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스님이 들려주신 일곱 번째 이야기 -마음의 달을 비추다-
법명은 중원(重遠)이며, 법호가 한암(漢岩)인 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속성이 방(方)씨였다 스님은 아홉 살 때 처음 서당(書堂)을 다니며, 사략(史略)을 배우던 중 ‘태고에 천황(天皇) 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盤古)씨가 있었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를 선생에게 물을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한다. *반고(盤古)씨는 중국 전설상의 천자(天子). 천지개벽 때 처음 태어났으며, 부부(夫婦) 음양(陰陽)의 시초 (始初)요 천지만물의 조상(祖上)이라 함 이때부터 세상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의문을 갖게 된 소년은 이후로도 10여 년 동안 그 근원적인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유교경전을 공부하다가 22세에 금강산 구경도중에 돌연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행름(行凜)스님을 은사로 출가(出家)했다 한암 스님은 이때 수도를 시작함에, ➀진정한 나를 찾고, ➁부모의 은혜를 갚으며, ➂극락에 가겠다는 세 가지 원을 세웠다. 이후 금강산을 떠나 그의 나이 24세 때인 1899년 경북 성주 청암사(靑巖寺)에 머물 때 운명처럼 근대 선의 중흥조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을 만났다. 그때 경허 스님는 해인사에서 조실로 있었는데, 청암사 조실인 만우당(萬愚堂)과 각별한 사이어서 찾아온 것이다. 이에 만우당은 경허에게 <금강경>을 강론해달라고 청을 했다. 경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는 <금강경>에 대한 경허의 강의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리고 경허 스님의 <금강경> 설법 중 한암 스님은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줄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대목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맛보았다. 훗날 경허 스님의 설법을 듣고 홀연히 안광(眼光)이 열리며 점차 우주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토로했다. 이때 비로소 유년시절부터 품었던 ‘반고씨 이전의 면목’을 깨달은 것이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경허 스님은 한암이 달여 올린 차를 마시다가 문득 차 시중을 들고 있는 한암에게 묻는다.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에 비가 내린다.” 밑도 끝도 없는 경허 스님의 한마디에 묵묵히 시중을 들고 있던 한암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답했다.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墻)이 앞에 와 있습니다.” 이에 경허 스님이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며, 한암을 몰래 훔쳐 가다시피 해서 해인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어느 날 해인사에서 경허 스님이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원선화(遠禪和,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지났다”고 공표함으로써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한암 스님은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읽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깨달음을 얻어 법의 눈이 열 (1) 렸다. 1905년 봄, 30세의 젊은 나이로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들어간 후 후학을 지도하고 석담(石潭)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한암(漢岩) 스님은 수행을 ‘소 치는 구도 행’이라고 비유하며,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설파했던 근대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일명 ‘오대산 도인’, ‘오대산의 학(鶴)’이라 불린 한암 스님은 일체의 외부출입을 금하며 오로지 수행에 매진해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수많은 납자들에게 존경받아온 시대의 선지식이었다. 스님은 청정율의(淸淨律儀)를 하며 참선수행 하는 납자들을 위해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➀참선, ➁염불, ➂간경, ➃예식, ➄가람수호 등 승가오칙(僧伽五則)을 제시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한암 스님은 경허 스님 법맥을 잇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참선만을 유일한 공부로 삼지 않았다. “경(經)은 노정기(路程記)요, 선(禪)은 행(行)함이다.”라고 했다. 혼자 공부하는 ‘독(獨)살이’의 병폐를 경계하고, “절집을 떠나지 말라”며 대중처소에서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대중과 떨어져 정진하면 아무래도 공부에 소홀해지고, 생활이 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나의 공부’를 격려하고 나태함을 경계하는 좋은 벗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1910년 선사의 나이 35세에 선원을 해산하고 평안북도 맹산의 우두암으로 들어가 조용히 참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열심히 참선하는 도중에 어느 날 불을 때게 되었는데 타오르는 그 불길을 보고 깨침을 얻어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시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착화주중안홀연(着火廚中眼忽然) ― 부엌에서 불 지피다 홀연히 눈 밝아지니 종자고로수연청(從玆古路隨緣淸) ― 이로부터 옛 길이 인연 따라 분명해지네. 약인문아서래의(若人問我西來意) ― 만약 누군가 나에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다면 암하천 명불습성(岩下泉鳴不濕聲) ― 바위 아래 샘물 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50세가 되던 1925년 봉은사 조실을 맡았으나 곧 그만두고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27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오대산 학’으로 불렸다고 한다. 다음은 한암스님께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면서 지은 시(詩)이다.
입오대산상원사시(入五臺山上院寺詩) 영위천고장종학(寧爲千古藏踵鶴) ― 차라리 천년 세월 자취 감춘 학이 될지언정 불학삼춘교어앵(不學三春巧語鸚) ― 봄 한철 아양 떠는 앵무새는 되지 않으려네. 이 무렵 조선 불교는 일제 당국에 의해서 일본 불교로 편입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서울 근교 봉은사에 있으면서 여기에 부역하거나 방관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던 참에 마침 한암 스님에게 와주십사 하는 청이 있어 오대산에 들어간 것이다. 상원사(上院寺)로 주석처를 옮긴 뒤 스님 문하에서 정진하려는 수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고성 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금강산 유점사 등 강원지역 3본사가 공동으로 수련원을 개설하면서 대중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산간 오지의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상원사(당시는 상원암)가 수행의 중심도량으로 떠올랐다. (2) 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상원사 살림으로 ‘먹고 사는 일’이 숙제였다. 큰절에서 보내오는 1년 치 식량은 쌀 4섬에 불과했다. 비록 생사를 넘나드는 공부를 하지만 무조건 굶을 수는 없었다. 식량을 마련하는 일은 큰 문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병자(病者)가 생겼을 경우였다. 사중에서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겨울이 되어 오솔길까지 막히면 더욱 난감했다. 이처럼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조실 방에 있는 꿀단지의 뚜껑이 열렸다. 쾌유를 기원하는 스님의 따뜻한 정과 함께 꿀 한 그릇이 전해졌다. 그러나 스님은 당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꿀단지를 열지 않았다. “벌 수십만 마리가 열심히 일해 만든 공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결국 조실 방의 꿀단지는 대중들의 비상약이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오대산에 나타나면서 국군이 주둔했다. 간혹 군인들이 상원사 계곡에서 밥을 지어 먹는 일이 있었다. 군인들이 밥을 먹고 난 뒤 계곡 곳곳에는 생쌀과 밥풀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이 버린 밥알을 모두 주워 씻어 먹었다. “쌀 한 톨이 썩어 나가면 그만큼 복(福)도 따라 나간다”며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했던 스님이다. 음식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제자들이 가끔 찢어진 상추잎 등을 버리면, “먹을 수 있는데 왜 버렸냐. 이 보다 못한 풀도 먹는다”는 경책을 들어야 했다. 치약은 고사하고 소금으로 양치하는 일도 상상 못했다. 버드나무 가지를 다듬어 양치를 대신했다. “참선 염불 간경 예식 가람수호는 승려의 덕목이고, 허욕은 망신이고 고집불통은 패가 된다”며, 화합을 강조하셨다. 한암 선사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25 때 상원사를 지켜낸 일이다. 1⋅4 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북한군의 은신처로 이용할 것을 우려해 오대산의 모든 절을 태우고 상원사마저 불태우려 했을 때, 한암 스님이 법당에 좌정한 채 “절을 태우려면 나와 함께 불 지르라”고 호통을 쳐, 이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하나 떼 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됐으나 상원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군의 상원사 소각을 막은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경허(鏡虛) 선사의 무애행(無碍行)이 화제에 올랐다. 그라나 훗날 경허의 제자 한암 스님은 뭍 승려들을 향해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라고 경책했다. 이러한 한암 스님의 경책은, 서투르게 깨달아 경허 스님의 행리처럼 무애행이라는 탈을 쓴 이행(異行)을 흉내 내지 말라는 말이다. 고승들이 보여준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잡승들의 오류로 확장될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무애행(無礙行)이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하는 삶을 일컫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라는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원래 무애(無礙)는 ‘나와 너’라는 경계를 짓지 않고, 만유가 적멸의 상태에서 하나가 됨을 통찰하는 데서 나온다. (3) 하지만 이도 기초적인 각성에 해당할 뿐 무애의 심오한 가르침은 높은 보살과(菩薩果)에서나 운위될 고차원적인 문제다. 무애(無礙)의 공간은 탐ㆍ진ㆍ치의 중생심에 의한 세속제(世俗諦)가 아니라 청정한 마음에 의한 승의제(勝義諦)를 의미한다. 승의제는 허공과 같아서 무애한데, 세속제는 탐ㆍ진ㆍ치의 먼지가 많아 무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오욕락(五慾樂)을 즐기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격이라고 했다. 남과 나를 경계 짓지 않고 남과 내가 걸리지 않을 때 무애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코 중생심의 구도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더욱 더 망상만 일고 자신을 세속의 족쇄와 굴레 속에 얽매이게 할 뿐이다. 한말(韓末) 무애행으로 시비를 불러일으킨 경허(鏡虛) 선사의 솔직한 게송을 들어보자. 이치는 단박에 깨치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도다. 단박에 깨달아 내 본성이 부처님과 동일한 줄은 알았으나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1941년 조계종이 출범됐을 때 한암 스님은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돼 4년 동안 조계종을 이끌기도 했다. 1943년 여름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 오대산에 왔다. 만공 스님이 일주일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 한암 스님은 동피골 외나무다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만공 스님이 “한암 스님!”이라고 부른 뒤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 돌을 주워든 한암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개울로 던졌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두 어른의 법거량이었다. 그 뒤로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은 만나지 못했다. 경허 스님 법맥을 이어 덕숭산과 오대산에서 회상을 이룬 두 어른의 만남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일제 강점기말(末) 이른바 ‘대동아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은 패색이 짙어지면서 초조해졌다. 일왕(日王)은 명사들에게 사자를 보내 승전을 기원하도록 했다. 이에 조선총독이 스님을 경성으로 초대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총독은 실권자인 정무총감을 상원사에 보냈다. 스님 앞에 앉은 정무총감이 말문을 열었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는데,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미국이 이긴다고 하면 총독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일본이 이긴다고 하면 민족 앞에 죄를 짓는 순간이었다. 모두 마음을 졸였다. 스님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깁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 정무총감은 오대산을 내려와야 했다. 스님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지도했다. 잘못하면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야단을 쳤다. 그러나 재가불자는 자상하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 와도 스님은 온화한 음성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절을 하며 인사드리면 스님은 어김없이 맞절을 했다. (4) 돌아갈 때면 마당까지 나와 배웅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스님이다. 서릿발 같은 수행과 인자한 성품으로 부처님 향기를 전한 한암 스님은 6.25 사변으로 국내가 아직 시끄러운 1951년 3월 22일 아침에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무언가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오늘이 음력 2월 14일이 아니냐?’ 라고 묻더니, 스님은 자신의 세연이 다했음을 알고 깨끗한 가사와 장삼을 손수 찾아 입고 선상(禪床) 위에 올라앉아 태연한 모습 그대로 좌탈입망(坐脫立亡) 하셨는데, 그때 선사의 세수 75세, 법랍으로는 54세였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본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돼있다. 맑고 깨끗한 계행과 넓고 깊은 학문 그리고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진으로 수행을 해 승가의 참 모습을 보여 준 한암(漢巖) 스님이었다. 한암문도회(회장 현해스님)와 오대산 월정사(주지 정념스님)는 어른 스님의 선양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방향을 제시한 한암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한 출가사문의 나침반이다. 스님의 대표적인 유고로는 <선문답 2조>, <참선곡> 등이 있다. 한암 스님의 오도송이라 알려진 시가 또 한편 있다.
각하청천두상만(脚下靑天頭上巒) 다리 밑에 푸른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산(둥근 봉우리)이 있구나. 본무내외역중간(本無內外亦中間) 본래 안이다 바깥이다 또한 중간이다 하는 것은 없는 것 파자능행맹자견(跛者能行盲者見) 절뚝발이가 걸을 수 있게 되고 눈먼 이가 볼 수 있게 됨이여 북산무어대남산(北山無語對南山) 북쪽 산이 아무 말 없이 남쪽 산을 마주하고 있구나 머리 위에 있어야 할 하늘이 다리 아래로 가 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는데 머리 위에 산이 있다. 밤이 되면 별들도 발아래 주르륵 펼쳐졌을 것이다. 안과 밖과 중간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안과 밖과 중간은 그대로 유지되기도 한다. 절뚝발이가 갑자기 걸음을 걷게 되고 눈먼 이가 별안간에 사물을 볼 수 있게 돼 무슨 일이 크게 일어날 것 같지만 북쪽 산은 말없이 남쪽 산을 마주 대하고 있다. 본래 아무 일 없는 자리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실상(實相)은 여여한 것이다.
출처/한암 중원스님 이야기 작성자 아미산
아미산님 성불(成佛)하십시오
(5) 마음의 달을 비추다 이 얼마나 오묘(奧妙)한 말씀인가,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말씀과 무에 다른가, 나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구름에 달 가듯 그렇게 구름 속을 헤집듯 세속(世俗)을 헤집으며 살아가는 나는 지금 어디로 향(向)하는 것인가, 한반도(韓半島)에 깔린 경부선(京釜線) 철길 위의 어느 한 기점(基點)에서 생존(生存)하는 내 삶의 끝은 어디쯤일까?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고향버드나무 숲으로 오르고 싶기도 했고, 이것저것 다 팽개치고 산중절간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도저도 다 시 놓치고 때 놓쳐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인간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중생(衆生)을 남아, 어쩌거나 때 좀 덜 무쳐보겠노라 버둥거렸지만, 연탄창고 들락거린 흰옷 같다 내 태어날 땐 상머슴 둘 꼴 머슴하나에 황소두마리가 농사일을 하는 부잣집 손자로 태어났다 다섯 살 6.25 피란길에서 살아왔고, 경찰가족은 사돈의 팔촌까지 씨를 말린다는 빨갱이들의 잔혹한 횡포에도 천명(天命)으로 살아남아, 골수(骨髓)에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의 제일이다 아버지가 예천경찰서에서 다인지서로 근무지를 옮겨, 다인지서 관내 비봉산 대곡사를 순찰하던 중에 작은 외할머니가 주지승(住持僧)으로 계시는 대곡사에 기거(寄居) 할 때, 열아홉 어머니를 만나 태어난 목숨이라, 내 가슴엔 불도(佛道)의 향이 타고, 내 귀엔 언제나 목탁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걸 모른 체하고 이교도(異敎徒)를 따라 삶이 곤궁(困窮)했다 태어날 땐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4.19의 회오리바람에 가문(家門)은 풍지박살이 나고, 사춘기(思春期)는 허황된 꿈을 잡으려 방황했다 골통소리를 들었고, 망나니란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군(軍)에 지원을 해 들어가 빡세게 인생 공부를 하고 전역(轉役)을 해, 사회일원(社會一員)이 되었지만 삶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사업실패를 하고, 두 번이나 죽는 연습을 했다 부모형제도 친지(親知)도 벗도 손 벌리려는 사람은 싫어했다 막 돌 지난 아들과 아내를 처갓집에 마껴 놓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집을 나섰을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죽기를 작정하면 못 할일도 없었다. 그렇게 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겠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오뚝이였다. 엎어지면 일어나고 일어나면 또 엎어지고, 그러다 사업(事業)이란 걸 걷어치우고 월급쟁이를 시작했다 정말, 천직(天職)이라는 것이 있었다. 시내버스운전무사고경력 16년으로 개인택시면허를 취득했다 삶, 정말 요지경(瑤池鏡) 속 같았다 내 죽네 사네 할 때 부모형제들도 외면할 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친구가 쌀 한 가마와 연탄 500장을 사줘 그 겨울을 살았는데 내 살만할 쯤, 그 친구 부도(不渡)를 맞아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해 줄 닫는 데는 다 수소문(搜所聞)을 했지만 찾지를 못하고, 지금 것 그 빚을 마음의 빚으로 끓어 앉고 산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늘을 살면서 좀 있다고 좀 배웠다고, 사람 없이 여기는 사람을 보면, 그 벌(罰)을 어찌 감당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우리 흔히 하는 말로 돈은 돈다고 돈이고, 담배는 다음 배로 온다고 담배라고 했다고 하면서 돌고 도는 인생사(人生事)엔 너무 무심들 한 것 같다 우리 심심찮게 하는 말로 인생은 한방이다. 한방블루스다 하지 않는가, (6) 밤새안녕이란 말은 또 어떤가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사를 놓고, 너무 야박하고 너무 야속하게 살 일은 아닌듯하다 곁에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을 귓등으로 듣고 이별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주어도주어도 부족하고 사랑하고 사랑해도 늘 모자란 듯한 게 사랑이다 말 잘해 뺨맞는 사람 없고, 나누고 베풀어 욕(辱) 먹는 사람 없다 그림자는 빛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둠에도 그림자가 있다. 다만 그 그림자가 잠시 숨었을 뿐..... 해를 짊어지고 걷는 사람은 제 그림자를 밟아야하지만, 해를 가슴으로 품고 걷는 사람은 제 그림자가 뒤따르듯,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도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과보(果報)가 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선인선과악인악과(善因善果惡因惡果)의 인과응보가 그것이다 아무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도 진짜가 가지고 있는 값어치는 가질 수가 없는 것처럼 아무리 비단 같은 거짓말일지라도 그 민낯은 숨길 수가 없다 그 어떤 꽃이나 꽃은 아름답다. 허지만 꼬깃꼬깃 접은 종이꽃은 꼬깃꼬깃 접힌 깃마다 아름다움이 가식(假飾)으로 접혀, 향기가 없고 화폭(畫幅) 속의 그림 꽃도 아름답지만 물길로 뻗은 뿌리가 없어, 한번 피면지지 못 한다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동물(動物)이라 요물(妖物)이다 저마다 천사(天使)인척 하지만 악마(惡魔)이고, 백로(白鷺)인척 하지만 까마귀다 삶을 속이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가난은 죄(罪)가 아니라 했다 욕심 많은 부자(富者)가 극락(極樂) 가는 것보다, 가난한 거지가 극락 갈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 이유인즉, 거지에겐 탐욕(貪慾)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한 많은 선사(禪師)와 부처의 몸으로 행(行)하는 많은 불제자(佛弟子)들 그들은 세속(世俗)에서 탐욕을 버리려 정진(精進)해왔다 올 때 인간의 몸으로 와 갈 때 짐승의 몸으로 가서야 되겠는가, 그리해 인간들에게 신앙(信仰)이 필요했든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번뇌(煩惱)가 여간 무겁지 않다 어머니 열아홉에 나를 낳으셨고, 내 아내 열아홉에 큰 아들을 낳았는데 어머니는 내 생일날 아침에 저승가시고, 아버지는 아들 생일날 저녁에 이승을 떠나셨다 이게 우연(偶然)일까?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우연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내가 아내와 전국 고찰(古刹) 100 군데를 찾아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經驗)하고 많은 것을, 깨우쳤다 예(例)를 들면, 시야(視野)가 밝아지고, 만사형통(萬事亨通)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돌이키면, 그때처럼 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열일곱 고2둘째를 불의의사고로 가슴에 묻고, 방황하며 생각했을 때는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목마를 때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려 해도 말이 어여쁘지 않으면 얻어 마실 수 없고, 길을 잃고 헤맬 때 말이 공손하지 않으면, 올 바른 길을 인도(引導) 받지 못하듯, 우리가 한 세상을 살면서 혼자살 수 없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꾸밈이 없고 원만해야 서로가 서로에게 신의(信義)를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7) 그러자면 먼저 내 마음이 어둠이 없어야 하고, 내 마음거울 속 내 모습이 흉물스럽지 않고, 추(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을 꽃이라고도 하고, 사람을 때론 짐승 같다고도 한다. 백년을 산다한들 하루를 잘 못 살면, 그 하루가 백년세월에 오명(汚名)이 되어, 죽어서까지 그 이름을 멍에지울 것이다
[블로그] 혜암의 시 향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반추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