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36. [역경의 열매] 송태후 (1-15) 예수 그리스도 만난 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다
서울로 진학 못 해 좌절감으로 지내다
CCC의 한 자매 초대로 성경공부 시작
철야 기도회 중 뜨거운 성령의 불 영접
송태후 장로가 지난 3일 전남 목포시 옥암동에서 운영 중인 기독교 전문점 ‘예수마을’의 좌우명을 소개하고 있다. 독서를 무척 좋아했던 그는 시각장애를 얻은 후부터 책을 많이 읽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출생하신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옥도라는 외딴섬에서 태어났다. 가부장적 유교 문화 가정에서 6남매 중 첫째로 자라났다. 중·고등학교는 목포로 유학 와 공부했다. 서울로 대학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그 꿈을 접어야 했고 목포교육대학으로 진학했다.
서울로 대학을 가지 못한 좌절감을 안고 대학 1학년을 다니던 중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한 자매로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초대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성경을 가르치신 당시 이경숙 간사님(현 태국 선교사)의 말씀에 내 마음은 예수님에 대해 열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고향 교회에 몇 번 다녔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일주일간 모이는 성경공부에서 나는 기독교에 입문하기로 하고 성경을 직접 사서 읽기 시작했다. 1971년 4월 하순쯤 CCC로 인도한 자매의 안내로 목포제일교회에 등록한 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71년 5월 24일 CCC 회원들의 철야 기도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 성령께서 뜨겁게 임재하셨다. 특히 합심기도 시간 성령의 불이 내게 임했다. 하나님은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보여주며 더럽고 추한 나의 죄악에 통곡의 눈물을 쏟게 하셨다. 저녁 9시에 시작된 기도회는 새벽 1시까지 진행됐는데 많은 CCC 회원들이 나의 애통해하는 기도에 중보해줬다. 새벽 1시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그 은혜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한 날로서 나의 영적 생일이다.
좌절감에 빠졌던 대학생활은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이후 CCC에서 계속되는 성경공부와 함께 영적인 안목이 넓어지며 기쁨과 희망으로 변했다. 캠퍼스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사영리’ 전도 책자로 전도하며 CCC 모임으로 인도했다.
패배감으로 시작된 대학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에 대한 사명감이 커지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도 깊어갔다. 교회에서도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회학교에서 열정을 다해 봉사할 수 있었다. 나를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샌디에고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풍랑과 암초에 파괴될 수 있으나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암울하고 어두운 마음을 밝은 마음으로, 우울한 감정을 기쁨의 감정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이것이 곧 복음이라 믿는다.
약력=1952년 전남 신안군 출생, 목포교육대 졸업, 초등학교 교사 22년 근무, 목포연합장로회 회장(2005),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목포지구 후원회장 및 건축위원장, 사단법인 문화 행동 돋음 대표 역임. 현 기독교전문점 예수마을 대표, 사단법인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어린이전도협회 목포지회 이사장 역임.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 예수 그리스도 만난 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다
* [역경의 열매] 송태후 (2) 두 차례 대형 집회 참석… 민족 복음화 헌신 다짐
* [역경의 열매] 송태후 (3) CCC는 영적 못자리요 어머니… 영적 삶의 기본기 다져
* [역경의 열매] 송태후 (4) 올바른 '말씀과 기도'의 길 인도해 준 영적 지도자들
* [역경의 열매] 송태화 (5) 50년 넘게 이어온 나사렛형제들과 아름다운 동행
* [역경의 열매] 송태후 (6) 필리핀에 단기 선교사로 참여… 세계 복음화에 한몫
* [역경의 열매] 송태후 (7) 열방을 향한 기도에 "선교의 마음 열리고…" 큰 울림
* [역경의 열매] 송태후 (8) 대학 졸업 후 교육 선교사로 첫발… 마을 교회 예배 회복
* [역경의 열매] 송태후 (9) 최변방 외딴섬 발령… 친지들 "가거도가 웬 말이냐" 탄식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0) 시야 점점 좁아져 "시력 회복해 주세요" 절박한 기도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1) 1급 시각장애 이겨내고 전문경영인으로 거듭나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2) 성령의 은혜로 가정 회복… 어린 시절 트라우마 치유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3) 다음세대 복음화 위해 바나바처럼 섬기기로 다짐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4) 양분된 목포 교계와 교회… 기도로 하나 되다
* [역경의 열매] 송태후 (15·끝) "주의 힘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 장래에 전하리라"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역경의 열매] 송태후 (2) 두 차례 대형 집회 참석… 민족 복음화 헌신 다짐
거지 순례 홍보한 충무체육관 집회와
총책임 순장으로 섬긴 ‘엑스플로74’서
김준곤 목사의 복음화 메시지에 감동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5·16광장(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개최된 부흥 대성회 ‘EXPLO(엑스플로) 74’에 참석한 기독교인들의 모습.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제공
19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한국 기독교 최초의 1만명 합숙 집회가 열렸다. 6월 말 대학이 방학하자마자 간사님으로부터 집회를 위한 홍보요원으로 전남 강진군과 장흥군에 갈 것을 요청받았다.
나는 사영리와 집회 홍보지를 거지 순례 짐 꾸러미에 넣고 단돈 2000원으로 농어촌 자연 부락을 샅샅이 돌며 30여 교회를 순회했다. 당시 열악한 교통 환경, 비포장도로, 험악한 산길 등을 도보로 순회하던 일은 큰 경험이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즐겨 부르던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농촌 들판과 험준한 산골짜기를 넘을 때면 몸은 무더운 날씨에 흘러내리는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됐다. 그 몰골은 말 그대로 ‘산 거지’였다. 10일 동안 십자가가 보이는 곳마다 찾아가 집회를 홍보했다. 그럴 때마다 만난 성도들은 여비를 보태주기도 하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주거나 숙식도 제공해주셨다.
당시 장흥군 대덕면 산골짜기의 고 김의환 박사 모교회였던 가학교회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무척이나 배가 고팠는데 들에서 김을 매고 있는 50대 아주머니에게 사영리로 복음을 전했더니 자기 집으로 데려가 삶은 감자를 주셨다. 감사의 눈물과 땀이 범벅돼 먹는 날 보며 아주머니께서 “나도 예수 믿겠다”고 결심한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드디어 거지 순례 홍보 여행과 함께 기도로 사모하던 충무체육관 집회에 참석했다. CCC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 복음화 선언 메시지는 내 마음을 뒤흔들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일깨웠다.
3년 뒤 서울 여의도에서 4박 5일간 열린 ‘엑스플로74’는 30만명의 합숙훈련과 200만명의 광장집회로 진행됐다. 당시 나는 마포구 아현초등학교에서 전남의 목포 무안 신안에서 참여한 1200명 성도의 숙식과 교육을 책임지는 총순장으로 섬겼다. 목포지구에서 훈련된 30여명의 교육 순장과 1200여명 성도들의 숙식과 교육, 여의도광장으로의 인솔을 담당했다. 세 끼 식사는 본부에서 차량으로 배송돼 순별로 배식을 했는데 식사 차량이 세 차례나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굶주린 1200명의 항의는 어린 나에게 피 말리는 고통이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실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를 외치며 저녁 집회를 위해 여의도광장을 향해 행진할 때는 힘이 솟아났다. 김 목사님과 빌 브라이트 CCC 국제총재의 메시지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내 몸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헌신을 다짐하게 했다.
마지막 날 30만명이 참석한 철야 집회에서 나는 비를 맞으며 스코틀랜드를 복음으로 변화시켰던 존 녹스처럼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가족 복음화, 학교 복음화, 믿음의 가정을 이뤄 달라는 기도는 모두 응답받아 지금은 복음 천국을 이루고 있다.
CCC가 주최한 두 차례의 대형집회는 지도자로 훈련받는 과정이었다. 거지전도 여행과 총책임 순장으로 섬기며 받은 고난과 혹독한 시련은 지도자로서의 야성을 갖게 해줬다.(욜 2:28)
***[역경의 열매] 송태후 (3) CCC는 영적 못자리요 어머니… 영적 삶의 기본기 다져
기도와 모임, 훈련과 섬김, 전도와 양육 등
각종 수련회와 기도회 통한 비전 회복하며
영혼 성장의 건강한 삶 열어가는 밑거름 돼
CCC 청년들이 1982년 즈음 충북 영동군 심천면 미루나무 섬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기도하는 모습.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대학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내 영적인 못자리요 어머니다. 캠퍼스에서 아침 기도회, 회관에서 채플과 소그룹모임, 순장 훈련과 섬김, 전도와 양육 등을 하면서 나의 영적 삶의 기본기가 든든히 다져졌다.
방학 때마다 열리는 여름 수련회와 겨울 금식 수련회를 통해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비전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생 중반까지 여름에는 학생들과 함께하는 여름 수련회에 참가해 은혜를 받았고, 겨울에는 원단금식기도회에 참여해 CCC 대표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기도의 영성을 받았다.
종로 보신각에서 울리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졌던 송구영신 기도회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격조 있는 찬양팀의 연주에 맞춰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가정과 교회를 위한 기도, 나의 개인 소원 등 올려드리는 기도마다 큰 응답의 열매로 나타났다.
그래서 20년 이상을 해마다 열리는 원단금식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특히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충북 심천 미루나무 섬에서 열린 천막수련회 때가 기억에 남는다. 어두운 밤 강가 모래밭에서 펼쳐지는 김 목사님의 백문일답 메시지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외치며 식은 비전과 열정을 회복했다.
특히 CCC에서 한 주간씩 펼쳐지는 성서대학은 내게 성경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해줬다. 일본 선교사였던 고 김안신 간사나 태국 선교사 윤수길 간사, 온누리교회 목사였던 고 하용조 간사, 고 채남선 간사 등을 통한 은혜의 강의는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1973년 겨울방학에 열린 성서대학 때다. 강사로 온 성서유니온 총무 고 윤종하 장로의 말씀과 묵상에 대한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 날마다 삶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강의에 큰 도전을 받았다. 강의 도중에 윤 장로님이 한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 성도, 새벽기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삶에는 성경이 없습니다. 영국 사람은 새벽기도 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서는 성경의 맛이 납니다.”
그 이후 매일성경(성서유니온발행)으로 30년 가까이 묵상 생활을 했다. 지금은 성경으로만 묵상한다. 난 20~30대 청년기에 CCC와 함께 체계 있는 성경 말씀 공부, 성경적 기도 훈련, 말씀 묵상 훈련, 각종 수련회를 통한 비전 회복 등으로 영혼이 성장해 내 인생을 건강한 삶으로 열어가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6~7)
***[역경의 열매] 송태후 (4) 올바른 ‘말씀과 기도’의 길 인도해 준 영적 지도자들
이경숙 CCC 간사에게 처음 기도 배우고
김일남 목사 김준곤 목사 등 영성 본받아
기도 체득하고 지경 넓혀 영적 깊이 더해
송태후 장로가 1995년 ‘20일 금식기도’를 마친 후 식사하는 모습. 송 장로는 중2 때부터 안 좋았던 시력이 악화돼 결국 이듬해 교직을 그만두게 됐다. 송 장로에게 있어 금식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대화의 시간이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7~18)
크리스천의 두 날개는 말씀과 기도라고 한다. 올바른 말씀의 날개와 기도의 날개가 균형 있게 펼쳐질 때 크리스천의 삶은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가 부어지게 된다.
내가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기도를 가르쳐주신 이경숙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간사님은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었다. 그분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내게 기도가 무엇이며, 왜 기도해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특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의 패턴과 내용을 설명하며 하나님께 대화하듯 기도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CCC 모임에서 합심 기도, 대화식 기도, 릴레이 기도를 경험하면서 기도를 체득하게 됐고, 나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대학 캠퍼스 아침 기도회 때는 서로 돌아가면서 순서를 담당하는데 캠퍼스 복음화와 교수님, 친구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 강의를 위한 기도 등을 인도하며 기도에 대한 지경을 구체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앙 성장 과정에서 기도하는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음에 다시 자세하게 소개하겠지만,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님이었던 고 김일남 목사님, 영적 거장이신 고 김준곤 목사님의 경건 기도 영성을 본받아 그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가고 있다.
그 외에도 내 기도를 깊이 있게 끌어 준 분들이 있다. 무등산 제일기도원의 고 공사진 장로님, 흑석산기도원의 안영민 방옥석 원장님이시다. 이분들은 올바른 금식기도와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손수 보여주시며 이끌어 주셨다.
주님을 영접한 이후 매년 방학을 맞으면 3일 5일 7일씩 기도처에서 금식기도 하며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고 배운 강의를 묵상하면서 영적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1995년 1월 1일부터 20일까지 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시무장로를 맡았던 나는 20일간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참여했다. 흑석산에서 기도했다. 당시 기도로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선하게 수습돼 지금은 두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기도에 관한 신앙 서적들을 통해서도 기도의 지성과 영성을 더했다.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오 할레스비, 앤드류 머레이 등은 성경적 기도의 훌륭한 가이드가 됐다. 홀리네이션스선교회 대표이신 김상숙 권사님의 ‘말씀으로 기도해 보았나요’란 책은 묻고 듣고 순종하는 내 기도 사이클을 더 견고하게 해주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나 자신을 더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게 됐다.(벧전 1:16) 또 나를 위한 기도보다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와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됐다. 아울러 기도가 깊어질수록 어려운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베푸는 손도 더 두터워져 갔다.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진 이들이 두 팔을 벌려 드리는 기도를 통해 지구는 돌아간다. 세상은 높이 쳐든 기도의 손들에 기대어 유지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송태화 (5) 50년 넘게 이어온 나사렛형제들과 아름다운 동행
졸업생 수련회서 ‘나사렛형제들’ 발족
‘3중 헌신’과 ‘5대 행동강령’ 헌장 선포
매월 전국서 모여 영적 재충전 기회 돼
송태후(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 장로가 목포교대 CCC 나사렛형제들 홈커밍데이에서 함께한 모습.
1968년 1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학사회, 즉 CCC 졸업생 수련회에서 ‘나사렛형제들’이 발족했다. 당시 ‘삼중 헌신’과 ‘5대 행동강령’을 담은 나사렛형제들의 헌장이 선포됐다. 삼중 헌신이란 ‘주님께 헌신’ ‘민족의 입체적 구원에의 헌신’ ‘형제들에의 헌신’을 말한다. 5대 행동강령은 ‘말씀’ ‘기도’ ‘전도’ ‘사랑’ ‘협심’이다.
목포 나사렛형제들은 김양성 장로가 1970년 교사로 발령 난 때부터 모이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52년째 이어지고 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이면 각지에 흩어져 근무하던 나사렛형제들이 월례회로 CCC 회관으로 모였다. 월례회는 예배와 성경공부, 간증과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로 밤을 새워가며 모일 때가 많았다.
월례회는 한 달간 각자 근무지에서 소진했던 마음을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기회였다. 요즘 목포 나사렛형제들의 월례회는 3대가 함께 모이고 있다. 특히 1년에 한 번 모이는 홈커밍데이, 이른바 ‘친정 오는 날’ 축제에는 전국에 흩어진 형제들이 모인다. 20대에서부터 70대 후반까지 폭넓은 연령층이지만 예수 안에서 나사렛 헌장에 담긴 형제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있다.
1975년 CCC 커플이었던 맏형 김 장로와 김현자 권사의 결혼을 시작으로 정인수 목사(76년), 전남주 목사(77년), 곽인환 장로(77년) 그리고 나까지(78년) 결혼하면서 다섯 가정의 ‘출발 순’이 발족했다. 출발 순의 공통점은 모두가 교사이면서 CCC 커플로 나사렛형제들의 헌장에 담긴 삼중 헌신과 5대 행동강령 실천을 다짐하고 CCC 사역을 위한 기도와 헌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출발 순은 회관 건축에도 주춧돌 역할을 했다. 출발 순은 가족 캠프를 통해 2박 3일간 모여 서로 영적 교제를 해왔으나 정 목사와 전 목사가 CCC에서 파송을 받아 해외 선교사로 나가면서 오랫동안 중단됐다. 그러다 최근에야 다시 국내에서 모이게 됐다. 출발 순은 조만간 캠프를 열어 모임을 이어갈 계획이다. 출발 순의 자녀들은 대부분 CCC 교육을 받고 영적으로 성장했으며 목사 의사 약사 과학자 신학자 학자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다.
나는 CCC와 나사렛형제들 활동을 하면서 공통의 원칙 하나를 발견했다. 지역교회에 뿌리내리고 정착하지 못한 ‘CCC맨’들은 신앙마저도 쇠퇴한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CCC에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며 월례회에 참여하는 나사렛형제들은 각자 교회 생활도 깊이 뿌리내리며 40대부터 각각 장로와 권사로 세워져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나사렛형제들이 많이 소속된 교회의 경우엔 CCC 선교 사역을 위해 정기적인 선교헌금도 보내오고 있다. 파라처치(선교단체)와 로컬처치(지역교회)가 협력해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것이다.
주님이 세운 교회와 선교기관의 아름다운 동행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그럴 때면 시편 133편 1절 말씀이 생각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역경의 열매] 송태후 (6) 필리핀에 단기 선교사로 참여… 세계 복음화에 한몫
‘80세계복음화대성회’서 목사님들이 전한
세계 선교 메시지에 선교사로 헌신 다짐
나사렛 형제들과 첫 해외 선교 사역 경험
1990년 8월 필리핀 만달리옹에서 ‘사영리’ 전도지로 현지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송태후 장로.
1980년은 우리나라와 민족에 큰 격동의 해였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12·12 군사 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국가적으로 암울한 때였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80 세계복음화대성회’가 8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00만명 이상의 성도들은 4박 5일로 진행된 집회에 모여 조국과 민족을 지켜 달라고 뜨겁게 기도했다.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외치던 예레미야처럼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김준곤 목사의 피를 토한 심정의 메시지는 100만 성도의 심령에서 통곡의 눈물을 쏟게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나는 광장 바닥을 뒹굴며 ‘하나님이여! 조국과 민족을 지켜주소서’라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당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많은 성도의 기도가 오늘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케 했다고 믿는다.
마지막 날 밤, 김 목사와 국제 CCC 총재 빌 브라이트 박사가 전한 세계선교에 대한 메시지와 선교의 도전은 10만명 이상의 성도가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고 일어서게 했다. 평생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 자비량 선교사로 나갈 사람, 1년에서 3년 정도 사업과 직장을 휴직하고 단기선교사로 나갈 사람, 자녀를 선교사로 키워 보낼 사람 등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선교에 대한 도전으로 일어섰고 나도 그 대열에 참여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선교에 대한 기도의 지경이 넓어졌다. 이후 섬기던 교회에서 선교부장으로 10년 넘게 봉사하면서 동남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를 상대로 한 선교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송태후 장로가 만달리옹의 달동네에 사는 한 가정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고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
90년 8월 CCC에서는 학생들과 나사렛형제들을 중심으로 필리핀 마닐라에 단기선교사 3000명을 파송했다. 나도 그 대열에 함께했다. 해외 진출이 처음인 나로서는 공항에서부터 생소한 환경과 문화, 언어 등을 접하게 될 큰 두려움을 안고 떠났다.
하지만 믿음으로 헌신한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짧은 기간임에도 학생들과 함께 영어로 된 ‘사영리’ 전도지를 들고 축호전도, 학교 방문 전도, 거리 전도를 할 수 있도록 이끄셨다. 내 영어 실력은 아주 짧았지만 전도할 때면 언어의 은사를 내려주신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도 경험했다. 우리나라 달동네 같은 언덕에 자리 잡은 한 가정을 전도하러 갔을 땐 여러 식구가 따뜻하게 우리 전도팀을 맞았다. 짧은 영어로 온갖 손짓을 곁들여가며 전도했음에도 그들은 복음에 반응했다. 나흘 동안 계속 그 집을 방문하며 양육 교육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현장에서 전도한 자들을 초청해 전도 축제도 열었는데 80여명의 결신자들이 모인 대열에 우리 팀이 전도한 8명의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뻤다. 이날 모인 결신자들은 모두 현지 교회와 연결됐으며 현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로 화답했다.
처음 경험한 해외 선교 사역이었지만 하나님이 맺어주신 결신자들로 인해 자신감을 얻게 됐다. 짧은 영어에도 복음을 듣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전도는 언어보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임을 실감했다.(딤후 4:2)
***[역경의 열매] 송태후 (7) 열방을 향한 기도에 “선교의 마음 열리고…” 큰 울림
섬기던 교회서 선교부장으로 봉사하며
단기선교팀 인솔 동남아지역 선교 활동
수련회 통해 주민들과 현지 선교사 위로
2014년 8월 김재성 선교사가 사역 중인 필리핀 세이브 보고교회 설립 예배를 마치고 현지 성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해발 800m 고지 산족 마을에 있는 이 교회를 목포제일교회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박승호 담임목사님과 함께 찾았다.
1990년 필리핀 마닐라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섬기던 목포제일교회에서 선교부장으로서 10년 넘게 봉사했다. 91년부터 94년까지 세 차례 단기선교팀을 인솔해 교회에서 후원한 김정웅 선교사의 태국 촌부리선교센터를 지원하는 선교 활동도 다녀왔다.
단기선교는 매회 자비량으로 자원하는 교회 직분자들과 청년들이 10여명 넘게 참가했다. 센터 내 보육원에서는 여름성경학교를, 마약재활원에서는 수련회를 열었다. 선교팀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이·미용 봉사, 마을소독, 축호전도 등을 벌이며 현지 교회를 지원했다. 교회에서 마련한 선물과 의류품, 악기 등도 전달했다. 마지막 날 100여명 이상의 주민들을 초청해 전도 집회와 잔치를 열며 그들의 영과 육을 풍성하게 해줬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두 번째 단기선교 때는 목포제일교회 40주년 기념으로 태국 서북쪽 미얀마 접경지대에 사는 카렌족 마을을 찾았다. 마을 내 따꼴랑교회 설립 예배에 참석했다. 선교팀 일행은 촌부리에서 7시간을 버스로 이동했는데 저녁이 돼서야 따꼴랑 마을 어귀 한 간이음식점에서 식사하게 됐다. 메뉴는 빵 한 조각과 채소 샐러드, 콜라 한 잔이 전부였다. 샐러드는 독특한 향과 함께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일행도 잘 먹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현지에 적응하려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나 억지로 샐러드 절반을 먹었다. 그날 밤 카렌 부족 마을에서 노숙하며 잠을 자는데 다른 일행 모두는 땅에서 올라온 벌레와 날아다니는 곤충에 물려 온몸에 핏자국이 됐으나, 난 샐러드를 먹었던 탓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해충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 일행이 날 부러워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단기선교 참가자 대부분은 훗날 처음 나서는 해외 나들이여서 그런지 큰 감격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중 두 사람은 현재 선교사로 헌신해 해외에서 활동 중이다.
2004년 8월에는 내가 속한 밀알 부부 9가정과 함께 싱가포르 국제 대학생선교회(CCC) 동아시아 본부를 방문했다. 현지 선교사들과 수련회를 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 일행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돌며 각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사역을 5박 6일 동안 진행했다.
처음에는 해외여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던 가족들이 선교사 수련회에 참석하며 각기 돌아본 나라마다 중보기도로 참여하면서 “선교의 마음이 열리며 큰 은혜를 받았다”며 간증을 전할 땐 팀 리더로서 뿌듯했다.
2018년 8월에는 목포제일교회 박승호 담임목사님과 함께 19명의 청소년과 청년들로 구성된 비전트립 팀을 꾸려 노병일 선교사가 사역하는 캄보디아를 찾았다. 당시 우기로 강이 범람해 마을이 섬이 돼버린 빵쯔라엥소망교회를 찾았는데, 마을 전체를 집집이 방문하며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해 선물과 음식을 나누는 잔치를 열며 전도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수차례의 단기 선교사역을 통해 내가 섬기는 교회는 ‘영적 근육’이 튼튼해졌다고 생각한다. 열방을 향한 나의 중보기도도 한층 깊어졌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8) 대학 졸업 후 교육 선교사로 첫발… 마을 교회 예배 회복
흩어진 성도들과 폐허 된 교회 새 단장
주중에는 학교 교사로 교육 사역 충실
주말과 주일엔 축호 전도와 예배 전념
송태후 장로가 1975년 전남 완도군 군외면 영풍리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열고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군외동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송 장로는 폐허가 된 예배당을 수리하고 학교 아이들을 전도했다.
1973년 2월 목포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는 우리를 직장 선교사로 파송했다. 당시 지도 간사였던 고(故) 채남선 목사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 길에 오른 바울과 바나바처럼 직장에서 어떤 고난에도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며 하나님 나라 사역자로 일할 것”을 권면했다.
그해 5월 나는 교사로 발령받아 전남 완도군 금일면 생영초등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준 이 아이들을 나의 분신처럼 주님의 가슴으로 품게 하소서’. 이것은 교육자로서 내 평생 기도다. 기도한 대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복음으로 관계하며 하나님 나라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다.
첫 부임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바다가 생업의 터전이어서 ‘바다 신’을 섬기는 신당을 마을 뒷산에 세우고 정초면 풍요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72년 교회를 개척하러 오신 한 여전도사가 ‘이 신당을 깨뜨려야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며 산에 올라가 신당을 훼손해 버렸다.
내가 부임을 했을 때는 이 일로 인해 그 여전도사는 마을에서 쫓겨나 산에 움막을 짓고 혼자 예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구했다.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을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사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전도사가 마을에 내려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요청도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을 사람들과 화해하고 그해 10월부터 전도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와 교회 사역을 재개했다. 나 또한 전도사를 도와 교회학교를 시작하며 예배를 회복해갔다.
모 교회와 여러 교회의 지원을 받아 74년 99㎡(30평) 규모의 사택을 겸한 예배당을 건축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이 교회가 바로 생영교회로 지금까지도 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75년 완도군 군외동초등학교에서 근무했을 때였다. 10여년 전 세워진 현지 교회는 문이 닫혔고 훼손됐으며, 주민들의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성경 속 느헤미야가 훼파된 조국 성전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예배당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주민들에게 짐을 치울 것을 간청했고 흩어진 성도들을 모아 폐허가 된 예배당을 수리하고 단장했다.
나는 학교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학교를 시작했다. 흩어졌던 성도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재개했다. 자비량 전도사로서 사역한 것이다. 주중에는 학교 교사로 교육 현장에 충실했으며 주말과 주일에는 축호전도와 예배에 집중했다. 3개월이 지나자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이 20여명에 이르게 돼 교역자를 초빙했다. 나는 봉사자로 섬겼다.
교사에게 주어진 황금 시간인 방학이 되면 영적 재충전을 위한 수련회나 금식기도를 통해 소진됐던 영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했다. 그 힘으로 교육 현장에 맡겨진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20대의 젊음을 주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도록 능력 주심에 감사드린다. 비록 미숙했지만 말이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9) 최변방 외딴섬 발령… 친지들 “가거도가 웬 말이냐” 탄식
가족과 떨어져 지낼 생각에 고민 끝 부임
9명의 제자 사랑으로 돌보며 교사로 헌신
근무 4년 동안 기독교 서적 400여 권 읽어
송태후 장로가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 방파제 위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있다.
전남 완도와 목포에서 16년의 교육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순환 근무 원칙에 따라 1989년 3월 1일 신안군 흑산면 소흑산(가거도) 항리분교로 발령을 받았다. 주변 친지들은 ‘가거도 발령이 웬 말이냐’라며 탄식에 가까운 위로를 보내왔다. 최선을 다해 교사로 일했는데 대한민국 최변방이자 중국의 닭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는 가거도로 발령 낸 교육 당국과 하나님마저도 원망스러운 기도가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 6학년에 다니는 두 자녀와 아내를 두고 방학 때나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했다. 사직할 것인가. 근무할 것인가 고민 끝에 일단 부임하기로 했다.
목포에서 출발해 흑산도에서 하루 자고 10시간의 항해 끝에 이틀에 걸쳐 가거도에 도착했다. 또다시 해발 640m의 험준한 산 능선을 한 시간가량 넘어 항리분교에 도착했다. 처량하고 암울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내 분신 같은 9명의 아이들을 사랑하며 교사로 헌신하기로 다시 다짐했다. 기능직 직원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소형발전기가 설치된 덕분에 전깃불을 밝힐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왜 이곳에 보내셨으며 할 일은 무엇인가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당시 나는 시력이 많이 약해지고 있었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질환으로 시신경 50% 가까이 잠식되고 있어 시야가 매우 좁아졌지만 독서는 가능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교실을 책 읽는 방으로 꾸몄다. 독서교육에 중점을 두고 지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도 기독교 전문서적을 심취하라는 응답을 주셨다. 당시 나는 좋은 책이 큰 사람을 만든다는 비전으로 작은 기독교 서점을 운영했는데, 아내에게 서점에 있는 읽고 싶은 책 50여권을 화물선 편으로 보내 달라 부탁해 독서에 전념했다.
그해 6월 중순쯤이다. 주일이라 산 능선을 넘어 마을 교회에 예배하러 가는데 갑자기 바다 쪽에서 올라온 짙은 물안개가 온 섬을 순식간에 덮쳐버렸다. 한 치 앞을 걸을 수 없을 정도여서 길가의 돌에 걸터앉아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처음엔 두려움과 겁에 질려 소름까지 느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홀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통곡의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니 오후 1시가 됐다. 그 무렵 순식간에 짙은 물안개도 걷혔다.
섬 근무 4년 동안 400여권이 넘는 기독교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동료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은 밤을 새워 독서에 심취한 내게 “고시 공부하러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밧모섬에 유배됐던 요한에게 요한 서신과 계시록을 쓰게 하셨던 하나님, 가거도를 포함한 외딴섬 4년의 근무는 다가올 미래를 위한 훈련 기간이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되리라는 욥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다. 가족과 흩어졌지만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양육하며 서점도 잘 관리해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이때부터 집중했던 독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 서적 분야에서 전문 권서인이 됐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0) 시야 점점 좁아져 “시력 회복해 주세요” 절박한 기도
가정 형편 어려워 교사 된 후에 첫 검진
망막색소변성증 진단, 온갖 치료 받아도
회복되지 않자 기도에 전력 다하는데…
송태후(왼쪽 두 번째) 장로가 1995년 러시아 모스크바 쁘리스뿔리나야교회 앞에서 이 교회를 개척한 남윤환(맨 왼쪽) 선교사, 교회 성도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남 선교사는 송 장로가 모스크바 포드록안과종합병원에서 안과 치료를 받도록 도와줬다.
나는 1965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야맹증과 약해진 시력으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밤에는 활동을 자제하며 학업에 충실했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전문 안과 병원을 가보지 못했다.
73년 교사 발령을 받은 뒤, 첫 여름방학을 맞아 전문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교사 활동은 대부분 낮에 이뤄지기에 30대 중반까지는 교육자로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밤에 외출할 때는 도시에서도 손전등을 들고 다니며 활동했다.
30대 후반부터 시야가 점점 좁아지면서 보행 중 물체에 부딪혀 안경이 깨진 일도 다반사였다. 유명 안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했으나 진단은 같았다. 망막 시신경이 잠식돼 시야가 좁아지고 색 분별이 어려워졌다. 초점도 점점 흐려졌다.
95년 여름방학엔 러시아 모스크바의 세계 최고 안과 병원인 포드록안과종합병원에 갔다. 모스크바에서 4년째 사역 중이던 남윤환 선교사 가정에서 도움을 받으며 병원에 다녔다. 그곳에서 20일간 검사하며 눈과 뇌를 연결하는 혈관 확장 수술까지 받았다. 효과가 있는 듯했지만 3~4개월이 지나자 다시 원상태가 됐다. 의학적 치료법을 다 써봤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부터 연약한 눈을 위해 하나님께 치열하게 기도했다. 수련회나 개인 금식기도 기간에도 “시신경을 살려주십시오.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렸다. 신유 은사가 있는 목사님들로부터 안수기도도 받았다.
96년 1월엔 시력 회복을 위해서만 7일간 금식 기도했다. 마지막 날 밤까지도 눈 상태는 여전했다. 실망한 채 신음의 기도를 하면서 누워있었다. 그때 성경 말씀이 선광처럼 뇌리에 들렸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반복적으로 들리는 이 말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이것이 내게 주신 주님의 음성입니까”라고 계속 물었다. 기도할 때 절망했던 마음은 평안함으로 변했다. 목이 터지라 찬송하며 “육체의 가시로 인해 약한 바울을 온전한 능력으로 쓰신 하나님께서 내 약한 시력이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으로 선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눈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91년 안좌박지분교에 근무할 때였다. 월요일마다 20여명의 교사들이 관광선(船)으로 도착한다. 이날은 조류 사정으로 평소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배를 대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그때 모든 교사가 내가 바다로 떨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난 안전하게 선착장에 내려 학교까지 갔다. 학교에 도착한 후 선생님들의 전화를 받고서야 천사가 나를 떠받쳐 준 것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시 91:11~12)
지금까지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준비된 사람들로 인해 살고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하심으로 안전하게 살면서 복음의 길을 걷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나는 96년 4월 15일 22년의 교사 일을 그만두고 전문서점 경영인으로 재출발했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1) 1급 시각장애 이겨내고 전문경영인으로 거듭나
교사로 근무하며 작은 기독교 서점 열어
규모 커지며 본격적으로 서점 경영 수업
매일 주님과 대화로 경영에 자신감 생겨
김준곤(왼쪽 네 번째) 목사가 2006년 당시 목포에서 열린 집회를 마치고 송태후(왼쪽 두 번째) 장로가 운영 중인 기독교 서점 ‘예수마을’을 찾았을 때 CCC 나사렛형제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모습.
전남 목포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1986년 2월 10평 남짓한 기독교 서점을 열어 직원을 두고 관리했다. 그해 3월에는 다니던 목포제일교회에서 35세란 젊은 나이에 장로로 임직을 받았다.
서점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88년에는 두 배로 확장했고 91년엔 40평 규모로 확장, 이전했다. 2000년에는 60평 규모로까지 커져 시내 중심가로 확장, 이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리에는 2005년부터 자리 잡았다. 당시 신도시 중심 도로변에 있는 3층 건물을 매입해 2층에 75평 규모의 매장을 열었다. 상호도 기독교전문점 ‘예수마을’로 개명했다.
86년부터 95년까지 낮에는 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퇴근 후에는 서점을 관리하며 경영을 익혀갔다. 결국 96년 교사를 사임하고 전문서점 경영인으로 거듭났다.
22년간 오직 다음세대 교육과 전도에 집중하던 마음을 사업가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았다. 3개월 정도의 경영을 하면서 부딪치는 출판사, 거래처 관계나 재정난 등의 스트레스는 극복하기가 힘든 난관이었다.
나는 매일 점심을 먹고 나서 가까운 유달산에 올라 2시간씩 경영인의 ‘마인드’를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감사하게도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그해 가을부터 자신감을 주시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주셨다. 매장 디스플레이, 직원 관리, 출판사와 고객과의 관계 등에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일하게 하셨다. 교회나 고객과의 관계도 계속 넓혀주셔서 2005년 결국 신도시에 건물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전문 권서인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매장에 오는 고객들에게 각자 신앙 수준에 맞는 책을 추천해줬다. 많은 목회자나 성도들로부터 좋은 책을 추천받아 감사하다며 또 다른 책의 권서(勸書)를 부탁받을 때의 마음은 무척 뿌듯했다. 하나님의 영광도 경험했다.
98년 1급 시각장애인으로 등록되면서 장애인으로서의 삶도 시작했다. 성경도 청독(聽讀)에 중점을 뒀고 2005년부터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읽기 도구인 ‘책마루’로 각종 책을 섭렵했다. ‘책마루’는 글을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 파일을 음성파일로 들려주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독서 기기다. 이 고마운 장치 때문에 들음으로써 책을 읽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불편은 해도 결코 불행하지는 않다. 하나님은 내게 장애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비전을 품게 하셨다. 장애인이나 장애인과 함께하는 가족들에게도 미래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라는 사명도 주셨다. 나를 만지시고 붙드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았던 강영욱 박사님을 떠올리며 살고 있다.
강 박사님이 하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장애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꿉니다. 나는 장애가 인생의 걸림돌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장애는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단순히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2) 성령의 은혜로 가정 회복… 어린 시절 트라우마 치유
독수리제자훈련학교 내적치유 사역 중
내면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일어나
복음으로 용서하고 묵었던 앙금 씻어내
송태후(맨 뒷줄 왼쪽 첫 번째) 장로가 1998년 목포 제3기 독수리제자훈련학교를 수료하면서 수료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주변의 권유를 받아 1998년 예수전도단의 비즈니스를 향한 독수리제자훈련학교에 참가했다. 이론 강의와 전도 여행 코스로 진행된 훈련은 나를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교육과정 중 내적치유 사역은 깊이 감춰진 내면의 트라우마를 꺼내 치유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시간이었다.
내적치유 과정 나흘째 밤, 예배를 드리던 내게 성령의 뜨거운 불이 임하며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 찬 복수심이었다. 아버지는 유교의 가부장적 가정 문화를 안 좋게 대물림받아 폭력적이셨다. 술에 취하면 어머니에 대한 폭언과 구타를 일삼았다. 자녀인 우리를 향한 꾸중과 질책을 마치 사랑의 언어처럼 생각했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아버지는 밤늦게 술 취해 들어온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온 어머니를 때리셨고 상을 엎으셨다. 이불 속에서 숨죽이며 이를 보던 나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복수심이 내 안에 불탔다.
당시 모습이 떠오르자, 아버지를 향한 분노의 감정이 다시 드러났다. 나의 마음속에 이런 깊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보자기에 싸인 한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환상이 보였다. 너무 무서워 우는 내게 성령님께서는 ‘네가 어머니의 복중에 있었을 때 모습’이라는 마음을 주셨다. 예배를 인도하던 예수전도단 호주 지역 포피 선교사가 “분노의 감정은 하나님 앞에 모두 다 토설하고 분노의 대상을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 말이 내 마음에 들어오자 아버지에 대한 용서의 마음이 일어났다.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으로 나 역시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통곡하며 회개 기도를 했다.
이날 내면의 트라우마를 만져주신 성령님의 은혜로 눌렸던 마음이 풀리며 참된 평안을 회복했다. 이 내적치유 이후 난 부모님께 드릴 얘기가 있다고 말씀드린 후 고향을 찾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난 아버지께 “어렸을 때 폭력적인 아버지를 보며 죽이고 싶을만큼 분노했다”며 “우리가 원수도 아니고 이젠 그 원망의 마음을 회개하고 화해해 우리 가정이 천국으로 변했으면 한다”고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용서의 의미로 절을 올리는 내게 아버지도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예수를 믿는다면서 나도 지금까지 헛다리로 믿었구나”라며 회개하셨다. 우리는 함께 눈물의 예배를 드린 후 가마솥에 따뜻하게 데운 물로 아버지를 목욕시켜드리며 서로의 묵은 앙금을 씻어냈다. 이후 나 역시 남편과 아비로서 마음에 상처를 준 내 아내와 두 자녀와도 용서를 구하며 화해했다.
상처로 막혔던 가족과의 담이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능력과 평안함이 온 가족에게 부어졌다. 부모님의 신앙은 더 깊어져서 아버지는 안수집사로, 어머니는 권사로 충성스러운 일꾼이 됐다. 간염을 앓던 아내의 건강도 완전히 회복됐고 두 자녀의 신앙과 학력은 기적이라고 할 만큼 향상됐다. 부모님 때부터 늘 채무에 눌려오던 경제 문제도 풀렸고 서점도 잘 돼 건물까지 매입하게 됐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다음세대 부흥을 위해서도 일하도록 이끄셨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3) 다음세대 복음화 위해 바나바처럼 섬기기로 다짐
CCC 사역을 위한 기도와 헌금으로 시작
나사렛형제들과 협력 회관 건축 힘쓰고
다음세대 위해 마음껏 사역할 환경 조성
2015년 11월 열린 ‘영적 강국을 향한 정면 승부’ 집회를 마치고 강사와 출연진 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971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복음임을 깨닫고 “주여 저로 하여금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다음세대 복음화를 위해 담당 사역자들과 선교 기관을 돕고자 바나바처럼 섬기기로 다짐했다. 바나바는 바울을 발굴해 이방인 전도자로 일선에 내세운 바 있다.(행 9:26~27).
나는 73년부터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사명으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사역을 위해 기도와 헌금을 시작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대학생들을 마음껏 훈련하고 교육할 수 있는 CCC 목포지구 회관을 증축 확장 이전 등의 방식으로 네 차례 건축에 나서며 목포CCC 나사렛형제들과 협력했다. 두 차례의 건축위원장을 맡으면서 전국의 나사렛형제들을 결집해 학생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할 회관 건축에 힘썼다. ‘첫 보너스 헌금드리기’ ‘마중물 헌금드리기’ ‘옥합향유 헌금(연봉) 드리기’ 등의 구호로 목포CCC 출신 150여명의 형제들이 힘을 모았다. 현재 목포 CCC회관은 연건평 925.62㎡(280평)의 2층 건물로 채플실 숙소 소그룹룸 식당 샤워실 카페 등을 갖추고 있다. CCC 학생들의 훈련과 교육을 비롯해 지역교회 청소년과 청년대학부를 위한 수련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89년에는 목포어린이전도협회 이사로 협력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3일간의 클럽 전도훈련 교육을 받은 후 이사로 섬기기 시작해 32년째 이르고 있다. 90년 이사회를 재정비하고 ‘사람을 세워야 사역이 열린다’는 비전으로 이사들을 설득했다. 홍은희 간사를 지회 첫 사역자로 세우고 이듬해 임병숙 간사(현 어린이전도협회 서울지회 대표)를 총무로 세웠다. 132.23㎡(40평) 규모의 회관도 마련해 본격적인 어린이 사역을 섬겼다. 한 차례의 회관 확장과 이전을 거쳐, 2009년 연건평 495.87㎡(150평)의 2층 회관을 건축했다.
현재 목포지회는 모성온 목사를 비롯한 세 분의 사역자들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회로 사역을 펼치고 있으며, 어린이전도협회에서 파송한 21개국의 해외선교사들도 후원하고 있다. 나는 이사들과 함께 사역자들이 다음세대 어린이를 위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면서 교회와 후원자들을 모금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다.
다음세대 영역 중 청소년 부흥을 위해 2010년 30여분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힘을 합해 ‘좋은부모커뮤니티’ 사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성경적으로 좋은 부모가 돼 복음의 다음세대를 일으킵시다’는 표어로 부모세대와 다음세대를 위해 매년 두 종류 집회를 열었다. 부모세대를 위해서는 ‘좋은 부모 영적 세미나’를 개최했고, 다음세대를 위해서는 ‘영적 강국을 향한 정면승부 집회’를 열어왔다.
지금까지 어린이들을 위해 32년간 어린이전도협회 이사로 섬겼고, 청소년을 위해서는 좋은부모커뮤니티 대표로 9년간 봉사했다. 청년을 위해서는 50년 넘게 목포CCC 후원자로서 섬겨 오고 있다.
부족한 나를 청년 시절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다음세대를 향한 복음 확장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4) 양분된 목포 교계와 교회… 기도로 하나 되다
회장 맡자마자 교계·교회 두 진영 갈라져
3일 금식 특별기도 후 다시 하나로 통합
각 교회 순회, 중보기도로 지역사회 섬겨
5000여명의 성도들이 2007년 4월 15일 목포KBS 스포츠홀에서 개최된 ‘1907 대부흥 100주년 김장환 목사 초청 대성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왼쪽 사진은 송태후 장로가 대표기도 하는 모습.
1996년 기독교 전문점 경영자로 재출발하면서 소속된 노회에서도 임원으로 봉사하게 됐다. 지역 사회 여러 기독교 단체들로부터 협력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모든 봉사 요청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묵상하며 신중히 기도했다. 기도하며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복음으로 연합할 수 있는 곳’ ‘함께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곳’ ‘자비량 헌금으로 봉사와 섬김을 할 수 있는 곳’ 등에만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50대 초반이던 2005년 목포연합장로회 10대 회장으로 봉사하게 됐다. 활동하는 모든 장로회원이 선배여서 처신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해 목포 기독 교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가장 크게 부상하던 교회마저 양분되면서 세상이 보는 기독교에 대한 시선은 무척 따가웠다. 연합장로회 회장인 나는 먼저 교계의 이 아픔을 안고 회개하며 애통의 금식기도를 드렸다. 그해 6월 20여명의 장로들이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올라가 3일간 금식하며 회개와 교회 화평을 위한 특별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의 결과로 연말에는 교계가 다시 하나로 통합됐다. 양분된 교회도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또한 목포를 위한 중보기도 카드 1만장을 만들어 각 교회에 나눠주며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호소했다. 장로회 사무실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20여명이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 매월 한 차례씩 지역 내 각 교회를 순회하며 목포를 위한 중보기도 시간도 가졌다. 많은 장로가 3일간 금식하며 드린 기도가 응답받은 것을 체험하며 어려운 문제는 기도로 풀어야 한다는 영적 본질을 깨닫게 됐다.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목포연합장로회 회장으로 세우셔서 회원 장로들과 교회들에 목포를 위한 중보기도를 일으켰던 일은 참으로 감사하다.
2019년 12월 목포연합장로찬양단 제2대 단장으로도 봉사했다. 장로찬양단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세 가지 실천사항을 세웠다. 찬양하기에 합당한 지성을 고양하기 위해 연습 때마다 칼럼 한 편씩 묵상하기, 찬양단의 영성 회복을 위한 뜨거운 기도시간 갖기, 회원 상호 간 연합을 위한 식사시간을 가지며 교제하는 것 등이다. 현재 장로찬양단은 4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이 모였지만, 칼럼 묵상과 기도, 식사 교제 등을 통해 성령으로 하나 돼 갔다. 새 단원도 영입해 현재 50여명이 정기발표회를 준비 중이다.
방송 선교 후원과 복음 사역도 매진했다. 96년부터 지금까지 목포극동방송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기도와 헌금으로 섬기고 있다. ‘성경적 문화와 경제(C&E)’ 3분 칼럼을 1년 동안 진행했는데 청년과 청소년들의 좋은 반응이 있었다.
최근에는 주님의 서재 코너를 통해 좋은 책을 소개하는 대담 방송을 6개월간 진행했다. 중·장년층으로부터 공감을 얻으며 책 읽는 독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시각장애인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날 지역 교계 단체 리더로 세우셔서 선한 영향력을 펼치게 하셨다.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역경의 열매] 송태후 (15·끝) “주의 힘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 장래에 전하리라”
목포기독교역사관 건립에 최선을 다한 후
구원의 완성인 노후 거룩하게 살리라 다짐
날 통해 주님 성품 후손에게 흘러갔으면…
2014년 목포CCC 창립 50주년 감사예배에서 송태후 장로가 아내 김경옥 권사와 함께 기념촬영한 모습. 시력을 잃은 송 장로에게 김 권사는 눈과 같은 존재다.
2020년 12월 당시 김종식 목포시장께서 기독교계와 시민에게 공약한 역사관을 건립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으나 김 시장은 목포기독교역사관은 내가 나서야만 할 수 있다며 간절하면서도 단호하게 요청했다.
김 시장의 청원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2개월간 기도하면서 김 시장의 청원이 하나님의 뜻이라 인정하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하나님의 전략을 묵상하며 40일 동안 기도하는 중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법인 설립을 위한 평신도 실업인 40여명을 품고 기도했다. 고삼수 장로를 비롯해 2000만원 이상 헌금한 20여명이 법인 이사로 결성됐다. 교계와도 연합해 ‘사단법인 목포권 기독교 근대역사 기념 사업회’가 설립됐다. 이사장으로 정용환 목사, 부이사장에 고 장로가 선임됐다. 나는 상임이사직을 맡게 됐다. 목포권 기독교 역사관은 중앙정부와 전라남도, 목포시가 지원하는 국책 사업으로 지난 8월 말 확정됐다. 2024년까지 3년에 걸쳐 건립하게 된다.
성경 신명기 32장 7절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란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들과 힘을 모아 역사관 건립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이 말씀은 일흔이 넘어서는 나로 하여금 자주 묵상하며 기도케 한다. 백발이 되더라도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에 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의 힘과 주의 능력이 무엇일까.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이요 탁월한 지성과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이 나의 지성과 나의 인격과 내 삶을 통해 후손들과 후배들에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인정해주고 지지해주고, 공감하고 격려하며 칭찬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력서를 위해 살기보다 추도사를 위해 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화려한 ‘스펙’(이력)이나 좋은 이력서를 쓰기 위해 살았다면 노후에는 내 가족이나 후배들이 나의 장례식에서 어떤 추도사 내용으로 나를 평가할지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과 과정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끝맺음이 구원의 완성이기에 노후를 거룩하게 살리라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내 삶을 ‘역경의 열매’에 기재토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졸필을 읽고 많은 격려와 위로를 보내준 국민일보 애독자들과 지인들께도 감사드린다. 44년을 부부로 함께 살아오면서 나의 연약함을 수용하며 힘이 돼 준 소중한 아내에게 깊이 감사한다.
시각장애인으로 총신대 총장으로 계시는 이재서 박사가 칼럼에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아픔이지만 창조를 위한 기회라는 것을, 고난은 이메일로 오지만 그에 대한 설명서는 배를 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