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엘 찰텐 강 건너 멀티루트 등반 후 기념촬영하는 원정대. 등 뒤로 엘 찰텐 마을과 피츠로이 산군이 보인다.
“명희야 움직여야 해.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위험해!”
윙윙, 바람 소리와 함께 석문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뭉쳐진 눈은 강한 바람을 타고 총알이 되어 온몸에 박히고 맨살에 닿는 부위는 아프다 못해 고통스러운 지경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거세게 불어오는 눈보라와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부는 바람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꼼짝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다. 화이트아웃으로 벽에서 내려오는 길마저 찾기 어렵다. 우리 주위로는 무시무시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입을 벌린 채 자리하고 있다. 오로지 동물적 감각과 경험만으로 이 험한 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한 번 가기도 힘든 곳을 세 번이나 간다. 2017년 12월 8일 세로토레(Cerro Torre)와 피츠로이(Fitzroy)를 등반하러 최석문(노스페이스)씨, 문성욱(바위를찾는사람들) 선배와 함께 남미 파타고니아로 떠났다.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떠나는 마음은 언제나 설렘과 걱정이 반반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미국 달라스를 경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엘 칼라파테(El Calafate)에 도착했다. 환전과 물품구입을 끝내고 다음날 버스로 3시간 이동해 마지막 목적지 엘 찰텐(El Chalten)에 도착하는 데까지 딱 3일이 걸렸다.
엘 찰텐에 와서 처음 한 일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가는 것이다. 일기예보도 확인할 수 있고 등반신청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등반가는 날짜가 정해지면 국립공원에 가서 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위성전화 있는지, 보험은 들었는지, 어느 루트를 오르는지, 등반인원은 몇 명인지, 돌아오는 날은 언제인지 작성하고 나면 쪽지를 줄 것이다. 등반이 끝나면 그 쪽지를 다시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주면 된다. 날씨가 안 좋다고 등반을 금지시키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등반자의 몫으로 넘긴다.
올해 전 세계가 이상기온으로 혼란스럽다. 이곳 파타고니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착해서 40일 동안 맑은 하늘 아래 세로토레를 본 것이 단 하루 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등반하러 갈 때도 세로토레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1차 등반을 위해 토레 빙하로 접어드는 모습, 세로토레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 세로토레 등반을 위해 토레 빙하로 접근하는 모습. |
기다림이 기본이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이, 12월 23~24일 우린 1박 2일로 엘 찰텐에서 10시간 거리의 세로토레 전진캠프 니폰니노(Niponino camp)까지 장비와 식량 데포를 하기로 했다. 토레 빙하에 접어들었을 때 바람의 세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까지 내려 화이트 아웃으로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어두워지면서 체온이 떨어져 급한 대로 움푹 파인 곳에 텐트를 설치해 몸을 숨겼다. 이런 극한 상황이 있다는 걸 알면서 나는 또 이곳에서 똑같은 바람을 다시 맞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 무서운 바람을 알면서 왜 또 왔을까? 무섭고 힘든 건 잊고 좋은 것만 기억에 남아있어 다시 온 건가? 아님 미쳤나? 후회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밤새 바람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온몸에 힘을 주어 텐트가 찢어지지 않게 붙잡아야만 했다. 엄청난 바람은 유령 울음소리를 내며 강하게 텐트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날씨는 더 나빠졌고 잔잔하던 토레 호수(Laguna Torre)는 바다처럼 파도를 만들어 우리들을 삼킬 듯 거칠게 솟아올랐다. 자연 앞에 순응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등반해야 한다는 걸 다시 일깨워 준 시간이었다.
기다림은 간절함을 만들고 우린 계속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2017년 12월 30일부터 2018년 1월 3일까지 우린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세로토레에서 맞으러 4박 5일 일정으로 등반을 떠났다.
화창한 날씨를 기대하며 많은 날을 기다렸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날이 흐리더라도 바람만 세게 불지 않는다면 어렵겠지만 등반이 가능하리라 판단하고 엘 찰텐에서 오후에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4시간 거리의 숲속 캠프까지 가려했지만 강한 바람으로 토레 호수에 있는 티롤리안 브리지를 건널 수 없게 된 우리는 아고스티니(De Agostini) 캠프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7시간 거리의 니폰니노 캠프에 도착했다. 오후에 도착해서 스탠하드 콜(Standhardt col) 어프로치를 확인하고 다음날 있을 등반 준비하고 새벽 등반을 위해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새벽 내내 바람은 계속 불어댔다.
“가자!” 석문씨 목소리가 들린다. 새벽 4시에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리가 등반할 세로토레 서벽 라그니(Ragni) 루트는 빙벽과 설벽 그리고 믹스등반이 주를 이루는 알파인 등반루트다. 난이도는 WI5, M5, 체력적으로 엄청 빡센 등반이기도 하다. 등반거리가 상상 그 이상, 웬만한 히말라야 등반과 맞먹는다.
전진캠프 니폰니노는 고도 1,000m에 위치해 있고 스탠하드 콜은 2,200m이다. 1,200m를 등반하여 오른다. 그 다음 750m 하강을 하여 서벽쪽 빙하 고도 1,450m에 위치한 곳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세로토레 정상 3,102m까지 다시 등반한다. 고도 1,650m를 올려야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정상에서 다시 빙하로 하강한 다음 스탠하드 콜 2,200m 위치까지 750m를 다시 등반해서 오른 다음 하강해야만 니폰니노 캠프장에 도착한다. 오르는 것만 1,200m, 750m, 1,650m, 표고차는 3,600m가 된다.
동면의 스탠하드 콜을 넘어가야 하는데 콜에 오르는 순간 바람은 우리를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댔다. 상상을 초월하는 바람은 우리를 냉동인간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살기 위해서는 빨리 빠져 나가야만 했다. 로프를 아래로 던지면 바람 때문에 하늘로 올라온다. 그래서 몸에 달고 하강을 했다. 클라이밍 다운과 하강을 반복하며 서벽 빙하로 내려섰다.
파타고니아 세로토레 등반, 시간 절약을 위해 거의 모든 루트를 연등으로 올랐다.
성욱선배는 에이스답게 멋지게 앞장서 나아간다. 석문씨는 최강 클라이머답게 모든 일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 셋은 거의 연등으로 등반을 이어갔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은 체력과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오후가 되면서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함박눈이 내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되어서 에스페란자 콜(Col de la Esperanza) 근처에서 1박하기로 한다. 불안하다.
눈은 새벽에도 계속 내렸다. 출발 전 항상 제4의 멤버 한국의 안종능에게 위성전화로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통화하는 석문 눈빛이 좋지 않다. 날씨가 더 안 좋아진 것이다. 바람도 세고 눈도 많이 온다는 정보였다. 하산하는데만 이틀이 소요되기 때문에 우린 내일 무조건 벽에서 내려가야만 안전하다. 일단 오후까지 등반해보고 결정하기로 한다.
에스페란자 아래 설원에 텐트를 치고 이른 새벽 등반 준비를 위해 램프를 밝힌다. | 여명이 밝아온다. 겨울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
에스페란자 믹스지대를 등반하는 문성욱, 최석문.
믹스지대는 밤새 내린 눈으로 크랙이 보이질 않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이팅을 외치며 석문씨와 성욱선배가 번갈아 길을 연다. 서벽 쪽은 온통 백색가루를 뿌려 놓은 듯 설국이 따로 없었다. 오를수록 주변 벽들은 눈이 바람에 날아와 겹겹이 붙어 생긴 모양이 마치 산에서도 백색의 산호초가 존재하는 것처럼 비밀스러우면서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보는 건 좋지만 등반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곤란함과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설벽이 오버행이고 눈이 단단하지 않아 50cm 정도는 정리해야 안에 아이스스크루를 설치할 수 있는 얼음이 나왔고, 인공등반하듯 1m 간격으로 스크루를 설치하며 올라야만 했다. 빙벽에서 인공등반을 할 줄은 몰랐다며 성욱선배가 웃는다. 이번 시즌 아무도 등반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린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엘모 비박지에서 오후 3시쯤 하산을 결정해야만 했다.
여명으로 붉게 타오르는 세로토레.
다들 말이 없어진다. 시선은 모두 눈앞에 보이는 세로토레 정상 쪽을 향하고 있다. 욕심을 내고 싶지만 그 욕심 탓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널 수 있기에 신중하고 냉철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모두 아쉽지만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우린 최선을 다해 이곳까지 올라왔다. 기다림은 간절함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또 기다림은 겸손을 알려주었기에 과감하게 하강 로프를 던졌다.
석문씨가 먼저 내려가면서 스노 볼라드와 아발라코프를 만들어 하강했다. 스탠하드 콜을 넘어 니폰니노까지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밤 9시쯤 스탠하드 콜 근처 바위 밑에서 1박을 하기로 한다. 금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백색암흑이 되어버렸다. 만약 욕심을 부리고 하강하지 않았다면 우린 정상 부근에서 이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의 선택은 아쉽지만 현명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으로 체력소모가 많았고 등반을 오랜만에 해서인가 발목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경련이 생긴다. 표고차 3,300m 등반이 무리가 되었나 보다. 국내에서 체력운동을 게을리 한 내 탓이다. 알파인 등반은 첫째도 둘째도 체력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동행한 성욱선배와 성문씨는 우리나라 최강 알파인 등반가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며 응원을 해주었다.
파타고니아에 세 번째 방문한 필자. | 기념촬영하는 공감4 세로토레 피츠로이 원정대 뒤로 피츠로이가 보인다. |
남자들과의 알파인 등반은 결혼 전 2001년 파키스탄 히말라야 멀티4 원정대 이후로 처음이다. 결혼 후에는 여성팀을 꾸려 알파인 등반을 다녔었다. 물론 남편 석문씨와 알파인 등반을 함께 하는 것도 결혼 이후 처음이다. 알파인 등반은 위험하고, 한 사람은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함께 등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아들 보건이 고등학교 입학을 하는 나이가 되어서 혼자 잘 할 수 있기에 남편과 함께 등반을 떠나기로 결정했었다. 함께 등반하며 오랫동안 공감할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마 아들도 44일 동안의 자유를 즐겁게 보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서둘러 장비를 챙겨 스탠하드 콜을 등반해 오른다. 꿀르와르가 좁아서 배낭을 메고 등반하는 것이 어려웠다. 역시 콜은 강력했다. 순간 몸이 날아갈 듯 강한 바람이 불고 눈은 바로 얼음이 되어 얼굴에 달라붙는다. 석문씨 얼굴이 할아버지 얼굴로 변해버린다. 동면으로 석문씨가 내려가 먼저 확보지점으로 스노 볼라드를 만든다.
이렇게 많은 스노 볼라드로 하강하는 건 처음이다. 처음엔 불안했는데 몇 십 번 반복하다보니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의지하게 되었다. 바람이 세지기 시작하면서 탈출은 더욱 곤란해졌다. 바람이 불 땐 움직일 수 없어 아이스바일을 깊이 박은 채 납작 엎드려 잔잔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칼바람을 타고 눈은 수평으로 날리다가 선글라스 사이로 들어와 나의 시야를 가린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석문씨가 소리친다. 위험하다고, 움직여야 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큰일 난다고. 석문씨와 성욱선배도 오랜 세월 등반했지만 이번처럼 악조건에서 등반한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1차시도 마지막 하강을 하고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원정대원들이 안도의 웃음을 짓고 있다.
빙하가 멋지게 잘 발달되어 있어 세로토레가 한층 더 멋지게 보인다. 서벽 쪽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 문성욱 뒤로 우리가 올라온 서쪽 빙하 바닥이 보인다. |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풍경에 기분이 좋아졌다. | 빙벽을 오를 때 50cm 되는 눈을 털어내야만 스크루를 설치할 수 있다. 1m에 하나씩 박고 인공등반으로 오른다. 등반자 문성욱. |
스탠하드 콜 꿀르와르가 좁아져 등반에 어려움을 더 한다. 등반자 문성욱 | 어둠 속에서 등반을 강행하는 원정대. |
그 후로도 우린 세로토레 등반을 한 번 더 시도했다. 하지만 1차 시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과 눈폭풍에 떠밀려 내려와야만 했다.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세로토레를 등반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기다림이었던지, 아니면 아직 폭풍 속으로 걸어가 돌아올 수 있는 우리의 용기와 능력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 동안 공감 원정대를 응원해 주신 가족, 친구, 동료, 선후배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훌륭한 등반 파트너 성욱선배와 석문씨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고 싶다. 세로토레 등반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벽 앞에 설 것이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언제나 희망은 있다.
스탠하드 콜 벽에 눈들이 달라붙어 있다.
엘 찰텐 마을 강 건너 스포츠클라이밍 루트들이 많이 있어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무조건 여기서 등반을 했다. 등반자 문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