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빈민촌
난징의 빈민촌은 콘크리트 건물로 정글을 이루고 있는 뉴욕의 할렘이나 페허가 된 로스 안젤 레스의 왓트스 개토(Watts ghetto)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파리와 같은 큰 도시 주변에 제3세계 이민 노동자들의 숙소들이 만들어 놓은 볼품없는 괴상한 풍경도 아니었다. 난징의 빈빈촌은 현대 도시화의 결과물인 변두리의 흉물과는 달리 검은 기와, 흰회벽의 전통 농촌 가옥이 줄지어 있는 사이 사이에 임시 변통으로 급조한 판자집과 오두막집이 섞여 있었다. 전통가옥에는 여러가족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농촌가옥들은 2백년도 더된 집들이었다. 집들이 4,5백 야드 가량 떨어져 있어서 집주위에 빈터가 많았다. 사람들은 이 공간에 농사를 짓기도 하고 과수원을 가꾸기도 했다.
어머니, 우리 5형제 그리고 주안-주안은 장카이색의 에이전트들이 우리집을 몽땅 털어 간 다음 날 이곳으로 이사 했다. 우리는 몇가지 안되는 소지품을 들고 빈민가를 향해서 걸었다. 빈민가에서 가까운 골목길에 들어서자 마자, 우리는 손으로 코를 감싸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 했다. 길에는 인분과 죽은 쥐가 널려 있었다. 어머니는 두개의 여행가방을 들고 평소에도 그랬듯이 약간 절며 맨 앞장서서 걸어 갔다. 일년전에 의과대학에 입학 했던 큰누나가 가장 뒤에서 따라 왔다. 나는 중간에서 형제들과 주안-주안의 고약한 악취와 오물에 대한 그칠모르는 불평과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어머니, 이거 참을 수가 없어!” 우리 누나들 중 하나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래, 우리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야.” 다른 누나가 동의했다.
“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어.” 형이 말했다. “그래 우린 정말 특권 층이었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수 있어?”
그말을 들은 어머니는 딱딱한 맨땅에 가방을 내려 놓고 서서 우리를 쳐다 보았다. “그렇다. 너희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무 우환없이 잘살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전에 없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특권층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너희들이 지금 보는 것은 대부분의 이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너희 아버지와 내가 산동의 시골 마을에서 자랄 때도 이랬다! 이제 너희들은 더러움, 가난, 그리고 배고픔을 견디며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는 우리를 똑바로 쳐다 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귓불에서 진주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말 없이 다시 걷기 시작 했다. 나는 빈민촌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본 빈곤 때문에 다른 형제들 처럼 의기소침 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감옥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해방된 것같은 기분이었다. 모든것들이 처음보는 것이었고 이상하게 보였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질병과 다른 위험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어린나이 여서 나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으며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과 의문에 정신이 없었다.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도 우리처럼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까? 빈민촌이 영원히 우리집이 될 것인가? 나이마가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 까? 그녀의 손을 잡고 물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가는 동안 무엇인가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자꾸 나타나는 거지들이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행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떤사람은 절름발이이고, 어떤사람은 눈알이 없고 눈꺼풀이 항상 열려 있어서 눈알 뒤쪽의 핏줄이 벌겋게 보였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주위에 파리가 윙윙 거리며 날라 다녔다. 거지들은 맥없이 보였지만 동냥 그릇은 단단히 챙겼다. 참혹하게도 팔이 없는 거지는 발로 동냥그릇을 가지고 다녔다. 모두 젊은 성인들이었는 데 아주 쇠약해 있어서 얼굴과 옷으로 가리지 않은 몸은 뼈골이 앙상 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가련한 신세가 되었나 하고 궁금해 하면서, 거지 동네에서 살면 나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드디어 빈민촌에 도착 했을 때, 오두막집과 판자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풍경은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나무토막, 녹슬은 양철판, 마포, 떨어진 옷으로 만들어져 있었는 데, 너무나 작고 빈약해서 우리 여덟 식구가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까 걱정 스러웠다.
아직은 빈민촌에 대한 첫인상은 그쪽으로 통하는 골목길에서와 같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빈민촌에는 도시에서 보다 넓은 터가 있었다. 더욱이 빈터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서 있는 나무는 키가 크지도 않고 멋지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없었으면 단조롭고 평평했을 경치에 안도감과 변화를 주었다. 이리저리 나있는 길은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덤불과 풀 덩어리는 이길에서 나는 냄새를 더 지독하게 했다. 걸인들은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이 자선을 배풀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가 살 집에 도착하여 멈추라고 할 때 우리는 튼튼한 석조 틀로 둘러 싸인 8 피트 크기의 두짝의 문으로 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석조틀은 좌우로 40 피트 씩 양쪽 벽돌 벽으로 이어 졌다. 두대문은 두꺼운 단단한 나무 판자로 되어있었고 진한 검정색으로 페인트 칠해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의 한쪽문을 열자 오른쪽에 넓은 안마당이 보였다. 왼쪽에는 몇백년된 기다란 농가집이 앞마당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지붕은 입구에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대문의 색깔과 어울리는 기와가 얹혀져 있었다. 나는 농가집을 보고 안심했다. 우리는 그 급조된 좁은 오두막에서 살지 않아도 되었다. 농가집은 튼튼한 벽 뿐만아니라 문도 있고 창문도 있었다.
농가집 안마당은 정원과 거의 같았다. 결코 잘 가꾸어져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저택 정원에서 볼수 있었던 꽃도, 분수대도, 잔디밭도 없었다. 마당은 스파르타 식 엄격한 단순함으로 처리 되어 소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리석 판으로 포장된 닳아빠진 통로는 대문에서 반대편 벽에 있는 입구에 이르렀는 데 거의 100 피트나 되었다. 다섯개의 좀더 좁은, 돌이 깔린 통로가 똑 같은 간격으로 왼쪽 가옥을 향해서 갈라져 나가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8그루의 큰나무들이 똑같은 간격으로 떨어져서 단단하게 다져진 땅의 넓은 터에서 질서정연하게 자라고 있었다. 집밖의 길을 더럽혔던 오물과 쓰레기 없이 집안의 토양은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두 그루의 수양버들, 세 그루의 뽕나무, 그리고 한그루의 오리엔탈 매그놀리아 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농가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긴 직사각형은 다섯개의 서로 붙어 있는 중형 방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방 하나에 한가족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각 가족은 한개의 창문,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과 집 뒤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뒷문을 마주보고 있는 오두막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와, 시멘트와 벽돌로 만들어진 요리대가 마련되어 있었는 데 이것이 우리집 부엌이었다. 부엌에 붙어 있는 칸막이 공간은 목욕실 겸 세탁실이었다. 칸막이는 금속판 조각들을 볼품없게 뜯어 맟추어 만들어져 있었고 기울어진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다. 목욕실은 자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목욕물이 시멘트 바닥에서 밖으로 흘러나와 땅속으로 흡수되기 전에 목욕을 하면 진흙탕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진흙탕물이 많이 고이면 앞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 버린다. 누나들과 어머니만 칸막이 목욕실을 사용 했다. 나는 여름철 찜통같이 더운 날, 마당에 있는 우물가에서 속옷 반바지를 입은 채로 물통의 물을 머리위로 뒤집어 쓰며 목욕 했다. 거기서는 물이 여러방향으로 흘러 가서 자갈사이로 스며들었다. 날이 추워지면 나는 전혀 목욕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긴 농가의 한가운데 방을 차지 했다. 그곳이 우리집이었다. 방은 일종의 “침대”가 거의 차지 했다. 3개의 좁은 작업대를 똑같은 간격으로 나열하고 그위에 여러조각의 널판을 못으로 밖아서 만든 침대였다. 어머니, 우리 형제 모두 - 누나 넷과 형 한명 그리고 내가 여기서 잤다. 우리는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침대가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어느 여름밤에 나는 자다가 오줌을 쌌다. 침대에는 메츠리스나 물을 흡수 할 수 있는 부드러운 패드가 없고 엷은 다다미 매트만 있었다. 내 오줌은 형제들을 모두 잠에서 깨게 했고 이어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내옆에서 자던 누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나중에 누나는 나에게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으려는 순간에 꿈에서 깨어 났다고 말 했다. 내 오줌이 악몽에서 과장되어 홍수로 변한 것이었다. 형과 누나들은 이사건을 즐겼다.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나는 방뒤에 있는 오두막에서 자야 한다고 주장 했다.
우리집 부엌인 오두막 에서는 주안-주안이 잤다. 아버지 저택에 살때 예전 친구였던 그녀는 매일 진흙 난로 옆에서 웅크리고 잤다. 침대도 없었고 않을 의자도 없었다.
판자잡과 농가외에 빈민촌에는 최근에 지은 작은 벽돌집들이 한 두체 여기 저기 눈에 띠었다. 겉으로 보기에 값싸고 지나치게 화려 했다. 작은 창문의 쇠창살은 더욱 집을 보기 싫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안에 들어가본적이 없다. 그집에 사는 사람들은 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빈민촌 사람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한단계 높다고 믿었다. 그들은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사는 도시 주민들 보다 더 빈민촌 사람들을 혐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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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안에 우리 가족과 나는 동네 사람들로 부터 새로운 우리 주위에 대해서 약간의 역사와 지리 까지 알만한 것은 모두 알게 되었다.
양쯔강 델타 바로 동쪽에 자리잡은 난징(글자 그대로 남쪽 수도 이다)은 20세기 초 군벌시대에 근대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난징이 정치적으로 중요해 지자 도시가 커지면서 주위 농토를 잠식 했다. 난징이 미국에 있었다면 도시 경계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를 그만둔 빈땅이 교외도시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경제는 교외 도시를 형성하기에는 부족 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서 돈을 벌려고 했다. 손, 괭이 그리고 물소와 함께 땅을 파며 일하는 것보다 힘들지 않은 도시 일이 그들을 유혹 했다. 마을에 남아 있는 늙은이 들은 그들의 전통가옥을 이차대전 미제라블(피난민-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 주어서 수입에 보탰다. 소수의 지독한 농부들은 땅뙈기에 경작을 계속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법입주자들,
일반적으로 이주 노동자들이 휴경지에 들어와 형편없는 오두막집을 지었다. 그리고 농사 짓지 않는 땅은 빈민촌으로 전락 했다.
우리가족과 내가 이사간 구역은 옛것과 새것, 도시와 시골, 현대와 전통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한가지 일관되고 통일 된 특징은 빈곤이었다. 포장도로는 하나도 없었다. 어떤 집은 전기가 들어 왔지만 축복받는 만큼 저주도 받았다. 전선을 싸고 있는 카버가 벗겨져 안의 철사가 노출되어 있었다. 감전사고가 주민들의 불길한 위험이었다. 전기로 인해서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자주 다쳤다.
빈민촌은 2차대전 전후 중국의 측소판이었다. 중국은 머뭇거리며 현대로 가는 변화와 자급 농업 경제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마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목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상의 빈곤과 불결함에서 오는 냄새는 여러분들을 역겨워서 토하게 할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서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가장 넓은 길이 당나귀 수레가 겨우 지나갈 정도 였다. 좁고 부드러운 흙먼지길이 교자 모양으로 나 있었다. 어른들은 길가의 진흙과 쓰레기에 대해서 불평 했지만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놀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 했다. 진흙길로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경찰과 산적 개임을 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이 게임은 옛날 부터 해왔던 여러 태그 게임의 변형 중 하나였다. 아무런 도구나 감독없이 재미있게 놀수 있는 게임이었다. 우리팀을 도우려면 빠르고, 지구력이 있고 속임수를 잘 써야 했다.
하수나 배수 시설이 없었다. 농부들은 사람의 배설물을 비료로 사용 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대나무 받침대로 받친 볏짚 지붕으로 덮은 것이 바깥 변소였다. 농가집 옆 좀 좋은 변소에는 큰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가로질러 넓고 두꺼운 돌조각 두개를 2 피도 떨어지게 깔아 놓았다. 주인은 잘 안보이게 변소 주위에 덤불을 심어 놓았다. 이것은 농갓집에 사는 30명이 같이 사용하는 공동 화장실 이었다. 물론 우리 가족 8명도 이곳에서 용변을 봐야 했다.
용변을 보려고 변소 앞에 서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이 예의 였고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헛기침으로 대답 했다. 헛기침 소리를 듣고 성별이 자신과 같지 않으면 변소 옆 덤불에서 기다렸다. 한번은내가 용변을 보려고 변소에 갖는 데 안에 있는 여자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마 워낙 급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항상 설사로 고생 했다.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고 부모는 아이가 설사 한다고 의사 한테 데리고 가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나는 변소 안으로 쳐들어 갔다. 용변을 보던 여자는 화들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여자 앞에서 빤스에 싸고 말 았다. 다행히 이 사고를 본 그여자는 내가 그여자 몸을 훔쳐 보려고 변소 안으로 들어 온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내가 몸을 씻으려고 우물로 가는 동안 내몸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를 참아야 했지만 그일로 그 여자 가족들에게 두들겨 맞지 않아도 되었다.
빈민촌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혹독한 빈민촌에서의 삶을 보상해주기나 하듯 집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지 않았다. 오두막집, 판자집 그리고 농가집이 사이사이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두고 있었다.
인구밀도가 조밀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미신이었다. 1937년 승승장구 하던 일본군은 북쪽으로 부터 빠른 속도로 남진 하여 당시 중국의 수도 였던 난징을 포위 했다. 대부분의 중국 군대는 탈영하거나 후퇴 했다. 장카이석은 자신의 정예군을 보호 하려고 했다. 일본군과 싸워 소모 하기보다는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서 였다. 난징에 남아있던 군대와 시민들은 일본 정예군에 대항하여 필요한 군수물자의 보급없이 3개월 동안 싸웠다. 방어군은 일본군 후방까지 굴을 파서 밤에 기습을 했다. 대담한 방어군은 일본군을 분노하게 했고 굴욕감까지 느끼게 했다. 결국 난징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 되었다. 화가 난 일본군 장군은 부하 장병들에게 난징 시민과 군인들을 강간하고 죽이고 다치게 하라고 명령 했다. 절망에 빠지고 분노에 찬 수만명의 군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잔악한 행위를 감행 했다.
우리가족이 빈민촌에 이사올 무렵, 난징 대학살 희생자의 대량무덤이 빈민촌 근처 도시 북쪽 경계에 있다는 소문이 자자 했다. 사람들은 죽은자의 귀신이 복수하기 위해서 돌아 다닌다고 믿었다. 귀신이 무서워서 많은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이곳으로 이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 빈민촌은 생각보다 비위생적이지 않았다. 종사짖지 않는 땅은 목욕과 세탁으로 부터 나오는 하수를 흡수 했다. 나무, 풀덤불, 잡초는 대기오염물을 흡수하여 공기를 깨끗이 해주었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버려진 쓰레기가 더미를 만드는 일은 없었다. 깡통과 쇠 조각은 모아서 쇠파는 상점에 팔았다. 나무는 연료로 쓰거나 집고치는 데 사용 했다. 나무조각을 당장 쓸 데가 없으면 나중에 쓰려고 모여 두었다. 유리병은 끓인물 담아 놓는 용기로 사용 했다. 대부분의 버릴 수 없는 쓰레기는 다시 쓰기 위해서 뒷마당에 모아 두었다. 아무데나 버려진 쓰레기는 대부분 유기물이 었는데, 여름철 더운 날씨에 썩어 없어졌고 추운 겨울에는 얼어서 별로 해를 끼치지 않았다.
유기물 쓰레기와 먼지는 유기적인 위험이 있었다. 모든 빈민촌 아이들은 기생충에 감염 되었다. 기생충 때문에 죽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아이들을 허약하고 마르게 했다. 기생충 때문에 죽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합병증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기생충과 같이 살았다.
그중 한 종류의 기생충은 머리에서 살았다. 이 기생충은 머리가 빠지게 하고 그자리에 은 동전 크기의 비늘 같은 점을 만들었다. 한두명의 심하게 감연된 아이들은 마리 빠진 자리가 6개나 되었다. 그 자리를 긁어서 살이 보이기도 했다. 부모는 아이의 머리를 당시에 가장 싼 항생제 였던 보라색 아요다인 액에 담그어 버렸다. 이 아이는 요지음 엑조틱 펑크 헤어 스타일의 개척자 처럼 보였다.
또다른 널리 퍼져 있는 기생충은 팔과 다리의 피부에 살았다. 이 기생충은 피부에 원형의 불그스레한 반점을 만들었다. 피부가 상해서 세균에 감염 되기 일수 였다. 그러면 반점은 부어서 보라색과 노란 색의 귤 만한 종기가 된다. 종기는 절개하고 알콜로 씻어 내야 했다. 치료하는 동안 아이들은 아파서 비명을 지르기 때문에 가족이 꼭 잡고 있어야 했다. 다행이 나는 이 두가지 기생충을 피할수 있었다. 나를 괴롭힌 기생충은 내 뱃속에 사는 놈이었다. 큰 분홍색의 지렁이 같이 생겼는 데, 가늘고 길었다. 때로는 내가 설사를 심하게 할 때 장 밖으로 밀려 나왔다. 배가 아팠지만 못견디게 아프진 않았다.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슈거코팅된 회충약을 삼키게 했다. 시내 길거리 행상들이 약을 팔았다. 이상하게도 약이 죽여야 할 기생충 보다도 약 자체가 내배를 더 아프게 했다. 훗날에 나는 기생충을 죽이는 독성 물질이 내 배를 아프게 했다고 이해 했다. 불행히도 기생충은 일 주만에 다시 돌아왔다. 다른 동네 아이들 처럼 눈에 보이는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아무것이나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마구 집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빈민촌 어린이들 모두가 만성 감기를 알 았다. 누리팅팅한 두줄기의 코가 콧구멍과 윗입술 사이를 겨울 내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감기만 앓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추었다. 12월, 1월, 2월의 체감 온도는 섭씨 영하 20도 였다. 난로는 아무데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로 부터 우리를 방어 해주는 유일 한 것은 솜 누비 저고리와 바지 였다. 우리는 속에 여러겹의 여름옷을 입고 그위에 손누비 옷을 입었다. 겨울 여러달 동안 떨고 또 떨었다.
줄줄 흐르는 코가 입으로 들어 갈려고 하면 소매로 훔쳤다. 겨울 내내 한벌의 저고리를 입기 때문에 콧물과 흙먼지가 섞여 소매에 얼어 붙었다. 겨울이 시작한지 채 한달이 안되어 콧물과 흙먼지 묻은 저고리는 얼어서 딱딱 해 진다. 몹씨 보기싫은 몰골이 된다. 어른들이 우리를 보면 질겁을 했다. 멸시 당하는 것은 둘째치고, 꼴사나운 소매는 항상 우리들을 위험하게 했다. 아무생각 없이 흐르는 코를 얼어붙은 소매로 훔치다가 입술과 코를 베는 일이 자주 발생 했다. 몹씨 추운 날씨는 상처를 쉽게 아물게 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은 아이들은 다친 것도 억울 한데 주의 산만한 바보라고 비웃었다.
겨울은 우리들을 무척 불편하게 했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재미있게 놀았다. 우리들이 자주 하던 놀이가 있었다. 두벽으로 만들어진 모퉁이에 모두 모여서 마치 벽으로 들어가려는 것 처럼 서로 밀었다. 한참동안 목이 쇠라고 소리지르고 희희덕거리고 나면 모두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겨울 동안에 우리가 즐겨 했던 놀이는 나뭇가지와 마른 풀로 불장난을 하는 것이었다. 꺼질듯하다가 다시 타오르곤 하는 불꽃은 얼어붙은 손을 녹여주었을 뿐만아니라 우리들의 상상력을 살살 건들였다.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큰바위 사이를 골라서 불을 피웠다. 어른들은 우리가 실수하여 동네에 화재가 발생할 까 걱정하여 우리를 잡으면 주저없이 두들겨 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잡힐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춤추는 불꽃의 넋을 빼앗는 아름다움에 긴장감과 흥분을 더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위해서 관청의 비서로 일 했다. 누나와 형들은 학교에 갔다. 형제 모두가 한 침대에서 잣지만 형제들은 나와 전혀 다른 생활을 했다. 우리는 거의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나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다른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아이들과 같이 온갖 못된 짓과 위험한 일에 가담 했다.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모험이었다.
우물에서 물을 퍼다가 나무 판에서 빨래하고 진흙 난로에 불을 지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 주안-주안의 임무 였다. 그녀는 항상 시무룩하고 비참하게 보였다. 아버지 저택에 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보내다가 빈민촌에 이사 와서는 매일 빨래하고 요리를 해야 했다. 지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빈곤 때문에 고생 한 사람은 주안-주안 만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빈곤에 적응 해야 했다. 가장 비참한 것은 먹을 것이 형편 없고 그나마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우리가 아버지 저택에 살 때는 음식은 항상 충분 했고 맛이 있었다. 반면에 빈민촌에서는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고, 먹을 것들이 음식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자주 먹던 음식중의 하나는 콩비지 였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섬유질의 부산물이다. 콩을 맷돌에 갈아서 짜내면 영양분이 많은 액체가 나오는 데, 여기에 칼시움이 많은 유화제를 첨가 하면 액체가 굳어져서 두부가 된다. 짜고 남은 찌꺼기가 콩비지 인데 보통 돼지 사료로 사용 했다.
어머니가 월말에 돈이 모자라면 이삼일 계속해서 콩비지를 먹었다. 내 위장을 콩비지로 채우고 나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처럼 배가 고팠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배는 가스가 차서 불러 있는 데 배고파서 못 견디는 그런 기분이었다.
잘차려진 저녁은 쌀밥과 숙주나물이었다. 두부와 나물이 나오면 형제들은 환호 했다. 고기와 생선 같은 단백질 많은 음식은 맛도 못 보았다. 형제들은 배고픔과 누추한 주거 환경에 대해서 심하게 불평 했다. 그들은 10년에서 15년 동안 사치스러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갑작스럽고 극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 적응 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 했다. 배고픔은 공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나도 아버지 저택에서 부의 맛을 보았지만 나에게는 형제들과 똑같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의 저택생활의 특징은 제약과 감금이었다. 빈민촌의 배고픔은 때때로 나를 짜증나고 성가시게 했다. 내배에서는 자주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대체로 나는 청결함, 편리함과 육체적인 편안함에 젖어 버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형제들은 내가 야생적인 성향, 모험을 좋아하는 자연적인 경향을 가지고 태어 나서 위험을 자초 한다고 주장 했다. 그들은 내가 물질적인 편안 함에 무관심 한것을 비정상이 아니면 이상하다고 생각 했다. 나는 그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회계층인 성인의 문턱에 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것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나는 리틀 리그 스럼 갱(little league slum gang)처럼 나와 한몸이 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좋았다. 아버지 저택에 살 때부터 나와 형제들은 가깝지 않았다. 이제 나는 새 세상에 친구가 생겼고 나와 형제들 간의 간격은 더 넓어 졌다.
어머니는 모든 곤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견뎌 냈다. 원래 그랬듯이 어머니는 나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형과 누나들을 아침일찍 학교에 보내고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 까지 일하러 가셨다. 아침에 그녀가 집을 나가기 전, 집 문앞에 서서 “작은 놈, 난폭한 짓 하지 마라!”라고 하고 일하러 가셨다.
나는 여섯 살이었다. 아직도 저택에 살았으면 매일 쇼퍼가 모는 어머니 자가용에 타고 사립학교에 갔을 것이다. 빈민촌에서 어머니는 하루 하루 살기 바빠서 내가 학교에 갈 나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충분히 먹지 못하고 기생충에 감염 되고, 충농증과 호흡기 감염으로 고생 했지만 나에게는 재미있고 흥분 된 나날 이었다.
낮 동안에는 가고 싶은 데는 아무데나 갈 수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나 무엇이든지 할수 있었다. 이사온지 1,2주 만에 친구들이 생겼다. 대부분 10살 미만이었다. 9살 짜리 꼬마 왕은 절름발이 였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 데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꼬마 챙은 누나가 4명 있었고 어머니는 없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농가집에서 살 았다. 그의 큰누나가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녀가 챙이 와일드한 행동을 못하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지는 한참 되었다. 가장 작은 린은 우리 갱(gang)중 유일하게 나보다 어렸다. 그는 3 사이즈나 큰 형들이 입던 헌옷을 입고 다녀서 꼬마 요정 처럼 보였다. 키가 큰 왕은 우리 그룹에서 가장 컸다. 그는 자기 또래 보다 우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 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마음씨 좋은 그는 우리의 허큘리스 역할을 하며 놀았다. 작은 바위를 뒤집어 놓는 일 처럼 짐승같은 힘이 필요할 때는 큰 왕이 최고 였다. 그는 빈민촌에서 자랐고 학교에 가본적이 없었다. 나는 작은 꼬마 린을 가장 좋아 했다. 그는 영리 하고 쉽게 지지 않았다. 둘이서 우리들 활동과 장난 대부분을 음모 했다.
어느날 나와 작은 꼬마 린이 우연히 만나서 빈민촌 북쪽에 있는 뽕나무 옆에서 놀고 있는 큰 왕과 합류 했다. 꼬마 린은 큰 왕의 어깨에 올라 타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매미를 잡으려 했다. 귀뚜라미 와는 달리 매미는 잡아 놓으면 금방 죽어서 가지고 놀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입 대신에 배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매미는 우리를 매혹 시켰다. 린이 손을 컵 처럼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매미를 덮치려는 순간, 매미는 날쌔게 날라가서 내 바지에 앉았다. 내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잡았다!” 나는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는 매미를 치켜들고 의기양양 하게 외쳤다.
“잘 잡았다!”작은 꼬마 린이 나를 보고 씩 웃으면서 응답 했다. “나무위로 올라가서 더 잡지 않을래?”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 들이고 매미 두마리를 더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곧 실증이 났다. 매미가 우리가 손가락으로 잡고 있을 때는 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작은 꼬마 린은 이 삼일 안에 나를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 해 주었다. 우리는 얼마 걸리지 않아서 아주 가까운 작은 한패가 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우정으로 서로 도왔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거나 서로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우리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민민촌을 휩쓸고 다녔다. 그룹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은 매일 매일 살아 남아야 하는 빈민촌 생활에서 오는 육체적인 고통을 쉽게 견디게 하고 우리를 위로 해 주었다. 내 친구들과의 밀접한 관계는 나에게 전에 내가 경험 해보지 못했던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다. 유모 나이마가 나를 보살펴 줄 때에도 지금 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처럼 강하고 용감 하지 못 했다. 그녀와 내가 가까웠던 것 만큼 나는 그녀의 헌신과 나의 의존심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웠지만 내친구들은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하나의 팀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어떤 장애도 극복 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우리는 음식을 훔치려고 담을 넘었고 과일을 따 먹으려고 나무위에 올라 갔고 감히 우리를 겁주려는 어른앞에 버티고 섯으며, 우리 주위의 어느 것이나 동네 사람들에 관 한 지식을 서로에게서 배웠다. 내 서클의 소년들은 내 가족이었다!
내 친구 누구도 가족의 감독을 받지 않았다.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는 장난감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좋아서 머리를 짜내어 놀았다.
산적과 경찰 놀이 외에 우리는 연못과 도랑에서 고기와 올챙이를 잡거나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그네 타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며 비행기 흉내를 내기도 하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이웃 농장에서 오디와 오이를 훔쳐 먹기도 했다.
때로는 도시가 어떤지 궁금해서 난징 중심가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근사한 관광을 하는 기분이었다. 진짜 모험 이었다. 약간 떨리는 것은 모험의 일부 였다. 그러나 우리 여섯명이 팔짱을 끼고 서로 바짝 붙어서 자신감을 올려 가며 중심가로 들어 갔다. 목적지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1946년에 난징의 인구는 백만이 넘었다. 결코 번영하는 도시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상거래로 붐볐다. 행상들은 보도에서 세상의 모든 음식을 팔았다. 생것, 익은 것, 싱싱한 것, 조린것, 달거나 신것, 말린 것, 소금에 저린 것 등등. 요리된 음식 중에는 고기든 찐빵, 만두, 국수, 꼬아백이, 두유, 허브차, 구운 빵과 찐 빵
등이 있었다. 좋은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아이들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렀다.
먹고 싶은 음식 만큼 유혹적이지는 않았지만 더 재미있는 것들은 대장장이, 장인, 수선공, 약장사,예술가들이 자기들 재주를 보이면서 호객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칼을 가는 것, 가구를 고치는 것, 편지 혹은 탄원서를 쓰는 것, 깨진 도자기를 맞추는 것, 낡은 등나무 의자와 발올려놓는 대를 다시 짜는 것, 낡은 구두 발꿈치를 고치는 것, 낡은 옷을 수선 하는 것, 이빨을 빼고 고름을 짜는 것, 뜸 뜨는 것 등등을 보았다. 모든 서비스는 고객이 기다리는 동안 즉석에서 해 주었다.
아픈 이빨을 빼고 싶은 사람이 보도에 쭈그리고 앉으 면 거리의 치과의사가 그의 머리를 뒤로 제치고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이빨을 홱 잡아 빼면 그만이었다. 마취도 소독약도 준비도 없었고 물론 불평도 없었다.
치과의사는 타구를 가지고 다녔다. 환자가 피를 뱃거나 발치 과정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넣기 위해서 였다.
발치가 끝나면 치과의사는 뽑은 이빨을 펜치에 잡아서 트로피 처럼 관중에게 높이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날 뽑은 약 12개의 이빨 옆에 기술 좋은 치과의사라는 증거로 가지런히 진열 했다. 검정 천 조각을 땅에 깔아 놓고 그 위에 진열 된 누렇고 갈색으로 변한 썩은 이빨은 유인원 화석의 전시회 같았다.
작은 숫자의 구경꾼이 모일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떠돌이 예능인들이 차지하고 공연을 했다. 인형극도 했다. 인형을 조종 하는 사람(파펫꾼)은 접을 수 있는 2 x 3 푸트 무대 바닥에서 땅까지 드리워 진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파펫꾼은 파펫을 조종하면서 노래도 하고 여러가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낭송 했다.
마샬 아티스트도 있었다. 칼춤을 추는 사람은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서 중요한 대목을 강조 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오락)를 하는 것 외에 카이로프랙티스(뼈와 근육 특히 척추를 만져서 병을 치료하는 사람)로
환자를 치료해주고 자신이 직접 제조한 호랑이 뼈 물약을 팔 았다. 칼춤이 끝나고 그는 자신이 만든 물약으로 얼마나 튼튼 해졌는 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때때로 허리 아픈 사람이 나오면 그는 그의 근육을 주무르고 척추를 맞추어 주었다. 호랑이 뼈로 보완된 물약을 환자에게 바르고 환자를 치료 하면서, 구경꾼 들에게 치료의 원칙과 그 근거를 열심히 설명 했다. 자신의 서비스를 팔기 위해서 였다.
저쪽 길가에서는 마술사가 구경꾼들을 농담과 기이한 이야기로 줄겁게 하면서 광택나는 비단 손수건과 트럼프로 손속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야바위꾼이 마술 물약을 팔고 있었다. 물약은 독사뱀의 담낭으로 만들었는데 천식, 류마티즘, 관절염과 마비를 틀림없이 완치 한다고 주장 했다.
중국의 도시는 아무리 가난하고 후진이어도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고 붐볐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고 억압할 수 없는 기업가정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1946년의 난징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내에 가지 않으면 우리는 빈민촌안에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을 벌리며 놀았다. 우리가 싫증내지 않고 했던 엔터테인먼트는 귀뚜라미가 꼭 있어야 하는 놀이 였다. 이놀이는 할일 없는 어른들도 좋아 했다.
좋은 귀뚜라미는 가치있는 소유물이었다. 귀뚜라미를 잡으면 농장이나 쓰레기에서 구한 채소를 먹여 살게 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동료로 생각할 정도로 중요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고 많은 시간을 쳐다보고 그들의 크기, 색갈, 사나움 과 특징을 비교하며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나는 항상 3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놈은 크고 사나웠다. 우리그룹아이들이 가장 탐내는 나의 가장 비싼 소유물이었다. 귀뚜라미 두마리를 평소에 지내던 집에서 꺼내어 생소한 중립지역에 놓고 싸우게 했다. 중립지대는 어느 쪽 귀뚜라미도 심리적인 이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귀뚜라미에 심리 작용을 고려 하다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귀뚜라미는 통안에서 침입자보다 훨씬 더 사납게 싸운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작은 귀뚜라미가 자신의 영역에서는 큰 귀뚜라미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두 투사를 중립경기장에 들여보내면 주인이 풀로 만든 작은 브러시로 귀뚜라미의 머리를 건드려서 다른 귀뚜라미와 싸우게 만든 다. 우리는 주위에 서서 그들이 앞발과 턱으로 머리를 부딪치며 싸우기 시작 하면
큰소리로 응원했다. 귀뚜라미는 상대를 향해서 돌진하다가 아크로벹(곡예사)처럼 공중으로 뛰어 오르기도 하고 스모 레슬러 처럼 서로 돌진 하여 크게 부딪 치기도 했다. 싸움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1,2초 만에 끝났다. 승리한 귀뚜라미는 몇번 큰소리로 울어서 축하 했다. 사실은 이곤충이 새로운 영역을 차지 했다는 청각적인 소통 행위 였다. 승자의 주인은 그의 글라디에이터(로마 검투사)를 집어 내면서 자존감과 만족감으로 환하게 웃었다. 진 귀뚜라미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 갔다.패배자의 주인은 다음날을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귀뚜라미를 잘 휘어지는 대나무 껍때기로 만든 작은 새장같은 통에 넣어 놓았다. 맨위에 덮개가 있는 이 통은 밤에 도마뱀붙이가 귀뚜라미를 먹지 못하게 했다. 도마뱀붙이는 매일밤 어느곳에서나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뱀붙이를 결코 헤치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은 어디에서나 볼수 있고 더러운 바퀴벌레와 모기를 잡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윗 뚜껑이 열리는 귀뚜라미 집을 만들기 위해서 대나무 껍질을 똑 같은 크기로 벗기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모두 귀뚜라미에게 싸움잘하는 순서로 순위를 매겼다. 그들은 우리의 그라디에터였고 우리는 그들의 주인이었다. 나는 나의 최고 그라디에이터를 특별한 집에 넣어 내 침대 밑에 보관 했다. 자기전에 잘있나 보고 눈을 뜨자마자 체크 했다.
친구들과 나는 돌과 바위를 뒤집어 보물같은 이 곤충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울지 않는 암컷은 버렸다.
귀뚜라미를 잡을 때 우리는 지네 땅굴을 자주 접했다. 난징의 지네는 입에 무서운 집게를 가진 적갈색의 불길하게 생긴 창조물이었다. 30cm 이상이나 자랄수 있고 다 큰놈은 입에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몇일동안 아파서 몸을 배배꼬아야 했다. 돌을 뒤집었을 때 큰 지네 굴이 나오면 우리 모두 펄쩍 뛰었다. 위험 신호 였다. 그리고 위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흥분 시켰다.
우리가 굴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한 친구가 굴을 나뭇가지로 쑤셨다. 지네가 나오면 다른 아이가 무거운 돌을 제빨리 지내 위에 올려 놓았다. 돌에 깔린 지네는 셀수 없이 많은 다리를 움직여 있는 힘을 다 해서 빠져 나올려고 발버둥 치고 몸을 양 옆으로 휘둘렀다. 그동안에 우리는 지네의 집게, 눈, 안테나, 그리고 몸 부분의 숫자를 체크하고 있었다.
럭비 선수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원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기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잡힌 위험물을 재미 있게 쳐다 보았다.
“이놈은 굉장히 크네! 저 다리 움직이는 것 봐.”
“그래, 지난주에 꼬마 챙이 잡은 것보다 훨씬 꺼.”
“아니야, 너 틀렸어, 같은 크기야- 그렇지만 더 검고 사나워”
우리 미신에서는 지네의 적갈색은 희생물의 피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지네가 죽인 희생물이 많을 수록 지네의 핏빛 빨간 색이 더 진하다고 우리는 믿었다.
한참후 지네의 크기, 색갈, 독에 대한 초기의 흥분과 토론이 잠잠해 지면 우리는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진행 했다. 우리중 서너명이 근처 농장에서 장닭을 잡아 오겠다고 나섰다. 나는 장닭의 배에 있는 털의 부드럽고 따뜻하고 매끄러운 촉감을 좋아 했기 때문에 이일을 무척 하고 싶어 했다. 내가 손으로 장닭을 들어 올릴 때 마치 내 의도를 아는 것 처럼 퍼더덕 거리지 않았다. 아주 쉽게 지네 한테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지네가 눈에 뜨이자 장닭은 마치 아주 고급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말 하는 것 처럼 꼬꼬 하고 부드럽게 울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조용해 졌다. 내가 장닭을 돌에 깔린 지네 앞 두 피트 앞에 놓자 긴장감과 흥분은 최고에 도달 했다. 지네를 앞에 두고 장닭은 싸울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땅을 발톱으로 후벼 파서 먼지와 쓰레기 조각들을 공중에 날렸다. 그리고 날개를 약간 올리며 공격을 개시 했다.
지네는 자연 포식자의 공포 앞에서 새로운 폭발적인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돌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장닭의 반복되는 쪼아 흔들음은 얼마지나지 않아서 지네의 부질없는 시도의 종말을 의미했다. 장닭이 먹이를 삼키자 남아있는 지네 몸통 부분이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경련 했다.
봄과 여름, 누구나 누에를 기르던 때, 우리는 좀더 문명화된 일에 전념 했다. 이것은 다른 하나의 창조물을 보살피는 친절하고 점잖은 활동이 였다. 다른 내 친구들이 하듯이 도시안의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종이상자에 누에를 길렀다.
누에는 검은 실오라기 조각 같은 작은 반점으로 시작 한다. 뽕나무 잎을 끊임없이 먹는 다. 하루에 서너번 나는 동네에 있는 뽕나무에서 잎을 따다가 누에를 덮어 주었다. 이 작은 점들은 우적우적 씹고 또 씹고 또 씹었다. 밤이되어 조용해 지면, 바람부는 날 소나무 잎이 만들어 낸 음악 처럼, 누에가 나뭇잎을 갈가 먹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나를 살살 달래서 잠들게 하는 자장가였다.
누에는 땅을 뚫고 나오는 큰 죽순 처럼 아주 빨리 컸다. 작은 검은 점이 1,2 주 만에 큰 반투명한 흰색의 쐐기(애벌레)가 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크게 흥분 했다. 그 단계에서 부드럽고 천천히 꿈틀거리는 누에는 예쁘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어느날 아침 상자 안의 쒜기는 다 사라지고 눈처럼 하얀 고치로 바뀌었다. 간밤에 쒜기는 몸이 바뀌면서 실크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큰 쐐기는 몸안에 있는 반투명한 실크를 밖으로 나오게 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쫄아든 몸을 싸는 고치를 짰다. 고치안에 있는 쒜기는 번데기로 변신 했다.
여러날이 지나서 고치에서 나방이가 나왔다. 나방이는 짝을 찾을 때 까지 윙윙거리며 상자 안을 날라 다녔다. 한 두시간 만에 짝을 찾은 암컷은 들깨 만한 수천개의 알을 상자 바닥에 낳아 여기저기 덩어리를 만들어 놓았다. 몇일 후 알에서 검은 점같은 누에가 부화하면 누에의 라이프 사이클이 다시 시작 되었다.
날씨가 쌀쌀 해 지면 나중에 나온 누에알은 부화하지 않는 다. 나는 그것들을 한쪽에 보관하고 내년 봄을 기다린다.
우리가 빈민촌의 밝고 확트인 공간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반면에 해진다음에 은밀한 활동을 하는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른 새벽이나 저녁때에는 멀리서 누구인가를 식별하기가 어려 웠다. 이때는 보복하거나 적을 습격하거나 인질극에서 멍청한 희생자를 잡아가기 좋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관련 되어 있지 않는 한, 폭력적인 습격이나 싸움에 관심이 없었다. 자진해서 희생자를 돕는 일은 없었다. 폭력적인 범죄를 우연히 본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피 했다. 자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범죄자들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을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서슴치 않고 죽인 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범죄 현장이 자신의 집과 가까우면 두들겨 맞는 소리, 신음 소리, 비명소리 같은 폭력 범죄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빈민촌에는 경찰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난징에는 경찰서가 있었지만 경찰은 범죄자 만큼이나 위험하고 불쾌 했다. 대부분의 경찰은 마약 장사들과 연관이 있고 도둑질과 다른 범죄에 관여 했다. 경찰 수사관을 포함한 사복 안전원이 부패한 경찰 중에서 가장 불쾌하고 위협적 이었다. 그들은 아무죄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닌 “범행”을 이유로 구타 했다. 말그대로 무자비 했는 데 아이들도 그들의 포악한 행위의 예외는 아니었다. 철없는 아이들이 가끔 경찰을 약 올리거나 업무에 방해되는 장난을 하는 경우 가 있었다. 괴물 같은 경찰은 이런 아이들을 가차 없이 구타 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우리는 그들이 소속된 부서에 관계없이 사복경찰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 시원한 날씨에는 값비싼 진한 갈색의 가죽 잠바를 입었고 날씨가 더워 지면 잘 다려진 흰 반소매 상의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인 척 하기 위해서 사복을 입었을 뿐이었다. 누구나 거드름 피우며 걸어 다니는 폭력배들이 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멀찌감치 피해 갔다.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것 같지만 사람들은 감히 표현 할 수 없었다.
절도와 폭행 같은 사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없는 범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우매한 피해자가 경찰을 찾아 가면 안됐다고 측은해 하면서 그냥 돌려 보냈다. 만약에 경찰이 도와 주고 있으면 당한 사람으로 부터 뇌물을 받고 수사에 착수 했을 가능성이 높다.
빈민촌과 난징의 거리에서 살아 남으려면 주위 사람을 재빨리 알아 봐야 했다. 내 친구들과 나는 사람알아보는 전문가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흔한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중에 하나는 유괴범 이었다. 그들은 절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 갔기 때문에 유괴범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빈민촌은 그들이 선호 하는 사냥터 였다. 사기꾼 처럼, 유괴범은 자신과 같이 다른 곳으로 가면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더 잘 살 수 있다는 등 달콤한 말로 아이들을 유혹 했다.
유괴범은 직업없는 어른 남자 이고 본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상냥하고 검소 하게 행동했다. 손가방 하나 들고 동네로 들어와서 며칠 씩 할일 없이 돌아 다니며 아이들에게 캔디를 주는 등 동네 아이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모든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괴범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 했다. 그는 일을 끝내려고 조급해 하지도 않았다. 일자리를 찾지도 않았다. 그는 가난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도 아니었다. 모두 눈에 띠게 긴장해 있고 절실한 동네에 와 있으면서, 그는 심각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내 친구와 나는 금방 유괴범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내가 빈민촌에 온지 6개월 쯤 됐을 무렵 전형적인 유괴범 같은 사람이 동네에 이사 왔다. 중년의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아이들에게 육체적인 위협보다는정신적인 위협을 주었다. 그가 나를 잡아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 넘기는 악몽을 꾸게 했다.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유괴범으로 의심받는 사람을 무서워 하면서도 경멸 했다.
아무런 증거 없이 어떤 사람을 유괴범으로 저주 하는 것은 지극히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일 수 있었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범죄자의 특징을 판에 박힌 표준형으로 인식하는 버릇은 중국에서 옛날 부터 있었다.
오늘날에도 중국과 동아시아 나라에서는 서양과 다른 형사 사법 제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범죄가 의심되어 체포 되면, 서양에서는 범죄가 증명 될 때 까지 결백을 인정 하는 데 동양에서는 결백이 중명될 때 까지 범죄자 취급을 한다. 만약 그 사람의 결백이 밝혀 지면, 아시아 사람들은 천연스럽게 “그가 왜 체포 되었지?” 한다.
유괴범이 동네 온지 1,2일 후 부터 내친구들과 나는 그를 볼 때 마다 “유괴범이 여기 있다. 유괴범이 여기 있다.”하고 크게 외치며 놀려 댔다. 그는 불쾌해 했다. 우리부모들에게 불평 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 부모들도 그의 범죄자 같은 모습과 나쁜 의도를 확신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우리의 괴롭힘을 참다 못한 그는 내가 건 싸움에 직접 나섰다. 응원단장 처럼 내동료들을 이끌고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유괴범, 유괴범”하고 큰소리로 놀렸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돌아서더니 도망가지 못하게 내 셔츠를 붙잡고 아주 세게 나를 때렸다. 나도 모르게 잡혀서 두들겨 맞은 것은 굴욕이었다. 나를 무척 화나게 했다. 쇠약한 유괴범, 사회 그늘에서 먹고 사는 인간 쓰레기가 내 친구와 동료 앞에서 나를 때리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야!
나는 복수에 나섰다. 관절염 때문에 육체적으로 불편한 중년의 유괴범은 쪼그리고 앉기가 불편 했다. 그의 대퇴사두근(quadriceps)은 너무나 약했고 그의 무릅은 너무나 굳어 있었다. 쉬려고 쪼그리고 앉으려면 그는 무릎을 구부려야 했다. 나는 그가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하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두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의 약점은 낯설은 사람들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동네 아이들의 관심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그는 아픈 무릎과 힘없는 다리 때문에 아침에 변 보는 일이 그를 무척 힘들어 했다. 변을 보기 위해서는 구덩이 위에 쪼그리고 앉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옥외)변소 구덩이 앞에 있는 관목을 붙잡고 겨우 앉았다. 아침에 그는 가장 먼저 변소를 사용 하려고 했다. 아무도 그가 관목을 잡고 앉는 것을 방해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어느날 나는 해가 뜨기전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 났다. 나는 그가 잡고 앉았던 관목을 파내어 표시 나지 않게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나는 약 20 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 뒤에 숨어서 변소로 가는 길을 보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유괴범이 나타나더니 변소 쪽으로 천천히 걸어 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가 관목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유괴범의 “아야”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즉시 내 덫이 제물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농가집을 향해 달려 가면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유괴범이 똥통에 빠졌어요! 유괴범이 똥통에 빠졌어요!”
모두들 변소로 뛰어 갔다. 다행이 유괴범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나는 오줌과 똥이 그의 옷에서 뚝뚝 떨어 지는 것을 훔쳐 보았다.
이틀 후 내가 유괴범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 약간 후회하기 시작 할 무렵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안-주안이 없어 졌다. 그녀는 판잣집 난로옆에 없었고 동네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유괴범이 빌렸던 방도 텅 비어 있었다.
주안-주안은 유괴범이 당콤한 말로 꼬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저택에서 처럼 편안하게 지내지 않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벌써 6개월 간 빈빈촌에 살고 있었다. 저택에 살 때는 나와 놀아주기 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루 종일 가난한 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도 한푼의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녀가 유괴범의 희생자가 된것에 대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되어 하이에나 처럼, 사냥터에서 잡으려는 동물을 추격 하듯이, 그는 주안-주안을 정해 놓고 유혹 했다.
주안-주안이 사라진지 1,2주 후에 나는 난징의 다른 지역에 있는 사창가에 주안-주안이 팔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은 빈민촌의 가십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이 경우에는 사창가에 자주 드나 들던 동네사람 입에서 시작 되었다. 누구도 그가 말한 주안-주안에 대한 소식을 의심하지 않았다.
주안-주안은 그때 겨우 15살이 되었었다. 나는 그때 내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주안-주안의 실종에 대해서 별로 생각 하지 않았다. 살인과 실종은 빈민촌에서 자주 일어 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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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주안이 없으니 어머니는 큰 곤란을 겪었다. 낮에 직장일을 하고 집에 오면 가족을 위해서 요리와 세탁을 해야 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의 양 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다. 주안-주안이 집에 없으니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형과 누나들도 이에 동의 했다. 나는 그들이 내가 학교가는 문제에 대해서 토론 하는 것을 살짝 들었다. 나는 진짜 싫었다. 나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내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중에 가장 어린 나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결정에 반대 할 수 없었다.
이주 후에 어머니는 나를 새로 세운 동네 학교의 일학년으로 입학 시켰다. 어머니가 그 학교에 데리고 갔는 데 , 학교는 골판지 모양의 알루미니움 튜브를 수평으로 자른 반쪽을 평평한 땅에 엎어 놓은 비행기 행어 같은 모양 이었다. 알루미니움 튜브 양쪽은 여러장의 사각형 유리로 막아 놓아서 빛이 들어왔다. 바닥은 흙이어서 건물 안은 습하고 곰팡이 냄세가 났다.
이 새 고안물은 국민당 정부가 빈민촌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교육을 제공하기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네명의 선생님이 각각 1 학년에서 4학년 까지 가르쳤고 한 학년이 튜브의 한 모퉁이 씩 차지 했다. 학교는 아침 9시에 시작 해서 정오에 끝났다.
큰 금속 튜브와 지붕이 있는 옥외변소외에는 학교에 다른 시설은 없었다. 교실을 가리는 벽도 없고, 칠판도 없고, 책상과 의자도 없고. 놀랍게도 책도 없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앉을 자리를 가지고 왔다. 나무토막, 작은 발판, 작은 벤치, 방석 등등 엉덩이를 흙으로 부터 보호 할 것들이면 되었다. 어떤아이는 다리와 팔판이 없는 의자를 매일 들고 왔다. 그래도 등을 기댈 수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 했다.
등교 첫날 나는 동급생 맨 뒤에서서 선생님이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선생님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거나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아침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선생님의 두서없는 이야기중 어떤 것들은 이치에 맞고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말잘하는 이야기꾼 이었지만 선생님 이야기 대부분은 나를 실증나게 했다. 교훈적이고 교화적이었는 데, 이솝우화 같은 이야기였다. 정직, 근면, 용기, 친절, 충성, 관대 등등의 도덕의 원칙을 교훈 했다.
둘째날, 나는 어머니가 전날 저녁 때 3 조각의 나무 토막으로 만들어 준 작은 스툴(등과 팔 다리 없는 걸상)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어머니는 애를 썼지만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작품은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수업중에 내가 놀려 먹은 아이가 보복을 하기위해서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그의 스툴을 쳐들고 나를 때라려고 했다. 나는 내 스툴을 들어서 방어 했다. 두 스툴이 부딧쳤고 그의 스툴은 멀쩡한 데 내 스툴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싸움은 끝났다. 나는 집에 두 조각의 나무만 가지고 왔다. 나무 한 조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두 나무 조각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포기 한 듯이 “그래, 너 학교가기 싫으면 안가도 돼.” 라고 말 했다.
그것은 내귀가 듣기 좋아하는 음악 이었다. 나는 즉시 꼬마 린, 큰 왕, 그리고 나머지 갱 멤버들과 같이 빈민촌을 돌아 다니며 모험을 시작 했다. 정말 살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숨겨둔 계략이 있었다. 한주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상하이로 가서 이모와 같이 살라고 했다. 본능적으로 즉시 아니오 라고 하고 싶었다. 또 다른곳에 가서 살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상하이로 가야 해?” 나는 혼자 중얼 거렸다. 내가 이 세상 어느것 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보물을 다 빼앗기는 일이었다. 내 친구와 놀이 터. 말이 내 입술에 걸려 있었다 - 다만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처럼 통제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니가 나를 통제할 필요가 없었고 아버지가 수감 되자 어머니는 그럴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었다. 어머니는 다른 중국 아이들 처럼 날때부터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유교적인 충성심과 복종심에 의존하려 했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는 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의 명령을 거절 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억지로 상해로 가는 기차에 태웠을 것이다. (나는 그때 어머니가 옛날에 우리 집에서 일했던 사람에게 나를 데리고 상하이로 가라고 미리 부탁해 놓은 것을 몰랐다.)
내 친구와 놀이 터를 떠나고 싶지 않은 데도 어머니에게 저항 할 수 없게 되자 나는 무척 우울해 졌다. 말을 하지 않았고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 트렸다.
어머니는 점잖지만 영리하게 조용하고 남을 화나게 하지 않는 태도로 나에게 이모는 상하이에서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말하여 내 마음을 달래려 했다. “이모 헬렌은 처녀야.” 어머니는 조용히 지적 했다.
“이모는 아이를 무척 키우고 싶을 거야. 너를 무척 아낄 거야.”
그러더니 진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모 헬렌은 매일 맛있는 음식을 줄 거야.” 정신이 번쩍 났다.
음식, 특히 좋은 음식은 중국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 한다. 좋은 음식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어떤 물질 보다도 중요하게 좋은 업과 소유물을 만든 다. 중국사람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모이면 음식을 차려 놓고 먹는 것이 센터 스테이지를 차지 한다. 친구가 서로 만나면 “식사 했어?” 하는 말로 인사 한다.
빈민촌에 사는 동안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해서 짜중이 났다. 불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원 했다. 시내에 진열 된 음식은 내 입안을 침으로 가득 차게 했고 내 마음을 들 뜨게 하여 나는 때때로 움직이지 않고 동상 처럼 굳어 버린 모습으로 음식을 처다 보았다. 침을 흘리는 바보가 되느니 차차리 그 곳을 피하려고 했다.
“어때?”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승리의 반짝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나의 저항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적어도 좋은 음식에 대한 유혹이 원하지 않고 어쩔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기 쉽게 했다.
“그래, 이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어머니가 말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나는 상하이에 도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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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