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의 유알헌 초청가의 살아 있는 역사서 - Tell it to the world - 번역
세상에 그것을 말하라
번역인의 서문
오늘날 진리가 너무나 쉽게 접하여져 있어 그것에 대한 진가를 아는 자가 별로 없는 듯싶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남은 교회가 되기 이하여 진리를 전한 수많은 공헌자들을 우리는 잊고 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윌리암 밀러가 성경을 홀로 깊이 연구하면서 발견한 단 8장 14절에서의 2300주야의 예언 역사의 해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리를 발견한 것으로 이에 대한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의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록 2300주야의 해석상의 기간이 잘못됨으로 인하여 쓴 실망의 경험을 가졌으나 그러한 설명의 과정이 있었기에 또 다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믿음의 선조들이 등장하여 성경 연구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게 된다. 이 일에는 어느 개인 한 사람의 공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하나를 두고도 천 만 가지의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중에서 이것이 진리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그 어떠한 기준도 없다. 성경 진리의 천명은 하나님의 바른 인도함 없이는 그 어떤 판정과 확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열약한 환경 중에서 하나님의 빛을 깨달아 된 믿음의 선구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이들에게 더 이상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되어 믿음의 선작자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저들의 헌신적 노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내가 믿고 있는 진리라 어떤 유형의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서 살아간 저들 선구자들의 생애의 본을 따를 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은 이 책에 대한 번역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중요성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자 싶다. 세상에는 참으로 중요한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본서의 저자인 자신도 한국에서 유명한 인물이라면 우리로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생애를 더듬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인은 지금까지 시작한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이미 4권의 책을 발행한바 있다. 그 일의 대게는 동족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난 양심의 발로로 인하여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희생한 대업이었다.
그 일은 내가 살고 있는 내 나라에서 일어난 순수한 양심의 발로에서 일어난 일이나 특별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화장을 위하여 성경의 진리를 알리기 위하여 후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여 준 분들의 공헌을 그 무엇으로 비교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과 조부들 중 한분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는다. 우리는 저들과 나 자신과는 견줄 때에 너무도 연대가 멀고 지역이 멀어 그렇게 우리들 피부에 금방 와 닿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연대가 멀지 않았던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되지 않되는 시점에서 일어난 일들을 외면하다는 것을 하나님을 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들의 믿음이 아무리 돈독하다 할지라도 과거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용하셨던 인물처럼 유명해질 수는 없다고 본다. 저들의 전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최선의 사람들이 된다고 본다. 본서에 나타난 인물들의 행적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한편의 진리가 등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 중에서 탄생한 것이지를 마음에 귀중하게 여기게 되며, 우리들 개인의 생애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적 시간들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의 배후의 인물의 태동 역사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나의 평생 목회를 회상하여 볼 때에 나 자산이 처음으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다. 제2의 인물로 등장할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러한 기대감을 가지 않고 책을 읽어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분 한 분 속에는 나와 같은 자의 일부도 포함된다.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 역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분들 이상 위대한 분들은 없다. 저들을 만나뵈올 기쁨의 시간을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 “아니요, 하나님 나는 설교할 수 없어요!”
“하나님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설교할 수 없음을을 아십니다. 나는 설교할 수가 없어요.” 윌리암 밀러가 주께 굴복하여 미국에서 위대한 재림운동을 일깨우는 지도자가 되기 전 그는 하나님과 논쟁하면서 13년 동안이나 양심과 더불어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빨리 오고 있음을 세상에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음을 강조항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인구의 십분의 구가 농업으로 살았던 시대에 윌리암 밀러도 역시 농부였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소년이었을 때에, 가족이 잠을 자고 있는 년후에 링컨처럼 뉴욕 러우 헴프톤에서 그의 통나무 숙소에서 송진 옹이에 불을 밝혀 책들을 독서하였다. 1803년에 결혼하여 버먼트 포올트니에 있는 그린 마운틴 사이에 정착하였으며 그는 지방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빠른 시일 안으로 완독하였다. 그가 새로 얻은 부인인 루시는 농장의 대부분의 일들을 자신이 하였던 고로 그는 공부하는 데에 여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학구적이었음과 아울러 사교적이고 열심파였다. 밀러는 보아관 대리인으로 치안에 성공적으로 선발되어 평화와 공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두 마리의 말을 자신의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부하게 되었으며, 그의 어린 소년 시절에 가졌던 믿음을 포기할 정도로 세상적이 되어 자연신론자가 되었다.
침례교회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윌리암은 청년으로서 한 동안 부모에 엄격한 친교를 가질 정도로 현명하였으며, 그의 부모에 엄격한 복종을 함으로 평안을 구하고자 시도하였으며, 소중한 소유를 희생하고 있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성경을 믿고자 노력하였으나 그러나 그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초조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던 초기 시절에 밀러는 제퍼슨, 프랑크린과 그 외 건국들의 조상들에 대하여 읽은 책들과 대비드 홈, 볼테에르, 토마스 파인의 저서를 읽었다. 포올트니에서 다른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책들을 읽어서 곧 바로 그는 자연신론을 받아들였고 우주에 대하여 매력적이면서 피상적인 철학에 탐닉하였다.
가족이 잠든 후에 젊은 밀리암은 뉴욕 러유 헹프톤에 있는 그의 통나무 송진의 빛으로 링컨의 자서전 같은 책을 읽었다.
자연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여 변화가 없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그것을 작용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들 법칙에 일치하면 사람은 정결하며 친절하여 정직한 생애를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기도로 구세주를 믿는 것이나 사후에 생애는 유치한 미신으로 간주되었다. 기적, 용서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신의 자연법의 법칙에 역행되게 행동하는 것으로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저 시계처럼 감았다가 저절로 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양을 진 자가 아닌 예의 바른 자로서 법과 질서를 지키는 미국인의 사상이 사람에게서 최상을 가져올 것으로 밀러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집은 국가를 위하여 열성당원들의 정규적인 밀회의 장소가 되었으며 그의 새 고장에는 비종적인 부부들이 참여하였다.
헴프톤으로 되돌아와서 밀러의 모친은 밀러가 포올트니에서 어떻게 되어가는 전하여 들었음 그녀는 상심이 컸다. 그녀는 그의 의형제에게와 그의 나이가 든 부친에게 간구하였다. 저들 두 사람은 감리교회의 목사들로 때때로 윌리암 밀러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기도가 저들과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였다. 윌리암은 따뜻하게 엘리후 아저씨와 할아버지 펠프 씨를 영접하였으나 저들이 돌아간 후에는 그의 동료들과 지나키레 즐거움에 파묻혀 해악을 갖게 된 채로 저들을 훙내 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보다는 나라 사랑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소망이라고 확신한 채로 밀러는 1812년 전쟁에 참전하는 길을 택하였다. 47명의 다른 이들과 같이 저들이 그의 명령에 직접적으로 따른다는 조건 하에 지원하였다. 1812년의 전쟁은 독립은 위한 미국의 두 번째 군대를 동원한 투쟁으로 산만하고 시간의 대부분을 소비한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밀러의 소년 시절의 고향으로부터 멀지 않은 챔플린 호숫가에서 싸운 프레츠버그 전쟁은 특별한 예외였다. 1814년 9월 11일에 아침에 영국군은 15,000명의 정규 육군과 소수이면서도 호수에서 잘 정돈된 해군을 자랑하였다. 미국 사람은 단지 5,500명 군사로 패배로 암담한 처지였다. 결과는 모두가 놀라웠다. 그날 오후 2시 20분에 열정적인 미군 장교가 보고하였다. 영국의 함대가 미국의 깃발에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양편에 대살육이 있는바 저들이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장소에 널려져 있습니다. 그날 장면이 정말로 위대하며, 고상하고, 우아합니다. 이날 아침 10시에 영국 군대가 우리들에게 집중 포격을 수륙으로 가하여 왔습니다. 저들의 로켓포가 우박처럼 날랐습니다. 당신은 전투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안 갖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그것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것을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그 장교는 자신이 행한 역할에 대하여 자랑삼아 회고하였다: “나는 싸울 수 있다고 만족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두려움이 없음을 압니다. 나의 동료 세 명이 내 앞에서 2피트의 거리 안에서 폭발한 파편에 의하여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흥분하면서 “Huzza"라고 연발하였다. 그때에 이 30명의 죄수들이 성채로 인도되었으며 그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으로 ”그대의 사랑하는 영원한 ‘윌리암 밀러’ 라고 서명하였다고 외쳤다. 전쟁은 1815년에 끝났다. 대장 윌리암 밀러는 그가 자원하여 종교운동을 창안하기 이하여 수년 전에 지도자의 자신의 소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정으로 돌아와 젖을 짜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수확하면서 그의 마음은 열정이 종교로 들뜨게 되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하여 그가 추론하여 볼 때에, 프라츠버그에서의 승리는 영국에 돌아가야만 마땅하였다. 저들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패배케 한 노련한 자들이었으며 저들의 수는 미국의 세 배였다. 어느 현대의 역사가는 프라츠버그를 전쟁의 결정적 행동으로 불렀다. 미국의 경비대장은 그 당시에 전쟁의 업무에 대한 그의 보고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전능자제서 우리들에게 눈에 보이는 승리로 우리들에게 기쁨을 준 것이었다.
하나남이 미국에서 한 개인의 관심을 가짐이 가능할 것인가? 자신을 상하지 않게 하고 그의 발 앞에서 폭발된 파편과 또는 그이 동료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곳에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셨는가? 그는 포울트니에서 러우 헴프톤으로 돌아갔다. 그의 부친은 타계하였으며 그는 어린 시절의 집에 저당잡힌 것을 지불하여 그의 모친이 빚에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었으며 그때에 그는 그곳 근처에 20에이커 땅에 정착하였다. 정직한 자가 되게 위해서 밀러는 그의 삼촌이 설교를 할 적마다 지방교회인 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 다른 때에는 빠지기도 하였었다. 우리는 지난 일요일 예배 때에 업어서 찾았다고 어머니가 부드럽개 말하였다. “왜 아들아 오지 않았느냐 아들아.” “집사들이 설교하고 있었잖아요.” “나는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확신합니다.” “아저씨가 어디를 가고 없었을 때에 어머니, 저들은 나에게 그것을 읽지 않게 하였나요?” 이렇게 하여 밀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올무에 걸렸으며 그가 웃음을 보냈던 선한 형제는 기뻐하여 그가 사로잡힌바 되었다고 즐거운 마음으로 확신하였다. 저들이 그에게 알렉산더의 실제적인 대화로부터 읽도록 한 설교는 그에게 깨우침을 주었다. 자연신론에 대한 그의 의심은 더 깊어만 갔다. 1816년 9월 11일에 프라츠버그에서의 제2회 승전 기념식 주위를 서성거렸다. 공중을 위한 춤이 계획되었다. 전날 밤에는 설교도 있었다, 초청된 전도사는 사람들을 집에 가ㅓ 눈물로 범벅되게 하였었다. 부흥이 일어났으며 무도회는 끝났다. 다음 일요ㅛ일은 다시 밀러의 읽는 차례가 되었으며. 이때에는 프라우드피트에서 저들의 자녀에게 대한 의무라고 부러지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중도에서 감정에 지배를 받아 마지막을 장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죄과에 절망하여 자신을 구주의 팔에 어떻게 하면 내어맡길 수 있는 지와 그의 은혜에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였다. 세상은 구주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분은 어디에 존재하셨는가? 성경으로 그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구하는 구주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으로버 온 계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받아드리도록 강요되었다고 그가 나중에 “그것들이 나의 즐거움이 되었으며 예수 안에서 나는 한 친구를 발견하였습니다.”라고 기고하였다.
즉시 그는 정규적인 가족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의 세상 친구들은 마치 그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비난하였던 것처럼 지금 그를 비웃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저들은 괴롭혔다. 그에 대한 모순은 무엇인가?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밀러는 충실하게 반응하였다. 그때에 포함된 모든 것들이 이해될 수 있었으며 모든 것들이 조화가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시간을 주시면 나는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조화 있게 할 것인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자연신론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과 그루덴 관주 성경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책을 버리면서 그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하여 떠오르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까지는 빠르게 진전시키지 않았다. 한구절씩 연구하여 나갈 때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의 다수가 사라져갔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구세주가 지상에 다시 오시마 약속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른 예언적 조건들이 성취된 것을 발견하였던바 그러나 왜 이것 하나는 성취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의 생애의 남은 기간을 위하여 구분케 한 단 8:14의 2300주야까지니 그제서야 성소가 정결케 함을 입으리라는 성경의 본문을 만났다.
그의 연구는 집중되어 어떤 때는 하루 종일과 어떤 때에는 온 밤을 보냈다. 2300주야가 2300년임과 그것들은 .BC.457년에 시작된다고 작정하였다. 부정확하게 그는 성소의정결이 세상의 마지막과 그리스도의 오심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스도가 지난 230년이 1843년에 오시리라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되었으며, 이제 25년 후이면 우리의 현상태의 모든 것들이 끝나게 될 것이었다.
25년 안에 끝이란 말인가? 그때에는 다른 것이 경고되어야 할 것이었다. 한 음성이 그의 영혼에 불을 질렀다. “가거서 그것을 세상에 말하라.” 5년간 말하라는 그 음성을 무시하였으며 나중에 “어떤 가능성으로 내가 잘못되지 않아 누구라도 잘못 인도되는 수단이 되지 않지 바란다는 글을 실렸다. 나중에 그의 대적자가 생겨난 것보다도 더 많은 장애가 그의 아음에 떠올랐다. 연구에 대핸 해가 모든 의심을 떠나게 될 때에, 공중 설교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나는 주께 수집어 하는 자이며 필요한 자격을 지니지 못하였다고 고하였다.
밀러는 그의 지방교회에서 활동하는 역할로 체워졌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열렬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리고 그는 이들과 동료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그의 확신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떠한 것도 설교하라는 끊임없는 내명의 부르심을 만족할 수는 없었다 1831년 8월인 13년 동안의 지연 후에 그의 영혼의 짐이 갑자가ㅣ 결딜 수 없어 보였다.“가서 그것을 세상에 말하라.” 나는 네게 파숫군으로 임명하였다. 가서 그것을 세상에 전하라! 그는 그가 읽고 있던 성경으로부터 쳐다보았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깊게 고통을 받았다.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심인가? 그는 의심 없이 알아야만 하였다. 그는 그의 책상에 그의 주먹을 두들겼다. “하나님, 나는 설교를 할 수가 없어여. 그러나 나의 뜻은 내가 가는 것이다. 오, 주님, 나는 당신과 언약을 가질 것입니다. 만일 그 길을 주신다면, 내가 당신에게 나로 하여끔 설교하도로고 보낸 것으로 의미허렵니다. 그때에 하나님, 내가 갈 것입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야 그는 나는 평화를 가질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내가 초청을 받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야 하고 마음에 만족하면서 어느 누구도 51살에 된 늙은 농부에게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하여 설교하도록 요청할 자는 없으리라고 미소를 지었다.
삼십분 안에 문에서 녹크 하는 소리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흥분하던 토요일 아침에, 누구란 말인가? 그는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물었다. 문 두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나는 나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윌리암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면서 외쳤다. ”아침 일찍 무엇이 너로 집에서 15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 오게 하였는가? 윌리암 아저씨. 나는 아침 조반 전에 드레스덴에 있는 우리의 침례교회 목사가 내일 예배에 말할 수가 없어 당신에게 말하도록 하고는 떠났어요. 아버지가 나를 당신에게 요처하도로고 나를 보냈어요. 그는 당신이 와서 성경에서 공부하던 것들에 대하여 말하여 오는 것을 바라고 있어요. 당신이 아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입니다. 오시겠어요?
밀러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당황하여 돌아서서 부엌문으로 달려가더니만 근처에 있는 단풍나무 숲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곳에서 주님과 씨름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화를 내었으며 하나님에게도 화를 발하였으며 많이 두려워하였다. 한 시간 여 동안 그는 그가 맹세한 것으로부터 철호하도록 간구하면서 “하나님 다른 누구를 보내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자연신자로서 그의 말을 지켜 나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그 어떠한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는 눈물로 괴로워한 후에 그는 마침내 하나님 편에 굴복하였다.
그때에 행복이 그의 영혼에 넘쳤다. 내키지 않았단 13년의 기간이 끝났다. 굴복함에 대한 기쁨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거의 이숙하지 않은 태도로 그는 깡충 깡충 뛰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 그의 작은 딸인 루사인은 염려스러운 모습으로 쳐다보면소 “어머니 어머니 빨리 와요:라고 말하면서 달려갔다.
점심을 먹고 나서 즉각 밀러는 어빙과 함께 챔프린 호수가의 입구로 나아갔다. 그곳은 프라츠버그 전투에서 싸우기 몇 해 전의 장소로 드레스덴에t의 그의 누이가 있던 곳으로 싸움에서 승리했던 곳이다. 그에게 쉬게 한 밀러와 하께 부엌에서 모였던 장소에서 큰 안락의자의 테이불에 앉아 있었다. 미국에서의 위대한 재림의 각성이 시작되었다.
그의 깊은 성경의 지식이 인상적이고 그의 진지한 열성적인 호소에 감동되어 드레스돈에 있는 사람들은 한 주일 간 매일 밤마다 설교하도록 하였다. 소문이 농장에서 농장으로 번져났다. 참석자가 늘어났다. 열두 가족이 그리스도께로 전향하였다. 틀림없이 저들은 길드포도 가정에서 교회로 이주하였다.
그러자 그의 가정에 돌아왔을 때에, 초대장이 그의 첫 번 ‘시리즈’에 관하여 아직 듣지 못하였던 목사로부터 그를 기다렸다. 주님과의 밀러와의 언약은 이중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가 목회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의심이 없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을 받은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도 부름 받은 것과 같은 확신을 지닌 같은 주님에 의한 것이다.
처음서부터 밀러는 그가 채울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초대를 받았다. 회중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등이 각자 다투어 그의 농장으로부터 모셔 그의 강단에 세우고자 하였다. 비용 절감을 돕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그의 설교의 강목들의 순서지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것의 비용이 증가할 때에, 그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깨우침을 더욱 확장함에 인쇄로 그의 재정에서 그의 설교에 관한 책이 출판되었다.
1833년에는 밀러를 아는 지방 침례교회에서는 그가 설교하도록 자격증에 사인하였다. 2년 후에는 그를 여러 침례교회 목사들과 다른 교파에 있는 상당수의 지도자들로부터 예언에 관한 강사로 그를 추천하는 자젹증을 갖게 되었다. 모든 곳에서 밀러는 설교를 하였으며 사람들은 회개하였다. 자주 그곳에는 부흥이 생겨났다. 때로는 전 도시가 변화를 받았다. 헨드릭스 형제가 그의 새로운 약력 속에서 한 친구에게 글을 쓰기를, “나이 든 밀러 형제가 설교하고 있음을 생각하노라면 참으로 웃을 일이다. 그것은 옳았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만일 내가 진리를 설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구할 모든 것이다.
이때에 모든 마을에는 이교자들이 있었고. 약간의 작은 집단들은 이교도들과 함게 무리를 지었다. 이교자들은 자연신론자와 같은 이들로 저들은 더욱 급진적인 의심자가 되었다. 밀러 안에서 저들은 저들의 문제에 질문하고 답하던 한 사람을 인식하였다. 한 장소에서 백 여 명의 불신자가 한 주일에 그의 기별을 영접하였다. 그의 생애 말년에는 밀러는 마세수체츠에서 미시간까지, 몬트리올에서 매릴랜드까지 500 이상의 도시를 상대로 설교하였으며 저들의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번에 걸쳐 6,000명 영혼 이상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데에 개인적으로 도왔다고 계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의 서두에 접하고 있다.
그의 첫 번 8년 동안에 주께서 길을 열어 준 곳만을 던지 가려고 정하였던 밀러는 작은 도시에서 작은 교회에서 매우 바쁘게 되었다. 뉴헴프샤의 엑스터에서의 봉사의 끝에서의 1939년 가을에는 그의 생애의 과정을 변화시킨 한 사람을 만났다. 34세의 죠수아 하임즈는 뉴잉글란드에서는 노예와 주정음료와 전쟁에 대하여 반대하는 열렬한 복음 전도자로서 이미 명성이 알려져 있었다.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그는 밀러의 2300주야에 대한 기별에 귀를 경청하여 들을 때에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자마자 하임즈는 활발하게 걸어 나가 밀러에게 보스톤에 있는 찰돈 거리에 있는 그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반복하도록 초청하였다.
이리하여 1839년 12월 8일에, 밀러는 큰 도시에서 그의 첫 번 설교의 시리즈를 선보였다. 관심이 커서 집회는 하루에 2회 가졌으며 집회 장소가 협소하여 많은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하임즈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항상 군대를 사열하는 사령관이나 그러한 직위를 가진 자로, 그는 밀러의 호소가 땅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모든 것에 원인이 됨을 보았다.
그대가 우리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당신은 진정으로 믿으십니까? 밀러에게 그의 집에서 어느 날 밤 물었다. 심사숙고하면서 진지하게 하임즈 형제에게, 나는 거의 모든 것을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세상에 그것들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밀러는 그에게 초대장을 전달하여 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도달되는 그의 시도들을 계산하였다. 하임즈는 놀랐다. 모든 작은 도시와 촌락이라니? 도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벌티모어, 로체스터,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의 1,700만 명의 미국의 사람들이 경고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만일 그대가 믿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수년 내에 오신다면, 뇌성과도 같은 기별로 저들을 준비하도록 일깨우는 기별을 보냄에 있어서 잃을 시간이 없다고 그는 마음이 격분되었었다.
“하임즈 형제여,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밀러는 지친 상태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늙은 농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단순히 홀로 서 있을 뿐입니다.” 라고 한탄하였다. 목사들은 내가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며 저들의 집회 장소를 마련하여 주었던바 그것이 모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들 중에는 대부분이 그대로입니다. 나는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임즈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즉시 하임즈는 자신과 그의 가족과 그의 명성 그 모두를 밀러를 돕기 위하여 그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을 놓았다. 한때 하임즈는 밀러의 매니저가 되며, 광고 대리인과 헌신한 조력 전문인이 되었다. “당신이 초대를 받으시면 도시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제서야 밀러는 컴페인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문들이 연합하여 모든 도시에서 열릴 것이며 모든 경고가 지상의 끝까지 전파될 것이다. 이때에 밀러를 father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바 이는 그 당시에 나이 든 분에 대한 애정과 존경에서 사용되었다.
하임즈는 그의 약속과 예언을 좋게 이해하였다. 미러가 그 지방에서의 중요한 모든 도시에서 기별을 들고 나아가자마자 그의 이름은 나라 전체를 통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하임즈는 자신의 교파와 그리스챤 연맹체의 목사들을 설득하여 큰 도시에 밀러를 보내어 그에게 저들의 강단을 맡겼다. 이들 목사 중 한 사람이 포트란드의 로렌조 다우 플리밍이었다. 플레밍의 카스코 거리 교회에서 밀러의 기별이 로버트 하몬 가계에 전하여졌다. 이렇게 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미래의 창설자 한 분인 십대의 엘렌이 재림의 소망에 자신의 생애를 위탁하게 되었다.
하임즈는 여러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아마도 그의 최대의 것은 출판이었다. 18400년, 재정과 구독자 명단 없이 그는 첫 번째로 재림 정기간행물인 시조를 시작하였다. 그것이 재림사상을 저명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