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국문화복지교육협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카페지기 자료실 스크랩 웰빙의 문명사적 含意와 담론적 效用
슈퍼비젼 추천 0 조회 68 16.05.16 23: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웰빙의 문명사적 含意와 담론적 效用


전상인


〈目次>

1. 서론
11. 웰빙 개념의 태동과 성장
111. 웰빙 이론의 발전과 성숙
IV. 웰빙 담론의 구성요소들
   1 . 육체사회론

   2. 탈물질주의
   3 반(反)소비주의
   4. 미시 ·생활정치
V 결론



1. 서론


이 시대를 풍미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로 ‘웰빙’(wel1-being)을 지적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웰빙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 안팎에 골고루 그리고 깊이 들어와 있다. 처음에는 주로 음식이나 건강 등의 영역에서 웰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의류나 레저, 건축이나 도시계획, 정치나 마케팅, 심지어 종교적 영역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로써 매일매일 접하는 대중매체나 상업광고에서 웰빙이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힘든 것이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 사회문화적 트랜드를 가장 잘 반영하는 단어” 로 웰빙을 지적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천선영, 2006: 2). 1)


* 서울大學校 環境大學院교수
1) 웰빙의 우리 말 번역으로서는 ‘참살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념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감안하면 ‘안녕’이
라는, 다소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표현이 본디 의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애초에 웰빙은 건강에 관련된 개념
으로서, 1974년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가 건강을 “단순한 질병의 부재 상태가 아닌신체적, 정신적, 영성적 및 사회적 차원 전반에 걸친 통합적 안녕 상태”로 규정하는 것에서 상용화되기 시
작했다



웰빙 개념에 대한 국내외의 학문적 논의는 그러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그것의 대중적 전파 및 파급에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학문의 세계에서 현실이 성찰을 앞서가는 것 자체는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웰빙의 경우, 특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듯하다.
우선 웰빙 개념을 음식이나 건강 등에 관련된 문제로 좁게 한정시키는 관행의 힘이다. 먹는 차원과 몸의 문제가 학문적 연구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하를 놓고 논쟁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웰빙을 인식하는 태도는 학계에서 사뭇 완강하다. “뭐니 뭐니해도 웰빙의 핵심은 잘 먹는 것”이라는 입장이 이를 웅변한다(서동욱, 2005: 200). 중요한 것은 나만 잘 먹느냐 아니면 남도 잘 먹느냐 하는 구분 정도인 것이다. 웰빙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대체로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 머물러 있다. 기껏해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여 삶의 질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활양식 정도이다(이미숙, 2004).2)

최근 웰빙이 ‘건강과 지속가능을 고려한 생활방식’을 의미하는 ‘로하스’ (LOHAS,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개념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한계를 크게 벗어난 일이 아니다.


웰빙을 주로 건강 등에 관련하여 제한적으로 인식하는 현상과 더불어 학계의 다른 일각에서는 웰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비하와 부정으로 일관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웰빙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소비양식의 연장이자 변질로 보는 입장이다. 곧, 웰빙은 건강을 미끼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소비를 자극하는 자본의 논리이자 상업적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김선욱 2005; 윤 진,2006; 이윤숙 2004 등 볼 것).

웰빙 논의가 겉으로는 건강이나 안녕의 영역에서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듯한 이른바 ‘주체적 삶’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구조적 조건을 극복하는 대신 소비문화의 진작을 통해 이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할 뿐이라는 주장이다(서동진, 2005).

여기에 흔히 덧붙여지는 것이 웰빙의 계급론적 함의이다. 가령 웰빙은 상류계층의 ‘구별짓기’( distinction) 행위를 마치 개인적 차원의 선호나 취향의 문제인 것처럼 환원하고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여기에 해당한다(Bourdieu,1984; 문성원, 2005 참조).


문제는 웰빙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이와 같은 제한적 이해나 비판적 시각으로서 결코 간단히 종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웰빙의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은 단순한 음식이나 건강의 차원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적 부박(浮博)을 넘어서 깊이와 넓이를 점차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웰빙을 근대적,산업사회적 혹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자 극복으로 이해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만약 목적과 이유에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진정성( authenticity)만 확보할 수 있다면 웰빙은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한 성찰적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김선욱,2005; 황갑연, 2005). 바로 이와 같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여 웰빙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념화 ·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천선영 (2006)에 의하면 웰빙은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혹은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소통의 상징적 코드’ 로서 일종의 ‘포괄담론’ (Overarching Discourse) 내지 ‘우산담론’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 글의 목적은 웰빙을 단순한 생활양식의 수준이나 이데올로기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거시 ? 문명사적(巨視 ? 文明史的) 사회담론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웰빙은 한편으로는 근대 산업사회의 삶과 문명에 대한 수많은 분파적 비판이 최종적으로 집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구체적 실천과 실행이 다양한 종류 및 수많은 단계들과 궁극적으로 합일하는 총체적 인식공간이라고 인식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웰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대사회의 문병적 특성을 이해한 다음 웰빙 개념의 기원과 진화론적 계보 빛 웰벙 담론의 주요 구성요소들을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웰빙 개념 혹은 웰빙 논의의 학문적 가능성과 효용성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2) 한국에서 웰빙 문제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접근은 생활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2004년도 한국생활과학회 하계학술대회는 ‘웰빙 라이프스타일의 이해와 생활과학의 과제’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3)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웰빙은 그 자체의 당연하고도 지당한 성격 때문에 상당한 보펀적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웰빙의 개념은 적을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비어있는 대상물’로서 다양한 층위와 범주의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 웰빙은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구체화를 위한 자양분을 대거 확보하고 있다 이 점에서 웰빙은 가령 행복과 같이 추상적으로 이해되기 십상인 개념과 차원이 다르다.

셋째, 웰빙은 이데올로기성을 강하게 띠지 않는다. 웰빙은 이념적으로 엄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원주의 원리에 부합한다 끝으로 웰빙은 문제해결 능력을 배태한 개념이다. 그것은 실천적 맥락에서의 ‘매뉴얼화’가 가능하며 또한 개인적 수준에서 ‘사소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1. 웰빙 개념의 태동과 성장


무릇 인간 세상에서 웰빙에 관련된 논의는 결코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닐 것이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했던 햄릿 왕자라면 몰라도, 일단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한 ‘잘 사는 것’이 삶의 당연한 가치라는 주장은 멀리 기원 전 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서 그저 사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플라톤.1985: 48).

그러나 잘 사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보다 분명히 제기되는 계기는 역시 산업사회의 등장이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사이에는 삶의 질과 양식에 있어서 뚜렷한 불연속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결코 일반사람들의 환호와 갈채 속에 등장하고 착근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산업사회가 웰빙과 공존하기 어렵다는 인식은 산업사회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일례로 19세기 중반 무렵에 막 시작된 미국의 산업화 물결은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에 의해 단호히 거부되고 부인되었다. 흔히 ‘ 19세기를 살았지만 21 세기 환경감각을 지녔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로우는 산업사회 대신 자연상태를, 그리고 문명 대신 야성 (wildness)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가 야생사과(Wild Apples)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것은 미국의 산업화 과정과 맞물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60년이었다. 자연과 조화된 삶을 강조했던 그는 그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야성의 어린아이를 만날 때 그러듯이 한 그루의 야생 사과나무 관목을 볼 때마다 우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어쩌면 그 나무는 변장을 한 왕자일지도 모른다"(소로우.1994: 44). 또한 그는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고 각 계절은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소로우.1994: 130-131).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치른 영국의 경우, 1930년대에 들어와 러셀 (Bertrand Russel)이 산업사회를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러셀은 산업사회가 사회적 미덕으로서 근로와 노동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4) 그에 따르면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으로서 고대사회나 농업사회 등 강제적 의무가 행사되던 시대에나 적용되딘 가치였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할 경우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게 지내게” 될 것이라고 러셀은 보았다. 근로의 윤리라는 미신을 떨쳐버리고 보다 많은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러셀, 1997: 15-33).

요컨대 러셀은 노동규율을 강조했던 산업화의 절정에서 오히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노래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던 산업사회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서구자본주의 사회가 인구폭발,자원고갈,환경오염 등에 의한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기 시작했던 그 무렵, 모든 권력과 권위,지배와 헤게모니는 사회 저변으로부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이른바 ‘ 1968년 혁명’은 그것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반체제 운동이었다. 특히 그것은 인종주의,성차별주의,제국주의적 세계질서,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제기하였다. 1968년 혁명은 말하자면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을 되찾고자 하는 투쟁이었으며,산업사회 문명을 지배하고 있던 실용성 대신 상상력을, 그리고 인간의 경쟁심과 냉담함을 협동과 존엄성으로 대체하고자 했던 문화정치적 시도였다. 1968년은 “정치를 에로스화한 순간”이자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가 분출한 시기 였던 것이다(카치 아피 카스,1999: 63-65 볼 것).

소위 ‘신사회 운동’ (new social movements)과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 그리고 반문화(counter-culture )를 태동시킨 1968년 사태는 인간의 자유와 자존 및 자율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4) 베버 (Weber, 1958)는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과 발전을 ‘노동의 윤리화’ 및 ‘직업의 소명화’(召命化)라는
정신적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가령 “시간은 금이다"(Time is gol이라든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격언은 노동의 중요성과 근로의 신성성(神聖性)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근로윤리에 관한 한 러젤과 베버는 매우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삶의 질에 관련하여 1968년은 서구 문명사에 ‘생태론적 전환’ (ecological tum)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을 모색한 이는 흔히 경제학자이면서 동시에 ‘반(反)경제학자’로 불리는 슈마허 (Emest F. Schumacher) 였다. 그는 당대를 풍미하던 자본주의 경제학과 사회주의 경제학을 공히 비판하면서 소위 ‘인간을 중시하는 경제학’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을 제창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포디즘 양식의 대량생산체제가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경제’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비인격적 사회를 형성할 뿐 아니라 각종 권력의 독점 빛 남용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존재의 진정한 의미나 삶의 목적은 보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소규모’ 조직에서 실현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1)고 말한 이가 바로 슈마허였다(Schumacher, 1975).


비슷한 시기, 인간의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진지한 성찰은 철학자 프롬(Erich Fromm)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류의 무한한 진보라는 약속이 좌절된 이후 프롬은 ‘소유’ (to have) 에 집착하는 삶의 모드로는 결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존재’ (to be) 모드를 제창하면서 무한성장 보다는 선택적 성장을, 물질적 쾌락 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그리고 관료제지배 보다는 개인의 주체적 결단을 강조했다. 그는 소유 모드와 존재 모드의 차이를 동서양의 대표적 시를 통해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산책 중 우연히 꽃을 발견한 영국의 시인 테니슨(Tennyson)은 이렇게 노래했다.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 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 그대가 무엇인지,뿌리뿐만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수 있으리라”고.


이와 대조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일본의 시인 바쇼(芭蕉)는 다읍과 같은 하이쿠(俳句)를 남겼다

“자세히 살펴보니/

냉이 꽃이 피어있네/

울타리 밑에!"(프롬, 1978:36-37).


말하자면 테니슨은 꽃의 소유에서, 그러나 바쇼는 꽃의 존재에서 희열을 느낀 것이다



111. 웰빙 이론의 발전과 성숙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호조세를 유지하던 선진 자본주의 산업사회 문명은 1968년에 혹독한 도전과 시련을 경험하였다. 비록 그 자체로는 좌절된 혁명이었지만 그 이후 인류의 삶에 관련하여 많은 성찰적 유산을 남겼다는 의미에서 1968년은 현대사의 ‘대분수령’ (great divide) 이었다. 한편,1989년은 1968년에 버금가는 또 다른 한 시대의 끝이자 시작이었다. 1980년대 일반, 특히 1989년은 무엇보다 시민 내지 민중의 힘이 가시적 성취를 경험한 시기였다. 1968년을 ‘문화혁명’ (cu1tura1 rev01ution)으로, 1989년을 ‘시민혁명’ (civi1 rev01ution)으로 해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Fink et al., 1998: 461-477).

이른바 민주화의 ‘제 3의 물결’을 통해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80년대였다. 그리고 1980년대의 클라이맥스인 1989년에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동구 및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마침내 붕괴하였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최종 승리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후쿠야마(Fu?cuyama,1995)는 이를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으르 부르기 도 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1989년은 시장경제 논리와 자본축적 구조가 명실상부하게 세계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자신의 본질을 보다 더 분명히 드러내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1989년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자동적으로 강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역사적 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역설적으로 불확실성과 위기가 팽배한 정황으로 접어든 것이다.5) 1989년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적 완성이 역설적으로 인간과 문명에 대한 낙관론을 부정하고 진보의 신화를 불신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은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에 녹아 내린다"(All That Is S이id Melts into Air)라는 《공산당 선언》의 한 문구를 상기시킨다(Tucker, 1978: 475).

1989년 이후 인간의 삶은 이성중심주의, 합리성, 계몽주의적 기획, 진보사관, 거대담론 등 모더니즘을 지탱해 왔던 거의 모든 사조 및 담론과의 결별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대표적 담론들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성찰적 근대화’ (reflexive modemization) 이다. 그것의 인접한 배경은 물론 1989년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이다. 벡(Ulrich Beck, 1994)은 서구 근대화의 실패가 아니라 승리가 그것의 붕괴의 길을 열고 있다고 생각한다.
벡에게 있어서 그것은 산업사회로부터 ‘위험사회’ (risk society)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사실상 위험이란 좁게는 안전의 반대개념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웰빙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물론 위험은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따라서 문제는 위험에 대한 인식과 처리 방법이다. 전근대사회의 경우 위험은 자연의 힘이나 신(神)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나 개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니면 위험이란 개인의 용맹이나 모험의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들어와 위험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자초되는 경향이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확률이론의 발전이나 보험업계의 성장, 복지국가의 등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계산과 예측 및 통제 가능성의 범위 안에 존재했다.


그런데 벡이 볼 때 오늘날의 문제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및 개인적 차원에서 점증하고 있는 위험이 감시체제와 보호제도로부터 점차 이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험사회는 자연과 인간을 과학 ? 기술적으로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 이루어진 인간적 결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위험을 위험으로 인식하거나 식별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벡이 말하는 ‘성찰’ (reflexivity)의 의미는 따라서 ‘반성’ (reflection) 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일차적 자기대면’ (first self-confrontation) 이다(Beck, 1994: 5)


5) 자본주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출현한 세 가지 이데올로기, 곧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 가운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경제체제다. 자유주의는 근대성을 근간으로 하여 사회변동의 정상성 (正常性)을 수용하면서 노동계급에 대해 정치적 참정권과 최소한 이상의 복지를 제공하였다. 그런 만큼 자유주의는 국가주도 사회발전 체제의 이념적 기반이었다. 1989년은 동서냉전의 붕괴와 더불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구조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이는 곧 자유주의의 종말과 국가주의의 퇴조로 귀결되었다.

이데올로기의 연막이 사라지고 국가권력의 존재이유가 약화된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게 된 것은 세계시장의 축적과 경쟁논리 뿐이다(Wallerstein, 1995 볼 것).



벡 에 따르면 근대화 이후의 대형 위험 (mega-hazards)은 과거의 그것에 비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Beck, 1999: 21).

첫째는 공간적 경계의 소멸이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전 세계적이고 전 지구적이다. 위험의 피해는 모든 인간, 모든 국가가 공유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그것은 ‘민주적’ 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시간적 경계의 소멸이다. 오늘날의 위험이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식가능한 시간의 범위 내에서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해 기원을 알 수 없거나 오랜 잠복기간을 갖고 있어서 피해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나타날지 예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는 사회적 경계의 소멸로 이어진다.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인 만큼 원인 규명과 피해보상 등에 관련하여 ‘조직화된 무책임’ (organized iπesponsibility ) 현상이 초래되는 것이다.


벡에 의하면 위험에 대한 정의(定義)는 인지적 및 사회적으로 ‘구성’( construct)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험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과학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위험으로 인식하고 성찰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사회에서 국가나 정당, 집단이나 계급, 공동체나 제도 등으로 대변되는 사회는 이러한 위험을 더 이상 제대로 인식하여 경고하는 주체적 역량을 상실하였다.

또한 위험에 대한 판단을 이른바 도구합리적 지식에 기초한 과학주의 혹은 전문가에게 더 이상 맡겨둘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으로서의 각 개인들이 위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일이다.6) 결국,이제는 개인 스스로 위험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또한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 행복이나 웰빙의
증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이다.7)


6) 벡은 두 가지 종류의 과학을 거론한다. 하나는 협소한 엄밀성이 지배하는 수학과 기술의 세계,곧 ‘실험실 과학’ (laboratory science) 이며, 다른 하나는 보통사람의 ‘경험’ (experiences) 혹은 ‘경험의 공개토론’(public discursivity of experience)이다(Beck,1994: 31) 벡이 비판하는 것은 전자이고 옹호하는 것은 후자이다.
7) 근대사회에서의 ‘표준화된 전기(傳記)’(standard biography)가 근대 이후 시대에 틀어와 ‘선택적 전71 '(chosen biography), ‘자기 완성 형 전기 ’(do-it-yourself biography) 혹은 ‘성찰적 전기 ’(reflexive biography)
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Beck, 1994: 14-15) 문제는 위험사회에서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삼도록 ‘저주’받고 있으며 그런 만큼 주체적 삶이란 일종의 사회적 ‘강제’가 된다는 점이다-



한편 위험사회의 도래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성취와 성공에 내재하고 있는 삶의 부정적 측면의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령 산업사회를 맞이하여 셀은 노동윤리의 폐기와 노동시간의 단축을 열망했고 작금에 그것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실현단계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실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결코 러셀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라 ‘노동의 종말’ (the end of work) 이라는 보다 총체적 인 비극이다. 삶의 모드를 소유로부터 존재로 바꾸자는 프롬의 제안도 이와 유사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소유모드 자체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것이 프롬의 기대처럼 반드시 존재모드로의 이행으로 귀결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러셀은 노동의 강요된 윤리로부터 벗어나 하루 4시간 노동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리프킨(1996)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의 노동은 시간적으로 단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에 따라 노동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이 레저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웰벙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리프킨, 1996: 32).

육체노동자들의 숫자는 계속 감소하지만 제조부분의 생산성은 꾸준히 증대함으로써 실업률의 장기적 증가에 의한 음울한 대량 실업사회가 목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중산계급의 몰락도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추세로 고착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노동의 단축 혹은 노동의 해방으로부터 기껏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리프킨, 1996: 31), 또는 “인간이 필요 없는 문명의 세계"(리프킨,1996: 9)를 맞이하고 있을뿐이다


사회적 과정에 있어서 인간 존재가 급속히 약화되거나 소멸하고 있는 이 시대는 당연히 사회계약의 기본 토대에 대한 재고(再考) 필요성을 제기한다(리프킨, 1996: 31). 곧, 시장의 붕괴와 해체를 뜻하는 이른바 ‘시장이후 시대 ’(post-market era)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와 내용의 사회적 대처가 시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리프킨이 제안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장기적으로 제3 부분, 곧, 시장부분도 국가부분도 아닌 자발적 결사체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원봉사자 모임 같은 사회적 서비스 조직이 확대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여기에 배치되는 실업자에게 정부 지원으로 사회적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장경제 체제를 소위 ‘사회경제’ (socia1 economy) 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리프킨에 의하면 이에 필요한 자금은 기업보조금 중단, 방위비 축소, 사치재에 대한 부가가치세 부여 등으로 조달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리프킨 (2001)에 의하면 ‘소유의 시대’ 역시 점차 역사적으로 종식되는 추세에 놓여있다. 얼핏보아 이는 삶의 양식에 있어서 소유모드의 종말을 기대했던 프롬의 희망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리프킨에 의하면 오늘날 재산이나 불건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빈도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곧, 시장경제에서 네트워크 경제로 목하 이동 중인 것이다(리프킨, 2001: 12-13). 이는 소유하는 대신 ‘접속’ (access)하는 추세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보다 집합자원을 공유하여 보다 광범위한 공급자 ? 소비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추세에 익숙해지고 있다. 예컨대 자동차나 주택, 전자제품, 공장, 가게 등을 직접 소유하는 대신 단기대여, 임대, 리스, 회원제 등의 방식을 통해 접속하는 것을 더 편리하게, 더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소유의 종말 추세가 곧 존재 모드적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유행위로부터 관계에 대한 접속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오히려 더 수동화 내지 피동화되는 경향이 늘고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 공감, 연대 등의 감정에 기반한 전통적인 상호 의무와 기대가 사라지는 대신 그 자리를 회원, 입회, 등록, 수임료, 요금 등에 기초한 계약관계가 차지하고 있다. 이로써 사회전반적으로 공리(公利)와 영리(營利)의 경계선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현대사회는 존재의 모든 측면이 유료화되는 추세에 놓여있다. 가령 놀이, 제의, 예술, 축제,사회운동, 영성수련, 시민참여, 공동체활동 등과 같은 개인적 체험이나 문화, 오락까지도 점차 잘게 분할된 상업구역에서 사들이는 형편이다.

자본주의의 최종 정착지가 ‘경험과 생활의 상품화’로 귀착되고 사회적 신뢰가 위축되는 상황을 맞이하여) 도대체 인간과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심각한 회의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IV. 웰빙 담론의 구성요소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등장 이후 웰빙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연원과 계보를 거시 ·문명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물론 그것에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반드시 혹은 모두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거나 주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오늘날 웰빙이라는 개념으로 포용하고 하나의 담론으로 수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웰빙 논의의 학문적 가능성과 효용성을 보다 분석적으로 탐색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웰빙담론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웰빙에 관련하여 제기되고있는 대표적 논의들은 다음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것으로 보인다.


1. 육체사회론


웰빙 담론의 구성요소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도 지속적인 것은 역시 건강이나 신체, 음식등에 관련된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적 안녕에 관련된 삶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에서 기초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 몸은 대체로 마음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있었다. ‘생각 없는 물체’ 혹은 살덩어리로서의 육체는 말하자면 정신에 의한 통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근대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동물적이고도 자연적인 몸과 구분되는 이른바 ‘문명화된 몸’(civilized body)이 탄생하였다(Elias, 1994). 이처럼 몸이 재발견되는 과정에서 몸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근대국가의 형성과 의과학(醫科學)의 발전은 몸의 가치와 중요성을 제고시키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소위 ‘육체사회’ (somatic society)의 등장은 최근 웰빙 붐과 더불어 몸이나 건강, 외모, 형상 등에 대한 관심이 일상화된 상황을 말한다. 몸은 자기표현과 정체성의 근원으로서, 부단히 수행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만들기 위한 ‘몸 프로젝트’(body pr이 ect)의 선풍적 유행은 육체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외양이다(Shilling,1993: 4-8).

몸은 그 자체로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건강관리와 다이어트, 보디빌딩, 성형수술 등을 통해 지속적인 생성과정에 있는 실체라고 보는 것이다. 몸의 중요성은 또한 육체나 용모의 자본화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몸은 단순한 노동력의 근원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하는 일종의 육체자본(physical capital)으로서 사회적 계급의 상징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Bourdieu, 1984 참조).

만연하는 봄 프로젝트에 따라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이 곧잘 ‘나이프 스타일’ (knife style)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Bordo, 1995).


몸과 육체에 대한 관심은 먹는 음식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따지고 보면 먹거리 영역 역시 몸에 대한 오랜 무관심과 유사한 운명을 거쳐 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독일 속담이 말하듯 “사람은 사람이 먹는 것 그 자체 "(One is what one ea않)라는 점이다(브로델, 1995: 135).

웰빙이 음식문화와 가장 강력한 친화력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웰빙과 관련된 음식문화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논의되고 았다. 대표적으로 소비사회의 관점에서 음식문화의 상품화, 표준화, 관료화 경향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고(Watson, 1997), 세계화에 의한 제국주의적 음식문화를 거부하려는 주장도 있다(Mintz, 1985; Ritzer, 1996;Schlosser, 2001). 덧붙여 유기농업이나 채식, 슬로우 푸드(slow food)에 대한 관심과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김종덕 , 2003; 구달, 2006; 시 즈카, 20054 등).


2. 탈물질주의


웰벙은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를 전제로 하거나 수반하는 것이다. 잉겔하트(Inglehart, 1997: 77)에 의하면 1970년대 이후 현대사회는 ‘생존가치’ (survival value)로부터 ‘웰빙가치’ (well-being value)로 목하 이동 중이라 한다. 그리고 이는 이른바 ‘물질주의 가치관’ (materialist values)의 약화와 ‘탈(脫)물질주의 가치관’(postmaterialist values)의 득세에 따른 것으로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해서 점차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라고 한다. 삶의 질이란 물질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결과인 것이다.

 ‘물질주의 가치’는 질서유지, 물가안정, 경제성장, 안보,범죄감소 등에 비중을 두는 반면, 탈물질주의 가치는 정부에의 참여 증대, 언론자유 보호, 직업에 대한 권리, 거주지 미화, 인간적인 세상 만들기, 의견과 개성의 수용을 보다 더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단순한 물질적 생계나 안정이 아니라 소속감, 자기표현과 같은 질적 차원이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잉겔하트에 의하면 결국 “웰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요소” (Inglehart, 1997: 77)가 된다.


잉겔하트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두 가지이다(Inglehart, 1997: 77).

첫째는 소위 ‘결핍 가설’ (scarcity hypothesis)에 입각한 것으로, 개인의 우선적 선호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반영한다는 주장이다. 곧,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에 대해 보다 강력한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어서 절대 소득의 증가 및 복지체제의 성립 이후에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자기표현,그리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른바 ‘사회화 가설’ (socialization hypothesis) 이다. 여기서는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곧,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어도 가치관은 옛 것을 고수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관의 변화는 소위 ‘동년배 효과’ (cohoπ effect)에 의한 것으로 사회전반적인 세대교체의 장기적 결과라는 입장이다.


영겔하트는 세계 많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탈물질주의 가치관이 향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서구중심적 발상의 결과이거나 단순한 희망사항으로 그칠 소지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볼 때 의식주생활과 연관된 물질적 조건조차 충족되지 않는 지역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 추세 속에서 경제적 양극화 역시 목하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통계적으로 관찰되는 탈물질주의 가치관의 팽배나 확산에 주목하여 웰빙사회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적실성이 별로 높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탈물질주의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실험하고 실천하려는 일련의 사회운동에 의미와 비중을 할애하는 편이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한 문명 자체가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령 웨더포드(2005)는 지난 1 만년 동안 진화를 자랑해 온 도시와 문명은 이제 “사회의 공룡”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인간은 “문명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최근에 들어와 과거 인디언들이나 ‘작은 티베트’로 알려진 라다크 사회의 자연주의적 생활이 삶의 대안적 모텔로 재발견되고 재조명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프리처드,2004; 류시화 2003; 노르베르-호지, 1999 등 볼 것).

그리고 삶에 대한 이러한 탈물질주의적 내지 친자연주의적 인식은 오늘날 ‘슬로 라이프’ (slow life)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신이치, 2005; 예니케, 2005; 쌍소, 2000).

한 때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신이치 (2005)는 “느린 것이 아름답다"(Slow is beautiful)고 했다.


3. 반(反)소비주의


물질이 결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소비사회 혹은 소비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물질주의적 삶 내지 물질적 풍요의 가장 가시적인 측면이 바로 소비 혁명 (consumption revolution)에 의한 이른바 ‘소비 인간’ (Homo consumans)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소위 ‘만물의 상품화’를 특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숙명적 조건은 끊임없는 소비이다. 생산의 목적이 필요에 의한 생산에서 이익을 위한 생산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위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임금을 상품의 소비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살기 위해,우리는 산다 모든 것을 산다"(그라프 외, 2002: 192).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는 소비를 미덕으로간주하는 최초의 경제체제이다.

무엇보다 이는 전후 선진자본주의를 풍미했던 포디즘(Fordism) 방식의 대량생산 체제가 대량소비를 필연적으로 요구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른바 포스트포디즘(Post-Fordism) 체제 하에서도 소비혁병의 기세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미학적 경향 혹은 섬미적 실천에 의해 소비속도가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재화에서 서비스나 문화영역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하비, 1994: 331-339).


그런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소비를 통해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소비는 유도된 소비행태로서 생산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보드리 야르, 1991: 50). 이로써 우리들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살게 되는 이른바 ‘사물의 시대’를 맞고 있다(보드리야르, 1991: 12-13). 하지만 사물의 풍부함은 역설적으로 가난을 의미할 뿐이다. 행복의 척도를 소비가 제공하게 되면서 행복은 계량 가능한 것, 물질적인 것, 증거가 필요한 것, 따라서 비교 가능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보드리 야르, 1991: 52-54).

결국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소위 ‘기호’로서의 사물을 소비할 뿐이다. 소비는 구매행위의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철저히 문화적 현상이 된 것이다(매크레켄, 1996). 이처럼 소비행위에서 차별성과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는 한 소비체계는 결코 안정될 수 없으며 바로 이것이 소비주의 사회의 숨은 계략(計略)이다.


반소비주의는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축적과 재생산에 기여할 뿐인 소비행태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바타이유(2000: 59-82)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소비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재생산과 축적을 위한 ‘생산적 소비’로서 이는 자본주의 체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체제 및 공산주의 체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둘째는 이른바 ‘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잉여의 소모 혹은 소진, 혹은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고대사회에서는 비생산적 소비가 중심이었다. 소비를 통해 새로운 생산을 자극하거나 축적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생산적 소비의 대표적인 형태로는 증여와 축제가 있었다. 아즈텍 문화 등 일부 고대문명에서는 순환적 선물교환을 통해 상대적 평등화를 추구했고 예술, 스포츠, 섹스, 도박과 같은 놀이의 일상화를 통해 축적과 분배를 둘러싼 분쟁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다. 현대사회에서와는 달리 고대사회에서는 써버리고, 놀고, 즐기는 등의 비생산적 소비가 결코 ‘저주의 몫’은 아니었던 것이다. 축제(祝察)에 열중했던 고대사회와 축재(蓄財)에 열중하는 현대사회는 이렇게 서로 대조적이다.


4. 미시 ·생활정치


웰빙 담론은 정치적 영역에서도 논의될 수 있다. 웰빙에 관한 정치학적 담론은 인간의 행복과 웰빙이 외부적 환경에 의해 피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신,각 개인이 의사결정의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스스로 관리하고 조정하는 방식의 삶이 선호되고 있다. 곧, 생활의 단위는 미분화되어야 하고 생활의 방식은 다양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의 운명을 가늠하는 사회적 단위는 점차 광역화되어 왔다. 수렵 ? 채취사회에서 출발하여 유목사회, 농업사회, 산업사회, 그리고 정보사회를 거치며 사회적 의사결정 단위는 부족, 도시, 국가로 확대되다가 최근에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세계 전체가 하나의 운명공동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세계체제론’이다. 이처럼 “국제적 차원에서 인간의 삶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은 일찍이 폴라니(1 944)에 의해 “자기규제적 시장에 맞서는 사회의 보호”라는 명목 하에 제기되어 왔다.

폴라니는 세계화에 대항하는 경제적 지역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오늘날의 반세계화 운동을 션창(先唱)한 셈이다. 역설적으로 세계화 그 자체가 지역적 다양성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왜냐하면 문화적 획일화 추세에 대항하는 ‘정체성의 정치’ (identity politics)를 세계화가 자극하기 때문이다.


국가주도 혹은 국가단위의 사회발전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미시적 생활정치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다. 가령 스캇(Scott, 1998)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려는 근대사회 국가권력의 선한 의도가 왜 항상 비극적으로 좌절되는가를 설병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위로부터 그리고 중앙으로부터’(from above and the center) 국가가 사회를 인식하는 것은 실제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일종의 ‘축약(縮約) 지도’ (abridged map) 일 뿐이다.

스캇은 20세기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권위주의적 고도 근대주의’(authoritarian high modemism)가 성행했다가 궁극적인 실패로 귀결된 시대로 규정한다(Scott, 1998: 87-102).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인간의 자연정복, 사회질서에 대한 합리적 설계에 대한 자신감, 대규모 사회공학적 접근 등으로 요약되는 ‘고도 근대주의’는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과 ‘비공식 과정’ (informal process),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 (improvisation)의 중요성 등을 간과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가중심의 제도권 정치와 관료주의, 그리고 그것에 수반하는 거시적 장기계획과 지식의 합리성은 이제 역사적 효용성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사회적 단위로서 국가나 세계체제, 혹은 계급이나 집단이 차지했던 비중은 약화되는 반면 개인이 중심이 되는 일상생활의 정치가 대안적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벡 (1994: 7)은 ‘개인화 과정’ (individualization process)라고 불렀다. 그는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대사회에 처하여 행복과 웰빙을 증가시키기 위해 각 개인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국가도 계급도 정당도 의회도 아닌, 오직 자신들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개인들은 스스로 하나의 ‘사회 형태 ’(soc?al form)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Beck, 1994: 13-15). 이른바 ‘정치의 재창조’ (reinvention of politics), ‘하부정치’(sub-politics)’ 혹은 ‘생활정치’(life politics)의 활성화는 바로 개인의 역할과 역량을 강화하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적 삶이란 웰빙의 기본정신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V. 결론


웰빙은 단순히 먹는 문제나 건강의 차원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또한 웰빙을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적 전략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것도 적절한 이해는 아니다. 웰빙 개념에는 항상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려는 인간의 근본욕구가 담겨져 있고, 그런 만큼 그 속에서는 거시 ? 문병사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웰빙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개념도 아니고 언제라도 쉽게 사라칠 수도 있는 일과성 담론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웰빙올 학문적으로 수용하고 이론화하여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담론체계로 가꾸는 일이다. 웰빙은 초분과적(超分科的) 통합과 교류를 지향하는 현대 학문의 추세와도 가장 적절히 부합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특히 환경이나 문화, 도시, 개발, 계획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문분야의 경우 웰빙은 새로운 경지 혹은 대안적 지평을 열 수 있는 매력적인 화두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욱, 2005. “웰벙라이프의 정치적 구조"  『철학연구』.1 95.
김종덕, 2003.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 한문화.
류시화, 2003.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문성원, 2005. “웰빙에서 윤리로 - 잘 있음과 있음 넘어서기" 『 철학연구.』 95.
서통욱, 2005. “웰빙: 잘 먹어야 한다? 또는 우리, 식인종들" 『 일상의 모험.』, 민음사.
서동진, 2005. “웰빙시대의 소비문화 ‘비판’을 위하여" 『 문화과학.』 4 1.
윤 진, 2006. “당선들의 웰빙" 『 인물과 사상.』 93
이미숙, 2004. “생활양식으로서의 웰빙: 이론과 적용의 뿌리찾기" 『 한국생활과학회지.』 13(3).
이윤숙, 2004. “웰빙은 없다" 『환경과 생명.』 40.
천선영, 2006. ‘“웰벙담론’의 구조적 성격과 그 사회이론적 함의 - 포괄담론/우산담론 효과에 대하여” 미발표 논문.
황갑연, 2005. “유가의 조화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본 현대 웰벙문화의 반성" 『철학연구』95.


그랜트 매크래켄 (Grant McCracken), 이상률(옮김), 1997. 『문화와 소비.』, 문예출판사.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구동회 ? 박영민(옮김), 1994.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마르셀 모스(Marce1 Mauss), 이상률(옮김), 2002. 『 증여론.』, 한길사.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 송은경(옮김), 1997.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쓰지 선이치, 김향(옮김), 2005. 『슬로 라이프』1, 디자인하우스.
에리 프롬(Erich Fromm), 최혁순(옮김), 1978. 『소유냐 존재냐?.』, 범우사.
에반 티 프리처드(Evan T. Pritchard), 강자모(옮김), 2004. 『시계가 없는 나라.』, 동아시아.
자비네 예니케 (Sabine Jaenicke), 이승은(옮김), 2005. 『느릿느릿 살아라.』, 도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이상률(옮김), 1991.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문예출판사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 권루시안(옮김), 2005. 『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이론과실천.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이영호(옮김), 1996. 『노동의 종말.』, 민음사.
제페미 리프킨 (Jeremy Rifkin), 이희재(옮김), 2001. 『 소유의 종말.』, 민음사.

제인 구달(Jane Goodall), 김은영(옮김), 2006. 『희망의 밥상』, 사이언스북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조한경(옮김), 2000. 『저주의 몫』, 문학동네.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이재원 ? 이종태(옮김), 1999. 『신좌파의 상상력: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이후.
존 더 그라프, 데이비드 핸, 토머스 네일러(John de Graaf, David Wann, πlOmas Naylor), 박웅희(옮김), 2002. 『 어플루엔자』, 한숲.
쓰루다 시즈카, 손성애(옮김), 2004. 『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 모색.
페르낭 브로댈(Femand Braudel), 주경철(옮김), 1995.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 구조上』, 까치.
플라톤(Plato), 조우현(옮김), 1985.『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거암.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 김주경(옮김), 2000.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강승영(옮김), 1994. 『 야생사과』, 이레.
헬레나 노르베르-호지 (Helena Norberg-Hodge), 김종철 ? 김태언(옮김) 1999. 『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사.
헬렌 니어링 (Helen Nearing), 공경희(옮김), 2001. 『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디자인하우스.



Ulrich Beck, 1994. “The Reinvention of Politics: Towards a Theory of Reflexive Modemization," U. Beck, Anthony Giddens, Scott Lash, R캠exive Modernization: Politics, Tradition and Aesthetics in the Modern Social Order, Cambridge: Polity Press.

Ulrich Beck, 1999. “From 1ndustrial Society to the Risk Society: Questions of Survival, Social Structure and Ecological Enlightenment", Malcolm Waters (eds.), ιlodernity: Critical Cono쟁ts, Vol. IV Afler Modernity, Routledge.

Susan Bordo, 1995, Unbearable Weight: Feminism, Western Culture and the Boψ, Univ. of Califomia Press.

Pierre Bourdieu, 1984. Distinction: A Social Critique 01 the Judgement 01 Taste, Harvard Univ. Press

Norbert Elias, 1994. The Civilizing Process, Blackwell.

C없ole Fink, Philipp Gassert, and Detlef Junker (eds), 1998. 1968: The World Translormed, Cambridge Univ. Press.

Francis Fukuyama, 1995. Trust: The Social η'rtues and the Creation 01 Prosperity, Free Press

Ronald 1nglehart, 1997. Modernization and Postmodernization: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Change in 43 Societies, Princeton Univ. Press.

S?dney W. M?ntz, 1985. Sweetness and Power, Penguin.

Karl Polanyi, 1944. The Great Trans"ψ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01 αlr Time, Beacon Press.

George Ritzer, 1996. 돼e McDonaldization 01 Society, Pine Forge Press.

Eric Schlosser, 2001. Fast Food Nation: the Dark Side 01 the All-American Meal, Houghton Mifflin.

Emst F. Schumacher, 1975. Small is Beautiful: A Study 01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Harper Col1ins Publishers.

James C. Scott, 1998. Seeing Like a State: How Certain Schemes to Improve the Human Condition Have Failed, Yale Univ. Press.

Chris Shilling, 1993. The Body and Social Theory, Sage.

Robert C. Tucker (ed.), 1978. 때e Maα-Engels Reader, Norton.

lmmanuel Wal1erstein, 1995. After Liberalism, The New Press.

James L. Watson (ed.), 1997. Golden Arches East: McDonald ’.s in Eαst Asia, Stanford Univ. Press.

Max Weber, 1958.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01 Capitalism, Charles Scribner’s Sons.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