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은 주산인 북악산을 기준으로 낙산이 좌청룡에 해당되고 인왕산이 우백호에 해당되는 명당 자리라고 한다. 또한, 호랑이에 의한 호환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군대까지 동원해서 호랑이를 잡았지만 1901년에도 경복궁에 호랑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서 토끼한마리 안보이지만...
또 1968년에는 김신조 일당의 북한무장간첩이 인왕산을 질러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으로 93년도까지 출입이 통제되기도 한 곳이다.
독립문역에서 내려 인왕산국사당 방향으로 (눈에 띄는 간판이 없다. 물어보는게 낫다) 아이파크 아파트의 오른쪽 길로 조금 올라가면 아래 그림과 같은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치며 왼쪽 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면 인왕산 국사당으로 오르게 된다.
인왕산 국사당은 굿으로 유명하며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는 것을 일제시대때 옮겨온 것이라 한다. 이곳으로 옮긴 이유는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이곳에서 무학대사와 조선 태조가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는데..... 우리가 올라갈 때에도 한참 굿이 진행중이었다.
국사당은 명성과는 달리 자그마한 사당이다.
보기에도 신비로운 선바위가 국사당 위에 버티고 서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경건하게 소원을 빌고 있다.
같이 동행했던 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 인왕산중에서 국사당 및 계곡이 특히 음기가 많은 곳이라 한다. 믿거나 말거나.....
![](https://t1.daumcdn.net/cfile/blog/166905374D92D04710)
14:22 약간의 성곽길을 지나 목조계단을 올라오면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조망명소가 나옵니다. 이 곳에서 서울시내 성북구방향을 조망해봅니다. 와룡공원에 올랐을때 서울시내 조망이 되더라구요~ 이 곳부터는 북악산 등산내내 서울시내권과 북한산방향 조망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6F67374D92D04804)
성곽 안쪽길을 따라 말바위안내소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와룡공원부터 말바위안내소까지 이정표가 아주 잘돼있습니다. 이정표만 따라가면 쉽습니다. 말바위안내소에서 탐방요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출입증을 줍니다. 북악산 성곽 산행은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등산이 가능하고요~ 그리고 등산,하산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에도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제가 간날은 9시부터 3시까지 입산가능이었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입산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사진촬영도 가능합니다. 좀 까다롭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2689F374D92D04810)
13:00 등반 1시간만에 숙정문을 지나 청운대에 도착합니다. 옆에 군인아저씨한테 여기는 사진 촬영해도 되나요? 물었더니 "원래는 안되는데~ 군사시설방향만 아니면 하셔도 됩니다. "말하길래 요기 조기 촬영합니다. 지금까지는 중간 중간 군인분들께서 경비근무를 하고 계셔서 좀 경직되서 사진촬영을 안했는데 지금부터는 용기내서 촬영해 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6552374D92D04A16)
청운대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길을 뒤돌아 보는데~ ""지난일을 후회하는 시간보다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시간이 많아야 인생의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5A893C4D92D04B0C)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글자는 성벽을 올린 군인들의 직함등이 적혀있다고 하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847983C4D92D04B4B)
1.21사태 소나무입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태 김신조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청운동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도주하였는데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이 곳 소나무에 15발의 총탄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 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0693C4D92D04D1F)
북안산 성곽 등산 내내 이러한 성곽길을 계속해서 걷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5D0B3C4D92D04D09)
다시한번 뒤돌아 봅니다. 시원하지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204A423C4D92D04E2D)
15:15 와룡공원에서 1시간 15분만에 북악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등반내내 조망이 좋았지만 정상에서도 아주 좋습니다. 표지석에서 남산방향으로 부부로 보이는 산객둘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본 고참군인이 후임에게 왜 저기서 식사하도록 그냥 있느냐?며 군기를 바짝 잡더라구요~ 식사장소가 정해져 있습니다. 북악산 중간 중간 휴식할 수 있는 시설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751B354D92D04F30)
정상에서 남산타워방향을 바라봅니다. 요기 소나무 앞에서 두분이 식사하셨어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90AAB354D92D04F09)
이번엔 구리시 방향을 바라봅니다. 남산타워 방향은 역광이었고 구리 방향은 괜찮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44B443C4D92D04E2E)
북악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서 서울을 조망하는 어느 산객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0D61354D92D05004)
북악산 정상에서 간단한 간식을 하고 인왕산을 오르기 위해 창의문방향으로 좌회전해서 계속해서 성곽계단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뒤로 북한산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창의문을 들머리로 북악산에 오르면 계단이 심합니다. 종종 계단에서 쉬고 계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계단이 높아요~ 무릅이 안좋으신 분들은 창의문을 들머리로 하는 산행은은 피하세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60A68354D92D0510A)
하산길에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북한산 14성문 종주를 언제 해야하는데?
![](https://t1.daumcdn.net/cfile/blog/18393F384D92D0530B)
15:46 와룡공원에서 1시간 46분 정상에서 25분만에 창의문 날머리에 도착합니다. 이 곳에서 출입증을 반납합니다. 등반내내 곳곳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지만 정해진 등반로를 지키고 아무곳이나 사진촬영만 안하면 괜찮아요^^ 지난 역사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인가요? 북안산 등반내내 뭐랄까요? 숙연해 진다고 해야 할까요? 출입증을 반납하니 가뿐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를 체험하고 등산까지 하는 1석 2조의 아주 좋은 산행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C5B384D92D05428)
자~ 이제 인왕산으로 향합니다. 창의문을 나오면 바로 이러한 도로입니다. 저기 지나는 택시 뒤로 인왕산 들머리입니다. 북악산에서 인왕산을 가려면 도로를 건너서 가야합니다. 좀 아쉬운 것은 육교를 설치하면 아주 좋을 듯 한데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1202B384D92D05531)
15:55 슈퍼에서 막걸리 한병 사들고 시인의 언덕 들머리로 올라갑니다. 콩크리트 위에 고맙게도 "시인의 언덕 오르는 길"이라 적혀 있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533E6384D92D05714)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종로구에서 이 곳에 시인의 언덕이란 공원을 조성했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2E8F384D92D05520)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청와대를 감싸고 있는 북악산 정상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23E8384D92D05660)
도심속의 자연공원 북한산 방향도 한번 바라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3927384D92D0580B)
시인의 언덕을 지나 다시 도로를 넘어가야 합니다. 청와대 근처라서 그런지 군데 군데 경찰초소가 있네요~ 그 곳에서 물어보면 다 가르쳐 주시네요~ 경찰과 군인분들한테 물어보면 친절합니다. 인왕산 역시 성곽길로 돌계단을 따라 오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3F3F3B4D92D05804)
다시 뒤돌아본 북악산과 바로 아래 청와대가 살짝 보이네요~ 성곽을 보면 오래된 돌과 새 돌들로 됐는데요~ 성곽을 복원하면서 새돌들로 쌓은 것 같습니다. 북악산은 성곽이 잘 보존되었는데 인왕산 성곽은 새돌들이 많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922393B4D92D05931)
남산 방향도 바라봅니다. 인왕산도 북악산과 마찬가지로 들머리에 들어서자마자 조망이 계속 이어집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눈을 즐겁게하는 산행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4B63B4D92D05915)
인왕산 8부쯤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북한산의 장엄함이란? 세계에서 등산객이 제일 많은 자랑스런 북한산^^
![](https://t1.daumcdn.net/cfile/blog/193D753B4D92D05A07)
이번엔 내부순환로가 보이네요~ 동네 이름을 몰라서^^ 홍제동?
![](https://t1.daumcdn.net/cfile/blog/1321D03B4D92D05A30)
성곽을 따라 인왕산 정상이 코앞인 듯~ 여기도 새돌들이네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129F93B4D92D05B2C)
이러한 길을 따라~ 왼쪽은 낭떠렁지
![](https://t1.daumcdn.net/cfile/blog/13251B3B4D92D05C35)
서울 시내방향 한번 보고~
![](https://t1.daumcdn.net/cfile/blog/173EBD3B4D92D05D05)
14:45 인왕산 정상 도착~ 와룡공원에서 2시간 45분, 인왕산 들머리에서 50분만에 정상에 오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6B73B4D92D05D11)
정상에서 다시한번 남산타워가 보이는 남대문과 동대문 방향을 조망합니다. 조망으로만 본다면 북악산보다 인왕산이 조금 좋은듯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85E3B4D92D05E11)
이번엔 서울역과 용산방향~
![](https://t1.daumcdn.net/cfile/blog/1427553B4D92D05E2F)
여기는 청와대 방향~ 이명박 대통령님이 지금 계실까요?
![](https://t1.daumcdn.net/cfile/blog/1940103B4D92D05E03)
안산과 홍제동 방향~ 스마트폰이라 화질도 안좋은데 게다가 역광~ 다음에는 안산과 백련산 산행을 해보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22AE3B4D92D05F38)
자~ 이제 사직공원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저 뒤로 범바위가 보입니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출입이 안되네요~ 아쉽게도 중간에 좌회전해서 인왕천약수터 방향으로 하산~ 성곽이 하얗네요~ 인왕산 성곽은 많이 훼손됐었나봐요~ 성곽보수공사가 속히 완료해서 범바위 등산이 속히 가능해지길~
![](https://t1.daumcdn.net/cfile/blog/162B313B4D92D05F28)
하산길은 가볍게~
![](https://t1.daumcdn.net/cfile/blog/1236883B4D92D06015)
인왕천 약수터에서 약수 한잔하고~ 졸~졸~ 나오네요~ 그래서인가 더 시원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D0F334D92D06134)
이런 곳을 지나~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CD4334D92D06106)
정상에서 25분 정도 후 인왕천약수터를 지나 도로가 나옵니다. 도로에서 우회전하면 사직공원 방향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1E51334D92D06204)
인왕산 호랑이를 지나~ 경찰관한테 사직공원 물어보니 좌회전~
![](https://t1.daumcdn.net/cfile/blog/1507DB354D92D0D60F)
17:54 사직공원에 도착 와룡공원에서 3시간 54분만에 사직공원에 도착합니다. 사직공원에서 경복궁역까지 5분정도 걸립니다.
잊지못할 북악산&인왕산 산행이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좋고 멋진 산이 있었다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출처: 미추홀 블로그(블로그 제목 사랑합니다.)
서울의 아름다운 5대 궁궐
- 경복궁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3_cafe_2008_07_18_21_08_488087c14fef5)
원래 경복궁은 7200칸으로 330동의 건물이 있던 광활한 궁궐이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단 36동의 건물만이 남았고 10분의 1로 궁궐이 극심하게 훼손,
원래 크기의 10%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5_cafe_2008_07_18_21_13_488088d7b2a82)
구한말 경복궁사진으로 높은 담장안으로 수많은 전각들이 꽉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 1918년에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침전이 모두 불타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이 헐리고 창덕궁으로 옮겨감.
경복궁과 창덕궁의 훼손을 위한 일본의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됨.
- 1929년 5월에 신무문 북쪽의 융무당과 융문당을 헐어 한강변의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함.
- 1932년 10월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일본인들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아넘겨 창고로 사용함.
- 192번지 남산장 별장을 만드는데에 경복궁 건춘문내에 있었던 비현각을 사용.
- 경복궁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해서 바로 건물을 해체하고
일본의 자기집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함.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은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서게됨.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오쿠라호텔의 정원을 꾸미는 돌로 사용함.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서
버려져 있는 자선당 주춧돌을 발견함.
결국 우리나라의 요구로 95년 12월 한국으로 반환되지만
이미 상태는 최악이였고 쓸모가 없기에 돌려준 것임.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일본인들에게 판매가 되어 일본인들의 개인저택 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혹시 경복궁에서 절에나 있을 법한 탑과 조각상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교를 섬기는 조선의, 철저히 유교양식으로 지어진 경복궁에 탑과 불교조각상이 있을리가 없어요.
일제가 전각을 다 허물어버리고 궁궐과 유교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던 불교문화재들을 경복궁에 옮겨놓아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물산공진회를 치루며 경회루 영역에 휴게실과 미술관을 지었다.
- 자경전 영역에는 수족관과 놀이터를 만들었다.
- 궁궐에는 깔지 않는 무덤에나 깔던 잔디를 경복궁 전체에 깔고, 온돌을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6_cafe_2008_07_18_21_27_48808c3f636fc)
전각들이 거의 헐려 휑한 궁궐과 그 곳을 메운 잔디들,
근정전을 가린 조선총독부건물이 위압적이다
경복궁자리가 명당자리이고 풍수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이기에
김영삼 정부에서 총독부를 파괴하기 전에
총독부 밑에 경복궁과 조선의 정기를 막는 말뚝이 박혀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실제 총독부 폭파후 총독부 밑에는 커다란 말뚝들이 박혀있었다
-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각들이 무참히 헐려버린다.
- 경복궁 전체를 야외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사정전 뒤쪽으로는 일제가 정원과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한 나라의 최고 궁궐인 경복궁을 일반인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진흥회를 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조선을 근대화하였다'라는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 경회루 뒤쪽에는 골프장을 만들고 야외극장, 식당, 맥주회사, 은행, 유흥점 따위를 세우려 한 기록이 발견됨.
또한 곳곳에 육교와 지하터널을 만들려는 설계도 역시 발견됨.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9_cafe_2008_07_18_21_30_48808cb268ed5)
경복궁 복원도.
원래의 경복궁의 모습으로 지금의 빈 터나 잔디는 찾아볼수 없고 아름답고 거대한 모습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8_cafe_2008_07_18_21_30_48808cc3d6fac)
일제강점기때의 경복궁 내의 남아 있던 건물들이다.
그냥 거의 다 파괴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5_cafe_2008_07_18_21_30_48808ccd3e5d0)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이다. 원래의 30%정도 복원 된 상태이다.
2009년까지 전체의 40%를 복원하는 단기복원이 현재 진행 중이다.
유교양식의 궁궐에 보이는 불교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20)이 참으로 언발란스하고 흉물스럽다.
궁궐내에 현대건물이 들어서 있고 심지어 주차장도 존재한다.
하루 빨리 정신차리고 복원하길.
- 창덕궁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5_cafe_2008_07_18_21_39_48808ee4d9639)
현재 창덕궁은 한양의 5대궁궐 중 그 보존상태가 그나마 가장 뛰어난 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죠.
하지만 창덕궁 역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현재 전각들은 원래크기의 3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보존이 뛰어난 궁궐이라면 도대체 다른 궁궐들은 얼마나 심하게 훼손됐다는 얘기일까요?
-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큰 화재가 나서 희정당 등 주변의 19동의 건물이 다 타버림.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짓는데 이용함.
이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창덕궁은 크게 변형 훼손되었다.
화재는 단순한 실수로 일어난 화재라기보다는 이 것을 노린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되고 있다.
- 1908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궁전일부가 변형되어 인정전은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들어서기 시작,
궁을 내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였으며 상당수의 전각이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림.
-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세우고
일제는 1912년에 창경궁과 함께 창덕궁의 인정전과 후원(금원)을 일반인에게 관람하도록 하였다.
아름답고 신비롭던 후원(금원)은 일반인들에 의해 상당히 훼손되고 만다.
왕조의 궁궐의 위엄을 떨어뜨리기 위한 조치였다.
보통 현재 우리는 창덕궁의 '비원'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또한 여러곳에서도 '비원'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래 창덕궁의 후원은 '금원'으로 불리어왔고 '후원'이나 '금원'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비원은 폐쇄스럽고 고립되어진 느낌의 비밀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때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후원을 격하시켜 부르던 말입니다.
앞으로는 창덕궁의 후원을 '금원' 혹은 '후원'으로 올바르게 불러야겟죠?
-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 특히 대조전의 일곽인 징광루와 경훈각은 중층건물로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의 방화로 추정되는 1917년 대화재에 의해 대조전 영역이 모두 불타고
경복궁 건물을 헐어다 초라한 모습으로 복원을 해버린다.
- 창경궁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6_cafe_2008_07_18_21_47_488090c7318e5)
창경궁이 일제에게 당한 만행은 그 어떤 궁보다도 굴욕적이며
치가 떨리는 만행들의 연속입니다.
- 1907년 일제는 고종을 황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황제로 앉힌 뒤 순종을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함.
순종은 아버지와 떨어진 채 우울하게 지냈고 일제는 순종이 우울해하는 원인은 감추고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을 내는 공사를 시작함.
- 선인문 보루각터에 동물원을 짓고 곰, 호랑이, 사슴, 공작, 타조, 낙타, 원숭이 등 각종 짐승과 새들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춘당대 지역에는 식물원을 설치함.
- 1909년 11월1일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의 개원식이 거행되고 일반인의 관람을 허용하였다.
- 1910년에는 궁궐내에 박물관을 설치하고 창경궁 내에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나무를 잔뜩 옮겨 심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8_cafe_2008_07_18_21_52_488091cf132a3)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2_cafe_2008_07_18_21_52_488091f9dd6b3)
동물원으로 변모해버린 창경궁에 들어선 코끼리,
한나라의 궁궐에 저런 짐승들이 가득차있었다니...
일제의 극악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2_cafe_2008_07_18_21_52_488092136f78e)
여기가 어디일까, 어린이공원? 아니 바로 창경궁.
저 뒤에 타조가 보이는가? 도저히 궁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모습이다.
한 나라의 궁궐을 일개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또한 궁궐내에 상상할수도 없는 놀이공원을 만들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며 창경궁을 오락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우리나라 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서는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개칭하는 등 격하시켜 불렀다.
궁이란 말은 왕과 왕실이 사는 곳이란 뜻이지만 원이란 뜻은 사냥과 야유, 놀이를 즐기는 곳이란 뜻이다
황제와 그 황실이 사는 근엄한 장소를
온갖 동물들이 뛰놀고 형형색색 식물이 자라는 곳으로, 놀이기구들이 즐비한 곳으로
사람들의 일개 놀이장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6_cafe_2008_07_18_21_58_488093625c17c)
여긴 정말 놀이공원이라 하면 믿겠다.
저 당시에는 창경원이였으니 놀이공원이란 표현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궁궐에 저런 놀이기구가 널부러져 있는데 누가 저 곳을 궁궐이라 믿겠는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2_cafe_2008_07_18_21_58_4880936a15056)
창경궁에 설치된 케이블카가 보이는가?
한때 정원으로 신성히 가꿔졌던 곳에서는 일반인들이 요트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다.
어찌 창경궁에게 죄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잔인한 일본을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 왕조국가에선 선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즉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종사라고 불리며 나라 그 자체를 뜻했다.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역시 전체적인 하나의 구역이였으나
지금 종묘는 창경궁과 겨우 옹졸한 육교 하나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일제가 1912년 11월에 광화문에서 안국동을 거치고 돈화문앞을 지나 이화동에 이르는
도로를 크게 내어 종묘와 창경궁을 끊고 궁궐의 맥과 기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 또한 경복궁에 그래랬듯이 창경궁에도 무덤에만 사용하는 잔디를 궁궐마당에 깔고
건물의 온돌들을 다 갈아없애버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8_cafe_2008_07_18_22_11_488096687725e)
이 길이 바로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일제가 낸 율곡로이다.
원래 이 길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의 산으로써 연결되어있던 곳이다.
저기 옹졸한 육교 하나가 그나마 종묘와 창경궁을 이어주고 있다.
하지만 저 육교마저 일본식으로 지어진 육교이다.
- 대한민국은 광복후에도 창경원을 유지해 동물원과 놀이공원, 식물원으로 사용해오다
1981년이 되어서야 창경궁 복원계획을 세우고
900여마리의 동물들과 2177분의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이전시키고 동물원, 유기장시설들을 철거하였다
창경궁은 1983년 12월 30일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제 이름을 찾게 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7_cafe_2008_07_18_22_09_4880961dcaa48)
창덕궁과 창경궁을 나타낸 동궐도이다. 왼쪽이 창덕궁, 오른쪽이 창경궁을 나타낸다.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로 이어져있던 궁궐로써 '동궐'이라 불리었다.
상당히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며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하였으나
현재는 창덕궁은 약 30%밖에 남지 않았고, 창경궁은 그보다 훨씬 크게 훼손되어 있다.
- 덕수궁(경운궁)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7_cafe_2008_07_18_22_08_488095cf860b3)
구한말 대한제국의 고통과 함께한 비운의 궁궐, 덕수궁(경운궁).
- 덕수궁(경운궁) 역시 일제에 의해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상당한 축소가 있었다.
원래의 덕수궁(경운궁)은 현 조선일보미술관, 덕수초등학교, 구세군본관, 예원학교 옛경기여고 부지를 총괄하는
굉장히 넓고 큰 궁궐로서 원래 40,626평에 이르렀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돼 지금은 3분의1인 18,635평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 미국대사관저에서 덕수초등학교로 넘어가는 덕수궁 돌담길은 일제가 1922년 개설한 것으로
궁궐내에 길을 관통시켜 정기를 끊고 궁궐을 파괴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 또한 일제는 덕수궁(경운궁)내에 경성제일여고, 경성방송국을 세운다.
- 덕수궁(경운궁)에 1904년에 대화재가 일어나
궁내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타버리고 정전인 중화전마저 불타버린다.
당당한 중층건물이였전 중화전과 대한문 등은 여건상 단층으로 복원되고 만다.
당시 불이 난 원인에 대해 일본의 문헌들은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불을 지나치게 떼어 나무기둥에 옮아 붙으며 큰 불로 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함녕전 온돌과 나무기둥 사이에 한 자 이상의 돌기둥이 있어 이런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또한 일제가 매일 고종과 덕수궁(경운궁)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역시 이 1904년 덕수궁(경운궁) 대화재도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고 있다.
- 사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불리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인데
덕수란 오래 장수하라는 뜻도 있지만 일제가 고종을 폐위시킨 후 격을 낮추어 부르던 말이며
궁궐의 고유명사가 아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보통명사다.
우리는 이제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바로잡아 불러야 한다.
- 해방 후에도 덕수궁(경운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61년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와 함께
덕수궁을 시민들의 공원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덕수궁의 돌담을 허물고
돌담이 있던 곳에는 길에서도 덕수궁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이유로 투시형 철창담장을 둘러놨다.
당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주위의 담이 헐려 6미터 안쪽에 세워지자
도로에 덩그러니 서있는 형상이 되버리고 말았다.
- 경희궁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2_cafe_2008_07_18_22_25_488099c6a7dfc)
"경희궁?"
보통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까지만 알지
경희궁이란 이름은 조금 생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훼손 당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무참하게 100%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원래 경희궁의 규모는 7만평 정도로 지금 남아 있는 면적의 3배가 훨씬 넘었다.
현재 서울시 교육청, 구세군회관 자리도 모두 경희궁이 있던 곳이다.
- 일제가 1910년 경희궁에 일본인자녀들이 다니는 경성 중학교를 세움으로서
궁궐의 거의 모든 전각이 헐렸다.
- 1922년에는 25,500평을 떼어 경희궁 동쪽에 전매국 관사를 짓고 서울고등학교 또한 궁궐내에 짓는다.
-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남쪽에 지금의 세문안길을 내어 궁궐을 파괴시킨다.
- 그리고 경희궁 정전인 숭전전은 1926년 일본인들의 절인 조계사에 팔아넘긴다.
- 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로 이전시켜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다가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 회상전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옮겨 사용 한 뒤에 조계사로 팔아넘김
- 편전인 흥전당은 소학교의 교실로 사용하다가 광운사라는 절에 팔아넘김
- 1920년대를 지난 경희궁은 단 한채의 전각도 제자리에 남지 못한 채로
한마디로 100% 파괴되고 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1_cafe_2008_07_18_22_33_48809b842c98d)
빨간색 - 경희궁의 원래 크기
보라색 - 현재 경희궁의 크기
노란색 - 현재 경희궁에 있는 궁궐건물
상당구역이 현재 다른 건물이 있거나 길이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아프게 초라한 숭정전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켠이 쓰라려온다.
또한 현재 그나마 있는 숭정전 건물과 행각들도 2002년에 복원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_cafe_2008_07_18_22_33_48809ba03c9ec)
경희궁을 나타낸 서궐도이다.
원래는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 경희궁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일제는 단 한 채의 전각도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해버렸으며
궁궐지역의 지형을 깎고 메꾸고 하는 등 궁궐을 두번 세번 무참히 짓밟았다.
- 경희궁의 지하벙커 -
일제는 전쟁 막바지인 1943년에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무지막지한 지하벙커를 만들었다.
280평에 폭 7m, 길이는 105m로 콘크리트 외벽이 3m씩이나 되는 벙커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는데
이는 일제가 왕기(王氣)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서울시가 1980년대 경희궁 복원시에 발견한 것으로
궁궐내에 지하벙커를 만드는 일제의 극악무도함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85/14_cafe_2008_07_18_22_47_48809ee6710b8)
지하벙커의 사진.
궁궐에 지하벙커를 만들었다면 정말 말 다한 것이 아닌가
- 경희궁은 애초에 아예 건물이 한 채도 남아있지 않고 일부 터만 남아있었으나
1988년부터 시작한 경희궁 복원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2002년부터다
서울시는 애초에 지하벙커를 제거하고 융복전등 침전 영역을 복원할 계획이였으나
예산을 조달할 길이 막연하다 하여
방공호를 일제의 횡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나
현재는 그저 청소장비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우리나라 궁궐에 대해
협소하다 비웃지 마세요
화려하지 못하다 욕하지 마세요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그 참혹하고 참을 수 없는 행동들을
잊지 않으실거죠?
조선시대 조성된 상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던 북촌은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게 된다. 주택경영회사들은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 33번지, 삼청동35번지, 계동135번지의 한옥주거지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 북촌의 한옥은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북촌의 한옥은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목재소에서 공급되는 표준화된 목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전통한옥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며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정착되었다. 북촌 한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진화된 구법'과 '장식화 경향'이 그것이다. 낮은 지붕물매, 굴도리, 겹처마, 좁은 주간에 많은 칸수 등 전통한옥과 비교할 때 비록 온전히 품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북촌한옥에는 한옥의 구성과 아름다움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의 한옥 분양광고에서 볼 수 있듯, 밀도와 익명성에 대한 도시주택으로서의 요구를 반영하며 북촌의 한옥은 당시의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북촌은 백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삼청공원과 백악산이 펼쳐져 있어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북촌은 북쪽이 남쪽보다 높아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만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여 있어 남산이 보이는 좋은 전망을 갖추고 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의 깊이가 깊어지고, 남쪽은 북쪽보다는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유지하고 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율곡로와 삼청공원으로 둘러싸인 가회동, 계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팔판동 일대(1,076,302㎡)를 말하며 현재 역사문화미관지구로서 제1종 일반주거지역 도시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북촌주변은 후면에 해발 463미터의 백악산과 삼청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사적 제117호)이 있고 동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사적 제122호)이 있다.
북촌 지역이 모두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던 1960년대와 달리,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들어선 다세대가구 주택 때문에 많은 수의 한옥이 사라졌지만, 일부지역은 양호한 한옥들이 군집을 이룬 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 일대 그리고 가회동 11번지 일대는 대표적인 한옥밀집지역이다.
물길 따라 이루어진 북촌
과거 북촌에는 북쪽의 능선에서 남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지를 따라 몇 줄기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이 남북방향의 물길들은 서울의 주요 젖줄 중의 하나로 잿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에서 보듯, 각 동네는 물길과 물길 사이의 능선을 경계로 좁고 길게 형성되었다.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제법 큰 하천인 중학천의 좌우로 삼청동, 사간동, 소격동이 있다.
다시 그 동쪽에 작은 두 물길 주변으로 화동과 안국동 송현동이 있다. 가회동에서 운현궁 앞으로 흐르는 가회동 물길 역시 제법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었다.
가회동 물길과 나란히 계동 물길, 원서동 물길이 흐르고 있는데, 원서동 신선원전에서 시작해서 창덕궁 담장을 따라 흐르다가 창덕궁 내부를 지나 와룡동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역시 중요한 하천중의 하나였다.
이들 북촌의 물길들은 마을의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현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메워져 도로로 바뀌었지만, 물길의 기억은 여전히 마을의 옛 이름으로 남아있다.
골목길이 가지는 의미
북촌의 한옥 사이사이로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들은 한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성'이 담긴 생활공간이다. 한옥에서의 생활은 담장 안쪽에서 뿐만 아니라 담장 밖 골목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골목은 빨래를 널고, 곡식이나 고추를 말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또 하나의 마당인 동시에, 이웃과의 담소가 오가고, 동네 노인들이 어울리는 마을 공유의 공간이다.
한편, 한옥동네를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시민이 함께 공유할 도시경관이 된다. 작은 한옥들이 군집하여 만들어 내는 골목의 풍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곳곳마다 마주치는 옛 기억, 북촌 골목길
조선시대 '화기도감터'와 '성삼문선생 살던 곳'이란 대리석 비문 두개를 확인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화동 골목길이 시작된다.
물이 흐르듯 가지에 가지를 친 미로와 같은 골목길, 마주 오는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좁아지는가 하면 어느새 우마가 지나다닐 만큼 넓어진다. 차가 들어올 수 없어 온전히 사람이 주인인 이 골목길은 이제 흔치 않은 풍경에 대한 기대로 남아있다. 골목길, 경사진 계단 가에 내놓은 소박한 화분 두엇에 북촌 골목길의 정감이 느껴진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혜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첫댓글 금형 마역
황정 3명
송낙 2명 중리역
아지매 마역
주미 2명 마역
백향 2명 39사
김명 2명 문성고
가술 2명
이금 2명 마역
경희 2명 마역
9541 2명 마역
김똥 2명 주상가
김경 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