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조 흥 제
내가 고등학생 때 국어책에 실렸던 글 중에 좋아했던 내용은 민태원의 ‘청춘예찬’, 정비석의 ‘산정유한’, 이양하의 ‘신록예찬’이었다. 피천득의 ‘인연’이나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나오지도 않았을 때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은 이광수 선생이 쓴 백마강에서 배 타고 내려가면서 3인의 노래를 듣는 장면이었다. 여행기 이름도 모르지만 ‘젊은 여자가 목소리를 떨어가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정성을 다했다고 보여 진다. 주위의 경관도 절경이고 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강상을 주유하던 이광수 선생은 얼마나 멋있는가.
내가 문단에 등단하고 나서 청소년 때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이광수의 백마강기(가칭)를 찾으려니 찾을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여행기 이름도 모르니 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잘 쓴 글이었다는 것은 잊히지 않았다.
이제 나이가 먹어 저 세상으로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아 그동안 써 놓았던 여행기와 산행기를 정리하다 ‘부여탐방’이란 기행문을 보았다. 그때 나는 대전에서 살았다. 5․16 혁명 무렵 직장에서 여행 갔을 때 써 놓은 것이다. 공주 계룡산의 갑사, 부여 부소산과 고란사, 백마강에서 배타고 내려가 강경에서 내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을 보러 갔었는데 그때 써 놓은 것이다. 백마강에서 배 타고 내려가면서 이광수 선생이 여기서 배 타고 가면서 세 사람의 노래 부르는 장면을 떠올렸던가 보다. 거기에 이광수 선생의 글 전문을 수록해 놓은 것이 놀랍다.
우리 배는 규암진을 떠났다. 옛날 백제의 상선과 병함이 떠났던 데요, 당, 일본, 안남의 상선이 각종 물자를 만재하고 폭주하던 데다. 자온대의 기암은 현금에는 의자왕이 유일하던 데로 명성을 전하지만 당시에는 아마 이별암으로 유명하였을 것이다. 진취 활발한 백제인이 금일 동, 명일 서로 천하가 좁다하고 횡행할 때에 이 암상에서 홍루를 뿌리던 미인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백제 인이 당을 향하고 당을 떠나는 마음으로 규암진을 떠났다. 감회 많은 부소산을 다시금 바라보며 일엽편주는 지국총 소리 한가하게 사자수 중류에 흘러내린다. 일점 풍, 일점 운이 없이 일파가 부동하는데 양안의 세류만 안개에 묻혔다. 이따금 이름 모를 고기가 뛰어 도영한 산영을 깨뜨릴 뿐이다. 물도 좋고 청산도 좋고, 백운도 좋다. 모두 동중의 경이요 시중의 취로다. 마침 동주한 3인이 모두 비범한지라 통소 부는 소경 노총각과 해금 긋는 백발파립의 노인도 신기하거니와 담경 소복한 연광이 이팔 넘었을 작달막한 미인이 동주함은 더욱 기연이다. 양개 낙인은 수십 년 내로 천하를 주유하는 방랑객이란 말을 들었으나 미인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이 바이 없고 묻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꽃 같은 양협에 진두에 아직 이별 흔이 남아 있는 것과 아까 규암진 벽두에서 팔을 두르던 노파를 생각하건대 무정한 인생에 무상한 인연으로 모녀의 이별을 당함인 듯하다.
배가 한 물굽이를 돌면 동쪽의 삼기봉이 흘립한 것을 보리니 이것이 유명한 대왕포다. 현란 문화에 취하여 강린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야일 계일로 독락을 탐하던 의자왕이 노닐던 터이다. 당시에는 바로 그 밑으로 사자수가 흘렀다 하나 지금은 망망한 초원이 그 밑에 있을 뿐이다. 선두에서 봉상을 바라보니 한 마리 솔개가 떴을 뿐이요, 다시 가무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나는 양개 낙인에게 일곡을 청하였다. 양인은 홀연히 허락하고 수곡의 선곡을 화주한다. 홍루흔의 미인도 유미를 움직이며 그윽히 듣더니 솟는 흥을 못 이김인지 격정 1번의 장생술의 1곡을 부르고 다시 내 청으로
반월성 깊은 밤에 화광이 언 일인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지단말가
수변에 푸른 양화야 너무 무심하노라
강산은 좋다마는 인물이 누구러냐
자오대 대왕포에 오작이 깃들이니
지금의 의자왕 없음은 못내 슬퍼하노라
사자궁 궁궐터에 보리만 누렀으니
당시 번화를 어디 가 찾을런가
동문밖 루루한 무덤에 석양만 비꼈더라
미인은 소리를 떨어가며 삼곡을 연창하였다.
노를 젓던 사공도 어느덧 노를 쉬고 배는 물을 따라 저 혼자 흘러간다. 이윽고 강산에 일진풍이 돌아가니 천년 간수 중에 놀던 낙화암 아름다운 넋이 이 노래의 깨임이런가. 배가 또 한 구비를 돌아가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싶은 조그마한 봉이 보이고 거기는 암상에 굴 붙듯이 모옥이 들러붙었다. 사공의 말이 강경에 다달았다 하더라.
지금 읽어도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