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인물,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전혀 무관한 허구입니다
찹케 님 표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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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검은 절벽
Writer . 쁜틳♡
Start . 12. 01. 10
불펌. 도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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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이라. 태라는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그 말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검은 절벽 >09
홀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거대한 샹들리에였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눈이 부신 나머지 영운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는 무례를 범했다. 자리에 참석한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에게 벌써부터 얼굴을 비추느라 바쁜 양아버지 김근학은 내버려두고 일찌감치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벽에 기대어 저 기분 나쁘도록 밝은 샹들리에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더러운 살인마 주제에 파티라니. 웃기지도 않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홀의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조명이 단상 위를 비추자 벌써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단상 한 편에서 태라가 매혹적인 드레스 자태를 뽐내며 나타났다. 오늘 파티의 주최자답게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마이크를 타고 간단한 소개와 이런저런 시답잖은 인사치레 말이 흘렀다. 영운은 문득 오른팔의 상처가 쑤시는 것을 느꼈다. 칼로 깊게 베어진 상처는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통증만 더욱 악화되었다.
ㅡ 자, 그럼, 여러분께서 고대하시고 고대하셨던 오늘 환영회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또다시 박수소리가 넓은 홀 내부와 천장의 샹들리에와 영운의 머리를 울렸다. 그 순간 영운은 아픈 것도 잊고 단상 위를 뚫어져라 노려보게 되었다. 아직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구두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발걸음을 이끌고 단상 위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목까지 뒤덮은 드레스, 어깨 위까지 뎅강 잘린 머리카락, 얼굴은 여전히 메마르고 창백했지만, 얇은 입술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 그렇다. 인형처럼 웃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거짓말처럼 웃고 있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ㅡ 유민입니다.
시선은 곧 떨어졌다.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잠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조용하던 장내는 또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ㅡ
나흘 전.
‘강종우와 관련 없어…… 실질적 후견인은 모수화’
ㅡ 주인아는? 잡아왔어?
신문 너머에서 영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한 달 만에 들른 재스민은 아직 신축 공사가 덜 돼서 방음처리가 되질 않았다. 퇴폐적인 교성과 비명 같은 소음들이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오는데도 일부러 영운은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방을 골랐다. 그는 벌써 이십분 째 신문지 같은 면을 보고 있었다.
ㅡ 아직…….
ㅡ 아직? 그깟 평범한 여자 하나 잡아오는 게 무슨 일이라고 아직이야?
ㅡ 그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치들이 있었습니다.
성진의 말에 그제야 영운이 신문을 내리고 찌푸린 눈으로 성진을 보았다.
ㅡ 골 때리는군. 설마 이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대비를 해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아, 젠장. 더 수상해졌어. 그년을 잡아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중얼거리며 버릇처럼 윗옷 주머니를 뒤지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만 걸치고 라이터는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미련 없이 등 뒤로 던져버렸다.
ㅡ 젠장. 팔자에도 없는 금연 하려니 손이 다 떨리는구만. 야, 의대생. 이 팔은 언제까지 담배 끊고 있으면 낫는 거냐?
영운은 이죽거리며 붕대 감은 오른팔을 공중에 몇 번 휘둘러보였다. 평소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존심 상하게도 붕대나 감고서 사방팔방 ‘나 다쳤소’하고 광고하는 꼴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어쩌겠어. 빨리 낫고 싶으면 똑똑한 주치의 양반 말 듣고 얌전히 있어야지. 성진이 붕대를 갈아주기 위해 상자 하나를 들고 영운에게 다가왔다.
여러 겹으로 감긴 하얀 붕대를 풀고 나니, 오른팔에 길게 베어진 상처가 끔찍스럽게도 고개를 쳐들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이놈의 상처는 도무지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운은 볼썽사납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성진은 개의치 않고 묵묵히 붕대만 갈았다. 상처가 스칠 때마다 욱신거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영운은 담배를 퉤 뱉고 애꿎은 신문만 괴롭혔다.
ㅡ 아까부터 같은 면만 보고 계시던데, 뭐 흥미로운 기사라도 났습니까?
성진이 아무렇지 않게 물어왔다. 뭐라 대꾸하려던 순간 붕대를 꽉 묶어서 신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ㅡ 윽. 흥미로운 기사는 개뿔.
ㅡ 20분 동안 말이 없으시기에.
ㅡ 돌아왔다더군. 그 년이.
영운이 구긴 신문을 놓았다. ‘유도균의 외손녀.’ 커다란 제목이 펼쳐진 면 맨 윗부분에 박혀 있었다.
유도균의 외손녀가 드디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귀국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공항은 수많은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입국장 문이 열리고 여리여리한 얼굴의 유도균의 외손녀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등장했다. 기자가 적어내리길 유도균의 외손녀께서는 오랜 비행으로 조금 지친 듯 보였고, 자신을 찍기 위해 몰려든 어마어마한 인파에 놀란 얼굴이었으나 곧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고 했다. 대문짝만하게 찍힌 사진 속에서 유도균의 외손녀는 너무나도 자그마해서 경호원들과 인파들 틈에서 찾아내기 어려웠다.
공항을 빠져나온 유도균의 외손녀는 안달이 난 취재진들을 위해 곧바로 자리를 마련했다. 취재진들뿐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라고 해봐야 단연 그것이었다. 강종우, 강종우의 죽음, 그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입장. 그 자리에 있었던 기자가 또 적어내려가길 유도균의 외손녀는 조금 자극적이다 싶은 질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고 했다. 강종우의 이름이 어디선가 튀어나오자 그녀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은 듯했으나, 곧 그 침착한 표정을 되찾고 차분히 답변을 했다.
‘강 이사님께서 어린 시절 혈혈단신이었던 저를 돌봐주신 은인인 것은 맞지만, 곧 반목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죠. 강 이사님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는 과격한 방식으로 저를 이끌어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엔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강 이사님과 관련된 모든 사건사고들은 저로서도 분노해마지않을 일들이었습니다. 비록 이젠 과거의 은인이시고 잘못된 방식으로 숨을 다하시긴 했으나 저 역시도 그분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이 반성합니다. ……’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강종우와 서인석의 일이라든가 그 외의 모든 일들은 이젠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계 진출에 대한 희망이 있으십니까?’
뒤이은 취재진들의 폭풍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자의 보도에 기대어 이해하자면 이렇다.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으나, 이번에 오랜 공백을 깨고 귀국을 한 것은 이번 총선에 출마할 예정인 고마운 분을 도와 일을 배우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그 ‘고마운 분’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잠깐 말을 아끼는 듯 했으나, 결국엔 입을 열게 되었다.
ㅡ 그게 모 회장이었단 거지. 유도균의 또 다른 우방세력이었던.
세간에는 강종우가 유도균의 젊은 피였고, 때문에 유도균의 사망 이후 하나 남은 유도균의 혈육을 강종우가 도맡아 키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뒤에 다름 아닌 모 회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낯선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의 발언에 또다시 언론과 정계는 물론 재계까지 발칵 뒤집혔다. 그 미래물산 모 회장이 유도균의 히든카드였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모 회장이 총선 출마를 선언한 이때에 유도균의 외손녀까지 가세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발 빠른 평론가들은 벌써부터 모 회장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강종우에게 잘못 갔던 ‘포스트 유도균’이라는 호칭이 다시 제 주인을 찾아간 것이라고.
영운의 눈길이 신문 속 사진을 노려보며 낮게 가라앉았다. 발표회장에서 수많은 플래시에 둘러싸여있는 그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새하얀 플래시 세례를 받은 덕에 더 기괴해졌다. 여자의 입가에 분명히 매달려있는 미소를 보며 이질감과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또다시 팔의 상처가 쑤셔 와서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그에겐 아직 그 여자의 마지막 기억이 남아 있었다. 피 묻은 칼을 그에게 휘두르며 서늘한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를 부르짖던 여자.
어둠 속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던 여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토록 의지해마지않았던 강종우를 남남처럼 취급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모 회장을 돕겠다고 나섰으며, 시종일관 이질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미소. 그 미소. 웃는 법을 알지 못해 비웃음밖에 그리지 못했던 여자의, 미소.
ㅡ 그래서 주인아가 필요한 거야. 저년이 어떻게 거기서 도망쳤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 데다 들어줄 가치도 없는 개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속셈이 대체 뭔지, 난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를 데려와서 알아내야 하는 거야. ……신문사에 잘리고 특별히 하는 일 없는 평범한 백수가, 유도균의 외손녀를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숨겨줬다고?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단 거지. 여차하면 주인아를 이용해 협박하면, 그년이 안 기어 나오고 배기겠어?
ㅡ 저…… 형님. 그 주인아 말입니다.
영운이 눈썹을 까딱였다. 성진이 뭐라 말할까 고민하는 얼굴로 잠깐 말을 삼켰다.
ㅡ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주인아를 보호하고 있던 그 치들, 아무래도 모 회장 쪽 사람들 같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영운이 뭐라 대꾸하려던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몽이었다.
ㅡ 왜? 무슨 일이야?
얼굴이 또 시뻘겋게 달아오른 몽은 두 손만 허우적거릴 뿐 뭐라 말을 하질 못했다. 아무래도 뭔가 큰일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이영운 새끼야! 몽이 겨우 그 말을 뱉어낸 순간, 뭐라 더 말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몽의 뒤로 흰 손이 쑥 나왔다. 몽을 밀쳐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영운의 얼굴이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찡그려졌다.
ㅡ 하이? 오랜만이야, 밥 씨?
문가에 기대어 여유롭게 선글라스를 벗어드는 저 여자, 홍태라였다.
난데없는 톱스타의 등장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몽을 데리고 성진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붉은 조명이 일품인 넓은 방에 남은 것은 영운과 태라 단 둘이었다. 양쪽에서는 쉬지 않고 야한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없이 서로만 살피는 데 바빴다. 먼저 입을 연 건 태라였다.
ㅡ 오랜만이잖아. 인사를 해야지. 왜? 오랜만에 보니 내가 더욱 아름다워져서 뭐라 말 하지도 못하겠니?
ㅡ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ㅡ 아아, 스토커라고 또 그 우습지도 않은 단어 갖다 붙일 거라면 차라리 입 다물어. 그대는 입 다물고 있을 땐 참 멋진데 그 몹쓸 주둥이만 열면 때려주고 싶을 만큼 짜증나거든.
영운이 냅다 집어던진 재떨이를 태라가 여유롭게 피했다. 재떨이는 의자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양쪽에서 울리던 신음 소리가 뚝 멎었다.
ㅡ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아아, 그대 취향도 참. 나를 꼭 이런 곳에 발 들이도록 만들어야겠어?
ㅡ 이번엔 또 무슨 용건인데? 아, 됐어. 마침 잘 왔네.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무척 많았는데.
ㅡ 아마 나도 그대와 같은 용건일걸?
영운이 얼굴을 찌푸리는 게 즐거운지 태라가 흥흥 웃으며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한겨울임에도 저 여자는 짧은 원피스에 얇은 스타킹을 신고 왔다.
ㅡ 어머, 신문 읽고 있었나봐? 잔악무도한 킬러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고 싶었나보지?
영운이 손을 뻗기도 전에 태라가 잽싸게 탁자에 구겨져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펼쳐진 면을 한 번 훑어보고는 태라가 느긋한 얼굴로 신문을 영운에게 흔들어보였다.
ㅡ 특별 질문 시간! 오늘만 특별히 국보급 문화유산 홍태라님께서 어디 시 어느 구 어느 동에 사는 킬러님이 물어보는 모든 것에 성심성의껏 답해드립니다.
ㅡ 또 무슨 꿍꿍이야?
ㅡ 물론 때에 따라선 거짓말을 할지도 몰라요. 여자는 원래 비밀이 많은 생물이니까. 호호.
저 얄미운 얼굴에 또 뭔가를 집어던지려다가 말았다.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대놓고 광고를 한 게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였다. 묻는 대로 다 대답해주겠다니, 저 여자가 또 무슨 속셈으로 저런 조건을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ㅡ 그 여자, 네가 탈출시켰나?
ㅡ 역시. 남자들의 순정이란.
ㅡ 개소리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태라가 신문을 탁 내려놓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ㅡ 탈출이라니,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네. 그 여자가 직접 우리 쪽으로 찾아온 거야. 그런 다 죽어가는 꼴을 해갖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네놈이 연약한 여자를 그토록 잔인하게 고문했단 사실을 알았지. 이런 못된 남자.
ㅡ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시겠다?
ㅡ 어머머, 그건 모르는 일이지.
ㅡ 뭐, 됐어. 거짓말이든 아니든 일단 네가 그 여자를 데리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오늘 나한테 그거 말 하러 온 건가? 그 여자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제 거래를 이행하겠다고?
태라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걸었다.
ㅡ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어.
ㅡ 그러시겠지. 그 여자가 모 회장을 돕겠다고 나선 덕에 포스트 유도균이라는 팔자에도 없는 별명을 얻게 됐으니.
ㅡ 부정하진 않을게. 그대가 지난날 아버님을 도와준 일은 여전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이건 그것과 별개의 일이야. 내가 그대에게 그 애를 내놓으면 그대가 또 그 애에게 무슨 잔혹한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태라의 눈에 힐난의 빛이 스쳤다. 영운은 전혀 개의치는 것 없이 심술궂게 입술만 비죽거렸다. 그가 태라의 앞에 붕대 감은 오른팔을 흔들어 보이며 조소했다.
ㅡ 이 붕대를 풀면 뭐가 나오는 줄 알아? 쳐다보기도 토 나올 정도로 끔찍한 상처가 있지. 누가 감히 킬러 B를 이딴 꼴로 만들어놨게? 바로 그년이야. 네가 지금 동정해마지않는 가증스런 유도균의 외손녀 나부랭이. 그년이 또 어떤 같잖은 속셈으로 연기를 하며 불쌍한 척을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년의 본래 모습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지. 속은 누구보다도 검게 썩어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고귀한 척 숭고한 척 온갖 가증은 다 떠는 끔찍한 년이야. 그렇게 징그러운 가증이나 떠는 데 일가견 있는 년을 벌주려면 그 정도는 약과지. 너도 그년의 연기에 속아서 언제 뒤통수 맞지 않길 바라.
ㅡ 그 애가 어떤 식으로 그대에게 당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군. 불쌍한 사람.
ㅡ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이야.
태라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영운은 얼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잠깐 침묵을 즐겼다.
ㅡ 전에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 너도 그년에게 갚아줄 게 있어서 그년을 잡고 싶은 거라고. 두 사람, 그렇게 좋은 사이만은 아니지 않았나?
태라가 대꾸 없이 예쁜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ㅡ 어쩐 일이야? 두 여자 간에 끈끈한 우애라도 다시 생겨나게 한 일이 있었어? 그게 뭔지 궁금한데? 아, 유도균의 외손녀가 순순히 모 회장을 돕겠다고 나와서 없던 정이라도 생겼나? 그러고 보니까 그년과 있었던 그 갚아줄 일이라는 게 뭔지 또 궁금해지는군.
ㅡ …….
ㅡ 대체 뭐야? 네년과 모 회장의 더러운 속셈이.
그 순간 태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곧 접고 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ㅡ 어디 가? 아직 대답 안 했잖아?
ㅡ 질문 시간은 끝났어. 난 가볼 테니 넌 다시 여자나 불러서 가랑이 사이에 끼고 뒹굴라고.
ㅡ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영운의 말에 태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태라가 한숨을 푹 쉬고는 팔짱을 끼고 영운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보았다.
ㅡ 또 뭐?
ㅡ 모 회장과 유도균 외손녀의 관계 말이야. 강종우와는 결별한 지 오래고 실질적인 후견인은 모 회장이었다지? 뭐, 들어줄 가치도 없는 개소리란 건 알지만 자칫 강종우의 일이 유도균 외손녀와 모 회장에게 악영향 끼치는 일 없게 미리 거짓말로 차단해둔 걸 테니 그건 됐고.
ㅡ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유감이지만 아버님과 그 애의 관계는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야. 내가 전에도 말해줬잖아? 강종우가 미래물산 재무이사로 있을 때 몇 번 그 애와 만나서 인연을 쌓게 됐다고. 아버님이 유 대통령님과 막역한 사이였단 말도 사실이야. 그 시절엔 공개하지 않았었지만 유 대통령님도 아버님께 많이 의지하셨었지. 유 대통령님 서거 이후 강종우가 미래물산에 입사해서 파격 승진을 한 데에도 다 그런 배경이 있었던 거고.
ㅡ 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냐.
또다시 잠잠하던 신음이 얇은 벽을 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영운은 리듬을 타듯 손가락을 몇 번 까딱거리다가 태라에게 턱짓했다.
ㅡ 생각을 해봤지. 유도균 외손녀, 그 여자 말이야. 반 년 전에 위장입국을 해서 서인석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 땐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를 맞아서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니 그제야 객관적으로 사건을 볼 수가 있더군. 그래, 그 여자가 아무 제지도 없이 위장입국 할 수 있었는지 그게 가장 미심쩍었어. 아무리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을 했다고는 해도 유도균의 외손녀가 움직이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을 리는 없잖아? 하다못해 공항 직원 정도는 알았을 테지. 그런데 그 여자가 반 년 전 국내에 잠깐 다녀간 뒤에도 모든 이들은 유도균의 외손녀가 아직 한 번도 러시아를 벗어나본 일 없고, 지금도 병약한 몸을 요양하며 러시아에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귀국한 줄로만 알고 있어. 그런 식으로 그 여자가 너무나도 쉽고 조용하게 입국하고, 더군다나 남의 신분을 빌려 서인석 측에 의심 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는 건……
ㅡ …….
ㅡ 국내에 유도균의 외손녀를 돕는 끄나풀이 있다는 말밖에는 설명이 되질 않지. ……그것도 보통 끄나풀이 아니라, 입국 절차도 마음대로 손댈 수 있고 이미 죽은 사람 신분을 위조하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보다도 쉬운, 거물급 끄나풀.
거기서 말을 끊고, 반응을 재듯 태라를 흘끗 곁눈질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적당히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이 왔다. 영운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ㅡ 그렇게도 유도균의 외손녀를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던 건가? 그래서 총선을 핑계로 유도균 외손녀를 정계에 슬슬 입문시키려고?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정곡을 찌른 나머지 충격으로 말문을 잃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태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가 아니라, 짜증과, 분노 같은 것을 집어넣고 억지로 짓는 기괴한 미소였다.
ㅡ 그래서…… 뭐, 우리 쪽에서 유도균의 외손녀를 빼앗아보기라도 하겠다?
ㅡ 보쌈은 취미가 아닌데, 그년이라면 기꺼이 그럴 의향이 있지.
ㅡ 닥치고 이거나 받아.
태라가 던진 것을 노련하게 잡았다. 고급스럽게 치장이 된 초대장이었다.
ㅡ 어디 해볼 테면 한 번 해보시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유도균 외손녀의 귀국을 축하하는 환영회에서, 남들의 이목이 집중된 그 곳에서, 지랄깽판을 치든 보쌈을 하든 어디 마음대로 해봐.
태라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마자 영운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날짜는 나흘 후. 유명 모 호텔 홀에서 유도균 외손녀의 귀국을 환영하는 파티가 열린다고 적혀있었다.
ㅡ
ㅡ 김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허허.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영운을 상념으로부터 끌어냈다. 모 회장과 김근학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손님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던 태라가 영운의 시선을 느끼고 슬쩍 잔을 흔들어보였다. 욕이라도 한 번 날려주려고 하려다가 그만뒀다. 지난날 점심식사 때도 그랬던 것처럼 모 회장과 김근학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을 뗄 때마다 다섯 번씩은 웃어댔다. 여기저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식들과, 손님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그런 것들로 인해 생전 없던 현기증마저 치미는 기분이다. 영운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사이 모 회장이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ㅡ 여기네, 여기. 응. 허허. 김 의원님, 오늘 파티의 공주님입니다.
누가 이쪽으로 걸어왔으나 영운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미처 깨닫지 못했다. 김근학이 앞쪽으로 팔을 잡아당기고서야 겨우 눈앞에 있는 것을 분간할 수 있었다. 눈앞에는 하얀 손이 있었다. 마치 남에게 보여줘선 안 되는 무언가가 몸에 남아있는 듯 몸을 친친 둘러싼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악수를 청하며, 검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ㅡ 처음 뵙겠습니다. 유민입니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또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가둬두었던 어둠으로부터 도망간 여자가 지금, 몰라볼 만큼 변해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지옥보다도 더 끔찍하게 자신을 유린했던 사내에게 정말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설게 손을 내민다. 처음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더라.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거기서 도망간 것이고, 지금 모 회장의 편으로 돌아서서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공주님이라도 되는 양 순진한 척 손을 내미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수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샘솟았으나 내뱉어지지는 못했다. 또다시 오른팔의 상처가 쑤시는 모양이다. 그는 통증을 참고 여자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그러나 점점 부서뜨릴 듯 세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다시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여자들의 끈끈한 시선들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것을 느꼈으나 매력적인 미소로 홀려버리는 것 대신 이를 앙다물고 한곳만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여자는 또 그 낯설기만 한 미소를 띠고서 모 회장을 따라 인사를 다니느라 바빴다. 뭐든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또 처음이다. 불쾌한 감정을 추스르며 냉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별안간 하얀 손이 쑥 내밀어져 그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재빨리 뿌리치고 보니 태라였다.
ㅡ 여기서 뭐 해?
ㅡ 신경 끄고 볼일이나 보시지?
ㅡ 그런 끈적끈적한 눈으로 노려본다고 오매불망 그녀가 그대 품으로 돌아오겠어?
영운이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 반박하기 전에 태라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ㅡ 아름다워졌지? 전의 그 창백하고 귀염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던 건방진 계집애가 생각도 안 날만큼. 당연하지. 누구의 손길을 거쳐 갔는데.
ㅡ ……너 말이야.
영운이 벽에 기대었던 등을 천천히 뗐다. 그 여자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런다고 그 여자와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데 그는 그렇게 하면 처음엔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그 여자로부터 발견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태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ㅡ 저 여자한테, 또 무슨 가면을 씌워놓은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운이 무어라 더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시간을 확인하고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가 태라에게 다가와 누가 보지 못하게 귓가로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였다. 찰나의 순간, 속삭임이 건네졌다.
ㅡ 맘대로 하라고 했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랄깽판을 치든, 보쌈을 하든, 내 마음대로 하라고.
그가 다시 멀어졌다. 태라가 재빨리 영운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넓은 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조명들이 순식간에 꺼지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조명은 곧바로 켜졌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 있었던 영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태라는 재빨리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없다. 유도균의 외손녀 역시 영운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태라는 방금 전 영운이 속삭였던 말의 뜻을 깨닫고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아야했다.
같은 시각. 암전을 틈타 재빨리 2층 테라스로 자리를 옮긴 영운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부서뜨릴 듯 쥐고 있었던 손목을 놓았다.
바로 등을 돌리진 않았다. 3초. 숨을 부드럽게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쉰 후,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천천히. 아주 아주 느리게.
머리 위에는 더 이상 그 징그럽게 밝은 샹들리에 따위가 없었다. 어둠. 그 날처럼 완전한 어둠 속에 사로잡혔다. 그는 어둠을 좋아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온전히 가득 채워진 산소 같은 어둠을, 그는 사랑했다.
그 속에서 마주 본 여자. 아아, 뭐라고 이름 불러야 좋을까.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이렇듯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이 여자를, 누구보다도 어둠이 잘 어울리는 이 여자를.
ㅡ 마녀가 좋겠군. 밤마다 착한 아이들을 잡아가 솥에 넣고 펄펄 끓여 잡아먹어버린다는 늙고 음침한 마녀.
여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들여다볼 뿐.
ㅡ 오랜만이잖아? 인사라도 해야 예의 아냐?
여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가 먼저 다가서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여자가 정말로 어딘가 좀 달라진 것을 알았다. 그가 여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동안 여자는 인형처럼 잠자코 있었다.
ㅡ 머리 잘랐네? 얼굴도 좀 편 거 같고. 제대로 좀 봐야겠는데.
그가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여자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댔다. 불을 켜고 보니 정말로 여자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얼굴색이 변하니까 그의 눈에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라이터를 사이에 두고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묘한 기분이었다. 장작개비라고 경멸했던 여자는 한 꺼풀 한 꺼풀 허물을 벗듯 날이 갈수록 달라졌다. 장작개비는 불타고 재만 남은 자리에 아직 다 피지 않은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애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작고 화려하지 않은 꽃이지만, 걸음을 멈추고 가만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게 되는 그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이 볼품없는 여자를 불쌍히 여기고 마법이라도 건 게 틀림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눈을 떼려 해도 뗄 수가 없는 거라고.
그래, 태라의 말이 맞았다. 아름다워졌다. 이 여자는.
ㅡ 못 본 새 변했군. 아주 많이.
막힌 숨을 뱉어내듯, 그가 첫 마디를 자아냈다.
여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버릇처럼 그의 손이 여자의 목에 남긴 흉터를 더듬으려고 했지만 여자가 제 손으로 그것을 도려냈던 것을 기억해내고 손을 거뒀다. 만지고 싶으면 마음대로 손을 뻗어 할 수 있었으나 그는 온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잠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저 무미건조한 얼굴에 미소 한 줌 없다는 사실을 조금 아쉬워할 뿐.
ㅡ 그 지긋지긋한 무표정만 아니면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줬을 거야.
ㅡ …….
ㅡ 하루가 바뀔수록 달라지는 게 여자라던데, 네년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이긴 했나봐? 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이렇게 꾸미고, 꾸미고, 내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진 거야?
그의 손가락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독한 미용실 냄새 대신 나른한 향기 같은 것이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이쯤 되면 여자가 앙칼지게 손을 후려치고는 표독스런 눈동자로 노려보기라도 해야 했을 텐데, 여자는 그저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머리카락을 희롱하던 그의 손이 우뚝 멎었다. 몇 걸음 물러서서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훑었다. 그 여자였다. 분명 그가 기억하고 부서뜨리고 싶어 안달 냈던 그 여자가 맞았다. 그런데도 저 낯선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자꾸만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해지는 저 표정은 도대체 뭐란 말이지?
ㅡ 너…… 뭐야?
그의 손에서 라이터가 꺼졌다. 다시 여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지긋지긋해마지않았던 무표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아니, 아니다. 아무 표정이 없되 그가 기억하고 있는 표정과는 다르다. 더 이상의 분노도, 증오도,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게 표백된 눈동자가, 눈앞에서 깜빡거리고 있을 뿐.
그 순간 그의 손이 드레스 앞섶을 거칠게 뜯어냈다. 옷이 벌어지고 여자의 목과 쇄골이 그의 눈앞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라이터를 다시 켰다. 그는 여자의 옷 앞섶을 풀어헤친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하얀 가슴께에 시선이 붙박였다. 조금만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가까이 했다. 여자가 몸을 비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깨를 꽉 잡았다. 그 바람에 라이터가 다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둠. 완벽한 어둠. 그러나 불빛 아래 드러났던 여자의 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지나치게 가는 목 아래로 하얀 거즈가 기괴하다 생각될 정도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가 남겼던 흉터가 있을 자리를 꾹 눌렀다. 살결 대신 거친 거즈의 촉감이 손 끝에 닿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여자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거둬졌음에도 여자는 옷을 여밀 생각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지포 라이터가 그의 손에서 다시 불꽃을 피웠다. 며칠 째 주머니 안쪽에 처박아두기만 했던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 입술에 걸쳤다. 입술을 조금 움직여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공중으로 느릿느릿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조금 기울여 여자의 얼굴에 후 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ㅡ 하마터면 또 다른 사람인줄 착각해버릴 뻔했잖아.
매캐한 연기가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자 여자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반 년 전 지호경이 싫어하던 담배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가 불 붙은 라이터를 장난스럽게 여자의 얼굴에 흔들어대며 비식비식 웃었다. 입술에 걸친 담배를 끄떡끄떡거리며 손수 옷을 여며주었다.
ㅡ 이 상처들만 아니었으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지 뭐야? ……말해 봐. 이번엔 또 뭐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없던 네년이 어떻게 거기서 탈출했고, 강종우와는 생판 남인 척 모 회장 밑에서 고마운 분이랍시고 도와주려는 이유, 그리고 네년이 지금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나 시종일관 달고 사는 이유.
ㅡ …….
ㅡ 이번엔 또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악마의 속삭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증오도, 분노도, 그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엔 가면이 덧씌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좁고 퀴퀴한 컨테이너에서의 독기 찬 얼굴이 아니라, 연약하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의 가면이 여자의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니, 과연 어느 것이 이 여자의 진짜 모습일지. 혼란으로 그가 잠깐 얼굴을 찌푸렸을 때, 여자의 미동 없던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가면이 벗겨지고 여자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린다고 생각했을 찰나였다.
ㅡ 여기 있었어?
갑작스런 목소리에 여자의 입술이 거짓말처럼 굳어버렸다. 다시 여자의 얼굴 위로 가면이 덧씌워졌다. 여자의 등 뒤에서 나타난 것은 태라였다. 태라가 짐짓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다가오자 여자도 영운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만 하고는 테라스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태라는 따라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영운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태라의 입술이 열렸다.
ㅡ 뭘 한 거야?
ㅡ 아무 것도.
ㅡ 쓰레기. 드레스 찢어진 거 다 봤어. 저게 얼마짜린데!
영운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잠자코 입술만 냉소적으로 올렸다 내렸을 뿐이었다. 태라가 말없이 영운을 쏘아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ㅡ 보쌈 한다고 잔뜩 겁을 줘놓고는 고작 납치한 데가 여기야? 웃기지도 않아. 그래놓고서 한다는 게, 옷이나 찢고 겁탈하기?
ㅡ 대체 저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영운의 물음에 잔소리조로 계속되던 태라의 말이 뚝 멈췄다.
ㅡ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줄 알겠네. 내가 뭘? 못난이를 인형으로 만들어준 게 그렇게 따져 물을 일인가?
ㅡ 모르는 척 하지 마. 웃는 법도 몰랐던 여자가 오늘처럼 파티에 드레스에 익숙하게 웃기까지 한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여자가 저렇게 변한 거지?
태라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동안 영운의 얼굴을 살폈다. 또다시 입을 비집고 뜻 모를 한숨이 나왔다.
ㅡ 바보 같은 사람.
ㅡ 뭐?
ㅡ 지금 그대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전에 강종우 환영 파티 날도 기억 나? 그 때와 똑같은 얼굴이야. 뭔가에 쫓기듯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표정. ……그 여자 때문인 거잖아. 또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서.
영운이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으나 태라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ㅡ 돌아서면 이렇게 초조해하면서 막상 그 여자 앞에만 서면 왜 그렇게 포악한 짓만 골라 하는 거야? 아까도 보면서 끼어들까 하다 말았는데, 말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그 여자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어. 내 말이 틀려?
내 말이 틀려? 하는 말에는 비난마저 느껴졌다. 영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른 생각으로 골몰해 있었다. 태라가 길게 한숨을 뱉고는 영운에게 뭔가를 넘겨주었다. 열쇠였다.
ㅡ 이런 놈을 믿고 그 애를 맡겨도 될지.
ㅡ 이게 뭔데?
ㅡ 집 열쇠야. 그 여자가 지내고 있는 집.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라고 물으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운의 변화를 눈치 채고 태라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ㅡ 그 여자를 맡았던 사람이 일 때문에 당분간은 자리를 비우게 됐어. 그동안 그대가 대신 그 여자를 맡아줘. 특별한 일정이 아니면 집에 있도록 되어 있으니까, 집에 가서 그 애 지켜보고, 혹시라도 쓸 데 없는 일 벌이지 않게 감시하고.
ㅡ …….
ㅡ 아, 왜 또, 감히 킬러 B에게 그런 일이나 맡기는 거냐고 펄펄 뛰게? 그럼 뭐, 하는 수 없지.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
태라가 열쇠를 도로 빼앗아가기 전에 영운이 얼른 옷 안주머니에 열쇠를 넣어버렸다. 저럴 거면서 튕기기는. 태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전처럼 아름다운 야경은 없었으나 그런대로 좋았다.
ㅡ 오늘 이후로 당분간은 얼굴 보기 힘들 거야. 본격적인 총선 시즌이라 아버님도 나도, 그리고 그대도 바빠질 테니.
ㅡ …….
ㅡ 그대, 전래동화 좋아해?
뜬금없는 물음에 영운의 시선이 태라에게 닿았다. 태라가 나른한 얼굴로 난간에 몸을 기대고는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ㅡ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말이야.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다가 동아줄을 잡고 오라비는 해가 되고 누이는 달이 되었다는 이야기.
ㅡ 그게 뭐.
ㅡ 오누이를 쫓던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붙잡은 탓에 아래로 떨어져 가엾게도 죽음을 맞이하고 말잖아?
안에서 태라를 찾으러 사람이 올라왔다. 태라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영운을 돌아보았다.
ㅡ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거지?
ㅡ 그 말 그대로야. 썩은 동아줄을 붙잡으면 아래로 추락하는 일밖에는 기다리고 있는 게 없다고.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한 채 태라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ㅡ
ㅡ 괜찮겠습니까?
파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말이 없던 진호의 물음에 태라가 고개를 들었다.
ㅡ 아아, 그 애 말이야? 걱정 마. 그놈은 절대 그 애를 해치지 못해. 어린애 같이 제 분노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 설치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 그 여자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내진 못할 거야. 그 여자에 대한 집착이 그새 또 얼마나 깊어졌는지……. 본인은 아마 자각도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이번 총선부터 잘 치르는 것이 중요하다. 유도균의 외손녀가 예상 외로 순순히 따라주는 것은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아주 작은 변수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그 거만하고 어리석은 킬러라든가. 일단은 그놈이 태라 쪽에서 유도균의 외손녀를 탈출시킨 것을 모르고 있긴 하지만, 만약 그것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 미친놈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유도균의 외손녀가 직접 얘기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놈이 알아챌 방법은 없겠지만…….
아니지. 그 여자가 제 스스로 그놈 편에 들러붙는 짓을 사서 할 리는 없다. 아직 그놈에게는 씻을 수 없는 낙인이 붙어있었다. 살인자. 강종우의 목숨을 거둬간 원수. 그럼에도 자꾸만 그 여자에게 집착과 또 다른 내밀한 감정을 끊어내지 못하는 그놈에게 동정심이 갔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는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ㅡ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채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겠지…….
태라가 냉소적으로 말하고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밤하늘. 서슬 퍼런 달빛만이 도심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울랄라남양 님 이름표 제공♡ ㅎ허허헝죄송해여..ㅠ.ㅠ 이렇게 늦을줄 저도 몰랏어여.. 암튼.. 3장 시작입니더 업쪽 = B 또는 댓글1111!!!! SeeYou 님 코멘창 제공♡
한입갖다 두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일주일이 넘도록 안오다니..ㅠ.ㅠ
엄청 고통스럽게 나온 9편이어요 흑흑 비록 분량은 적지만..ㅠ.ㅠ
으오오옹옹 너무 늦게와서 작가말 쓸 면목도 없어여.ㅠ.ㅠ.ㅠ.ㅠㅠ
휘리릭 올려놓고 뿅 사라집니더 흑흑
하트애정백만개!!!!!!!!! 는 잊지 않구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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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너의사랑우는님!! 오랜만이져..ㅠ.ㅠ 흙흙죄송해여 저도빨리오고싶엇는데 마음처럼 되질않아서 속상햇서여..흑흑 이게 다 이 무시무시한 성격의 주인공들 때문입니더ㅠ.ㅠ.ㅠ 평범한 로맨스를 펼쳐나가지 못하는 이 주인공들 때문에!!! 얼마나 힘이 들던지!!!!ㅠ.ㅠ.ㅠ 그치만 점점 나쁜남자이영운이가 마음을열고 민이한테 무너지는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 기쁩니닼ㅋㅋㅋㅋ 앞으로 이영운의처절한짝사랑이 예고되어잇으니.. 앞으로 남주를 더더더애껴주세요!!ㅋㅋㅋ 민이는 원래컨셉이 본래 성격을 알수없는 마녀같은 성격이라서.. 저도 지금 원래 성격이 뭔지 헷갈릴 지경입니다만..허허.. 무튼 열심히 달리겟슴더!!
B
곧 10편 가지러 갑뉘당♡
B 진짜진짜재미있어요!!!다음편 완전 궁금!!!!!
감사합뉘당!!!!! 곧 10편 가지러 갑뒤당!!!!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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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운이는 민이에게 사로잡힌 사랑의노예얔ㅋㅋㅋㅋㅋㅋ 앜무리숰ㅋㅋㅋㅋ 곧 10편들고 간다잉!!!ㅎㅎ
B ?ㅠㅗㅠ 이제 영운이가 불쌍해질 정도예요ㅠㅠㅠ 아 진짜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모진말만 하는지ㅠㅠ 그리고 민아 너의 심중을 도대체 알 수가 없다ㅠㅠㅠ 니 정체가 뭐야!!! 둘이 좀 친해졌으면ㅠ
죄죄죄송합니다.. 아마도 영우니랑민이는.. 많이.. 싸울 것이어요.. 허허.. 저도 마음같아서는 걍 로맨스를 뙇!!!!! 썸씽을 뙇!!!!! 뿌리고싶지만.... 눈물을 머금고 참고 잇습니당 헝허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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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니는 검은절벽의 남주이므로 민이를 사랑할수밖에없는 운명인걸 독자분들이 다알고계시는데 왜 영운이만 모를까요...;ㅡ; 하.. 그래도 이렇게 애간장태우는게 로맨스소설의 맛 아니겟서요!!!ㅋㅋㅋㅋ 강력한 로맨스가 뙇!!! 하고 튀어나올 때까지 함께 달려주세용 오홍홍ㅎㅎㅎ
B흡 ㅠㅠㅠㅠㅠㅠㅠ 태라 뭔가 디게 의미심장한 말들만 던져줫네여....... 모회장의 속셈은 대충 드러났는데 뭔가.. 더 있을꺼같아요 ㅋㅋㅋㅋ 민이가 저렇게 영운이가 느낄만큼 이상하게 변한것도 그렇고, 말 하려다가 태라 오니까 아무말 안하는 것도 그렇고......핳.....ㅋㅋㅋㅋㅋ오랜만에 보지만 여전히 답답한 영운이.... 점점 민이에게 집착? 하고 있는거같은데 ㅠ.ㅠ 앞으로 어째될지..기대됩니당! 춫!!!
우수독자엘렌님!!! 역시 예리하십니다.. 덕분에 저는 소설쓸맛이날뿐이고^ㅇ^!!ㅎㅎ 뭔가 검은절벽이 점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여러사람들의 욕망과 속셈같은 것들이 꼬이고 꼬여서 보는 저도 참.. 기분이 그렇게 되드라구여.. 허허.. 뭐 그게 다 검은절벽만의 매력아니겟어훀ㅋㅋㅋ 아직접말하려니 챙피하네옄ㅋㅋㅋㅋㅋ 암튼!! 열심히 완결까지 달려봅시당!!ㅎㅎ
B // 뭔가요 뭔가요 썩은 동아줄? 저는 머리가 안 좋아서 뭔말인지 모르겠어염 ㅠㅠㅠ
뒤에가면 차차 나올것이어요!!!허허헣.. 쪼까 의미심장하지여?허헣..
애정합니다. 아 전 뭔가 영운이가 불쌍하면서도 이해가 되는게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게 생겼는데 알고보니 그게 바람. 어쩌다 민이를 알게 돼서 너란 남자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여자가 민이라니. 한편으론 아쉬워요. 참 날짐승같이 감도 빠르고 촉도 굉장한 남자인데 눈이 멀어서. 다음 편에서부터는 안달복달할 영운이를 볼 수 있는 걸까요? 너무 설레여요.
안달복달을 위해 슬슬 시동을 걸고 잇습죻ㅎㅎ 아직 10편정도까지밖에 안왔는데 마치 30편 달려온 마냥 애들이 너무 진지해져버려서 탈이지만..ㅠ.ㅠ 로맨스 시동이 걸리면 미친듯이 빠져드실 거라 자부합니다!!ㅎㅎ 끝까지 응원해주셔용♡
B둘이빨리잘됐으면좋겟네요 ㅎㅎ
영운이의집착이점점더심해지는것같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