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앙지계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행복했던 일이나 슬펐던 일, 또한 외롭고 괴로웠던 시간들이나 참을 수 없이 울화가 치밀고 미움을 가득 품었던 사람들 때문에 숨막히게 답답했던 날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사람들의 얄미운 말이나 행동도 새록새록 생각나고, 정말 바보 같이 산 내 삶이 자신을 많이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알고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목숨을 걸고 교만했던 순간들이 나를 괴롭히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해서 떠오르면, 혼자 웃음 짓고, 눈물짓고, 가슴을 두드리는 일이 아주 자주 일어납니다.
또한 부모와 자식들이 어떻게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이를 임신하고, 열 달 동안 품어 안고 살지 않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보지 못하여서 내가 생각하는 임신과 출산은 아내의 체험과 전혀 다른 것이고, 자식에 대한 느낌 또한 전혀 다를 것입니다. 나의 아내는 삼 남매를 낳았지만 나는 아버지로서 느끼는 것이어서 아내가 겪은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비하면 극미하게 느낄 뿐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임신과 출산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내 살과 피를 나누고, 내 뼈를 나눈다는 의미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릴 만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마 자식을 위해서 오장육부를 떼어 주는 엄마의 그 지극한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살을 쪼개는 아픔을 겪은 엄마와 옆에서 지켜본 아빠와의 차이는 정말 극명할 것입니다. 가끔 주님의 성체성사를 생각하면서 그 쪼개어짐의 살과 피를 생각하면, 내가 상상하고 느끼는 사랑은 정말 빈 껍질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의 완성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쪼개어진 것이 완전히 붙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도 떨어져(장소적인 떨어짐이 아니라 영혼의 괴리감) 있으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흔히 '원앙지계'(鴛鴦之契)라는 말이 있습니다. 춘추시대의 송나라에 강왕은 아주 폭군이었는데 시종인 한빙의 아내 하씨(何氏)가 절세미인이어서 눈독을 들인 강왕은 하씨를 빼앗아 측실로 삼아버리고 남편 한빙을 아무런 죄도 없이 유배를 보내고 강제노역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한빙은 자결하였고 이를 알게 된 하씨는 남편과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성벽에서 떨어져 자결합니다.
드디어 강왕은 미쳐 날뛰며 “너희들은 부부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려고 하는데 따로 무덤을 만들어줄 테니 어떻게 하나로 합쳐 보아라.”하고 무덤을 마주보게 매장해 주었는데 며칠 뒤에 두 개의 무덤 끝에서 한 그루씩 가래나무가 돋아나고 열흘이 되자 한 아름 이상 되는 나무로 성장하더니 서로 줄기를 굽혀 가까워지고 흙 속에서는 뿌리가 뒤엉키고, 지상에서는 가지들이 서로 뒤엉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무 위에서는 자웅 한 쌍의 원앙새가 둥지를 만들고 서로 휘감고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송나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이름 지어 소중히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상사상애지중'(相思相愛之仲)이라는 말의 어원이 나오고 '원앙부부'(鴛鴦夫婦)라고 하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고 그 간의 내 삶을 반성해보면 '원앙지계'의 삶도 아니고, 피와 살과 뼈를 나눈 혈육 간 사랑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부부의 사랑도 정말 엉터리였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현세에서 아주 부족해서 한 부부의 사랑만도 못하며, 그런 사랑의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엉터리로 사랑한다고 하였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일치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일치하여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안에서 사랑하고 일치하시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과 일치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 사랑과 일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으나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사랑과 일치인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일치에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안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간구하시며 기도하시는 데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옹졸한 생각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으로 일치하기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사랑의 일치에 반(反)하는 말과 행동은 없었는지 다시 반성합니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는지 다시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봅니다.
<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축일5월 15일 성 이시도로 (Isidore)
신분 : 농부, 평신도
활동 연도 : 1070-1130년
같은 이름 : 이시도루스, 이시도르, 이시돌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 근교에서 태어난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후안 데 베르가스(Juan de Vergas)의 영지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심은 매우 깊었고, 수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자신도 가난하였지만 비록 적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면서 살았다. 그는 5월 15일에 마드리드에서 운명하였는데, 그의 아내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 역시 남편 못지않은 신심과 가난을 살았기 때문에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 9월 9일)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는다.
실로 그는 노동자, 이웃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었다. 국왕 필립 3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의 전구로 회복되자 그의 시성 운동을 적극 장려하여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농부와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이다. 또한 그는 1947년 미국 국립 농촌 생활 위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이시도로 (Isidor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