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ㅣ거망산] 한적한 억새산행 즐길 수 있는 숨은 명산
월간산 2019.10.17
산세 깊어 무학대사와 빨치산 하준수, 정순덕이 은신처 삼아
하산길에 전망 좋은 암릉에서 뒤돌아보니 거망산이 가깝고, 그 뒤 1255.1m봉은 안개에 휩싸였다.
가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역시 억새와 단풍이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기 전, 먼저 산야에 일렁이는 억새 물결이 산꾼을 유혹한다. 억새는 창녕 화왕산이나 영남알프스의 재약산, 신불산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 산들은 가을이면 억새보다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라 호젓한 억새 산행을 누리기는 어렵다.
거망산擧網山은 억새밭의 규모 면에서는 이 산들에 비할 바 못되지만 한적하게 억새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이웃한 남쪽의 황석산과 더불어 덕유산에 뿌리를 둔 함양의 명산으로 이야깃거리도 많다. 산 곳곳에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은신암을 비롯해 지리산 빨치산의 마지막 생존자 ‘남도부’ 하준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하준수는 거망산 은신골에서 일제의 징병을 피한 바 있으며, 정순덕은 1963년 체포될 때까지 남장 빨치산으로 불리며 거망산을 거점으로 군경을 괴롭혔다. 거망산의 산세가 워낙 깊다 보니 몸을 숨기는 장소로 애용된 것 같다.
산행은 용추사주차장(버스 정류장)을 기·종점으로 하는 원점회귀다. 용추사 버스주차장에서 청량사~963.7m봉 지능선~황석·거망산 갈림길(주능선)~1255.1m봉~지장골 갈림길(거망샘)~거망산 정상~장골 삼거리~사평재~1105.3m봉~은신치~은신암~용추자연휴양림을 지나 용추사주차장으로 되돌아온다. 약 15km에 이르는 거리로, 만약 체력이 부족하거나 일찍 산행을 시작하기 어렵다면 장골 삼거리에서 태장골로 하산하면 된다.
산행 시작은 용추사 버스정류장 아래쪽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용추사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버스가 지나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내려가면 버스정류장 옆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넘으면 바로 야영장이다. 야영장의 세면장을 뒤로한 채 직진해서 오른쪽으로 꺾어 언덕으로 오른다. 장자벌마을로 올라가는 포장된 길을 만난다. 등산로 안내판은 따로 없으나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있다. 안의 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버스를 타고 와서 ‘장자벌정류소’에 내리면 된다.
가을이 영글어가는 마을을 스치듯 지나면 오르막 끝에 덕유산 청량사가 있다. 여기서 포장길이 끝나고, 이정표(황석산 5.03km, 거망산 4.37km)가 나온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한동안 철망 울타리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숲길이 너무나 한적하다. 불당골 입구의 이정표에서 산죽이 우거진 비탈길로 오른다. 963.7m봉 지능선까지는 경사가 가파르다.
거망산으로 오르는 숲속의 능선 길은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산벚나무, 다릅나무 등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지능선 안부에 닿으면 다시 이정표가 서있다. 나무로 가득한 능선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다.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산벚나무, 다릅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9월의 거망산은 여전히 푸르다. 단풍이 들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 같다. 봉우리라하기에는 밋밋하지만 963.7m봉에 이르면 주변 조망이 잠깐 열린다. 살짝 내려섰다가 한 굽이 치오른다. 곧 황석산과 거망산이 갈리는 이정표를 만나면서 주능선에 닿는다.
주능선의 또렷한 산길을 따라 거망산으로 가다 보면 1255.1m봉을 만난다. 이 봉우리는 북쪽의 거망산과 남쪽의 황석산보다 높지만 두 산 사이에 끼여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주능선의 조망은 양옆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오늘따라 안개가 잔뜩 껴서 아쉽다. 잠깐 안개가 걷힐 때 발아래 서상면의 조용한 산골마을이 살짝 엿보인다. 조금 더 진행하니 거망샘이다. 갈수기에도 잘 마르지 않는다는 거망샘은 힘겨운 산행 중에 만나는 오아시스다. 거망샘이 있는 지장골 갈림길에서부터 거망산 정상까지 드문드문 억새가 꽃대를 세웠다.
지장골 갈림길에서부터 거망산 정상까지 드문드문 억새가 꽃대를 세웠다.
곧장 올라선 거망산에 덩그렇게 선 정상석이 산객을 반긴다. 거망擧網은 글자 그대로 ‘그물을 던진다’는 뜻이다. 일설에 따르면 중생들에게 불법의 그물을 던져 제도하겠다는 무학대사의 의지를 반영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물을 던져놓은 것 같은 산세라 해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정상 주변은 제법 널찍한 억새평원이다. 언제부턴가 싸리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들어차면서 아쉽게도 억새는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맑은 날이면 전망도 좋아 지리산과 덕유산이 그려내는 마루금이 장쾌하다. 주변의 1,000m가 넘는 걸출한 산들이 빚어내는 산골짜기의 풍경도 아름답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로 멀리 덕유연봉이 얼굴을 내민다.
은신골로 내려서면 촉촉한 숲이 주는 푹신함에 발걸음이 편안하다.
하산은 주능선 따라 북쪽 방향이다. 로프가 설치된 전망 좋은 암릉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거망산이 가깝고, 그 뒤로 1255.1m봉은 안개에 휩싸였다. 이정표가 선 장골봉 삼거리는 태장골 입구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사평재를 지나면서 가을바람에 서걱서걱 울어대는 억새가 산릉을 따라 듬성듬성 이어진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로 멀리 덕유연봉이 얼굴을 내민다. 헬기장을 지나고 1105.3m봉을 넘어 은신치가 가까워지면 억새는 모습을 감춘다.
은신치에서 은신골로 내려선다. 촉촉한 숲을 걸으니 발걸음이 편안하다. 은신암隱身庵은 숨은 듯, 감춰진 듯 주등산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무학대사가 몸을 피해 수도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암자에 인기척마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하기 그지없다.
숨은 듯, 감춰진 듯 주등산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은신암.
암자를 벗어나 계곡을 건너고 산허리를 돌아 내려서면 오토캠핑장이다. 여기서 용추사 버스정류장까지는 용추계곡을 끼고 약 3.5km의 도로를 따라야 한다. 용추자연휴양림과 사평마을을 지나 지루한 도로의 끝자락에 유명한 용추사와 용추폭포가 있다. 산행이 끝나는 곳에 자리한 장수사조계문은 화려한 단청을 뽐내고 있었다.
산행길잡이
용추사주차장~청량사~963.7m봉 지능선~황석·거망산 갈림길(주능선)~ 1255.1m봉~지장골 갈림길(거망샘)~ 거망산 정상~장골 삼거리~사평재~ 1105.3m봉~은신치~은신암~ 용추자연휴양림~용추사주차장 <6시간 소요>
교통(지역번호 055)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경우 안의 버스터미널(1666-0448)에서 용추사행 군내버스(서흥여객, 944-3720)를 타고 용추사 버스정류장(주차장)에 내리면 된다. 용추사행 버스는 07:30부터 18:30까지 매시 30분에 출발하며 20분 정도 걸린다. 이 버스는 용추사에서 안의로 되돌아와 거창을 왕복하므로 거창에서 타고 와도 된다.
숙식(지역번호 055)
안의면에는 숙박업소가 많지 않지만 시골 여관치고는 깨끗한 운성장모텔(964-1399)과 문화장여관(962-0137)이 있다. 함양군에서 운영하는 용추자연휴양림 (963-8702)을 이용해도 된다. 안의면은 선지와 야채로만 속을 채운 피순대와 갈비탕이 유명하다. 용추사 버스정류장 인근의 황석산장(963-5337)은 민박을 겸한 식당으로 닭볶음탕과 닭백숙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