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속이 상한 오르페우스의 동료들, 아니 동료라기보다 형제로서 똑같은 아름다움의 이상을 좇던 그들은, 다시 말하지만, 그의 점잖은 죽음에 침묵과 고통이라는 하얀 백합을 흩뿌리지 않은 채 이 영면의 장소에 그를 그냥 버려두고 가버릴 수는 없었다.
죽음이 그를 우리에게서 데려간 것, 그의 기적 같은 재능과 우아한 존재감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슬퍼한다. 그러나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인 그에 대해서뿐이다.
운명이 그의 영혼과 창의력에 부여해준 신비로운 아름다움은 결코 사라 지지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지닌 천재성의 영역에 속한다.
자, 삶의 평범한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존재들이 아직도 발견되는 것이 다행이다.
햄릿의 시대부터 우리는 그 뒤는 침묵이었다는 말을 하며 돌아다녔다, 결국은 천재성이 그 뒤에 남은 것들을 모두 보살핀다.
만약 이 천재가 해 낸 일이라면, 아마 다른 천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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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무너져서 카드의 짝들이 뒤섞이느니 윗부분이 없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정말로 성경에 나오는 말씀, 그러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나,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이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갔는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정말로 한 말이 무엇이냐고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잘 있어라, 세상아, 넌 점점 더 나빠지고 있구나.
그러나 히카르 두 헤이스의 신들은 말없이 무심하게 우리를 굽어보는 존재이며, 그들에게는 선과 악이 말씀보다 덜 중요하다. 결코 말을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선과 악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사의 강을 따라 여행한다.
우리와 다른 점이라고는 우리가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며 가끔 믿는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런 교훈을 배우게 된 것은, 새해를 맞아 더 훌륭한 결심들을 하며 공연히 기운을 빼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이 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판결을 내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궁극의 진리는 어쩌면 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임무는 바로 매 순간 선과 악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말을 하지 말자. 내일 실천할 거야.
내일은 우리가 피곤해질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신 내일모레라고 말하자.
그러면 생각을 바꿔 다른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는 하루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신중한 말은 언젠가이다. 언젠가 내일모레라고 말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 말을 하겠지만, 만약 결정적인 죽음이 먼저 찾아와 나를 의무에서 풀어준다면 그 말조차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의무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고, 자유는 우리가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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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업을 통해 생계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명성을 얻을 수는 없다.
명성은 한때 우리 인생이라는 여행의 중간에서(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나 메니나와 모사가 나를 우리 부모님 집으로 데려갔다(Menina e mosa me levaram da casa de meus pais)나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En un lugar de la Mancha) 같은 구절을 썼던 사람이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런 구절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적절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다는 유혹에 다시 빠지지않기 위해서이다. 백전연마의 명성이 드높던 용사들(As armas e os bardes assinalados), 이렇게 남의 글을 빌려 말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를, 무기와 한 남자를 나는 노래한다 (Arma virumque cano).
사람은 언제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과 운명의 주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람의 시간이 아닌 세월이 사람을 번성하게 하거나 쇠하게 하는데, 가끔은 그 이유가 일정하지
않거나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깊은 밤에 길이 끝나는 곳에 자신이 있음을 깨달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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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조금 서성거리다가 침실 거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응접실로 다시 돌아왔다. 거울을 봐도 내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이상하군.
자네 얼굴이 안 보인다고. 그래, 분명히 거울을 보고 있는데도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네. 하지만 그림자는 있잖나.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야.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포르 투갈에 아주 정착할 건가, 아니면 브라질로 돌아갈 건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네,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져왔어, 어쩌면 여기 남아서 병원을 열고 손님들을 확보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리우로 돌아갈 수도 있고, 잘 모르겠네, 지금은 여기 있지만, 생각 할수록 내가 돌아온 건 오로지 자네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네가 남기고 떠난 빈틈을 오로지 나만이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대신할 길은 없네.
세상에는 진정 살아 있는 사람도 진정 죽은 사람도 없어.
훌륭한 말이군, 자네의 시에 쓰면 딱 알맞겠어. 두 사람은 함께 빙긋 웃었다.
히카르두 헤이스가 물었다. 그런데 내가 이 호텔에 묵는 걸 어떻게 알았나.
페르난두 페소아가 대답했다.
사람이 죽으면 말이야, 모든 걸 알게 되지, 그게 좋은 점 중 하나야.
그럼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때처럼 들어왔지.
허공을 날아온 게 아닌가, 벽을 통과해서 온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친구야, 그런건 귀신 이야기에나 나오는 일이지, 난 프라제르스에 있는 묘지에서 왔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계단을 걸어 올라와서 저 문을 열고 이 의자에 앉아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네. 낯선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나.
그것도 죽은 사람이 누리는 특권 중 하나지,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를 못 보거든.
하지만 내 눈에는 자네가 보이는데. 그거야 자네가 내 모습을 보기를 내가 원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생각해보게, 자네가 누군가. 이 질문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수사적인 질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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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문의가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마르센다, 제 판단으로는 만약 당신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면 그건 곧 자기 자신을 앓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뿌리 깊은 질병들은 우리의 존재와 떨어질 수 없고, 지금의 우리 모습 또한 어떤 식으로든 그 병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이 모두 곧 각자 지닌 질병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질병 때문에 아주 하찮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질병 때문에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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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이 이렇게까 지 흥분할 수 있다면, 확실히 죽음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삶과 죽음의 유일한 차이점은, 산 사람에게 아직 시간이 있다는 점이지만, 단 한마디의 말을 하고 단 한 번의 몸 짓을 할 시간은 점점 끝나가고 있다.
무슨 몸짓, 무슨 말인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은 그 말과 그 몸짓을 하지 않아서 죽는다, 그것이 그의 사망 원인이다. 질병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죽은 뒤의 그가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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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을 믿는다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미리 예방책을 강구 할까 봐 하느님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하느님은 자신의 일을 관리하는 재주도 형편없다.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치는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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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뜻으로, 라고 말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하느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짜증스럽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우린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걸 흉내 내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하느님의 뜻으로 같은 정해진 말을 되풀이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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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가 아가씨의 아버지벌은 되겠구먼. 한 노인이 말했다.
틀림없이 둘이 사귀는 사이야. 다른 노인이 대꾸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작자가 왜 줄곧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어떤 작자. 저기 난간에 몸을 기 댄 작자. 아무도 안 보이는데. 자네 안경을 써야겠군.
자네가 술 에 취한 거지. 두 노인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잡담을 나누다가 그것이 말다툼으로 번지고, 그 다음에는 둘이 서로 다른 벤치에 떨어져 앉았다가 싸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한 벤치에 앉곤 했다.
히카르두 헤이스는 난간에서 멀어져 꽃밭 옆을 지나 아까 온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왼쪽을 보니 마침 위층에 글자가 새겨진 집이 한 채 보였다. 한 줄기 바람이 야자수들을 흔들었 다. 두 노인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알투 드 산타카타리나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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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사의 표시를 남겨두었습니다. 피멘타가 대답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알맹이 없는 말, 위선적인 말. 사람이 말을 갖게 된 것은 생각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프랑스인의 말이 옳았다. 그래도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비록 항상 좌절을 맛보지만 어쨌든 그런 시도를 할 때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도구가 바로 말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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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에는 항상 진심이 가득 배어 있기 때문에 히카르두 헤이스는 그 말을 믿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사람은 공부를 하다 보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신들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 그들은 지식으로 알고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그것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점이다. 끝은 언제나 아주 빨리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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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끈 기억이 없는데, 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틀림없이 중간에 일어나 불을 끈 모양이었다.
살다 보면 우리 몸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자동적으로 어떤 일을 해내서 최대한 불편한 상황을 피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투나 처형 전야에 잠을 잘 수 있고, 삶이라는 가혹한 빛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결국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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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르두 헤이스는 쇠창살 모양의 정문으로 다가가 가로대를 손으로 만져본다.
안에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산들바람이 삼나무 가지들을 휘 감아 돌고 있다. 이파리를 모두 잃고 벌거벗은 가연은 나무들.
하지만 우리가 속았다.
우리가 듣는 소리는 저 높은 건물들 안에 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코를 고는 소리일 뿐이다.
담장 너머의 나지막한 주택들에서는 음악 소리, 웅웅거리는 말소리, 여자들이 중얼거린다.
너무 피곤해, 좀 누워야겠어. 히카르두 헤이스도 혼자서 같은 말을 한다.
너무 피곤해. 그는 창살 사이로 한 손을 넣어보지만 그것을 마주 잡고 악수해주는 손이 없다.
시체가 되 어버린 이 사람들은 팔 하나도 들어 올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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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편이라니.
산 사람들의 편,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이해하기도 그만큼 힘들 것 같은데.
죽은 사람은 한때 살았던 적이 있으니 이점이 있지, 이승은 물론 저승의 일에 두루 친숙하니까, 반면 산 사람은 그 근본적인 진실을 배워서 이용할 수 없잖나.
그 진실이 뭔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아.
아니, 모르네, 아무도 몰라, 나도 살아 있을 때 몰랐어, 우리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아는 건 다른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이네.
철학으로 보기에는 좀 하찮은 말인 것 같군.
당연히 하찮지, 이렇게 죽음의 이편으로 건너 와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얼마나 하찮아 보이는지 자네는 전혀 모를 걸세.
난 산 사람 편에 있으니까.
그럼 그쪽 편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겠군.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지.
친애하는 헤이스, 말을 잘 생각해서 하게, 자네의 리디아는 살아 있어, 자네의 마르센다도 살아 있고, 하지만 자네는 그 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알아낼 수도 없네, 설사 그 둘이 자네한테 뭔가 말하려 해도 말이야, 산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은 벽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은 벽만큼이나 불투명하다네.
이 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위안이겠군.
꼭 그렇지는 않네, 죽음은 일종의 양심이거든,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사람 자신과 그 삶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판관일세.
친애하는 페르난두, 말을 잘 생각해서 하게, 자칫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 위험이 있어.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우리가 할 말을 다 하지 않는다면, 결코 반드시 중요한 말을 하지 못할 걸세.
그럼 자네는 이제 그 말이 뭔지 아나.
난 이제 막 어리 석어지기 시작했을 뿐일세.
하지만 자네는 전에 이렇게 썼지, 초심자여, 죽음은 없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이제 자네가 죽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아니, 한때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내가 다시는 살 수 없다는 것이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상상이 가나, 다시는 살 수 없다는 것.
페루 그룰류가 할 만한 말이군.
그 사람보다 훌륭한 철학자는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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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다시 오지 않은 건 짜증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지.
맞네.
나한테 짜증이 나서.
그런 건 아니고, 계속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나고 계속 피곤했네, 기억과 망각이 서로 잡아당기고 밀면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야, 쓸모없는 싸움인 것을, 결국은 언제나 망각이 승리를 거두거든.
난 자네를 잊지 않았어.
한 가지 말해주지, 이 저울에서 자네 무게는 얼마 안 나갈걸세.
그럼 어떤 기억이 자네를 계속 불러내는 건가.
내가 세상 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
난 세상이 자네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이 자네를 불러내는 줄 알았는데.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다니, 친애하는 헤이스, 세상은 잘 잊는다네, 자네한테 이미 말했잖아, 세상은 모든 걸 잊는다고.
자네가 잊혔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워 낙 잘 잊어서, 이미 잊힌 것이 부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네.
그것 상당히 허세가 깃든 말인데.
당연하지, 이름 없는 시인보다 더 허세가 많은 시인은 없다네.
그렇다면 내가 자네 보다 허세가 많겠군.
자네한테 아부를 할 생각은 없지만, 이 말은 해야겠네, 자네는 실력 없는 시인이 아니야.
하지만 자네만큼 훌륭하진 않지.
아니, 훌륭하네.
우리 둘 다 죽은 뒤에, 그때도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면, 아니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는 한, 저울 바늘이 누구 쪽으로 기울어지는지 살펴보면 흥미로울 거야.
그때는 우리가 무게에도, 무게를 재는 사람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을걸.
초심자여, 죽음은 존재하는가.
존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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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있는 꿈을 꿨어.
흥미 로운 환상이군.
흥미로운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꿈을 꾼 것이 아닐세, 어차피 삶이 어떤 건지 죽은 사람도 잘 알고 있으니 꿈을 꿀 수도 있겠지, 그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뒤의 꿈을 꾸는 것이 흥미롭네, 그 사람은 죽음이 뭔지 모르니까.
이러다가는 곧 삶과 죽음이 똑같다는 말이 나오겠군.
바로 맞혔네, 친애하는 헤이스.
하루 만에 자네는 상당히 다른 말 세 가지를 했어, 죽음은 없다, 죽음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삶과 죽음이 똑같다.
처음 두 문장의 모순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었네.
이 말을 하면서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네도 알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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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그녀와 마주칠 것 같지는 않소.
때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죠, 지금 제가 여기 선생 님의 아파트에 와 있는 걸 보세요.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선생님이 브라질에서 막 도착했을 때 다른 호텔로 가셨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게 살다 보면 겪는 우연의 일치지.
운명이에요.
운명을 믿소.
운명보다 더 확실한 건 없어요.
죽음이 더 확실 해.
죽음도 운명의 일부예요, 하지만 이제는 선생님의 셔츠를 다리고 설거지도 해야겠어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된다면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죠,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고 어머니가 계속 뭐라고 하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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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없었다. 성모상 행렬이 밖으로 나와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눈먼 사람들은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은 여전히 말하지 못하고, 몸이 마비
된 자들은 여전히 마비 되어 있고, 팔다리를 잃은 자들의 몸에서 팔다리가 자라지도 않았고, 병
걸린 자들의 고통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쓰디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책망하고 비난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성모는 기적을 몇 가지 정도는 일으켜줄 각오를 하고 예배당에서 나왔지만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불타는 덤불이나 영원히 타오르는 기름 램프는 없을 것이다, 이래서는 안 돼, 내년에 다시 찾아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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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네가 쓴 송가의 내용이 바로 그래, 인간적인 불안은 무익하고, 신들은 현명하며 무심하고, 그들 위에 운명이 있지, 신들조차 복종해야 하는 최고의 질서.
그럼 인간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질서에 도전하고, 운명을 바꾸는 것.
좋은 쪽으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다를 게 없네, 중요한 건 운명이 운명이 되지 않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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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는 더 가까이 그의 품을 파고들면 서 그가 꼭 안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선생님이 아이를 인정해주시지 않아도 저는 괜찮아요, 사생아로 자랄 수도 있죠, 저처럼요.
히카르두 헤이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부끄러운 눈물 조금, 연민의 눈물 조금.
과연 이 두 가지 눈물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내 진심이 된 그는 갑자기 충동적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상상해보라. 그는 그녀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추며 이 엄청난 짐을 내려놓았다.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열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고마움이 물밀듯이 밀려올 뿐인 순간. 그러나 관능은 이런 미묘한 차이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몇 초도 안 돼서 리디아와 히카르두 헤이스는 신음 소리와 한숨 소리를 내며 정사를 벌이고 있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아이가 잉태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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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얼마나 옳은지.
그러나 이 말을 우리가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이 말이 매일 진실로 확인되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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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나는 번성하는 사회에서는 자유를 잃는 것이 자연스럽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네만, 이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어, 자네를 믿었는데 실망이네.
나의 최선은 가설을 제시해주는 것뿐일세.
무슨 가설.
살라망카의 그 총장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는 가설,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곧 거짓말이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섬뜩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죽음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 야만적이고 불쾌한 패러독스, 밀란 다스트라이 장군은 불구자다, 모욕을 하려는 건 아니다, 세르반테스도 불구자 였으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스페인에는 불구자가 너무 많다, 밀란 다스트라이 장군이 대중의 심리를 장악해보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괴롭다, 세르반테스 같은 영적인 풍부함을 지니지 못한 불구자는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데서 위안을 얻게 마련이니.
그가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무한히 많은 가설 중에 하나일세.
포르투갈 군인이 한 말과 일치하긴 하는군.
여러 가지 일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의미를 갖추는 때가 중요하네.
마르센다의 왼손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는군.
가끔 한 번씩.
너무 먼 곳을 찾아볼 필요 없네, 우리 모두 불구자니까.
히카르두 헤이스는 혼자다. 느릅나무의 나지막한 가지에서 매미들이 울기 시작한다.
말을 할 수 없는데도 나름의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커다란 검은색 선박이 해협으로 들어오지만, 물 위에서 은은히 빛나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눈앞에 펼쳐 지는 파노라마가 현실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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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그는 자신의 시를 종이에 베껴 썼다. 벌써 여름을 향해 안달하며.
이 진실이 이제는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제 그는 전혀 안달하지 않고, 그저 무한히 피곤할 뿐이었다.
그는 봉투에 마르센다 삼파이우, 우체국 보관, 코임브라라고 썼다.
만약 육 개월 뒤까지 그녀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이 편지는 파기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 했던 그 양심적이고 호기심 많은 직원이 삼파이우 박사의 사무실로 이 편지를 가져가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특권을 이용해 편지를 열어본 삼파이우 박사는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지의 남자가 널 몰래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마르센다는 그 시를 읽으면서 혼자 미소지을 것이다.
이것이 히카르두 헤이스에게서 온 편지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다.
그가 그녀에게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필체가 확실히 비슷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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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입을 꼭 다물고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서로 위로의 키스를 나눌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리디아는 너무나 불행했기 때문에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신음 속에 묵직한 다른 소리가 섞여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원래 이렇다. 한순간에 많은 것을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리디아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히카르두 헤이스는 너무나 그 답지 않게 층계참으로 나갔다.
그녀가 위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빙긋 웃었다.
살다 보면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 글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백지가 된 페이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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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는 소리. 히카르두 헤이스는 달려가 문을 열고, 눈물투성이 리디아를 안아주려고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은 페르난두 페소아였다.
아, 자네로군.
다른 사람을기다리고 있었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안다면 자네도 잘 알 텐데, 그래, 기다리고 있었네, 아마 전에 자네한테도 말했던 것 같은데, 리디아의 남동생이 해군에 있었거든.
죽었나.
응, 죽었네. 두 사람은 침실에 있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침대 발치에 앉았고, 히카르두 헤이스는 의자에 앉았다.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웠다. 이런 식으로 삼십 분이 지나고, 위층에서 시계 종소리가 들렸다. 히카르두 헤이스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참 이상하네, 지금까지 저 시계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아니면 한 번 듣고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나. 페르난두 페소아는 양손을 꽉 맞잡은 채로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대로 미동도 없이 그가 말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왔네.
왜.
내 시간이 다 됐어, 내게 남은 시간 이 겨우 몇 개월이라고 말한 것 기억나나.
그래, 기억하네.
그래서 앞으로 못 만난다는 걸세, 그 몇 달이 다 지났거든.
히카르두 헤이스는 넥타이 매듭을 단단히 조이고 일어서서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협탁으로 가서 『미궁의 신」을 들어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럼 가세. 그가 말했다.
어딜 가는데.
자네랑 같이.
자네는 여기서 리디아를 기다려야지.
그건 나도 알아.
남동생을 잃은 그녀를 위로해줘야지.
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네.
그 책은 또 왜 가져가는 건가.
시간이 허락되었는데도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어.
자네한테는 시간이 없을 거야.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온 세상의 시간이 내 것이 될 걸세.
자신을 속이고 있군, 글을 읽는 능력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고 했잖나.
히카르두 헤이스가 책을 펼치자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보였다. 검은 낙서들, 얼룩들.
그가 말했다. 그 능력은 이미 사라졌어.
하지만 상관 없네, 그래도 이 책을 가져갈 거야.
아니, 왜.
세상에서 수수께끼를 하나 덜어주려고.
페르난두 페소아는 히카르두 헤이스와 함께 아파트를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 모자를 깜빡했군.
우리가 가는 곳에서는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걸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나.
공원 맞은편 인도에서 두 사람은 강물 위에서 깜박거 리는 창백한 불빛들, 불길한 산의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그럼 가세. 페르난두 페소아가 말했다.
가세. 히카르두 헤이스가 맞장구를 쳤다.
아다마스토르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마침내 엄청나게 울부짖는 소리를 내지르게 될까 봐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여기, 바다가 끝나고 땅이 기다리는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