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곳에서 가장 가까웠으나 양동마을에 찾아가는 데는 무려 6년이 걸렸다
지금은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지만, 경상북도 포항에 산 기간이 무려 7년 반이나 될 정도로 오래 살았다. 성남은 2016년부터 살았으므로 아직도 포항에 살았던 시간이 성남에서 살았던 시간이 길 정도다. 하지만 이상하게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우면 잘 찾아가지 않는 듯하다. 성남 하면 판교 테크노밸리로 대표되는 IT 산업이 떠오르지만, 성남도 나름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다. 2014년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성남 또한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내가 남한산성에 간 적은 없다. 가까울수록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양동마을도 남한산성과 똑같은 처지였다. 양동마을이 경주에 속해있긴 하지만, 양동마을이 위치한 경주시 강동면은 포항시 남구와 훨씬 가깝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곳이 남구인 데다, 양동마을과는 11㎞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양동마을에 찾아간 건 포항에 살기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양동마을에 찾아가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무지였다. 조선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통 마을이라 하면 하회마을을 떠올리지, 다른 마을을 생각하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두 번째는 양동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 남한산성을 찾아갈 수 있으나, 성남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아직도 남한산성에 간 적은 없다.
때마침 아는 후배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주말 하루를 할애해 자전거를 타고 경주 양동마을로 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면 이렇게 빨리 도착할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힘들게 (?) 찾아간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다른 의미로 정말 아름다웠다. 주중 바쁜 일정을 보내고 나면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양동마을에 가면 어떨까 생각이 들 정도로 꼭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양동마을에 간 건 고작 두 번이었으며, 가족들에게도 양동마을을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되어 가지 못 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27 -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난 2010년 8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 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草家)가 모여 있다.
양동은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의 산세와 지세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 예로부터 재물과 인재가 모여들었다 한다. 그를 증명하듯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으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 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 선생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등이 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양동마을 전통문화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양동마을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하회마을과는 너무나 생김새가 다른 경주 양동마을
화천이라는 강을 따라 형성된 하회마을과는 달리 양동마을은 산자락을 따라 형성되었다. 양동마을이 집성촌으로 형성된 데는 안강 평야라는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 때문이다. 충청도나 전라도에 비해 평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상도지만 안강읍의 평야는 전라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드넓다. 월성 손 씨와 여강 이 씨는 드넓은 안강 평야와 마르지 않는 형산강을 끼고 있는 데다 홍수에도 마을이 잠기지 않을 산자락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회마을이 강을 따라 형성된 반면, 양동마을은 산자락을 따라 형성되었다.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강과 숲, 산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경관은 하회마을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양동마을에서는 그 완전성이 약간 떨어진다. 양동마을에 흐르는 안락천 개울과 수운정(睡雲亭)에서 바라보이는 안강 평야와 산등성이는 등재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게다가 양동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는 다리, 도로, 철도와 같은 사회기반시설은 양동마을에서 바라보는 안강 평야의 풍경을 망쳐놓았다. 이러한 영향이 전부라 할 수 없지만, 하회마을을 찾은 방문객의 수가 양동마을의 10배 정도가 되는 것을 보면 하회마을이 지닌 가치가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양동마을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이다. 문화재의 수만 보면 하회마을보다 더 많을 정도로 건축학적으로는 가치가 있다. 국보로 지정된 통감속편은 조선시대 제작된 금속활자본으로, 중국 고대 반고씨부터 고신씨까지 그리고 당나라 천복 1년 (901)에서 송나라 상흥 2년 (1279)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역사서다. 중국의 역사를 정성스레 출판해 책으로 펴낸 통감속편을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조선이라는 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세 개의 건물은 무첨당, 향단, 관가정이다. 무첨당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 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또 다른 보물인 향단은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명품고택 체험으로 하루를 묵을 때 내부를 볼 수 있다. 관가정은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언덕에 자리 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 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송첨종택은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 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낙선당(樂善堂)은 손중로 선생의 종갓집으로 월성 손 씨의 종가인 손동만 가옥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종 35년(1540)에 지은 집으로 ‘낙선당(樂善堂)’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의 이름이다.
집의 구성은 크게 대문채, 안채, 행랑채로 되어 있는데, '一'자 모양의 사랑채가 안채 옆면에 이어져 있다. 대문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행랑방, 왼쪽에 외양간(원래는 마구간이었다고 함)을 두었다. 안채는 '一'자형 행랑채와 안쪽으로 'ㄷ'자형 몸채를 두어 전체로 볼 때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성이지만 사랑마당과 광채를 넉넉하게 나누었고, 보통 양반집과 달리 기단을 낮게 세워 보기 드문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안채 마당에서 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사랑방, 헛청, 광이 있고 왼쪽에 안방, 부엌, 부엌 아랫방, 찬광을 두었다.
사호당 고택은 사호당 이능승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조선 헌종 6년(1840)에 지었으며 일반적인 'ㅁ'자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 안채에 '一'자형 행랑채가 놓여 'ㅁ'자형을 이루고, '一'자형 사랑채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북서쪽 모퉁이에 부엌을 두고 부엌 오른편으로 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을, 왼편으로 안사랑 1칸과 누마루 1칸을 놓았다. 사랑채는 안채 건넌방의 오른쪽 대청과 사랑방을 연결하였는데 사랑 대청과 방 2칸(작은사랑, 감실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비교적 기단을 높이 쌓았고 부엌을 크게 만들었으며 특히 안사랑에 연결된 누마루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구성이다. 또한 건넌방과 사랑방의 위치를 독특하게 두어 흔치 않은 배치를 취하고 있다. 행랑채는 앞면 7칸·옆면 1칸 크기로 동쪽부터 대문 1칸, 작은 문 1칸, 헛간 2칸, 3칸을 터 통칸으로 만든 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춘헌 고택은 이덕록 선생이 살던 집으로 그의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 선생의 호를 붙인 것이다. 조선 영조 6년(1730) 경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튼 'ㅁ'자형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의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안마당에서 볼 때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툇마루를 둔 건넌방, 왼쪽 끝 칸에 안방, 안방 밑으로 부엌을 둔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보통 부엌을 두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놓은 점인데 이는 중부지방 민가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방, 사랑 대청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기단에는 화단을 꾸몄고 사랑마당 북쪽으로 가묘를 두었다. 이 북쪽 기단에도 화단을 가꾸어 놓았는데 사랑채와 화단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행랑채는 앞면 6칸·옆면 1칸 크기로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방 1칸, 왼쪽에 광 1칸, 마루방 1칸, 2칸을 터 통칸으로 만든 광을 배치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고택 외에 8개의 고택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마을 곳곳을 탐방하면서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내륙 한가운데 있어 발전이 더디었던 안동과 달리, 양동마을은 철강 산업으로 유명한 포항과 가까운 불리함에도 고택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산업 도시와 가까운 단점은 양동마을에서 안강 평야를 바라보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야를 가로막는 고가도로와 철도 등은 대한민국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무관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형 문화재만이 다가 아니고, 주변의 풍광 또한 문화재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최근 김포 장릉의 풍광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아파트가 지어져 논란이 일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하회마을의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양동마을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열려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푸짐한 음식을 제공하고 밤에 달집 태우기를 통해 소원을 비는 행사가 열린다. 하회마을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 참가하기 때문에 한적한 상태에서 정월대보름의 전통을 이어가기 좋다.
개인적으로도 하회마을이 더 아름답긴 하지만 양동마을의 풍경은 하회마을의 그것과 달라 언제고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직 양동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적은 없기 때문에 향단에서 하룻밤 머무르며 양동마을의 조용한 밤에 잠들고 한적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