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관[明月館] 이야기
명월관 한말의 유흥음식점. 1909년경에 개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궁중 기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영업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6·25 전쟁 때 북한군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철수 당시 불태워졌다.
출장뷔페의 원조 명월관 이야기
“출장연회” 또는 “출장뷔페”는 요리, 음료, 식기, 식탁, 유리잔 따위 필요한 집기 비품들을 준비한 뒤 손님이 정한 곳으로 운반하여 손님이 만족할 만한 연회행사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출장연회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시작한 곳은 명월관으로 보기도 합니다. 명월관(明月館)은 1909년 무렵 대한제국 말기 궁내부(宮內府)에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현재의 서울 종구로 세종로에 문을 연 20세기 최초의 조선 요릿집이지요.
궁중 요리사가 운영하던 이 명월관은 조선후기 궁중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나오는 음식들을 팔았기에 당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요리들은 바로 숭어·잉어·조기·도미 따위를 구워 푸성귀·국수와 함께 끓인 “승기악탕(勝妓樂湯, 원 이름 승기아탕)”과 신선로(神仙爐)에 여러 물고기와 육고기 그리고 푸성귀를 넣어 끓인 “신선로(원 이름 열구자탕-悅口子湯)” 따위가 있었지요.
그런데 명월관은 단체 회식은 물론이고, 회갑연과 혼례연까지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조선음식을 팔던 첫 번째 전문음식점이라 할 만 합니다. 또 조선음식을 개량하여 교자상 곧 명절이나 잔치 때 음식을 차려 놓는 직사각형의 큰 상까지 배달 판매 했다니 출장연회, 출장뷔페의 원조가 아닐까요? 이 명월관은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궁중 기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영업이 점차 번창해졌는데 문제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전통요리를 서양그릇에 담는가 하면 신선로에 일본요리가 오르기도 하여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명월관[明月館]
1909년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자 당시 어전(御前)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 기녀들이 모여들어 영업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건물은 2층 양옥으로 1층은 일반석, 2층은 귀빈석이었으며, 매실이라는 특실도 있었다. 주로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하였다. 1918년 5월 24일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안순환은 장춘관(長春館) 주인 이종구(李鍾九)에게 명월관 간판을 내주어 서울 돈의동 139번지(지금의 피카디리극장 자리)에 명월관 별관 간판을 걸게 하였다. 안순환은 이종구의 소개로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에 위치한 순화궁(順和宮) 자리에 명월관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개점․영업하였다. 태화관은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고, 1921년경 안순환은 식도원(食道園)이라는 요릿집을 새로 개점하였다. 한편 이종구가 경영한 명월관은 3·1운동 이후 우국지사들의 연락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운영방식으로 이종구가 대지와 가옥을 소유했으며, 영업권은 종업원들이 공동 관리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공산군의 종로 일대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공산군의 철수 당시 이종구는 납북되었고, 명월관은 불태워졌다. 명월관,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 '명월관'은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따온 이름으로 명사와 한량들에게 편안한 장소와 푸짐한 음식을 대접한 요릿집의 대표적인 브랜드를 쌓았다. 궁내부 주임관(奏任館)과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었던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온 뒤인 1909년에 생겨난 요릿집이었다. 전신은 '조선요리옥'이었다. 명월관 본점은 종로구 돈의동 145번지, 지점은 종로구 서린동 147번지에 있었다. 본점의 토지 평수가 1,200여 평이었고,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 총평수가 600여 평에 달하는 당시 상당한 규모였다.
안순환은 명월관을 개업하여 궁중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되었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이 담그는 술을 대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주, 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술을 팔았다. 이 무렵 융희 3년(1909)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방 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 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1910년대 명월관은 이색적인 광고를 한다. 종로 거리에 우산을 받쳐 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나이 든 기생이 앞에 서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동기(童妓)가 뒤를 따르는 행렬은 구경꾼들의 눈을 번쩍하게 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앞서 가던 기생이 선창을 하면 뒤에 따르던 기생들이 화답하면서 가는 행렬은 요릿집 명월관 선전이었다. 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식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릿집에서나 구경할 기생을 백주 대낮에 구경하게 된 횡재에 군중들은 이들 행렬을 따라 나섰고, 행렬이 종로에서 동대문 쪽으로 방향을 틀면 구경꾼도 이들을 뒤따랐다.
그러나 1918년에 명월관이 불타버렸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당시 여러 이야기가 나돌았다. 친일정객들이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기생에게 욕본 고관의 분풀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아들을 둔 시골 양반 때문에 불이 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무성하였다. 이듬해 이종구는 '명월관' 상호 명칭에만 3만원을 주고 인수한다. 이종구는 1937년 종로권번도 인수한 재력가였다. 명월관에서는 고유한 조선요리와 서양요리를 만들었고, 주요 손님들은 고위 관료와 재력가, 외국인 등이었다. 1932년 조사에 의하면 하루 매상이 500원 이상이었고, 종업원의 숫자도 120여 명이나 되었다. 종업원은 손님을 안내하는 '보이', 음식을 만드는 '쿡', 인력거 '차부(車夫)'까지 포함한다.
안순환은 그 뒤 화재를 당한 후 새로이 '태화관' 그리고 '식도원'을 세웠다. 명월관은 서울에 있어서 조선요리업의 '원조(元祖)'라는 이름이 높다보니, 지방에서도 '명월관'이라는 간판을 내놓고 요릿집을 운영하는 이가 많았다. 현재 명월관 본점 자리에는 동아일보사 사옥이 있고, 지점 자리에는 피카다리 극장이 있다. 1971년 「중앙일보」에 연재를 한 조선권번 출신 이난향의 회고에서 보더라도 '명월관'은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명월관에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언론인과 문인들은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고 한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도리우찌'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 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은 방을 잘못 들어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좌중에 계신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육당 선생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나 백운선의 영변가를 좋아하셨고, 음성은 쇳소리였다. 내가 육당 선생의 처음 인상을 '복덕방목침' 같다고 손님들에게 말했더니 그 후 이 말은 육당 선생님의 별명처럼 돼버렸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얼굴색이 유난히 빨간 것이 인상에 남아있으며, 수주 변영로 선생은 그때부터 술을 많이 들었는데 김금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1930년께는 춘해 방인근 씨가 주동이 된 동부인회가 가끔 명월관에서 베풀어졌다. 이 모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춘원, 박인덕, 의사 백인제, '세브란스'의 전 학장 오긍선, 음악가 백명곤, 숭실전문 교수이며 테너가수였던 차재일 등 제제다사였다. 김억, 김동인, 윤백남, 안석영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1)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과 2층에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큰 홀이 있기 때문이며, 그 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명월관 특설 1호 무대
명월관의 제1기라 할 수 있는 고객 계층은 1910년대 초반 이름만 남아있던 조선 왕조의 왕족들, 옛 대한제국의 고관관직을 했던 이들, 그리고 친일파들이었다. 1910년대 후반의 제2기 고객 계층은 망국대부의 자제들과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여기서 나라 잃은 망국의 슬픔이 아이러니하게 '공간으로서 명월관'에서 드러난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위정자의 자제들은 해야할 일도, 울분을 토로할 공간도 마땅히 없었기에 명월관에서 기생과의 유흥이 유일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늙은 고객들은 발을 끊게 되고 그들의 자제 덕분에 손님들이 갑자기 젊어지게 되었다.
제3기는 1920년 초반으로 일본 유학생들의 사각모자, 즉 대학생들이 주된 손님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상해의 애국지사도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1919년 3·1운동으로 사회의 변화는 기생의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바로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으로 투신하게 되는 기생, 즉 사상기생이 생겨나게 된다. 1919년 3월 19일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기생조합 소속 기녀집단을 '기생독립단'라고 하는데, 3월 29일에는 수원 권번 기생 30여 명이 검진을 받으러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자 김향화(金香花)를 선두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 앞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는데, 김향화는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4월 5일에 해주 기생들은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김월희·문월선은 징역 6월, 이벽도·문향희·해중월 등은 징역 4월이 언도되었다.2) 이 사건은 삼일운동이 한국민족 전체의 운동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기생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일본인들을 골탕 먹인 예가 많았다.
이어서 제4기는 1920년 후반으로 신문 언론인과 문인들이 두드러진 고객이었다. 1929년 조선총독부 20주년 시정기념 박람회로 명월관에 지방의 부자들이 서울의 기생을 보러 올라오면서 고객의 계층이 급격하게 변하였다. 그러면서 기생들은 일본 유학을 가거나 근대식 학업으로 신여성처럼 살겠다고 기생폐업하는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1930년대 들어 제5기에는 사업가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이제 양장 차림에 양산을 오똑하게 받쳐 들고 인력거 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 이미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객층은 앞서와 별반 차이 없었지만 1940년대 제6기에 명월관으로 출퇴근하던 기생들이 비단옷 대신 몸빼 옷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자 명월관은 휴업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기생의 친일 행적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웃음과 노래를 파는 연약하고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는 하나 '애국의 열성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푼푼이 모으고 모은 돈으로 8개의 고사기관총을 헌납하는 헌납식은 본정관내의 조선권번, 한성권번, 동권번, 본권번, 경성요리업조합, 신정유곽 등의 기생, 창기, 예기 1000여 명의 손에 의하여 오후 세시 가을빛 짙은 장충단공원에서 감격과 찬양을 받으며 성대히 거행되었다. 헌납식이 끝난 후 창기, 예기, 기생들이 섬섬옥수를 들어 가을 하늘을 향하여 헌납한 기관총의 실연을 하였다.3) 제7기 1940년대 후반은 미군들로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주된 고객도 미 제5공군 장병들이었고 요릿상의 다리가 높아지고 서양 댄스 중심의 파티였다. 이로써 기생과 함께 한 공간으로서의 명월관은 어느새 사라져 갔다.
명월관은...
당시 기생관으로 유명했던 집. 구한말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명월관이다. 황토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는데 회색빛 2층 양옥이었다. 2층에는 귀빈석, 하층에는 일반객을 받았으며, 매실이란 특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귀빈 중의 귀빈에게 제공되었다. 하층은 온돌이었고 2층은 양탄자와 돗자리를 깔았다. 명월관을 개업한 안순환(安淳煥)은 궁중요리를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술은 궁중내인이 빚었기 때문에 성황이 일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그 해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나,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거물들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문인 언론인등이 드나들었고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지사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귀빈들로는 의친왕 이강(李堈)공을 비롯 민병석, 윤태경, 박영효, 민영찬, 조남승, 구용산, 그리고 친일파 거두로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과 화가 김용진도 드나들었다. 1930년을 전후해서는 문인 · 언론인 등이 드나들었으니 최남선, 변영로, 이광수, 방인근, 김억, 김동인, 윤백남, 안석영, 이상범, 노수현, 김팔봉, 최독견, 주요한, 이관구 등이며 박동화는 천향원에 자주 드나들었고 명월관엔 가끔 출입했다고 한다.
진주 기생으로 명월관에 드나들던 산홍에게 친일파 이모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였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으로부터 배일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면서 돈 한뭉치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 또 그림과 서예에도 능했던 주옥경(기명 산월)은 의암 손병희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주위에 방을 구할 수 없어 형무소 담 밑에 있는 초가 한칸을 빌려 음식을 차입했다. 하루는 일본인이 주옥경에게 찾아와 의암선생이 졸도했으니 모셔가라고 해서 달려갔을 때 조금 의식을 회복하자 도로 감방에 수감했다고 한다. 주옥경은 다동기생조합 제1대 번수를 지낸 서도 출신이며, 1967년 정부에서 의암선생에게 드린 건국공로훈장을 대신 받았다. 당시 명월관에서 의암선생의 부름을 받고 평생을 의암 선생을 위해 살았다. 또 명월관에 나가던 남도 출신 현산옥의 집에 상해에서 잠입한 애국지사가 은신하고 있었다. 명월관 인력거꾼이 현산옥의 집에 쪽지를 전했는데 미행한 일본 형사가 무슨 쪽지냐는 질문에 문밖놀이에 나오라는 기별쪽지라고 인력거꾼과 같은 대답을 했으나 믿지않고 방문을 열었을 때 현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운 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인력거꾼은 고학생이 많았고 이들 중엔 애국지사의 연락역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인력거를 타고 가던 기생이 인력거꾼이 고학생인 줄 눈치채고 돈을 주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기생의 애국충정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또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는데 박춘금이 육혈포를 인촌선생에게 겨누자 그 자리에 있던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선생 주위를 둘러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선생은 기생중 대표격인 이연행을 자택으로 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하며 최홍련은 상해로 , 현계옥은 상해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했다.
이 무렵 서울의 대표적인 관은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이 손꼽혔으며 그밖에 봉천관, 영흥관, 혜천관, 세심관, 장춘관 등이 있었고 일본인이 사는 남촌에 백수화일, 천대본 등 일본식 요리집도 생겨났다. 당시 명월관은 주로 유명인사가 출입했으며, 국일관은 상업하는 신흥부호, 식도원은 일본인과 관공리들이 드나들었다.
1918년경에 명월관이 소실된 뒤 순화관(현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했다. 이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본관 간판은 장춘관으로 옮겨졌지만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경영했기 때문에 명월관에 모였던 명기들이 그대로 모여 전처럼 번창했다.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불려나와 우미관양악대와 단성사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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