 없어 . 안돼 . 티키는 영원한 공이라고 !!! " 라고 외친지가 바로 엊그저께 같은데 , 만나버렸습니다 . 노알티키를 . 있을 수 있군요 . 티키수가 . 그것도 이렇게 ……어우 , 어떡해요 . [마구 얼굴붉히며 수줍게 벽 주먹으로 쾅쾅 치기] 잘 보고 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