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견뎌냈다. 죽음과도 같은 일주일의 시간을. 이곳에서의 시계는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인다.
그리고, 어제 아군의 최고 지휘관은 코 앞의 적에게 결전장을 보냈다. 이제 오늘이다.
나는 서있다. 지금 이곳. 죽음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살며시 코 끝을 간지럽히는 전장에.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군사들도 마찬가지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리라.
나는 간신히 숨만 몰아쉬었고, 왼손으로는 폼멜을 쓰다듬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내 움직임의 전부였다.
갑옷이 내 호흡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패전을 예감했는 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살아날 구멍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선 곳은 실도르 군의 중앙. 창병들을 양옆에 끼고 있는 매우 안전한 위치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기가 적의 그것만큼을 따라가지 못 한다.
중앙에서 보병들의 좌우로 포진한 창병들 옆에는 가볍게 무장한 기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마지막 회의에까지도 기병 지휘관들은 그 부대의 특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유부단함을 보이고 있었고,
보병 지휘관들이나 궁병 또는 창병 지휘관들도 그에 질세랴 제대로된 태도가 잡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엉터리 군대였다. 이런 것은..
나는 어째서 이런 군사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인가.
나는 후회를 깊이 깊이 삼켰다. 이제 곧. 아침의 영광스런 태양빛이 이곳 전장에 밝아오는 순간.
웅장한 뿔나팔의, 그 죽음을 강요하는 울음이 우리들의 귀에 요동치리라.
그리고, 우리는 그 길게 끌려 울리우는 울음에 떠밀려 나아가게 되리라. 그리고, 돌아오리라.
나는 고개를 돌려 해가 떠오를 방향을 바라봤다. 새벽의 어둠이 떠밀려나고 있었다.
영광스런 태양. 그리고 죽음. 그러나 승리가 찾아올 것이다.
나는 파비스가 설치된 아군 진형을, 저 너머의 적군 진형을 살펴보았다.
아군과 적군의 진형은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진형이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은 진형.
나는 아군과 적군의 진형의 짜임새 사이의 조임을 살펴보았다. 전투 전의 긴장이 풀리질 않는다.
무거운 파비스 뒤에는 적과 아군의 궁수들이 각각의 방패 하나만을 의지하고 활이나 석궁을 들고 있다.
그렇게 궁수들은 잠시동안이나마 안전하게 적을 향해 자신의 화살을 쏘아보낼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도 결코 안전치는 못하리라. 전장에 눈물은 없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눈물 없이 오직 흐르는 피만이 존재할 뿐인 전장에서 무거운 파비스 뒤에 의지하고 자신의 몸을 숨겨가며, 화살을 쏘아내는
궁수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안전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자신의 생명을 끝내 잃게 되고야 말리라.
나는 궁수들 좌우에 포진한 아군 창병들을 살펴보았다. 롱스피어를 든 그들은 숏소드도 장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무거워 보이는 호버크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살펴보았다. 그들의 호버크는 철걱철걱 소리내 신음하겠지.
아마도 그들은 상당한 시련을 겪을 것이다. 궁병과 적 보병들, 혹은 기병들의 공격에 무너지거나 혹은 승리하리라.
나는 창병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이 겪을 고통과 내가 겪을 고통은 그리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아군 기병들은 살펴보았다. 아군 기병들. 말 위에 올라 허리를 펴고 앉은 그들은 풍채가 좋았다.
그들은 든든한 갑옷을 받쳐 입고, 호즈맨 해머나 프레일. 그것도 아니라면 롱소드를 장비하고 여차하면 방패로라도 머리를 내려찍으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믿을만한 기병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대부분은 용병일 것이다.
본래 전쟁 발발 소문만큼이나 시작도 하기 전에 뻗어나가는 소문을 찾아보기가 힘든만큼.
전쟁 용병들을 모으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대부분은 용병일 것이다.
때로는 용맹하지만 그외에 자주 겁에 질린 양보다도 더 무력한 자들이 대부분인 전쟁 용병들.
나는 그들을 대체로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는 저들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끝끝내 그들을 신용하지 못 했다. 사실 그들이 용병인지 정규군인지조차 알지 못 했으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내 주위에 침울한 표정,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 애쓰는 보병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몸가짐과 기세를 살폈다. 그들은 나의 바로 곁에 있었고, 나는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에게서는 나에게서와 같이 죽음의 향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나와 같은 의도에서였음직한 눈길을 나와 주고받은 병사에게 쓴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는 애써 나의 쓴웃음을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갑옷은 품질이 좋은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이렇게 대체로 엉망인 군사들에게 플레이트 메일같은 갑옷이 있을 줄은 몰랐는 데.
검은 이전에 적에게서 수거한 검. 한달이 지나도록 아직 검집에서 꺼내보지도 않았다.
창백한 미소를 지어주던 달은 이미 저버렸고 이제 다가오는 싸늘한 전장의 함성 뿐이리라.
나는 왼손으로 검 손잡이를 힘주어 쥐었다. 그리고, 멀리 전장의 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뿔나팔 소리가 양군 진영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적들을 경계하던 채로 꿈에 젖어버렸던 것이었을까.
나는 뿔나팔의 울음에 떠밀렸다. 내 뒤를 미는 군사들의 발걸음에 떠밀렸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슬픔을 가슴 깊이 삼키고 검을 뽑았다.
나는 나를 찾을 때까지 죽을 수는 없다. 그랬기에 나는 검을 뽑았고 나는 달리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내 뒤를 밀지 않았다. 나는 나의 걸음으로 나의 죽음을 향해 걸음 걸음을 떼고 있었다.
적과 아군 사이. 거리는 멀었다. 보병들의 힘찬, 숨차는 달음박질로 그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적과 아군 사이. 적과 아군이 맞붙으려 다가가는 사이 적과 아군의 화살. 묵직한 파비스 뒤에 숨어 화살을 쏘아보내는 궁수들.
나는 기꺼이 그 화살들에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딛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 평안했다.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이 가라앉아 있었고, 이제 두렵지 않다.
나는 날아드는 화살들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아군과 적군의 기병들이 서로를 향해 창을 든 것을 보았다.
양측 기병들은 서로를 겨눈 창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보병들에게는 없는 힘과 속도가 있었다.
그들은 말. 특권계층에 속한다는 자부심이 들어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기병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화살들. 그것들은 순식간에 아군 대형과 적군 대형에 거의 동시. 아니, 잘 모르겠다. 구멍을 뚫었다. 듬성듬성.
그렇다. 사실 나는 아군의 화살이 적의 대형에 구멍을 뚫는 모습이나 적군의 화살에 아군 대형이 구멍 뚫린 판자조각처럼 되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사실 나는 적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나는 적들을 향해 쉼없이 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변에 함성이 웅웅 거린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국왕 전하 만세..'
모든 것이 박살나버린다. 모든 것이. 그 모든 것들이, 내 주변의 것들이 산산히..
적의 방패와 아군의 방패가 부딪친다. 이윽고 대형은 무너지고 적과 아군이 뒤섞인다.
화살은 아군의 등과 적군의 등. 아군의 몸통과 팔 다리. 적군의 몸통과 팔 다리. 아군과 적군의 정면으로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궁수들은 이제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하리라.
나는 화살은 잊기로 했다. 아니, 잊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앞이나 뒤 혹은 옆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검끝이나, 위아래로 베어져 들어오는 검날에 집중해야만 했던 것이다.
전투가 치열하다. 아니,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는 있는 것일까. 나는 누구를 위해서..
나는 적병들을. 나와 같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있는 적들을 베어냈다. 그들의 비명.
나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들어야했다. 나의 얼굴을 아는 병사들의 죽음일지도 모를 소리.
적에게 저주를 퍼붓는. 자포자기에서 나오는 욕설들. 나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적과 아군의 비명과 함성이 뒤섞여 머리가 아파왔다. 중간중간. 나는 들었다. 아군과 적군.
누구에게나 맞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궁수 멋대로 잡아당겼다 놓은 시위에서 튕겨진 화살 날아가는 소리를.
그것은 내 곁을 비껴났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것은 나를 비껴나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날아갔다.
안도할 사이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종종 나를 스쳐지나가는 화살의 울음소리를 위안 삼을 뿐이었다.
전황을 알아차릴만한 여유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죽음이 가까운지 먼지를 대충 가늠할 뿐이었다.
호각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렁찬 뿔나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고통에 찬 신음소리. 절망에 찬 고함소리.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조금이나마 더 오래 타게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
호각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렁찬 뿔나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나.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삶과 죽음 사이의 갈림길에서 사신에게 선택을 강요받는 불쌍한 병사들 뿐이었다.
그들과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싸워야만 했다. 운명이었다.
사실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남이 내게 정해준 것이니까.
이 상황은 정말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운명이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고, 내가 있어야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적병을 베어내고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저들과 나는 사실 이곳에 있어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나 저들이나..
한결같이 불쌍한 몰골을 하고 이렇게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하는 것이 나는 안쓰러웠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을 테지만.
나는 조용히 검을 고쳐잡았다. 적병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또한..
아직은 차가운 들판 위에 드러누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첫댓글 나이츠님은 전쟁 묘사를 정말 잘하는것 같아요... 그 쪽 부분 매니아라서 그런가... 음... 어쨋든, 굉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