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대왕릉 - 영릉(寧陵)
제17대 효종의 영릉(寧陵)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으로, 건원릉(동구릉 내) 서쪽에 있었으나 현종 14년(1673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병자호란 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인질로 있다가 인조 23년(1645년) 환국하였으며
그 해 4월 26일 건강하던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의문사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대군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고초를 겪었고 부왕 인조의 삼전도치욕을 설욕하고자 북벌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이 부족하고
청(淸)의 세력이 강해지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재위 10년 만인 1659년 5월 4일 얼굴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1세에 별세하였다.
동구릉 내에 있던 영릉(寧陵)은 병풍석에 틈이 생기고 물이차자, 현종 14년(1673년) 여주 세종대왕릉의 동쪽 언덕으로 천릉(遷陵)하였는데,
이에 앞서 인근의 민가 25채와 묘소 60여 기를 옮기게 하였다.
(효종이 묻혔던 파묘자리에는 후일 정조에 의해 영조와 계비 정순황후의 쌍릉이 들어섰다.
정조는 고의적으로 영조왕릉을 흉지로 정했던 것이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가 미웠고 사도세자 묘를 흉지에 쓰게 했던 영조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조를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 파묘자리 흉지에 묻은 것이다. 풍수에서 파묘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맥이 빠진 자리라 하여 흉지로 친다.
영조는 생전에 자신이 정해 놓았던 홍릉(弘陵)의 정성왕후(정비) 옆에 묻히지 못하고 동구릉에 있는 계비 정순왕후 곁에 묻혀 영면한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는 현종(顯宗) 15년(1674년) 경희궁에서 57세로 별세하였으며 소생은 현종을 비롯한 1남 6녀이다.
효종릉 아래에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쌍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인선왕후릉이 왕릉 아래에 위치하여 상하(上下)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풍수지리상 생기왕성한 정혈(正穴)에
능침을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원(同原) 쌍릉은 조선왕릉 중 처음이었고 제20대 경종의 의릉(懿陵)이 두 번째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만나게 되는 효종 영릉 재실
재실 안마당에 있는 회양목,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재실을 지나 능으로 가는 오솔길
오솔길이 끝나자 홍살문이 나타납니다.
중앙에 있는 삼지창 좌우로 10개의 홍살이 꽂혀 있군요.
홍살문 오른쪽에는 능을 찾은 왕이 4배를 드리는 판위(板位), 또는 배위(拜位)가 있구요.
그런데, 홍살문 앞에 마땅히 있어야 할 금천교가 안보이네요.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향하는 참도는, 다른 능에서 흔히 보는대로 왼쪽이 약간 높은 신도(神道),
그리고 오른쪽엔 어도(御道)로 되어 있지요?
참도를 걷다 보니 중간에 금천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 다른 능에서는 못보던 특이한 점이네요.
무슨 연유로 홍살문 밖에 있어야 할 금천이 참도를 가로질러 흐르도록 한 것은 무슨 연유가 있었겠지요.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와 관노가 거처하던 수복방
제사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수라간
수복간 바로 위에 있는 비각
세종대왕릉에서 자세히 살펴 보았던 '정자각'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 상위에 제물을 차려 놓는데, 문을 여니 효종왕릉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정자각 앞쪽에 있는 '예감(瘞坎, 또는 瘞埳)'
정자각 왼쪽으로 돌아가면 붉은색 목책 주위에 예감이 있다. 제를 올린 뒤 폐백과 축판(祝版)을 묻던 예감은
한 변이 50~60cm 정도 되는 석재(石材)로 만든 사각형 모양입니다.
예감을 설치한 것은 축문을 태울 때 능에 불이 날 염려가 있어 묻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군요.
예감에는 축문 외에 비단 1필과 음식물을 함께 묻는다고 하는데, 능에 따라서 목책 안이나 밖에 있답니다.
정자각 뒤편 언덕에는 2기의 능이 조성되어 있네요.
위에 있는 능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는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의 능인데,
이 능은 바로 조선왕릉 중 최초의 동원(同原) 상하의 쌍릉이랍니다.
먼저 위쪽에 있는 효종 능으로 가 보겠습니다.
영릉(寧陵)의 효종 왕릉에도 앞에서 살펴본 세종대왕릉과 동일하게 바깥쪽에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장)이 있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지키고 있는 안쪽에 12간(間)의 난간석이 능침 주위에 둘려져 있군요.
그리고 능침 앞의 능원에는 초계(初階)에 혼유석과 한 쌍의 망주석이 있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석마(石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下階)에는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좌우에 세워져 있네요.
다음은 아래에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의 능입니다.
아래의 인선왕후릉에는 능침 뒷편에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지 않을 뿐( 同原 쌍릉이기 때문에 효종 능에만 곡장 설치),
석물들이 왕릉(王陵)과 같이 설치되어 있어 단릉(單陵)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위에서 본 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능, 능침 뒷편에 곡장(낮은 담장)이 없는 모습이지요.
괜히 조선왕릉에 다녀왔나 보다. 그동안 질책하지 않고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누가 질책을 하냐? 왕릉들에 이토록 많은 정성을 쏟은 것을 보면, 각 도읍지에 많이 남아 있어야 할 궁궐이 왜놈들의 행패로 대부분 없어진 것이 한스럽다. 비록 개인 사저라고는 하나 운현궁도 복원이 필요하고, 이순신장군 시절의 수군기지들도 복원했으면 좋겠다.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게 그 자료와 역사를 말살한 왜놈들은 그 기록을 일본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다 찾아야 하는데... 용환아 다음은 어디냐? 난 릉에 대한 기억으론 국민학교 5학년 땐가 동구릉으로 소풍갔었던 게 있긴 한데..
임박사! 조선왕릉을 모두 답사하셔 보성57의 교양을 드 높여주오셔~~~이제 따뜻한 봄이 오니~~~
능 관리를 잘 해서 보기가 좋다. 능을 찾는 후손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모양인데...능안에 있는 소장품을 구경하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능을 찾을 때마다 돈을 내라고 하다니...능 주변에 박물관이라도 있어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껴 볼 기회라도 있다면...
실로 영양가 높은 충실한 답사기로고! 이미 열화와 같은 국내의 팬을 다수 확보했으니 여주땅에서 왕릉답사기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용환아.
어?! 그동안 이라니? 다음은 어디지?라고 물어 볼 참인데... 용환아, 다음을 기다리고 있어도 되지?
예전에는 조선왕릉에 가면 누구나 가까이에 가서 구경할 수 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로는 관리가 엄청 강화되어
일부 개방한 능 이외엔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멀리서 바라만 볼 수 있도록 하고 관람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니 자세히 관람할 수가 없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몇 기의 능은 시도를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