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배명 목사
누가복음 10:38~42
저는 경기도 안산 수암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인정중독 마니아’ 배명 목사입니다. 저는 교회와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이 다른 것에 대한 괴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큐티목회세미나를 통해서, 특히 ‘목장탐방’을 통해 사역자들도 드러내길 꺼리는 가정사와 여러 문제를 평신 목자님들이 말씀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며 적용을 권면하고, 목원들도 말씀으로 삶을 해석하며 적용하는 모습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적용하는 삶과 신앙이 일치되는 모습을 통해 성도, 가정, 그리고 교회도 살아나는 것이 제 안에 분명히 믿어졌고, 교회의 본질과 목회의 방향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본질인 말씀으로만 사역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긴 경험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는 오전에 사역자들과 함께 큐티와 나눔만 합니다. 1 시간은 기본이고 어떤 날은 점심시간이 지나서 끝이 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제가 먼저 큐티를 해야 사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역은 이제 단순하고 명료해졌습니다. 큐티만 합니다. 유치부부터 장년부까지 큐티 본문으로 설교합니다. 중고등부, 청년부는 ‘예수동행모임’이라고 하여 일주일에 3번 새벽예배가 끝나면 큐티 모임을 합니다. 어른들이 큐티를 제일 어려워해서 매일 아침 큐티인 묵상 명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점점 큐티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오픈도 하고 있습니다. 자해하는 동생을 무시하고 원망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말씀으로 자기 동생을 살려야 되겠다고 고백합니다. 싸우시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 가는 것이 무서웠는데 귀가 전 다시 큐티하는 것이 적용이었고 지금은 싸우시는 부모님보다 아버지를 무심하게 대한 자기 죄가 더 크다고 회개하며 부모님들을 전도하는 적용을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숫자적 부흥 때문이 아니라 말씀이 본질이고, 말씀을 통해 성도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사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분주한 마르다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화가 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를 고자질하고 자신을 도우라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마르다가 일하고 있는 것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기쁨 없이 염려하여 일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염려 가운데 자기 열심, 자기 의, 자기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과 기쁨으로 일했다면 ‘마리아가 좀 갈급한가 보네. 은혜받게 놔두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핵심적인 것은 마르다의 깊은 내면에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은 ‘집주인,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예수님이 주인이어야 하는데, 마리아를 이르며 예수님의 필요도 묻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마르다의 주인 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의 필요,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인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또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인데 말씀을 듣지 않으니 생명이 타락하고, 교회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큐티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은 그대로이지만, 말씀을 통해 삶이 달라집니다. 체면을 중시했던 유대인 마르다에게는 주님의 책망이 고난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준비하던 일을 내려놓고 마리아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르다를 사랑하기에 염려하고 분주한 마음 상태, 주님 앞에서 집주인 노릇 하려는 믿음 상태를 깨닫게 하고자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이 마르다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책망의 말씀이 마르다를 살렸습니다.
저는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착해야 했고, 잘 섬기고 예배도 빠지지 않으며 공부도 잘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THINK양육’을 통해,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인정받는 것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양육 받는 지금도 인정받기 위한 것임을 직면하며 ‘내 안에 이렇게 죄가 가득한데 해결되지 않은 모습으로 목회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죄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제대로 양육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보니 인정받아야 할 존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 정욕의 죄, 음란의 죄 등 수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남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자신도 속게 되었습니다. 내 죄가 보이지 않으니 회개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신학생이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젊은 목사가 만 125년의 역사를 가진 대형교회를 사역하는 것이 요셉의 색동옷처럼 저를 포장하는 옷이 되었습니다. 시기를 받고 안 좋은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 저 스스로 그 시기와 질투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마르다처럼 묻지 않고 집주인 노릇을 하는 저에게 주님은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강한 것처럼 보여야 했고 누구에게나 인정받아야 살 수 있던 저에게 이 질병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정도 아픔으로 이런 병이 왔다는 것을 저조차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은 인정들이 무너질 것 같아 계속 숨겼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감당하는 척, 잘 순종하고 있는 척했습니다. 그러니 치유되지 않고, 약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큐티인을 만나 말씀이 저를 살렸습니다. 나에게 찾아왔던 고난들이 사실은 주님이 나를 만나시고자 하셨던 계획이셨음이 믿어졌습니다. 특히 공황장애와 우울증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닌 내 죄 때문에 왔어야 할 고난이었고, 저의 모든 상황이 말씀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살아나면 이 말씀을 계속해서 의지해야 하는데 문제가 해결되니 말씀이 뒤로 밀렸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말씀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처럼 말씀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를 살리는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삶이 바뀝니다. 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연약하고 죄인이지만 저에게는 매일 붙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 묵상하고자 큐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믿으니 큐티합니다. 마리아처럼 말씀을 들으려 할 때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나의 생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큐티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