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설날, 추석 등과 같은 전통 명절과 중요한 집안 행사에 음력을 사용한다. 집안 어른들은 음력이 표시된 달력을 좋아하는데, 이 달력에는 동지(冬至), 대한(大寒), 입춘(立春)이라는 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갑자년(甲子年), 을사일(乙巳日) 등의 간지(干支)도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음력 달력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순수한 태음력과는 달리, 태양태음력을 쓰고 있다. 달력을 만드는 역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태음력과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이 있고 달과 태양의 운행주기를 조정한 태양태음력이 있다. 우리나라 음력은 태음력과 태양력의 장점을 절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달력인 양력이 지배적인 요즘에도 우리나라 어른들이 음력을 고집하는 데에는 ‘살기에 편한’ 그 어떤 이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해 첫날 1월 1일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천문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다. 1989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 대신, ‘설날’이라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되찾고 3일 연휴를 즐기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음력은 양력보다 우리네 생활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 과학적인 역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근대 이후에 서양 중심의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상들이 쓰시던 시간 개념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시간 개념은 역법, 즉 달력 속에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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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각 문명권마다 시간을 나누고 헤아리는 방법은 달랐다. 먼저 해와 달의 운행이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이는 시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기준이 되었다.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해의 운행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또 어떻게 날짜를 세고 이름을 붙일 것인가, 얼마나 정확하게 주기적인 자연의 변화를 반영하는가 등이 고민거리였다. ‘60간지’로 불리는 60갑자(甲子)는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 지지(地支)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늘의 줄기’라는 뜻을 가진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고, ‘땅의 가지’란 뜻의 ‘12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이다. 60간지는 제1일을 갑자라 하고, 제2일을 을축, … 제60일을 계해라 하며, 계해에 이르면 다시 갑자로 돌아가는 60진법을 사용했다. 60주기는 동양에서 인간 생명의 자연스러운 한계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출생년도에 맞춰 뱀띠니 토끼띠가 결정되었고, 60년마다 또는 60일마다의 개념이 생성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 역법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사업이었다. 역법 제작의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의 유학자들은 하늘이 만물의 지배자로서 인간 중 한 사람을 뽑아 지배권을 주었는데, 그가 바로 중국 황제인 천자(天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천자만이 역법을 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면 새로이 역법을 제작해 그가 천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던 것이다. 『춘추』의 ‘하늘의 명을 받아 제도를 고친다’라는 ‘수명개제(受命改制) 사상’은 동양의 천문학과 역법을 크게 발전시켰다. 동양의 역법은 일과 월, 년을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 달력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다. 해와 달, 그리고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와 운행을 천구상에서 계산하고, 일월식을 예측하는 천체력이었다. 우주 구조와 천체 운동을 포괄하는 천문학까지 역법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고도의 수학적·천문학적인 원리가 가득한 전문 과학서적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조선의 역법 『칠정산 (七政算)』이라는 이름에서도 그 뜻을 알 수 있다. 칠정(七政)은 해와 달, 5행성 즉, 일곱 개 별의 운동을 계산해서 책으로 엮어 놓았다는 뜻이다. 동양의 역법과 천문학은 왕조와 황제의 권위를 보여 주는 학문이었다. 국가에서는 당대의 훌륭한 천문학자를 고용하여 보다 정확한 역법 제작에 힘을 쏟았다. 유럽의 경우, 1582년에 그레고리력으로 개정하기 직전에 율리우스력이 12일 정도의 오차가 있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태양태음력이 서양의 태양력보다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태양태음력은 달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진 음력 날짜와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계절 변화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역법에 절기가 도입된 것은 음력에 태양력을 절충시키기 위해서였다. 절기란 태양이 황도상에 위치한 곳에 따라 나누는 계절적 구분을 말한다. 대한, 입춘과 같은 절기는 계절의 변화에 나타내는 천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 세종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역법서 『칠정산』을 편찬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새로운 역법의 제정은 시대적 요구였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는 인간, 사회, 자연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원리였기 때문이다. 천리가 담겨 있는 천체 현상을 관측하고 그 규칙성을 역법으로 체계화하는 일은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용하던 중국의 역법인 『선명력』, 『대통력』, 『수시력』 등에서 계속 부분적인 오차가 드러났다. 이는 중국과 조선의 위도와 경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는데, 실제로 『대통력』에서 예보한 일식이 조선의 한양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세종은 역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즉위 초기부터 수십 년간에 걸쳐 새로운 역법을 추진했다. 1423년(세종 5년) 『선명력』과 『수시력』의 문제점을 찾으라고 지시한 후,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1433년에 정인지, 이순지, 김담 등에게 『칠정산』 연구에 착수할 것을 명했다. 동시에 천문 역법의 계산에 능통한 전문 관리들을 양성하고, 간의대와 혼천의 등 천문기기 제작도 함께 진행시켰다. 그 결과 1442년, 세종 24년에 이르러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 드디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
『칠정산』 내편은 원나라 『수시력』을 바탕으로 명나라 『대통력』의 장점을 보태어 만든 역법이다. 특히 조선의 하늘을 정확하게 반영해서, 이해하기 쉽고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역법의 체계를 재구성한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이었다. 상, 중, 하 3권으로 엮인 『칠정산』 내편은 상권 첫머리에 『칠정산』 편찬의 경위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고, 천체 운행의 기본 수치가 나온다. 이어서 1장에 역일(曆日), 2장에 태양, 3장에 태음, 4장에 중성(中星), 5장에 교식(交食), 6장에 오성(五星), 7장에 사여성(四餘星, 4개의 가상적인 천체), 그리고 끝에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매일의 해 뜨는 시작과 해 지는 시각, 밤낮의 시간표를 첨부했다. 특히 『칠정산』 내편에서는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들은 현재의 기준값과 소수점 여섯 자리까지 일치하는 정확한 계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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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 내편과 더불어 이순지, 김담 등 세종 대의 천문학자들은 『칠정산』 외편을 편찬해 냈다. 중국 역법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역법을 세우기 위해서는 또 하나 소화해야 할 역법이 있었는데, 바로 『회회력』이었다. 『칠정산』 외편은 명나라에서 수입한 『회회력』의 오류를 바로잡고 조선의 하늘에 맞도록 고친 역법서였다. 이 책에서 참고하고 있는 『회회력』은 이슬람 세계의 역법으로서, 고대 그리스 천문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의 역법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회회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회회력』은 그리스 천문학의 전통에 따라 그 각도 표시법부터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들은 이슬람 천문과 역법까지 통달하고 『회회력』의 한역본을 새로이 만들어 『칠정산』 외편을 완성해 냈다. 『칠정산』 외편은 그리스 천문학에 따라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한 새로운 기준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 방식은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칠정산』의 편찬은 곧 조선의 천문역산학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역법 전통과 이슬람의 역법을 완벽하게 소화해, 15세기 조선의 하늘을 기준으로 하는 독자적이고 새로운 역법을 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중국과 이슬람 문화권과 비교했을때, 『칠정산』을 완성해 낸 조선의 천문학 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에 사용된 도판은 『시간 박물관』(움베르토 에코, 에른스트 곰브리치, 크리스틴 리핀콧 외 지음, 김석희 옮김,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조선의 과학기술』(박상표 지음,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엮음, 현암사 펴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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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 |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에서 한국과학사를 공부했다. 현재 고려대와 서강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역사와 과학기술, 일상생활이 소통할 수 있는 작업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저서로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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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 10월 4일(목요일) 잠에 든 로마인들은 그 어떤 누구도 예외 없이 10월 15일(금요일)에야 깨어났다. 도대체 이 열흘 동안 로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혹시, 그 마녀? 공주의 생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앙갚음으로 아름다운 숲 속의 공주와 백성을 잠재웠다는, 그 마녀가 다시 로마에 나타나서 저주를 퍼부은 것일까? 그럴 리가…. 역사는 동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로마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평온하게 잠들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어났을 뿐이다. 단지, 달력에 열흘이 사라졌을 뿐! 태양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나던 달력의 날짜를 맞추기 위해 과감히 열흘을 없앤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그레고리우스 13세. 그는 1572년 로마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달력 개혁에 나서 마침내 10년 만에 율리우스 달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우스 달력을 도입하는 개혁을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그가 선포한 그레고리우스력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달력이 필요하다. 무인도에 상륙한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정착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자기만의 달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치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난 후, 인간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 씨를 뿌리고 수확할 때를 알기 위해 달력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달력은 계절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다. 사람들은 태양과 달, 별과 계절의 관계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절을 알려주는 데에는 태양만큼 편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양력이 시작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일 강가의 이집트 사람들이었다. 옛 이집트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1년이 365일인 것을 알았다. 나일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농부들에게 파종할 시기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간격이 대략 365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65는 나누기 힘든 불편한 숫자였다. 그래서 한 해를 360일로 간단히 정하고, 남는 5일은 오시리스 신화를 만들어 축제를 벌였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유쾌한 방법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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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인들은 매우 이상한 달력을 만들었다. 1년이 열 달에 304일이다가, 나중에 열두 달로 바뀐 다음에는 평년은 355일, 윤년은 382일이었다. 달력이 자연의 변화를 알려주지 못했을 뿐더러 1년의 길이가 제각각이어서 세금과 이자를 낼 때 불만이 생겼고, 관리의 임기도 들쭉날쭉했다. 기원전 45년, 로마의 권력을 잡은 율리우스 케사르는 이 달력을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이집트에서 쓰던 태양력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이 사용하던 달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문어(octopus)의 다리는 여덟 개이며 모세의 십계(decalogue)에는 열 가지 계율이 있는데, ‘october’는 8월이 아니라 10월이고 ‘december’는 10월이 아니라 12월이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원래 로마의 한 해는 지금의 3월(마르티우스, martius)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2월(아프릴리스, aprilius)에 끝이 났다. 그리고 8, 9, 10월은 각각 옥토베르(oktober), 노벰베르(november), 데셈베르(december)라고 불렸다. 그런데 새해에 집정관으로 취임하기로 되어 있던 율리우스 케사르는 빨리 취임하고 싶은 욕심에 새해의 첫 달인 마르티우스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당시 11월(야누아리우스, januarius)을 1월로 정해 버렸다. 이로 인해 두 달 씩 자리가 밀려나게 되었고, 결국 엉뚱하게 옥토버(october)가 10월이 되고 디셈버(december)는 12월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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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은 자는 시간도 지배한다. 율리우스는 달력 개혁을 기념해 7월에 자신의 이름 ‘율리우스(영어의 July)’를 붙였다. 율리우스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역시 권좌에 오르자 여덟 번째 달에 자신의 이름(영어의 August)을 올렸다. 그런데 여덟 번째 달은 ‘작은 달’이었다. 율리우스의 달인 7월은 31일인데 자신의 달인 8월은 30일 인 것을, 황제 체면에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원래 29일이던 2월에서 하루를 가져와 8월을 31일로 늘렸다. 덕분에 7, 8월은 연달아 큰 달이 되었다. 큰 달과 작은 달이 들쑥날쑥하고 이름이 제멋대로 바뀐 거야 대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왕 고치는 거라면 정확히 고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이집트의 과학자들은 시간의 길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실제로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2월 15일에는 24시간 15분 만에 지구가 한 바퀴 돌지만, 11월 1일에는 23시간 44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지구가 우리 편하라고 딱 24시간 만에 한 바퀴 돌지는 않듯이, 달도 정확히 30일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지 않고, 지구도 정확히 365일 만에 태양을 한 바퀴 돌아 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구가 공전하는 데에는 365일 하고도 5시간 48분 46초가 더 걸린다. 율리우스는 이 자투리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한 해는 365일에 대략 4분의 1일이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4년에 한 번씩 하루가 더 긴 윤년을 두었다. 비록 그 중 한 해를 11분 14초 더 길게 잡아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이 작은 오차가 대체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율리우스 달력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켰고 기독교의 확장과 함께 전 유럽으로 퍼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율리우스 달력에 대한 의심이 생겼고, 16세기가 되자 달력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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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부활절이었다. 태양력과 태음력의 요소가 모두 들어 있는 부활절은 매년 바뀐다. ‘춘분(3월 21일)이 지난 뒤 보름달이 뜨고 난 후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이 바로 부활절이다. 그런데 기원전 45년부터 율리우스가 간단히 무시해 버린 11분 14초가 매년 쌓여 부활절 계산을 힘들게 만든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옛 로마 교회에는 부활절을 계산하는 일을 ‘콤푸투스(computus)’라고 했는데, 이 말에서 오늘날의 컴퓨터(computer)가 나왔으니 당시 부활절 계산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만하다. 16세기에 이르자, 춘분이 달력에는 3월 21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은 3월 11일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열흘이라는 차이는 너무 커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달력이 필요했다. 그레고리우스 13세의 달력 개혁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단 오차가 생긴 열흘을 없애고, 윤년 규칙을 정교하게 바꾸었다. 새 규칙에 따르면 옛날과 마찬가지로 4로 나눌 수 있는 해는 윤년이다. 하지만 100으로 나눌 수 있는 해는 윤년이 아니고, 또 400으로 나눌 수 있는 해는 다시 윤년이 된다(그래서 지난 2000년은 윤년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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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항 없는 개혁은 없는 법, 저항이 없다면 그건 개혁도 아니다. 로마의 영향력에 있던 나라들은 로마와 함께 달력을 바꾸었지만, 개신교 국가나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는 율리우스 달력을 더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러시아는 1919년에야 새로운 달력을 도입했다. 이때는 달력의 오차가 13일로 벌어진 후다. 그래서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식은 11월에 열리고, 러시아정교회의 성탄절은 1월 7일이다. 모두 매년 쌓이는 ‘11분 14초’라는 작은 오차를 제때 수정하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나라는 음력 1895년 11월 16일 다음날이,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따른 양력으로 1896년 1월 1일이었다. 2009년 새해 달력에 불만 사진 사람들이 많다. 공휴일이 며칠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안으로 삼을 만한 사건이 있다. 18세기 말, 구체제를 몰아낸 프랑스 혁명가들은 미터법을 도입하면서 시간에도 10진법을 적용했다. 하루는 20시간이며, 1시간은 100분, 1분은 100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도 10일로 이루어졌다. 누가 봐도 간단하고 합리적인 달력이다. 그런데 이 달력은 프랑스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일주일이 10일로 바뀌지 않고 7일로 그대로 남은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 본문에 사용된 도판은 『시간 박물관』(움베르토 에코, 에른스트 곰브리치, 크리스틴 리핀콧 외 지음, 김석희 옮김,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달력 - 영원한 시간의 파수꾼』(자클린 드 부르구앵 지음, 정숙현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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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 한국과 독일에서 생화학과 유기화학을 공부했다. 『달력과 권력』, 『과학완전정복』 등의 책을 썼고, 『매드 사이언스 북』, 『색깔들의 숨은 이야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사, 과학기술과 문명 등을 강의하고 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