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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 알려지니라 <행 9:19b-31>
우리는 막 시작된 2023년을 - 새해라고 부릅니다. - 그러나 2023년을 밝혀주는
저 태양은 - 2022년에도 밝혀주었던 태양과 똑같습니다. - 새로 시작하는 2023년 밤하늘을 비추는 달도 - 2022년 밤하늘을 비추었던 - 그 달과 똑같습니다.
2023년은 분명 날 수로는 새해입니다. – 그러나 사람들은 2023년을 맞이했지만 - 2022년에 일했던 곳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집으로 퇴근해서 - 똑같은 환경에서 생활을 하다가 -똑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잡니다. - 그리고 아침이면 똑같은 일터로 나갑니다.
모든 일상이 2023년이 되었지만 - 여전히 2022년에 했던 것을 반복적으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새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22년에 비해 새로 시작된 2023년이 - 여러분이 진정 원하는 새해로 다가왔습니까? - 그렇지 않을 겁니다.
새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 새해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상 시인의 말처럼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살 때만 -그 결과인 2023년 한 해가 우리에게
진정한 새해로 축적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 새로운 삶을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 새해는 -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 속에는 –가난과 질병이라는 겨울도 있고 – 고난과 시련이라는 태풍도 있고 – 희망과 소망의 봄도 있으며 – 지침의 여름도 있습니다.
겨울은 춥습니다. -그 겨울의 추위로 인해 땅이 얼게 되는데 –그로 인해 -병충해가 박멸됩니다. - 병충해가 없어진 그 겨울의 언 땅이 봄볕에 녹으면 - 그 봄의 땅에 농부들이 씨앗을 뿌립니다. - 그 씨는 여름의 무더운 태양과 비와 바람, - 때로는 원치 않는 폭풍을 맞아가면서 자랍니다. -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 꽉 찬 열매로 결실 보게 됩니다. - 그래서 가을에 수확의 기쁨을 - 농부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에 매일 태양만 내리쬔다면 - 생명과는 무관한 죽음의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 인생에 매일 비만 온다면 – 모든 것을 앗아가는 홍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해도 필요하고 –비도 필요하고 – 사계절 모두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는데 –그 사계절을 통해 -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꽉 찬 인생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2023년 올 1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인생의 계절을 맞이하든 – 혹 내가 원치 않는 환경이라 할지라도 – 그 환경과 계절은 -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참된 평안 -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 -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을 지닌 사람만 -올 1년 동안 - 인생의 엄동설한을 거친다 해도 –내 인생이 폭풍 속을 걷는다해도 -찌는 듯한 더위로 인해 인생이 지친다 해도 -자신의 오늘을 진리로 바르게 가꿀 것이요, -그 결과로서 참된 평안 - 새로운 미래와 희망이 있는 내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미래와 희망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 - 하나님을
자신의 미래와 희망으로 삼은 사람만 – 울면서라도 - 오늘 미래와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 그러한 사람의 내일만 - 참다운 희망과 미래로 결실될 수 있기에 - 그때에만 – 그 사람의 내일의 집합인 - 2023년이 새해로 축적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에 - 하늘이 무너져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날은 – 고대하고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을 - 우리의 희망과 미래로 삼고 -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때 - 오늘의 결과인 2023년도가 – 분명히 새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로 인해서 - 우리의 가정과 일터, - 그리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희망과 미래의 열매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게끔 –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을 통해서 - 몇 가지의 깨달음을 얻게 해주고 계십니다.
비늘 벗은 눈으로 - 길이요 –진리요 -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울은, 즉시 다메섹의 각 회당에서 -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 오늘 본문 21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이 - 빛이신 주님께 사로잡혀 눈이 멀었을 때 -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해주라 말씀하셨을 때, -아나니아가 보인 반응이 사도행전 9장 13절-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에 대한 아나니아와 -본문 속 유대인들의 반응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의 입장마저 같은 것 아닙니다. -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 그는 유대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주님의 대적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사울은 당신의 택하신 그릇이란 말을 듣는 순간, - 아나니아는 주저 없이 사울을 찾아 나섰습니다.
주님 안에서 - 사울 역시 사랑해야 할 형제임을 - 뒤늦게나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인 아나니아의 안수기도에 의해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 사울은 비로소 만물의 실상을 -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본문 속의 유대교인들이 -사울에 대해 -아나니아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들은 아나니아와는 반대로 - 주님을 부정하던 유대교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크리스천을 핍박하고 투옥시키던 사울을 - 자신들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요즘 유행어로 한다면 – 유대교인들은 – 사울을 깜부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사울의 행동이 갑자기 돌변하여 – 유대교에서 부정하는 주님을 – 증거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 지금까지 사울은 자신들의 편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
그 사울이 – 자신들이 볼 때 이단이 된 겁니다.
사울은 유대교의 배신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군사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
아나니아는 - 사울을 적군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 알고 보니 아군이었습니다. -
그래서 아나니아는 지체없이 사울을 -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다메섹의 유대교인들은 - 아군으로 여겼던 사울이 – 실은 적군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기대를 짓밟은 배신자 사울을 -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 이것이 바로 본문 23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들은 마침내 사울을 - 아무도 몰래 죽여 버리기로 - 공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울로 인해 신실한 유대교인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적지 않았던 탓입니다.
즉, 유대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 기독교로 개종하려 한 겁니다. - 그래서 그들에겐 - 배신자인 사울을 죽이는 것 외에 -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나니아와 다메섹 유대교인들의 사울에 대한 반응은 같아 보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정반대였습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가 단지 몇 마디의 말로 상대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다메섹의 유대교 신봉자들이 - 집단적으로 사울을 죽이기로 은밀히 공모했다면, - 객지에 홀로 떨어져 있던 사울로서는 -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4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아무도 몰래 은밀하게 공모한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수동형으로 기록된 헬라어 έϒνώσθη 에그노스테는 - 본래 동침한다는 뜻으로 – 유대인들의
계교가 - 속속들이 알려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울이 알려고 안달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 그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도 - 유대교인들의 계교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마치 사울이 그 공모의 현장에 - 동석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 24절 하반절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유대인교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짐과 동시에 - 사울은 몸을 피합니다. -
유대교인들은 언젠가는 사울이 - 다메섹을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을 했기에 -
그때를 기다리며 -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 의하면, - 이때 유대교인들은 -당시 다메섹의 지배자이던
아레다 왕의 신하들을 매수하여 - 성문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 어떻게든 사울을 죽이려는 그들의 의지가 - 그만큼 확고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 다메섹 군사의 힘을 빌리면 - 필히 사울을 죽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 결과는 본문 2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군사까지 동원하여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려던 유대교인들의 작전은 - 간단하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을 죽이기로 은밀하게 공모한 유대교인들의 계교가 -어떤 사람에 의해 -어떻게 사울에게 알려지게 되었는가? - 사울을 한밤중에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린 제자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 그들의 수는 총 몇 명이었는가?
본문은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 그들은 단지 도구였을 뿐, - 그들
배후에서 사울을 친히 구해내신 분은 -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비단
다메섹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 본문 28절-29절의 증언입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그 이후에 사울이 -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증거할 때, - 그곳에도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유대교의 신봉자들인 그들이 - 사울을 얼마나 미워했었는지, - 그를 죽이려고 힘을 다할 정도였습니다. - 그러나 그들의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30절이 –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이때에도 사울이 능동적으로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은 여전히 그들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지만, - 믿음의 형제들이 먼저 알고 -사울을 그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시켜 주었습니다.
그 고마운 믿음의 형제들 이름이나 직업이 무엇인지도 - 역시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 그들을 도구로 삼아 - 사울을 구원해내신 분은 - 이번에도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비늘 벗은 눈으로 만난 주님께 - 자신의 일생을 의탁하였을 때, - 주님께서 그 사울의 일평생을 이처럼 책임져 주신 것은 -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 뿐,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 두 가지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우리 삶의 축을 옮길 때,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 오늘 본문의 사울을 책임져 주셨던 - 바로 그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1988년 - 세르비아인들의 알바니아인에 대한 - 인종학살을 응징한다는 명분 하에 - 유럽대륙에서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었습니다.
지난 1999년 3월 24일 -미국을 선봉장으로 한 나토 공군의 - 대 유고 공습이 시작
된 이후 - 6월 10일 유고군의 일방적인 코소보 철수로 종전되기까지, -78일 동안 미 공군은 무려 4만회의 출격에 2만3천 톤의 폭탄을 유고 전역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유고의 발전소, - 정유소, 주요공장, - 전기수도 시설 등이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대량공습의 와중에 -미 공군이 입은 피해란 - 전투기 손실 단 한 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추락하는 전투기로부터 -낙하산을 타고 비상 탈출한 미 조종사는 -미국의 특공대에 의해 -불과 몇 시간 만에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조종사가 적진에 떨어진다는 것은 - 적군의 포로가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하지점에서 - 첨단 기기로 자신의 위치를 알렸고, 그 신호를 포착한 미 특공대는 -유고군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하려 - 정확하게 그를 구출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 같은 실화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개전 초기 유고의 접경을 순시하던 미군 3명이 유고군에 사로잡혀 -포로로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인권 운동가인 - 흑인 목사 재시 잭슨이 - 단신 유고로 날아가
밀로세비치 유고 대통령과 담판 끝에 - 억류 한 달 만인 5월 2일, - 그 세 명의
포로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전쟁 중에 적군의 포로를 일방적으로 풀어주는,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유고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 재시 잭슨 목사의 언변이 탁월했기 때문이겠습니까? - 그 개인의 능력으로 인함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 미국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유고대통령 밀로세비치가 미국의 힘 앞에 굴복한 것이었습니다. - 만약 그 세 명의 포로가 -미군이 아니었더라면, -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이 초강대국이긴 하지만 -그러나 영원하거나 전지전능한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단지 다른 나라에 비해 - 지금 현재 상대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그 나라의 속을 들여다보면, -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온갖 문제와 - 모순과 갈등이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적진에 떨어진 자국의 조종사를 구출하고, -적군에 사로잡힌 자국의 병사를 전쟁의 와중에 구해냈습니다.
유한하기 짝이 없고 - 온갖 문제의 온상인 세상의 나라도 -이처럼 자국민과 병사를 책임진다면, -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 - 전능하신 주님께서, -어찌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 책임져주시지 않습니까?
만약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 그것은 하나님을 -미국 대통령보다 못한 존재로
여김을 의미할진대, - 그런 믿음으로야 - 우리 개인의 인생은 고사하고, - 어찌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책임져주심을 믿음으로서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흔들림 없이 그분의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심어가는 -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 아무리 은밀하게 행하여도 - 불의한 짓은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다는 교훈입니다.
사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음모를 얼마나 비밀리에 추진했겠습니까? -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음모와 계교는 - 결코 비밀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2000년 5월 4일 유포되기 시작한 '러브 바이러스'가 -불과 몇 일만에 전 세계 수백 만 대의 컴퓨터를 - 감염시켰습니다.
미국의 경우 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백악관과 의회, -국무부, -국방부 등 주요
정부 기관마저 - 러브 바이러스'의 침투를 당하였습니다. - 유럽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러브 바이러스의 공격에 - 속수무책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벨기에에서는 -은행 현금자동인출기가 작동을 멈췄고, -독일 내무부에서는 이메일 수신 자체가 중단되었습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컴퓨터 시스템 역시 - 전면 정지되고 말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전 기업의 30%, - 스웨덴에서는 기업의 80%가 -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이로 인해 전 세계가 입은 경제적 손실은 25억불 – 우리 돈으로 2조 6천억원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 순전히 악의로 바이러스를 유포시킨다는 것은 - 참으로 가공스러운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 미연방수사국 FBI가 - 바이러스가 침투한 전화회선을
역 추적하여, - 미국으로부터 1만 Km 이상 떨어져 있는 필리핀 마닐라의 판다칸 소재 한 아파트에서 - 범인이 사용한 컴퓨터를 - 정확하게 찾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수천만 대의 컴퓨터 중에서 -범인이 사용한 단 한 대의 컴퓨터를 찾아낸다는 것은, - 비전문인인 저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 컴퓨터로 바이러스를 유포한 범인으로 지목된 – 당시 23세의 필리핀 청년, - AMA 컴퓨터대학 학생인 오넬 데 구스만조차도 -자신이 그처럼 쉽게 잡히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조직에 지나지 않는 미국의 FBI가 이 정도라면, -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 앞에서 -어찌 불의한 짓이 영원히 가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 12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어둠은 사람의 시야를 차단합니다. -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기도 합니다. - 그것은 무슨 짓을 하든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 빛과 어둠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흑암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다윗이 이처럼 고백한 데에는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 그것도 한밤중, - 구중궁궐 속에서 말입니다. - 그 여인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있었습니다. - 자신의 불륜을 본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사자들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 다른 사람이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그 순간 그는 -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 지극히 단순한 사실 말입니다.
마침내 그의 불의가 하나님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 그로 인해 그는 백주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 수치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심령에 다시 한번 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흑암이 숨겨질 수 없으며, - 하나님께는 흑암과 빛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실추되었던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 내일 나의 삶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존귀한 삶으로 귀결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백주에 수모를 당하는 - 수치스런 삶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떤 결과로 끝날 것인지는 - 결코 타인의 소관이 아닙니다. - 그것은
전적으로 오늘의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직 진리를 좇아 살아가는 나의 삶을 -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심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내 자신의 욕망을 위해 - 아무도 몰래 불의와 거짓을 행할 경우, -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됨을 믿으면서 살 것인가, -나만은 예외일 것으로 착각하며 살 것인가?
이 두 길 중에 - 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 나 자신에게 - 내 인생의 결과는
송두리째 달려 있습니다. -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 내가 본문에 나타난
생명의 사울이 될 수도 있고, - 음흉한 사망의 유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주님의 진리를 좇아 산다는 것은, 결코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을 책임지는, - 자신을 위한 최고 최선의 삶입니다.
* 2294 -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
==============={ 기 도 }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 결과적으로는 주님을 미국 대통령보다 못하게, 주님의 능력을 FBI의 수사능력보다도 -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심어야 할 때 - 진리를 심지도 못했고, - 도리어 사람의 눈이 없는 곳이라면, - 마치 그곳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양, -불의와 거짓을 불사하며 살아 왔습니다.
내일 내 인생의 결과가, - 전적으로 오늘 나의 삶에 의해 결정됨을 다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진리를 좇아가는 한, - 주님께서 반드시 내 삶을 책임져 주심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 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둠이 어둠일 수 없음을 망각치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 흔들림 없이 진리를 심는 나의 삶이, - 날이 갈수록,
주님 안에서 더욱 존귀케 하여 주옵소서. - 그 같은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빛이
이 세상에 비추이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나의 그릇된 오늘의 삶으로 인해, 내일 만인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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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어떤 경우에도 - 흔들림 없이 진리를 심는 나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는 – 주님의
백성들과 – 비전교회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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