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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론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적인 사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의 행복으로 행복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기능인 이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한 일시적인 이성의 발휘만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는 까닭에 이성을 항상 잘 발휘하게 하는 성품을 필요로 한다. 그 성품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아닌 중용을 선택하는 습관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어 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은 이성적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논증을 행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부분"인 이성적 부분과 그 본성이 욕정적인 것이지만 이성적 부분이 제시하는 이성적 원리에 복종하는 중간적 부분으로 구분되어진다. 따라서 이성적 부분에 대응하여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항상 올바른 행동을 계획하는 지적 능력"인 지적 덕과 중간적 부분에 대응하여 "이성의 인식과 계획에 따라 늘 올바른 길을 택하는 행동의 능력인 윤리적 덕이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을 중용이라고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완성된 엄격한 의미의 윤리적 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습관의 결과에 의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재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성격의 상태는 각기 그 비슷한 활동에서 생긴다. 그리하여 악기를 연주해 봄으로써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같이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즉 고정되지 않은 자연적인 성격의 상태가 습관 혹은 훈련의 결과로 고정된 성격의 상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이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는 것을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행위가 유덕한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자가 첫째로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둘째로 그 행위를 선택하되 그 행위 자체를 위해서 선택하여야 하고, 셋째 그 행위가 행위자 자신의 확고부동한 성격에서 나와야 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절제 있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가 그의 성격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간섭에 못이긴 것이라면 그의 행위는 유덕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절제 있는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절제 있는 성격이 형성되어져서 그의 성격으로부터 나온 절제 있는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는 유덕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덕을 생산하는 행위가 덕에서 나온 행위 즉 유덕한 행위와 외적인 측면에서는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내적 본성에서 보아 구별되어 진다. 따라서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어진다는 말은 모순 없이 성립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윤리적 덕이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된 성격의 고정된 상태이다. 그러나 고정된 성격의 상태라고 해서 모두 윤리적 덕인 것은 아니다.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그것의 기능을 잘 전개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덕은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하게 하는 성격의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기술에 있어서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은 지나침이나 모자람을 피하고 중간을 찾고 선택한다. 이처럼 모든 기술이 중간을 지켜보며 또 이 표준을 가지고 그 성과를 판단함으로써 그 일을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덕이 어떤 기술보다도 더 좋은 것인 까닭에 덕 또한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 건강이나 체력의 경우에 있어서 지나친 휴식이나 운동 혹은 부족한 음식이나 운동이 건강이나 체력을 파괴시키는데 비하여 적당한 음식 혹은 운동은 건강이나 체력을 유지시킨다. 동일한 원리가 용기나 절제와 같은 윤리적 덕에도 적용되어진다. 모든 것을 두려워할 때 겁쟁이가 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 어떠한 위험에도 뛰어들 때 무모한 사람이 된다. 또한 온갖 쾌락에 파묻혀 조금도 삼가지 않을 때 방종한 사람이 되고 모든 쾌락을 피하기만 하는 사람은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용기와 절제 같은 윤리적 덕은 지나침이나 모자람의 경우에는 성립될 수 없으며 중용에 의하여 보존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이란 "중용에서 성립하는 행위 선택의 성격의 상태"로서 "지나침으로 말미암은 악덕과 모자람으로 말미암은 악덕 사이의 중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윤리적 덕을 악덕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게 하여 주는 種差라고 할 수 있다. 중용은 情意와 행위에 관계하는 윤리적 덕의 종차로서 제시된 까닭에 감정의 알맞은 강도와 행위 속에서 이전되는 사물의 알맞은 양을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정한 때에 적정한 일에 대해서 적정한 사람에게, 적정한 동기로, 또 적정한 태도로 정의를 느끼고 나타내는 것 역시 중용이므로 중용을 단순히 양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또한 중용이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중용으로 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하는 까닭에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인 중용이다.
◈유교의 중용이론
유교의 기본사상을 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용은 성에 대하여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 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고 했는가 하면 "정성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性이라 하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정성해짐을 敎라 한다. 그리고 정성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곧 정성되어진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내면으로는 지성으로 선을 추구하여 인간의 본성을 찾고
외면으로는 예를 갖추어서 부모에 효도하고 친족에게 화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중용이니 그 길은 지성에 있다.
주희는 중용에 대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정도에 알맞은 것이 중이요, 언제나 바르고 일정한 것이 용'이라 풀이하였다.
어느 때 공자의 제자 자공이 "사(師)와 상(商)은 누가 더 현명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사는 재주가 지나치고 상은 모자란다" 하였다. 이에 자공이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과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용이라는 中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글자 그대로 가운데를 가리키는 산술적인 비례에 있어서의 중이거나 양적 물적인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이다. " 희로애락에 愛惡慾을 더하여 이를 七情이라 하는데 앞에서 말한 측은한 마음과 수오한 마음 그리고 공경한 마음과 시비하는 마음인 이 사단도 역시 성의 발현이요 마찬가지로 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단은 순전무악한 것이고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이기 이원론에 입각하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여 본연지성은 순수한 理이므로 그가 발하였을 때에는 선하기만 하고 악은 없는 것이요, 기질지성은 이가 기속에 타재되어 기의 淸濁粹駁영향을 받아 그가 발하였을 때에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주희는 희로애락이 혼연히 中에 있어서 미처 사물에 자극 받지 않았을 때에는 일편에도 기울지 아니하고 또한 過 하지도 못 미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이라 하였다. 그러한 중이 어떤 사물에 접촉하게 되면 이 희노애락의 情이 발생하게 되어 과불급이 생기기 쉽고 올바른 판별을 못하여 편중하고 애착에 걸려 적절한 데에 맞지 않은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때에 하늘에서 받은 본연의 성을 그대로 中節시키는 것 즉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을 和라고 하였다. 이 중화를 하기 위해서는 敎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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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아니하고는 분별을 할 수가 없으니 순선무악한 본연의 성품이 사물에 접촉하였을 때에 중절할 수 있는 식견이 없으면 칠정에 얽매여 和를 이루지 못하고 악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을 대학에서 말하기를 "明德을 천하에 밝히려면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안을 바로 잡아야 하고, 그 집안을 바로 잡으려면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하고, 그 몸을 닦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여야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려면 먼저 그 앎에 이르게 하였으니 앎에 이르게 하려면 사물을 규명함에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물을 규명한다는 격물에 대하여 주희는 '사물의 이치를 추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은 데가 없이 하려는 것이다.' 라고 풀이하였다.
따라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출발점이 바로 격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재가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길이 오직 수신에 있다고 볼 때에 그 수신은 또 격물치지에서 비롯됨을 역설하였다. 격물 없이는 치지가 되지 아니하고 치지 없이는 사물의 善惡邪正을 밝힐 수가 없다.
사물의 선악사정이 밝혀진 다음에는 칠정에 구애됨이 없이 그 뜻에 성실하여야만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것이요, 正을 취하고 邪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선설에 바탕을 둔 중용의 도이다.
◆『중용』의 中
유학은 규범의 체계, 내면의 도덕적 원리의 체계의 파악과 수양을 통한 그 구현에 목적을 두는 학문체계이다. 전자를 지식의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수양의 문제라 하였다. 이 양자는 물론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것들이며 동시적으로 추구되어 가야만 하는 것들이다.
공자는 이러한 그의 정신 수양의 결과를 도덕론적 차원에서 '仁'이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에 집약시켜 설명한다. 그리고 그 '仁'을 실현하기 위한 내적 외적 수양의 방법을 '忠恕'로 제시한다. '忠'이란 내적인 차원에서의 자기완성을 뜻하고 '恕'란 그 완성된 자신의 외적 표현을 의미한다. 공자는 이렇게 그 사상적 핵심을 도덕적 또는 수양론적 차원에서 설명하여 내는데서 그친다. 이것은 공자가 지식론과 수양론의 양측면을 겸비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아
수양론적 차원에 중점을 두는 사상가라는 것으로부터 연유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어』속에서 "선생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었으나 선생의 性과 天道에 대해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제기된 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논어가 결집되던 시기에 이미 '性'과 '天道'에 대한 이론적 요구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것은 이 시기에 '性'과 '天道'에 대한 공자의 말들이 유포되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통하여 볼 때 우리는 바로 논어가 편집되는 시기에 '性'과 '天道'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체계에의 탐구가 진행되고 있었거나
진행될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의 구체적 결실이 『중용』으로 형상화 되는 것이다.
중용은 공자 만년의 정신세계의 이론적 형상화의 결과이다. 따라서 중용사상은 공자의 정신세계 속에 그 연원을 갖는다. 공자는 유학이라고 하는 학파를 건설함에 있어서 그것이 자기 개인의 역량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자기 시대의 의식의 반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공자는 스스로가 자신을 '편집자'의 위치에 정초시킨다.
그는 그의 사상의 연원을 멀리는 요임금 순임금에게로, 가까이는 문왕 무왕에로의 귀속시킨다. 이것은 공자가 이념적으로 중국 문화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공자사상은 공자 이전의 전체 중국 정신이 한꺼번에 적용하여 조형하여 내는 사상적 흐름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공자 사상의 핵심은 『중용』으로 형상화 되어 나타난다.
『중용』은 비록 공자 자신에 의해 명확하게 제기되고 있지는 않지만 공자 정신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사상적 요체가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남으로써 구성되는 이론 체계이다.
따라서 『중용』의 위치는 공자학파에 있어서 화룡정점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용이라고 하는 개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논어』에서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인데 사람들은 오래 지속하는 경우가 드물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中庸'이, '中'이 '庸'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중용 개념의 효시이다. 물론 '中'이라고 하는 개념은 고대로부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여 왔었다. 그러나 고대에 있어서 그것은 '庸'과 연결되어 쓰이지 않았었다. '中'이 '庸'과 연결되어 쓰이는 최초의 경우가 바로 『논어』의 이 경우이다. 그럼 '中'과 '庸'의 의미를 각각 살펴보자.
'中'이란 개념은 그 원리적 법칙성의 형식적 개념이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치우치지도 의존하지도 않음'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의 두 가지에 의해 설명된다. 전자는 '中'이 갖는 본체론적 중립성을 의미하고, 후자는 '中'이 현실 속에서 운용됨에 있어서의 실재론적 적합성을 의미한다. '치우치지도 의존하지도 않음'은 본체로서의 '中'이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은 운용 상태의 '中'이다. 이것은 '道'가 지니는 본체 상태 또는 운용 상태의 형식적 일면을 취하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中'이란 '道'를 표현해주는 형식적 개념인 것이다.
'庸'이란 쓰임을 뜻하며 그 '쓰임'의 반복을 통한 지속적 의미를 갖는다. 즉 '庸'은 '행위', 그것도 '지속적 행위'의 의미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속적 행위는 원리적 법칙성을 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庸'이라는 것은 '원리적 법칙성을 시간 속에서 구체화하는 실천력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中'과 '中庸' 개념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서로 같은 개념이다. '中庸'이라고 할 때에는 그냥 단독으로 '中'을 사용할 때보다는 그 '庸'적 측면, 즉 구체적 지속적 실현력으로서의 의미가 보다 부각되어 나타난다는 차이만 존재한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 속에서 전통적인 '中'개념에 '庸'의 의미를 부가하여 '中庸'이라고 쓸 때는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의 창조가 아니라 기왕에 존재하는 '中'개념의 실천력의 강화일 따름이다.
『중용』은 공자 만년의 제자들에게 유전되어서 나타난다. 『중용』의 체계는 공자의 만년 정신의 구체화이다. 이것은 『중용』사상의 전체를 관통하는 제 1장의 서두에서 확인 될 수 있다. 『중용』의 서두에서 나타나는 체계는 공자의 만년 정신 속에 표현되기 이전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용』의 서두에서 '天命'·'性'·'道'·'敎'는 일원적 체계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天理'로부터 '人性'이 비롯된다고 이해함으로써 '人性'에 객관적 원리성을 부여하여 주는 유가사상의 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자의 만년 정신의 일반적 체계화의 결과가 그러한 사상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 반경은 물론 공자에서는 평생을 통한 끝없는 수양과 학습이 동반되어서
말하여 지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 입각하여 '욕심' 그 자체의 거침없는 발현이 언제나 도리에 합당한 결과에로 이끌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공자의 '心'이 이기적 욕구의 주체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하고 도덕적 욕구의 주체로써 확립된 다음에야 하늘의 이치를 자신의 심성 속에 수납하여 자신의 심성이 완전히 하늘의 이치와 같아진 다음에야 이러한 정신 경계는 가능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는 위의 정신 경계는 수양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용』에 오면 그러한 정신 경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공자에 있어서는 위의 정신 경계는 그 자시의 심성의 확산과 수양에 의해 후천적으로 달성된다. 이 점에서 공자는 '天理'와 '人性'을 동일 문맥 위에서 말하면서 '人性'을 통하여 '天理'에 접근하여 간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자는 주관을 통하여 객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적 문제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해결하여 버리는 것이다. 『중용』은 공자의 만년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제 관념들 사이에 관계를 부여하면서 나타난다. 거기에서 '天命'·'性'·'道'·'敎'는 물론 서로 간에 개념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은 내용상 일치된다. 외재하는 객관적인 원리로서의 '天理'는 그대로 내재하는 주관적 원리로서의 '性'이 되며, 그것은 동시에 외적 표현의 과정을 거쳐'道'가 되고 또 수양을 통하여 '敎'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 관념들은 '中'의 형식을 갖추고 나타난다.
『중용』에 있어서 '中'은 '和'와 짝을 이루고 존재한다. '性'의 존재형식으로서의 '中'은 감정의 先決定性의 배제를 뜻한다. '性'의 표현 형식으로서의 '和'는 감정의 적절한 발현을 의미한다. 감정의 발현이 적절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로서의 '性'이 어떤 편견에 의해서도 굴절되지 않은 순수한 내적 평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 순수한 내적 평정 상태가 바로 '性'의 '中'이다. 이 '性'의 '中'은 감정의 미발 상태이다. 감정의 미발상태인 '性'의 자리가 어떠한 감정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것은 상황에 직면하여 가장 적절한 감정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장 적절한 감정의 표출을 미발인 중립적 '性'의 中節을 얻은 發이라하고, 和라하며, 道라고 한다.
행위의'中'에 있어서 그것이 시간적 질서 속에서 말하여 질 때는 그것은 군자의 '時中'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공간적 질서 속에서 말하여 질 때는 그것은 순임금의 '用中'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이러한 행위의 '中'은 존재론적 '中'의지지 하에 달성될 수 있는 이차적인 '中'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의 中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객관성·보편성을 보장하여 주는 도덕의 존재, 형식을 의미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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