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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 ‘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 부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나는 누구인가?
옥상에서 운동하고 부추를 자르면서 옥상밭을 정리하다보니 손.발이 무척 시리다.
젠장 산에 돌아다닐땐 보일러가 가동돼서 안추운데 옥상서는 왜 이리 춥게 느껴지는지?
옥상서는 온수보일러가 신통찮게 가동되나보다..
영하 7 ~ 8도를 오르내리는 이 추운 겨울에도 열지않고 푸르게 잘 자랄 정도로 大熱한 부추를 하나하나 정리하다보니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의문이 스쳐지나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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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업가인가? - 글쎄.
나는 장사꾼인가? - 글쎄
나는 농사꾼인가? - 글쎄
나는 약초꾼인가? - 글쎄
나는 東洋學 先生인가? - 글쎄
나는 氣功 先生인가? - 글쎄
나는 風水師인가? - 글쎄
나는 命理家인가? - 글쎄
나는 修行者인가? - 글쎄
나는 禪師인가? - 아니
나는 道士인가? - 글쎄
나는 글쟁이인가? - 글쎄
나는 골퍼인가? - 아니
나는 詩人인기? - 글쎄
나는 실업자인가? - 아니
나는 놀고 먹는가? - 아니
나는 어디서 왔는가? - ?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럼 나는 누구인가? - ?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죽을때까지
이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의 답을 구하다가 간다.
물론, 그 답을 알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이같은 疑問을 풀고자 나타난 宗敎인 六祖 慧能의 南方禪宗(南宗禪,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교라 하기에는 타당하지 않지만)인 佛敎 禪宗은 西竺에서 온 菩提達磨를 初祖로 삼지만, 그 또한 嵩山 小實峰에서 面壁 9年 끝에 자기 敎祖 고다마 싯달타의 부처(佛)와 佛性만 假借했을뿐 敎理 中心의 기존 敎宗과는 완전히 다른 宗敎를 創始했으니 其實 佛敎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宗敎라 할 것이다.
菩提達磨가 開創하고, 2祖 慧可와 3祖 僧瓚을 거쳐 6祖 慧能이 完成시킨 중국 南方禪宗의 祖師禪은 "
父母未生前 本來面目[태어나기 전 본래 어떤 얼굴(누구)인가]?"를, 즉 간단하게 "이 뭣꼬(우스개
소리로 밥먹꼬)?"를 잡고 참두한다.
이는 朱熹가 주장하는 性理學의 本性論과 一脈相通한다.
중국 唐朝 時에 百丈(註1) 선사라는 아주 유명한 禪僧이 있었다. 그는 禪 도량을 위한 규율을 세운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제정한 『百丈淸規』 덕분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禪 수행을 위한 도량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門下엔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황벽 희운과 위산 영우가 가장 유명하다. 뒷날 이들의 계통에서 바로 臨濟宗과 潙仰宗이 시작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임제의현이 개창한 임제종의 一脈이다.
* 註1, 百丈懷海(749~814): 당나라의 禪僧으로 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이름은 懷海이다. 육조혜능, 남악회양, 마조도일에 이어 제9대 조사지만, 그 당대에는 대주혜혜가 더 유명했다.
福建省 福州 長樂縣에서 출생했는데, 西山慧照를 따라 삭발하고 衡山의 法朝律師 밑에서 具足戒를 깨우쳤다. 그 후 廬江의 부차사에 들어가 그곳의 藏經閣에서 大藏經을 연구하였다.
그 후 백장은 767년 경에 南康에서 馬祖道一을 만나 사사하였다. 마조 밑에서 修道해 大悟한 후에 백장산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고 교화하였다. 그 중에는 黃檗希運(註2)과 위산영우도 있다.
* 註2, 黃檗希運( ?~850): 당나라 때 스님으로 백장 선사의 지도를 받고 玄旨를 통달하였다. 시호는 斷際이다. 흔히 황벽단제 선사로 알려져 있다.중국 선종 제10대 祖師로 제9대 백장회해로 부터 의발을 전수 받은 후 11대 임제의현(註3)에게 傳燈하였다. 복건성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홍주 황벽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志氣가 왕성하였다. 이마에 작은 혹이 있었고, 음성이 우렁찼으며 7척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한다.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고향 근처의 黃檗山에 있던 절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때 그는 어떤 큰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發心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 희운은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열흘째 되는 날 집을 나와 절을 찾아가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종릉의 용흥사와 848년에는 배상국(裵相國, 791~870)의 청으로 완릉의 개원사에도 머무르면서 찾아드는 學人들을 弟接하였고 황벽산에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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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은 절대 현재인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일 뿐"
황벽희운 선사가 일찍이 대중들을 흩어 보내고 홍주 개원사에 살았는데 당시 정승이였던 배휴 相國이 하루는 절에 들어와서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원주에게 물었다.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원주가 말하였다. “고승입니다.” “형상은 볼 수 있으나 고승은 어디를 갔는가?” 원주가 아무 말을 못하였다. 배휴가 말하였다. “여기에 선사는 없는가?” “희운 상좌라는 이가 있는데 아마도 선사 같습니다.”
배휴가 드디어 황벽 선사를 불러서 앞에서 원주에게 물었던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황벽 선사가 말하였다. “다만 묻기만 하라.”
배휴가 말하였다. “형상은 볼 수 있는데 고승은 어디에 갔습니까?”
황벽 선사가 “배상공!”하고 부르니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벽 선사가 말하기를,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고승이 여기 있어 대답하네.”
이 말을 듣고 배상공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黃蘗運禪師 曾散衆 在洪州開元寺 裵休相國 一日入寺 見壁間畵相 問院主云 壁間是什 主云高僧 休云 形儀可見 高僧向甚處去 主無語 休云 這裏莫有禪和 主云 有希運上座 頗似禪和 休遂召師 擧前話似之 師曰但請問來 休云 形儀可見 高僧向甚處去 師召相公 公應諾 師曰 高僧在者裏 公於言下 領旨)
<직지>에 인용한 배휴 상국과의 대화는 대단히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天子 다음가는 높은 벼슬인 相國(宰相.정승) 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찰을 參訪하였다. 절을 관리하는 원주로서는 당연히 사찰의 이곳저곳을 안내하였을 것이다. 크고 작은 법당들을 다 돌아보고 나서 아마 마지막으로 조사전에 들렸다가 위와 같은 불교사에 길이 빛나는 명언을 남겼던 것이다.
사람을 대신해서 영정이나 사진을 모셔두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사진은 여기에 있는데 그 사진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시장에나 이웃에 갔다고 대답할 것인가?
진정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사진의 그 사람은 누구며, 그를 묻는 사람은 누구며,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은 또 누구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누구인가?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이며, 이 글을 읽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어떤 대답도 그것은 주변을 헤매는 일이다. 중심의 일은 아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주시하라. 묻고 대답하는 나 자신을 주시하라. 일체 사물을 보고 일체 소리를 듣는 나 자신을 주시하라. 그곳에 답이 있다.
황벽 선사가 배휴를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였다. 황벽 선사가 말하였다.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고승이 여기 있어 대답하네.”
존재하는 것은 절대 현재인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일 뿐이다. 그도 나고 너도 나고 나도 나다. 지옥도 극락도 지금 여기 나다. 시방세계와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여기 나다.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성문 연각 보살 불, 4聖, 6凡 모두가 지금 여기 나다.
* 註3, 臨濟義玄(?~867), 臨濟 또는 義玄은 당나라의 禪僧으로 俗性은 형(邢), 산동성 曺縣 사람이다. 禪宗의 일파인 臨濟宗의 始祖로 黄檗希運을 이어, 중국 선종 11대 조사이다.
그의 조계종은 우니나라 조계종의 母胎가 된다.
그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인 三聖慧然(?~?)이 편집한 《임제록》은 臨濟宗의 기본이 되며 또한 실천적인 禪의 진수를 설파한 책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해서 임제록, 벽암록, 허당록, 선관책진, 육조단경, 서장, 오가정종찬을 宗門七書 또는 宗門의 七部書라 부른다.
"一日不作 이면 一日不食하라[하루 일하지(作) 않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는 百丈의 말은 그의 禪風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로, 그는 百丈山에 律院에서 독립한 禪院을 창설하고 律典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禪宗의 독자스러운 규율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이 《百丈淸規》이다. 당시 많은 수도승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자급자족하는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는데 《백장청규》는 이런 변화에 부응했다.
潙山 靈祐는 후대에 위산 선사로 더 잘알려졌는데, 그는 사실 백장 스님의 계승자로 선택받았다. 그리고 훌륭한 선사답게 아주 겸손했다. 그래서 백장의 門下에서 수행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문下에서 계속 수행을 이어 가고 싶어 하는지 물어볼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그 중에 백장 선사 아래에서 약 2년간 공부하고 있었던 나이가 꽤 어린 승려가 한 명 있었는데, 그 나이 어린 젊은 스님도 영우 선사를 만났다.
潙山 靈祐는 그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젊고 총명한 스님이구나. 많은 불교 경전에 대해서 아주 해박하다고 들었다.”
사실 이 젊은 승려는 모르는 경전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새 주지에게도 자신의 명성이 알려져서 매우 기뻤다. 이 젊은 승려는 百丈門下에서 고작 2년만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도량 내에서 자신이 잘 알려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香嚴 智閑(註4)’이다. 사실 이 일화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불교 국가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 註4, 香嚴智閑( ?~898)은 潙山 靈祐의 제자로서 어렸을 때 百丈 懷海에게 출가했다. 키가 7척이나 되고 아는 것이 많아서 학문에 있어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산 영우를 만난 후 敎學 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禪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父母未生前 本來面目[태어나기 전 본래 어떤 얼굴(누구)이었나요]?
'What is your original face?’
영우가 말했다.
“그래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는데, 아주 박식하다고 하더군. 하지만 난 그대가 이런 혹독한 선 훈련을 계속하고 싶어 할지는 확실치 않다네. 그대는 불경을 읽고 싶어 하지만, 우린 선 수행을 하고 싶어 하거든. 그래서 난 이런 환경이 그대에게 적절한지 그게 확실치 않아.”
그러자 젊은 향엄은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몇 년은 더 머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위산 영우는 젊은 향엄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질문하나를 주겠다. 그대가 그렇게 많은 경전을 안다고 하니, 이걸 한번 물어봐야겠다. 네 부모가 너를 낳기 전에 네 본래 얼굴( 本來面目 즉 누구)이 무엇이냐(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한두번쯤 話頭를 들어봤거나 화두에 대한 책을 읽어봤다면, 이 유명한 화두를 한번쯤 들어 봤을 테지만, 위앙종도 이렇게 화두를 시작했다. 위앙종의 창시자인 위산은 향엄을 깨우치기 위해서 화두법을 쓴 것이다.
이 젊은 승려는 지금까지 외운 모든 경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전을 외웠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위산에게 “아! 모르겠습니다. 제발 몇일만 말미를 주십시오. 제가 돌아가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서책을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3일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향엄은 방으로 돌아간 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책이란 책은 다 찾아보았지만 3일 후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향엄의 방은 수많은 佛經과 책들로 가득했고, 그는 그 내용을 다 읽고 파악하고 있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 주지인 영우에게 돌아가서 “스님, 죄송합니다. 답을 모르겠습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부디 그 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영우는 “물론 나는 답을 안다. 하지만 난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혼자서 그 답을 찾아내길 바란다”라고 했다. 이 젊은 스님은 3일 동안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신경이 아주 긴장된 상태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주지는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자길 웃음거리로 만들고, ‘난 답을 알지만 너한테는 말해주지 않겠다’라고 말하니 氣가 막혔다.
이런 간단한 질문조차 답할 수 없었던 향엄은 ‘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할 줄이야. 내 지난 세월 동안 했던 공부가 무의미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던 經典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떠돌이 승려가 됐다. 배고픔을 겪고, 목마름도 겪어야 했으며 사람들의 비웃음도 견뎌내야 했다. 그는 떠돌아다니면서 추위와 더위도 참아냈다. 그는 그렇게 수년을 떠돌아다녔다.
이런 향엄의 旅程은 慧忠 國師(註5)의 무덤에서 마무리 된다. 그가 당도해보니, 혜충 국사의 무덤이 너무 황폐하고 흉한 모습이었기에 향엄은 ‘내 삶에 남겨진 마지막 일로 삼고, 여기 남아서 국사의 무덤을 돌봐야겠다 '라고 결심하고, 그때부터 무덤과 주변을 치우고 정리해서, 보기 좋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만 있었으니 “부모님이 낳아주기 전 내 본래 면목은 무엇이였을까?” 였다.
*註5, 南陽慧忠(?∼775): 당나라 때의 스님으로16세에 6조 혜능의 문하로 출가하여 육조 혜능을 따라 배우고 그의 法을 이었다. 혜능으로부터 心印을 얻자 南陽 白崖山 黨子谷에 40년간 머물면서 수행과 교화를 하였으며, 유명해지자 황제의 초청으로 入京하였다. 그 후 18년 이상을 帝都에 머물면서 국사를 역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安史의 亂으로 피폐해진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다양한 불사를 일으켰다. 혜충의 禪思想은 見聞覺知의 性에 대한 비판, 無情佛性과 無情說法, 불성의 생멸과 無心 등으로 기본적으로는 혜능이 지은 '六祖壇經'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無情佛性’과 ‘無心’ 등의 사상은 오히려 육조단경의 선사상을 向上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후대의 조사선에서는 ‘無情佛性’과 ‘無情說法’, 그리고 ‘無心’의 사상적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혜충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六祖가 입적하신 후에 여러 산에 두루 머물렀는데 五嶺의 羅浮山과 四明의 天目山을 거쳐서 南陽의 白崖山 黨子谷에 들어가 40여년을 산문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唐 숙종 상원2년(761) 肅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칙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예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끝내 내려가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唐 玄宗과 肅宗 및 代宗의 세 임금에게 더욱 두터운 歸依를 받아 玄宗⋅肅宗⋅代宗의 三帝의 國師를 지냈고, 항상 담박한 본성 그대로 천진자연을 즐기었으며, 오랜 훗날에 까지 수행자로서의 고고한 모범을 보인 분으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청원행사선사, 남악회양선사, 하택신회선사, 영가현각선사 등과 함께 六祖慧能 문하의 五大宗匠으로 추앙받았다.
당시에 많은 禪僧들이 혜충국사를 찾아뵙고 공부를 점검받고자 하였는데, 이는 혜충국사가 쌍봉산에서 육조 혜능으로 부터 직접 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當時 六祖께 법을 받는 僧으로는 南岳懷讓, 靑原行思, 하택 神會, 영가 玄覺, 南陽慧忠, 法海등 10여 명이다.
無情이란 곧 有情의 반대이다. 有情이란 곧 情이 있는 존재라는 말인데, 情이란 곧 五蘊으로 이루어진 모든 생명체를 일컫는다. 따라서 스스로 지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흔히 불교에서는 ‘情識’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뜻을 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정이란 반대로 지각하는 의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글자로 보면 매우 평이해서 무정을 그저 無情物 정도로 기와조각이나 자갈, 돌맹이 정도로 여기기 쉽다. 아니면 반대로 두두물물이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했으니, 무정이 곧 불성이고 보배라고 헤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혜충국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한 생각으로 상응하는 것입니까?"
"기억하는 것과 지혜를 함께 잊는 것이 곧 한 생각으로 상응하는 것이니라."
"기억하는 것과 지혜를 함께 잊으면 누가 부처를 봅니까?"
잊어버리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없으면 곧 없다고 말하는데 어찌 부처가 된다고 말합니까?"
"없는 것은 또한 텅 빈 것이요, 부처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없는 것이 곧 부처요, 부처는 곧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느니라."
"마음 쓸 것이 없으면 成佛합니까?"
"마음 쓸 것이 없으면 저절로 성불이니 부처도 또한 무심이니라."
"부처님은 대단히 불가사의한 분이라 능히 중생을 제도하시니 만약 무심하다면 누가 중생을 제도하겠습니까?"
"무심이 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라.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보면 곧 이것은 유심이니 완연한 생멸이니라."
혜충국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상응할 수 있습니까?"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불성을 보느니라. 또한 부처와 중생을 일시에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곧 해탈이니라."
禪法이 크게 흥성했던 중국 唐代의 역사를 잠깐 보면, 3代 高宗이 죽고 나서 고종의 皇后인 측천무후가 중종과 예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帝位에 올랐던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덕 높은 큰스님을 國師로 모셔서 사심 없는 지혜의 眼目으로써 善政을 펴려고,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던 慧忠 선사와 神秀 대사 두 분을 請했다.
慧忠 선사께서는 白崖山에서 40년 동안 내려 오시지 않고 修道에만 전력하셨는데, 무후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서 간청하므로 하는 수 없어 내려왔다.
무후는 이 두 큰스님 가운데 道가 높은 한 분을 추대해 모셔야겠는데, 자신은 識見이 얕아 두 분의 지혜의 안목을 판가름할 수가 없는지라,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묘책을 냈다. 시녀를 시켜서 두 큰스님의 목욕시봉을 들게 한 것이다.
시녀들이 목욕시봉을 다 해드리고 나서 그 과정을 사실대로 말하자 측천왕후가 듣고는,
"물에 들어감으로 인해 장한 분을 보았도다."
하고 혜충 선사를 國師로 모셨다.
그리하여 혜충 선사는 측천왕후 때부터 현종, 숙종, 대종에 걸쳐 국사가 되셔서 널리 敎化를 베풀었다.
세 天子가 다 信心이 돈독했는데, 특히 숙종은 그 신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아침 조회 때마다 국사를 모셔와서 신하들과 함께 법문을 들었는데, 이 때 항시 친히 가서 예를 올리고 손수 말고삐를 몰아서 모시고 왔다 한다.
하루는 肅宗 황제가 혜충 국사 처소를 방문하여 한 가지 請을 드렸다.
"西天에서 온 大耳三藏이 他心通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다고 하니 스님께서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그래서 국사께서 대이삼장을 불러 물으시기를,
"그대가 타심통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다고 했는가?"
하니, 대이삼장은 "그러하다"고 답했다.
국사는 잠시 동안 가만히 계시다가 물으시기를,
"老僧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고?"
"스님께서는 一國의 스승이시거늘, 어찌하여 蜀川 강 위에 배들이 경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시옵니까?"
국사께서 또 잠시 가만히 계시다가,
"지금은 老僧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고?"
"스님께서는 一國의 스승이시거늘 어찌하여 天津橋 위에서 원숭이들이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국사께서 또 잠시 계시다가 물으셨다.
"지금은 노승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고?"
대이삼장이 이번에는 아무리 찾아도 마음 있는 곳을 찾지 못하여,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습니다."
하자, 국사께서 큰 소리로
"他心通이 어디에 있는고?" 하고 꾸짖으셨다.
그러면 두번째까지는 정확히 알아 맞췄는데, 세 번째 물음에서는 왜 알지 못했을까?
大耳三藏뿐만 아니라, 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도, 혜충 국사께서 마음 두신 곳을 바로 보기가 어렵다. 修行이 깊어 無心의 三昧에 들 것 같으면, 귀신도 보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다 보지 못하는 법이다.
후일에 어느 스님이 '無'字 話頭와 '狗子無佛性’ 및 ‘庭前栢樹子'로 유명한 趙州 從諗에게 여쭙기를,
"국사께서 세번째는 어디에다 마음을 두셨기에 大耳三藏뿐이 보지 못했습니까?"
하니, 조주 선사께서는
"삼장의 콧구멍 위에 있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보통 앉아서 명상할 때도 ‘근심을 잊어야지', 또는 ' 돈을 더 벌어야지’하고 잡생각을 하지만, 향엄은 오직 본래면목에 대한 답만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날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가 돌 하나가 대나무에 날아가 부딪쳐서 “탁”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즉시 깨달았다. 소워 '香嚴擊竹'이다. 그는 당시 깨달은 선사들이 의당 그러
하듯이 그 깨달은 순간에 대해서 悟道頌(註6)을 읊었다. 이같이 완전히 전념해서 一心으로 열심히 하면 놀랍게도 喝, 무언가 깨지는 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로 만으로도 眞理를 꿰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 註6, 悟道頌: 高僧들이 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지은 詩歌.
이것이 향엄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로, 그가 온종일 한 것은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말한
"dubito, ergo cogito, ergo sum 두비토, 에르고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처럼 ‘疑問이 있어. 이 의문을 풀어야 해!’가 전부였는데, 이것이 바로 禪이다.
그리고 그는 깨달은 후 오두막에 돌아가서 沐浴齋戒 후 衣冠整齊한 다음 潙山 靈祐를 향해서 고마움의 절을 올리고 나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香嚴智閑의 悟道頌>
一擊忘所知(한번 쳐서 알았던 것을 잊으니)
更不自修持(다시 더 닦을 것 없구나)
動容楊古路(속내를 움직여 옛길을 드러내고)
不墮悄然機(근심의 갈림길로 떨어지지 않도다)
處處無蹤迹(이르는 곳마다 자취가 없으니)
聲色外威儀(성색 밖의 위의로다)
諸方達道者(모든 방향에서 도를 아는 이라면)
咸言上上機(최고의 根機라 부르겠지)
이게 과연 깨친 것일까?
그리고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에 대한 답이 될까?
判斷은 이글을 읽은 이들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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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에 다닐 때 보일러가 작동된다는 비유가 절묘합니다.
옥상밭의 상추가 저렇게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주인의 정성을 잘 알 수 있네요.
푸르게 자라고 있는 부추보다도 더 많은 의문이 있지만 너무 난해하고 앎의 깊이가 옥상 밭두께여서
글을 읽고 이해하기도 벅차네요.
그래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필요한듯 합니다.
잘 지내시지요?
감사합니다.
혹한기 감기 조심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많이 배웁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고운 저녁되세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
나는 누구인가?
죽을때까지 답을 얻기 힘든 화두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맞아요.누구도 알지못하는 답이라서리..
고운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