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유형문화재 제70호 충숙공 이상길 묘역 (忠肅公 李尙吉 墓域)
충숙공
이상길(忠肅公 李尙吉)
1556(명종 11)∼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유번(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명(碩明)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희선(喜善)이며 어머니는
경상도군사(慶尙道郡事) 정환(丁煥)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감찰·호조좌랑, 1590년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광주목사 재임중에 선정의 치적이 뚜렷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02년에 앞서 정언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등을
정여립(鄭汝立) 일당으로 몰아 추론한 죄로
성혼(成渾) 등과 함께 6년간 황해도 풍천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08년 유배에서 풀려 나온 뒤 강원도
회양부사, 평안도 안주목사, 호조참의 등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잡자 규탄을 받아 동문 밖 노원(蘆原)에 거처하면서
이항복(李恒福) 등과 교우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1617년(광해군 9) 하지사(賀至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부하를 잘
단속해 재물을 탐내지 못하게 했고
이듬해 평안감사로 있을 때 가도(?島)에 웅거하던 명장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보내어
구원하였다.
그러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전라도 남원으로 돌아가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다시
출사(出仕)해 승지·
병조참의·공조판서를 역임한 다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평난호성정사진무원종공신(平難扈聖靖社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다음 해 청군이 강화도로 육박해오자 아들 경(坰)을 불러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정려문
충신증대관보곡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 용 경연사 감춘추관사 행 자헌대부공조판서 증시충숙공 이상길지문
충숙근린공원
외삼문과 재실
묘역에서 바라본 외삼문과 재실
재실 동천재(東川齋)
묘역으로 들어가는 협문
홍살문과 충숙공 묘
신도비각과 충숙공 묘
신도비각
비명은 우암 송시열이 찬하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으며 문곡 김수항이 전액하였다
충숙공 사당의 내삼문
충영각(忠影閣)
충숙공 이상길(忠肅公 李尙吉) 영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9호)을 모신 사당이다.
재실 동천재(東川齋)
충숙공 이상길 신도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0호)
비문은 성균관 제주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썼다. 또한 충숙이공영정(서울유형문화재 69)이 있다.
이상길은 조선 인조 때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갔다가 1637년 청의 군사가 강화에 쳐들어오자 자결했다.
사후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동천집(東川集)'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사곡리 벽진이씨 문중에 보물 제792호로 지정된 이상길 초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충숙공 이상길 묘(전)와 선고 이희선 묘(후)
충숙공 이상길부부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향로석
바로 뒤는 부친인 찬성공 휘 희선(贊成公 諱 喜善, 1530~1592)의 묘임.
충숙공 묘의 문인석
묘역에서 바라본 신도비각과 홍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