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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止觀과 四禪
1. 四禪의 주요내용
붓다의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우리는 止가 먼저인가 觀이 먼저인가를 질문하곤 한다.
이 문제는 경험에 비추어보면 양자 모두 옳다.
한참 성이 났을 경우에 찬물로 목욕을 하거나 호흡에 집중하여 숫자를 세어본다면, 그 성남은 조금씩 가라앉는다. 이런 방법은 분명하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몰두하여 얻어지는 효과로, 곧 止의 수행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남이나 애욕을 넘지 않고서는 지혜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매우 흥분된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아채고, 그것을 떠나려는 인식 그 자체는 역시 觀의 한 성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止와 觀은 단순하게 순차적인 관계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止觀, 혹은 定慧의 관계에 관한 위치설정 문제는 첨예한 대립을 이루면서 발전되어 왔다. 물론 초기경전에는 止에서 觀으로, 혹은 觀에서 止로, 혹은 止觀의 俱修같은 경우가 설해지고 있다.1)
마찬가지로 論書에서도 이와 같은 다양한 견해들이 표출되고 있다.
비교적 초기의 論書라고 할 수 있는 『阿毘達磨集異門足論』에서는 止를 마음의 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으로, 觀을 현상에 대해서 揀擇하여 了解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定慧의 兼修를 주장하고 있다.2)
그러나 說一切有部에서 經量部的 입장에 걸쳐진 『阿毘達磨俱舍論』은 오히려 싸마타(奢摩他) 수행을 성취함에 의지해서 비로소 위빠싸나(毘?舍那) 수행이 이루어짐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싸나가 중심인 듯한 四念住(四念處)와의 관계에서도 먼저 (四禪에 의한) 欲貪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四念住는 수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3)
그런데 대승적인 성격이 강한 『成實論』에서는 止에서 觀으로, 觀에서 止로의 두 방향 모두를 經說의 입장으로 수용한다. (四禪과 같은) 禪定으로 모든 因緣이 멸한 智慧를 발생시킨 것은 ‘止로서 마음을 수행하고 觀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이름한다.
반대로 산란한 마음으로 五蘊?十八界?六入들을 분별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因緣이 멸한 止를 얻는다면, 이는 ‘觀으로써 마음을 닦고 止에 의지해서 해탈을 얻는다.’고 말한다.4)
이것으로 보면, 『俱舍論』과 같은 有部系列의 論書는 止觀의 次第的인 관점을 가진 반면에, 대승의 성립에 영향을 준 『成實論』과 같은 후기의 論書는 止觀兼修나 혹은 觀止의 차제를 강조한 모습을 보인다.
현대 학자들의 경우에는 南方佛敎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보다 止와 定을 강조한 반면에
北方大乘의 영향을 받는 경우는 觀과 慧를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양자간의 관계에서도 대체로 南方의 전통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止가 觀에 선행하는 입장을 보여준다면,
북방의 전통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통념적으로 止觀의 兼修를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남방적인 이해의 한 모습은 止觀을 해석함에 있어 대체로 四禪은 止로, 四念處는 觀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5) 특히 止의 四禪은 觀의 四念處를 선행하며, 양자는 그 차제에 있어 엄격히 구별된다.6)
이런 주장은 『俱舍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愛欲이 완전하게 끊어져서 싸마타가 완성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빠싸나 수행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戒?定?慧 三學의 순차적인 접근방식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觀이나 慧를 닦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戒와 定이 필수적으로 守持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점은 戒行이 무너지고, 欲貪으로 가득 찬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초기불교의 전체적인 흐름을 논의할 때는 일견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구체적인 교설에서 말한다면, 이를테면 四禪을 止, 혹은 定으로 보고, 四念處를 觀, 혹은 慧로 보는 견해는 각 교설이 가지는 의미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필자는 戒定慧 三學 뿐만 아니라, 止觀의 문제에 있어서도 경전의 전체적인 관점은 (戒)定慧의 雙修, 止觀兼修, 혹은 俱修가 올바른 정신이라고 본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연 四禪에서는 止와 觀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는 것이 본고의 주된 관점이다. 四禪의 중요성은 이미 論書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어 재론의 여지는 없다. 일반적으로 붓다가 바라문의 수정주의나 사문들의 고행주의를 버리고,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四分律』에 의하면, 붓다가 고행주의를 버린 데는 四禪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 때, 보살은 그곳에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였다. 그러나 더욱 뛰어나고 성스런 지혜의 법을 아직 증득하지 못하였다. 이때 보살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예전에 부왕의 밭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慾心과 不善法을 버리고 覺觀이 있지만,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초선에 노닐었다. 그 때,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을 하였다. 자못 이런 도가 있으니, 이것을 따라 고의 근원을 없앨 수 있을까? 다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도는 능히 고의 뿌리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보살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자못 愛慾과 不善法으로 행복한 법을 얻을 수 있는가? 애욕과 불선법으로는 즐거운 법을 얻을 수 없다. 다시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애욕이 없고 불선법을 버림을 익힌다면, 행복한 법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몸을 괴롭히는 것으로는 즐거운 법을 얻을 수가 없다. 나는 차라리 작은 음식으로서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좋겠다.7)
여기에 의하면, 붓다가 결정적으로 고행주의를 버린 기준점은 바로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경험한 初禪이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四禪은 충분히 고행주의에 대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오랜 고행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고행을 버리고 다시 기력을 회복한 붓다 보살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정진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닫는 내용은 바로 먼저 初禪, 二禪, 三禪, 四禪을 얻고, 그리하여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 三明을 차례로 증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8)
이런 문헌적인 자료는 대부분 후대에 편집된 경향이 있어서 그 객관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四禪을 평가하고 그 중요성을 인지한 후대의 불교계의 인식마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12緣起와 더불어서 四禪을 붓다의 깨달음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교설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선은 후기 대승불교나 중국 선종에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수행의 과정에서 어떻게 마음이 정화되고, 어떤 단계를 밟고 지나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결코 작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만큼 四禪에 대한 논의는 붓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진리 인식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붓다 시대 이후로 四禪과 관련된 주요한 쟁점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四禪의 전체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止觀이나 四念處와 같은 다른 교설과의 관계설정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문제는 한결같이 四禪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서 초기불교가 지향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특히 해석자의 수행관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여러 개의 부파로 나누어진 지난 역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止觀이나 四禪과 같은 다른 교설과의 섬세한 비교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다만 四禪 그 자체에 대한 논의에 한정하고, 四念處와의 관계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초기경전에서 사선은 셀 수도 없이 빈번하게 설해지고 있지만, 일단 四禪의 전형적인 설법 하나를 선택하여 初禪부터 四禪까지 차례로 그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욕망(k?ma)과 착하지 않는 행위(akusala)로부터 떠나고, 覺(vitakka, 尋)이 함께 하고 觀(vic?ra, 伺)이 함께 하지만, 떠남(viveka, 離)에서 발생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2. 覺과 觀이 점차 멈추어지고, 내면은 정적하고 마음이 전일하게 되어, 覺과 觀이 없어져서 삼매(定)로부터 발생한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二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3. 기쁨의 욕구를 떠나서 마음의 평정에 머물며, 알아챔(念)과 바른 앎(正知)으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몸에 의해서 느낀다. 이렇게 성인들이 말씀하신, ‘마음의 평정과 알아챔을 갖춘 행복감에 도달한다.’고 하는 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4. 행복감과 고통이 제거되고,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슬픔은 근본부터 끊어져서, 고통도 없고 행복감도 없으며, 평정과 알아챔에 의해서 완전하게 청정해진, 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9)
이와 같이, 四禪은 마음이 정화되는 과정을 네 개의 단계로 나누어서 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불건전한 내적인 행위를 벗어나서 완전한 청정으로 나아가는 마음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양파 껍질을 벗길 때처럼, 사선의 각 단계는 떠남의 대상과 존속되는 심리적 상태 그리고 다시 새롭게 생성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관점을 중심으로 사선의 각 단계별로 쟁점이 된 점들을 고찰해 보자.
특히 전통적인 해석들을 정리한 『成實論』의 주석을 참고하여,10) 그것을 소개하는 의미도 있겠다.
① 初禪
初禪에서 떠나는 대상은 愛慾(k?ma)과 不善法(akusala)이다. 愛慾은 성적인 열망과 같은 五慾을 의미하고, 반면에 不善法은 들뜬 마음과 같은 五蓋를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로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표출되는 윤리적인 측면을 드러내며, 특히 身口意 三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욕망이나 착하지 못한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애욕과 불선법은 欲界의 특징적인 덕목이다. 戒라는 윤리의식으로 억압된 욕계를 그 내면에서부터, 떠남으로써(vivekaja?, 離生) 새롭게 발생되는 경험, 그것이 初禪이다. 여기서 떠남으로부터 오는 경험은 기쁨(p?ti, 喜)과 행복감(sukha, 樂)으로 표상 되는데, 그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그것은 욕계의 애욕과 불선법이 남아 있는 한, 그곳에다 ‘禪(jh?na)’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떠남에서 발생한 기쁨’을 경험하는가 여부는 初禪의 중요한 징표 가운데 하나이다. 初禪의 또 다른 징표는 言語의 寂滅이다.
이를 『中阿含經』에서는 ‘소리를 꾸짖다(以聲爲刺)11)’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이 行하는 자리가 적멸함(心行處滅)’을 禪이라고 정의한다.12)
이것은 바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애욕과 불선법과 같은 행위와 언어가 모두 끊어진 初禪이나 四禪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初禪은 침묵 가운데 스스로 경험하는, 기쁨이 넘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태를 말할 수가 없다. 침묵의 기쁨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② 二禪
二禪에서는 初禪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존속했던, 覺(vitakka, 尋)과 觀(vic?ra, 伺)을 떠난다.
覺과 觀은 『成實論』에 의하면,13) 散亂心으로 거친 것을 覺이라 하고, 미세한 것은 觀이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종을 칠 때 처음의 큰 소리는 느껴지는 覺이고, 작아진 소리는 보이는 觀이다. 처음 선(初禪)에 들어 왔지만, 아직 삼매의 힘이 부족하기에 散亂心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覺觀이다. 배가 앞으로 정진하는데, 일어나는 파문과 같다. 그러므로 초선에서는 애욕에 대한 집착과 떠남이 대립된 구도라면, 二禪에서는 고요함의 三昧와 산란심의 覺觀이 대립된다. 삼매의 힘이 깊어짐에 따라, 이 각관은 사라지고, 삼매에 의한 기쁨과 행복감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二禪의 의미이다.
여기서 覺觀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완전하고 성스러운 침묵에 들었다고 하는 의미이다. 초선에서는 언어가 寂滅했다고는 하지만, 언어의 근본적 원인인 覺觀이 남아있기에, 초선을 결코 ‘성스런 침묵(聖?)’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而佛但說二禪爲聖?然不說初禪).14) 삼매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에서 성스런 침묵은 바로 二禪의 특질이다.
初禪이나 二禪이나 喜樂이 존재하는데, 양자간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초선의 喜樂은 욕망의 뿌리가 끊어지면서 발생하는 희락이다. 그러나 二禪에서의 희락은 삼매의 힘에 의해서 覺觀이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곧 고통의 뿌리가 뽑힘에서 오는 喜樂이다.15) 그래서 初禪의 喜樂은 약하다면 二禪의 喜樂은 깊다. 그럼으로써 욕망과 고통의 뿌리가 끊어진 이선은 산란심이 없는 내적으로 고요하고(ajjhatta? sampas?dana?, 內靜),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인 인식론적 관점이 사라져서, 마음은 하나가 된다(cetaso ekodibh?va?, 一心)고 말한다.
③ 三禪
三禪에서 떠남의 대상은 기쁨 그 자체이다. 初禪이나 二禪에서 발전된 희락은 나의 마음이 있고, 기쁨이 존재한 有漏法이다.16) 그러나 三禪에 도달하면 三昧에서 오는 기쁨(p?ti)도, 욕구의 일부이고 떠남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三禪을 설하는 첫 구인, 빨리어 ‘P?tiy? ca vir?g?'는 ‘기쁨과 욕망을 떠남(離喜欲)’으로 해석되지 않고, 오히려 『中阿含經』처럼, ‘기쁨의 욕구로부터 떠남(離於喜欲)’으로 번역된다. 만약 기쁨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無我가 아니요, 미세하지만 분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특히 三禪에서 주목되는 점은 기쁨(p?ti, 喜)과 행복감(sukha, 樂)을 명백하게 구별한다는 점이다. 기쁨에 대한 욕구마저 떠남으로서, 몸으로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 양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기쁨은 그 대상에 지향되어 있다. 대상을 따라 기쁨은 변화되고, 그 강약에 깊게 영향을 받는다. 말하자면 기쁨은 산란한 마음의 일종이다. 그러나 행복감은 변화하는 외적 대상으로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적인 측면이 강한, 내재된 경험이고, 몸으로 펴져 나가는 지속되는 현상이다. ‘기쁨’과는 달리 ‘행복감’은 밖으로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몸에 의해서 느끼는(身覺樂)’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三禪의 행복감이다.
그럼으로써 初禪의 애욕, 二禪의 고통에 이어서 三禪에 이르면, 기쁨의 뿌리가 잘려나가고,
그 결과로 마음은 평정하여(upekhaka), 알아챔(sati)과 바른 앎(sampaj?na)이 갖추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주목되는 점은 알아챔(sati)의 성립이다. 이때의 알아챔은 특별한, 처음으로 성립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것 역시 일상에서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변화를 알아챈다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알아챔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다만 그 대상이 달라진, 작용(用)의 차이일 뿐이지, 알아챔의 본래적인 기능, 體가 바뀐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삼매에서 오는 二禪의 기쁨을 떠나서, 평정에 기초한 三禪의 행복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알아채는 작용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二禪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삼매라곤 하지만 여전히 분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지만, 三禪에서 드러난 행복감은 분별이 없는 깊은 평정의 행복감이기 때문이다. 만약 二禪에서 三禪으로 轉移되는 과정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평정이 아닌, 無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④ 四禪
第四禪에 이르면, 마음의 모든 감정과 형상이 벗겨진다. 이런 四禪에 의하면 감정의 층위가 있는 듯하다. 가장 표층의 감정은 欲界의 愛慾이다. 이를테면 애욕이 분출하면, 그 끝은 결국 고통의 층위에 닿는다. 그러나 初禪에서 애욕을 떠나고, 二禪에서 覺觀의 고통이 다하면,
곧 기쁨이 넘치고, 기쁨이 자자들면 마침내 三禪의 행복감이 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깊은 층위의 감정은 四禪에서 언급된, 슬픔(憂)이다. 물론 이때의 슬픔은 初禪에서 떠나는 어떤 대상의 배신에 따른 실망이나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종류의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不苦?不樂의 깊은 심연에서 올라오는 실존의 고독감 같은 슬픔이다. 이것은 삼선의 행복감에서 사선으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반동적 정서이다. 그래서 이 알 수 없는 슬픔은 매우 깊고 미묘한 감정이다.
아마도 고려시대의 普照知訥이 40대에 가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원수와 같은 감정이라고 했을 때,17) 그것은 바로 이러한 슬픔과 같은 실존의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사선에서는 이 천년의 고독 같은 슬픔이 평정되어, 마음은 완전한 청정에 도달한다. 여기에선 어떤 형상에 대한 인식이나 앎도 존재하지 않는다. 三禪에서는 수동적이지만, 행복감 같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알아챔이 미세하게 방해를 받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알아챔의 작용(用)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지, 알아챔의 그 자체(體)가 미숙하거나 변화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四禪에 이르러서 온전하게 알아챔의 작용이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때는 ‘더 이상 외적 대상에 속지 않는’, 알아챔이고, ‘흔들림이 없이’, ‘완전하게 평정해진’ 청정이다.
사선과 관련된 또 하나의 특질은 出入息이 소멸한다는 점이다. 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제로 호흡이 멈추어버린다는 의미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육체적인 호흡의 멈춤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다. 만약 육체적인 호흡의 멈춤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혈액 순환을 포함한 모든 생리적인 현상이 단멸하는 결과가 되어 옳지 못한 견해라고 보고 싶다.(이 부분은 남회근선생과 다른 해석이다) 오히려 마음이 부동하여 호흡이 느려지고, 마침내 호흡에 대한 이원론적인 인식이 사라진 상태라고 이해된다. 이때는 호흡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 없다. 다만, 마음은 부동의 청정성으로 가득하여 완전하게 깨어있지만, 대상을 향한 어떠한 인식도 부재한 상태이다.
2. 止觀의 辨證法的인 循環
앞에서 보듯이, 四禪은 낮고 엷은 단계에서 높고 깊은 단계로 나아가는, 이를테면 ‘마음이 정화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떠남, 생성, 존속의 변증법적인 현상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변증법적이란 말은 대립된 구도가 새롭게 통합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현상학이란 말은 경험된 현상이 떠남과 생성의 극적인 반전을 설명해 준다. 변증법이 보다 구조주의적인 관점이라면, 현상학은 마음의 역동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四禪은 바로 이런 두 관점에서 해명될 수가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과정 | 떠남 (離) | 생성 (生) | 존속 (住) |
初禪 | 離欲, 不善法 | (離生)喜樂 | 有覺, 有觀 |
二禪 | 有覺有觀 | 內靜 一心 | (定生)喜樂 |
三禪 | 離於喜欲 | 正念正智 | 身覺樂 |
四禪 | 離苦樂, 憂喜 | 捨念淸淨 | 不苦不樂 |
먼저 구조적인 측면을 조사해 보면, 사선의 전체를 관통하는 떠남/생성의 변증법은 서로를 은폐시키고, 그래서 양립할 수 없는 갈등관계에서 출발된다. 이런 갈등관계에서 남겨진 앙금은 다음 단계에서 떠남의 대상이 되고, 새로 생성된 통찰(觀)은 다음 단계로 확대되면서, 더욱 깊은 평정(止)의 단계로 나아가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먼저 初禪부터 검토해 보면, 그 주된 갈등구조는 愛慾과 不善法으로 대표되는 집착과 그것을 벗어나면서 경험하는 喜樂이 대립구도를 이룬다. 欲貪이 존재하는 한에서 결코 떠남에서 오는 喜樂을 경험할 수가 없다. 반대로 만약 떠남에서 오는 喜樂을 경험한다면, 그곳에선 愛慾과 不善法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집착과 떠남의 갈등은 覺觀이라는 散亂心을 상속시킨다. 그렇지만, 覺觀의 산란심은 이 변증법적 현상학을 초선에서 멈추지 못하게 하고, 다시 二禪으로 향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왜냐면 覺觀은 느낌과 분별이 존재한 의미요, 尋伺는 추리하고 엿보는 사유작용의 일종이다. 이들은 의지적인 집중이 요청되는 수행의 초기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다시 말하면 二禪은 어느 정도는 覺觀(혹은 尋伺)에 의해서 유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초선이 가지는 구조는 아래와 같다.
初禪 : 집착/떠남 → 覺觀
初禪에서 覺觀의 존재는 愛慾과 不善法의 떠남에 의해서, 또한 喜樂이 발생하면서 비로소 인식된다. 愛慾이 존재하면, 覺觀은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愛慾은 覺觀보다 거칠어서 覺觀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愛慾을 떠남으로써 일단 喜樂이 발생하면, 곧 覺觀은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애욕의 떠남과 희락의 발생이라는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覺觀은 인식된다. 그럼으로써 二禪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初禪에서 인식된 覺觀은 삼매로 이끄는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二禪에 들어서면서, 떠남의 대상이 되어 三昧와 대립된 관계에 놓인다. 二禪에서 三昧가 경험되기 위해서는, 대립되는 각관의 소멸이 반드시 요청된다. 만약 산란한 마음인 각관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삼매는 경험할 수 없고 그 고요함에서 오는 二禪의 喜樂은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散亂心의 覺觀은 三昧를 은폐하는 ‘구름’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초선에서 愛慾과 不善法이 떠나야만, 은폐된 喜樂이 발생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그래서 二禪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二禪 : 散亂/三昧 → 喜樂
二禪에서 남겨진 喜樂은 初禪에서 존속된 散亂心의 覺觀이 소멸되고, 내적으로 평정한 삼매에 의해서 발생된다. 그래서 初禪에서 발생한 喜樂은 二禪에서 내적 고요함(靜)에서 비롯된 喜樂으로 변화되어서 더욱 깊어진다. 이것은 언어의 근본적인 원인인 覺觀이 소멸됨으로써, 인식하는 주객의 이원론적인 인식이 소멸된 침묵의 기쁨과 행복감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번 정도는 경험한 바와 같이, 여기에 이르면 좌선에서 일어나기가 싫다. 그 행복감을 계속 유지 발전시키려는 욕구(喜欲, P?tiy? ca vir?g?)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구가 일어나는 순간에, 분별이 되어 다시금 초선의 散亂心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二禪에서 三禪으로 나아가는 길목은 결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二禪의 행복감을 벗어나서 깊어진 수위만큼이나 行者는 더욱 명료하게 ‘깨어있음’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三禪에서 발생하는 喜欲과 깨어있음(正念, 正智)의 갈등구조이다.
三禪 : 喜欲/正念 → 身受樂
二禪에서 三禪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그렇지만 조심스러운 기법은 ‘구함이 없는 낙천성(捨無求遊)’이다. 初禪의 떠남에서 발생된 喜樂과 二禪의 삼매에서 발생한 喜樂으로 말미암아,
行者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喜樂에 젖어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하려는 喜欲이 생긴다. 그럼으로 여기서는 더욱 섬세한 노력이 요청된다. 이때의 노력은 참으로 ‘노력이 없는 노력’이 되지 않으면, 三禪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 없는 노력’이란 긴장이 없는 냉철한 통찰, 곧 다름 아닌 ‘바른 깨어있음’이다.
그럼으로써, 분별적인 기쁨(喜)은 마침내 사라지고, 몸에 의해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때 행복감이란 몸으로 찾아오는 몸의 가벼움이고, 청명한 느낌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좌선은 비로소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그 행복감은 두둥실 문득 四禪의 청정심에 이른다. 이때는 모든 감정적인 징후나 인식의 분별이 멈추고, 오직 마음의 청정성과 빛남을 경험한다. 물론 이때, 통찰이 약하여 퇴행된 경우는 不苦?不樂의 無記나 아니면, 희미한 슬픔과 같은 고독감이 밀려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三禪에서 생성된 바른 깨어있음과 지혜는 결코 行者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불퇴전의 精進과 본래적인 의미의 淸淨性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四禪 : 幸福感/淸淨 → 不苦?不樂
이상으로 四禪 전체를 관통하는 떠남/생성의 변증법은 매우 역동적인 관계로 상향적인 방향을 고려한 설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래로 퇴행하는 경우도 고려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립된 양자는 서로를 은폐시키면서, 양립할 수 없는 갈등관계를 노출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자는 결코 논리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반대로 갈등관계에서 남겨진 앙금의 소용돌이가 클 경우, 그래서 충분한 통찰(觀)이 일어나지 못하고, 혹은 떠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만큼 집중(止)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전히 떠남과 생성의 변증법에서 行者의 放逸하지 않는 의지적인 노력은, 붓다가 누차에 걸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위의 표에서 보듯이, 떠남의 대상은 주로<愛欲, 覺觀, 喜欲, 슬픔>과 같은 감정이 계층을 이루면서 순차로 이루어지고, 마찬가지로 이 떠남의 요소들과 상응하여 생성되는 현상(法)도 기쁨이나 행복감과 같은 정서적인 측면도 있지만, 오히려<專一, 正念, 正智, 淸淨>과 같은 지혜가 더욱 깊어져 가는 일연의 과정을 내포한다. 여기서 전자가 정서적인 측면인 止(samatha)에 가깝다면, 반면에 후자는 내적인 통찰이 강조된 觀(vipasana)에 속하는 특성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四禪은 정서적인 측면과 지혜의 측면이 어우러진 관계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사선은 장애가 되는 애욕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떠남(止)은 내적인 고요함, 삼매에 도달하고, 이 삼매는 다시 바른 알아챔(正念)이나, 바른 지혜(正智)와 같은 새로운 통찰(觀)을 성립시키고 있다. 적어도 四禪 그 자체의 내적인 구조만을 검토했을 때, 애욕이 떠남으로써 보다 깊은 삼매에 이르고, 이 성숙된 삼매는 바른 염과 앎을 성립시키며, 다시 새로워진 앎의 통찰은 더욱 깊은 마음의 청정을 경험하게 하는, 일종의 止→觀, 觀→止의 循環關係를 보여준다.
전통적인 분류로는 四禪의 성격을 止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四禪을 정태적인 측면의 이해만을 강조한 결과로, 四禪이 가지는 역동적인 수행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오히려 이상의 논의로 보면, 四禪의 성격은 마음의 평정(止)과 참다운 깨어있음(觀)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인 수행과정’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겠다.
[출처]止觀과 四禪| 작성자 맑은마음
출처 :새벽이슬 원문보기 글쓴이 : 효로
(출처: http://blog.naver.com/123skeofh/140022858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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