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우리 동창회에는 단짝이 여럿 있다. 단짝은 항상 붙어 다닌다. 어제 진섭이네 혼사에서 후선이가 등장한 것을 보고, 나는 창우도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 동창회에는 모르긴 몰라도 맞수도 여럿 있을 것이다. 맞수는 앙숙과는 다른 것이다. 맞수, 즉 라이벌은 경쟁 상대요, 비교 대상이다. 라이벌이 앙숙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라이벌이면서 단짝인 경우도 많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라이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동창회 이야기는 아니다.
어제 나는 두 군데 결혼식에 참석했다. 다른 한 군데는 윤씨(尹氏)네 결혼식이었다. 윤씨네는 4남 2녀였는데, 장남이 몇 해 전에 타계하여서 이제 3남 2녀가 되어있다. 나는 셋째 아들인 영선이형 옆 자리에 앉았는데, 이 형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우리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보다 더 가까운 집안의 사람이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맞는 말이다. 나는 어제 폐백까지 받았다. 예전에는 우리 할머니 임송출 여사가 이 집안의 혼례에서 폐백을 받곤 하셨다. 나는 3남 2녀와 나란히 앉아 조카뻘이 되는 신랑과 그의 신부가 바치는 절과 술을 받고 덕담까지 해주었다.
영선이형이 내 라이벌이냐고? 아니다. 우선, 이 양반은 나보다 네 살이나 위다. 그리고 이 양반은 누구의 라이벌이 되거나 누구를 라이벌로 삼을,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천하의 호인으로,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은 양성하지 않음’이라고 얼굴에 쓰고 다닌다. 옛날 옛적의 영화배우 중에 추석양이라고 있는데, 그 마스크를 조금 부풀리면 영락없이 이 양반 얼굴이 된다. 많이 맞았다. 자기의 작은 형한테서 말이다. 나는 어릴 적에, 이 양반이 자기 형한테 쥐어 박히거나 물건을 빼앗기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 양반, 자기 동생을 때린 적은 없다. 그 동생은 이름은 영훈이다. 윤씨 집안 막내다. 나하고 동갑이다. 폐백을 받을 때 나는 오른 쪽 끝에 앉았고 영훈이는 왼 쪽 끝에 앉았다.
그것은, 폐백실에서 영훈이가 나에게 “너희는 정년이 몇 살까지지? 65세라고 했던가?”라고 물었던 때였던 것 같다. 아니, “너희 작은 아이는 어디 다닌다고 했지?”라고 물었던 때였던 것 같다. 바로 그 때, 이 친구, 아직도 나한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가, 곧바로, 아, 나에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내가 아직도 저 친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이 라이벌들을 모두 용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은 워낙 유서 깊은 것이기 때문이고, 또 이들에게 유서 깊은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것은 이들 탓만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예컨대 “영훈이는 그렇게 잘 씻는다는데, 우리 영태는 왜 이 모양이니”라는 식의 말을 예사로 하곤 하였다. 어른들은 때로 “영태는 숙제를 다 해 놓고 논다는데”와 같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날조하기도 하였다. 아예 노골적으로 싸움을 붙이기도 하였다. 윤씨 집안 둘째 형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권투 글러브를 갖고 와서는 우리 둘에게 끼워주고 스파링을 시켰다. 그 때 우리는 초등학교 학생이었는데, 시키는 대로 해봤자 우리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정도는 분명하게 알았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달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큰 누나는 더 악질이었다. 이 누나는 우리의 신장이 성장을 완료할 때까지, 그러니까 수 년간에 걸쳐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키를 비교해 보자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누나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가 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엎치락뒤치락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영훈이가 이겼다. 177 대 175.
몸을 쓰는 일이나 노는 일에서는 대체로 영훈이가 앞서는 편이었다. 형들과 누나들이 많으니 그랬겠지만, 영훈이는 각종 운동과 각종 놀이를 나보다 먼저 배웠으며, 그것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면 중학교 때였을텐데, 영훈이는 청량리 대왕코너 안에 있는 오락실로 나를 대리고 갔다. 거기에서는 테이블 축구나 테이블 하키 같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영훈이는 나에게 푸쉬-핀도 가르쳐주었다. 내가 서울운동장 수영장에 처음으로 간 것도 영훈이를 따라서 간 것이었다. 기타 실력은 내가 나았던 것 같지만, 탁구도 영훈이가 더 잘 쳤고, 우표도 영훈이가 더 많이 모았던 것 같다.
하마터면 영훈이가 우리 동창이 될 뻔하였다. 나와 영훈이는 나란히 홍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란히 일차 시험에서 떨어진 후 경희중학교 입학시험에 나란히 응시하였기 때문이다. 합격자 발표를 보고 오는 길에 우리는 경희대 입구에 있는 1번 종점에서 떡볶이를 사먹었다. 영훈이는 재수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입학시험이 폐지되었다. 이 친구, 참 재수도 없지? 이 친구가 추첨제로 들어간 곳은 광운중학교였다. 이 친구가 들어간 대학교는 중앙대학교 공과대학이었다. 합격자 발표를 보러갈 때 내가 동행해주었는데, 언덕길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서 대학교 합격은 장차의 진로 전체를 결정짓는 큰 사건이었는데, 그 점은 이 친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대가 적성에 맞았는지, 이 친구는 5·16장학금을 받는 등 평탄하고 모범적으로 대학 시절을 보냈으며, 동아건설에 취직하여 원자력 발전소 건설 현장에 발령을 받았다. 군복무가 면제되는 자리였다. 이 친구는 의무 근무 기간을 채운 뒤에도 동아건설에 머물면서 경력을 이어나갔다. 내가 제대한 후 중학교에 발령을 받았을 때, 이 친구는 이미 대리가 되어있었다. 윤씨 집안 작은 매형이 우리 둘을 앉혀 놓고 “영훈이가 시류를 잘 타서 앞서 나가는구나”라는 요지의 말을 한 것은 그 때쯤의 일이다. 이 친구는 계속 승승장구하였으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책임을 지는 이사급의 현장소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아직 동점(태백시)에 살던 시절의 일이다. 아마도 일곱 살 나던 해였던 것 같은데, 그 해 나는 서울 구경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여름 방학에 이 친구와, 위에서 말한 영선이 형 등이 동점을 방문하였으니,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 때다. 어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비교하여 보았을 것이다. 우리도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라이벌이었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단짝이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다가, 내가 입대를 하고 제대를 한 이후에는 둘이서 연락을 하여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이 친구, 요즘은 덕소 쪽으로 나가서 조용하게 살고 있다. 은퇴한 직후, 친구 다섯이서 5억을 만들어 불가마를 운영해 본 적도 있다. 개업 초기에는 투자액의 1할에 육박하는 매출을 매달 올리기도 했지만,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동업자들 사이의 분란까지 겪고, 결국 폐업을 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그런 류의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경매 물건을 사서 파는 일을 한다. 몇 해 전에 경상남도 작은 읍에서 3층 짜리 건물을 하나 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은퇴하면, 그냥 노는 게 최고야. 동업은 제일 나쁜 거야. 벌려고 할 게 아니라, 쓰는 것을 줄이려고 해야 해. 아이들에게도 너무 투자하지 말고. 자생력을 길러줘야지.” 이게 요즘 이 친구의 지론이다.
첫댓글 토요일에 영태 교수가 바빴구나. 고맙다.
우리집 폐백은 간단히 진행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
축하해 주시러 오신 손님을 마중하지 못해, 결례가 된 점도 있고..... 여하튼 미안했다.
요즘은 폐백을 생략하기도 하더라.
지난 2월 차남 결혼식 때는, 그래서 폐백을 안했는데,
이번 장남 결혼식에는 그래도 폐백을 하는 게 좋을 것같아서, 하기로 정했다.
다만 종래의 풍습과는 다소 다르게, 외가, 처가에 대한 배려를 더해
신랑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함께 모셨고,
폐백의 마지막 순서로, 신부 부모께 절을 드리도록 했다.
나 스스로 그렇게 제안했다.
그렇게 하니 누님, 형님, 형수님도 다들 좋아하시더라...
나에게 있어 라이벌은 누구일까라고 이글 읽으며 생각해보니 딱히 생각 되어지는 대상이 없네..좀 불행한 것인가? 뭐 그래도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친구들은 꽤 있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기모,영태,계무 ,주원,수석,마눌,아들놈,울아빠...여튼 나를 아는 지구상의 모든 수컷들 )ㅋㅋ
음.. 학쭈니와 라이벌은 욕심을 내려 놓지 않는 이상 저 세상까지 계속 될 듯....
라이벌한테 한수 배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