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차 정기 합평회 (2022. 9. 24. 토)
1. 환상통 / 엄옥례
2. 반짇고리 / 임윤교
3. 타인의 눈초리 / 백명철
수필의 자존심 한국수필문학관부설
한국에세이포럼
1. 환상통/엄옥례
1.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옆지기에게 붙잡혀서 모임에 나갔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절정기에 태어난 58년 개띠 남정네들 모임이다.
2.그들은 젊은시절 봉사단체에서 만났다. 회원 중에 유독 개띠가 많고 동연배끼리 잘 통해서 따로 모임을 결성했다. 원기가 팔딱팔딱 뛰던 시절, 구원투수가 필요 없을 때는 자기들끼리만 만났다. 회원 몇 사람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이 들면서 사내들의 성격이 암되어지자, 모임의 찰기가 떨어진다며 푸념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아내들의 손을 잡아당겼다.
3.남자 회원들과 동반자들이 동네에 있는 집밥식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커다란 접시에 담겨서 김을 무럭무럭 피우는 아귀찜과 밑반찬으로 멸치 조림, 가지볶음, 콩자반, 열무 물김치, 깻잎 김치 등속이 차려진 밥상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4.맥주, 소주, 막걸리도 몇 병씩 시켰다. 취향대로 앞앞이 술잔을 채웠다. 술이 한 순배 돌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밥이 들어왔다. 코를 벌름거리며 일제히 수저를 들었다. 의욕과는 달리 몇 숟가락 뜨지 못하고 더 못 먹겠다며 하나, 둘 뒤로 물러났다.
5.밥도, 술도 반은 남았다. 한창때는 막걸리 한 말, 소주 열 병, 맥주 한 박스를 가소롭게 여기던 사람들 아니던가. 내가 보기에 그들이 잘 통한다는 것은 푸지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룻저녁에 대여섯 번 자리를 옮겨 가며 먹고 마시는 통에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에 귀가하던 사람들이었다. 질펀한 부부싸움까지 벌어져 진을 빼고도, 하루 푹 쉬고 나면 벌떡 일어나서 일터로 갈 수 있었다. 지금은 과음, 과식을 했다가는 여러모로 불감당의 나이가 되었다.
6.밥을 먹었으니 집으로 가야 할 텐데, 비가 내리는 탓인지 다들 꽁무니를 뒤로 빼고 뭉그적거렸다. 밥상을 바라보던 한 사람이 비애감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옛날,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놀던 그 시절이 좋았다며 일명 ‘라떼 시리즈’를 소환했다. 주유소를 운영해서 부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술과 노름을 즐기다가 사업체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남아있는 재산을 까먹는 중이다.
7.레퍼토리가 먹고 놀았던 것부터 시작해서 잘 나갔던 이야기로 치달렸다. 한 사람이 이야기에 물꼬를 트자 그 옆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행정직 공무원으로 강산이 네 바퀴나 돌 때까지 공직에 몸담았다. 승진을 위해 공부하고 성취의 기쁨을 누리며 구청에서 국장으로 퇴직했다. 그 옆 사람도 입맛을 쩍쩍 다시며 끼어들었다. H 대학 도서관장으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말단 직원에서 남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 원하던 자리에 올랐다가 퇴직했다. 그의 옆에 앉은 사람도 한 말씀 거들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누나 회사에서 자신의 사업체인 양 몸 바쳐 일하며 회사를 키웠다. 조카들이 장성하여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 경청하고 있던 남자도 이야기에 숟가락을 얹었다. 한때 컴퓨터 대리점, 휴대폰 대리점, PC방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체를 늘여 갈 때도 있었는데, 세상의 먹이사슬에 잡아먹혀 지금은 일손을 놓았다. 가을비는 배경음악이 되고, 그들은 라떼 이야기를 우려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7.예순을 넘은 사내들의 머리에는 희끗희끗 서리가 내렸고, 얼굴은 기름기가 말랐다. 다른 세대보다 머릿수가 더 많아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바쁘게 살았다. 전성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는 활개를 치더니 화재가 현실로 바뀌자 어깻쭉지가 금방 꺾였다. 심심하네, 돈 떨어질까봐 겁나네, 취업이 안 되네, 잉여 인간 같네, 우울증이 올 것 같네. 경력 단절로 인한 넋두리가 이어졌다. 마치, 잘려져서 없어진 신체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처럼, 이들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은퇴 전의 화려했던 기억에 사로잡혀 환상통을 앓고 있다.
8.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하나, 둘 다시 일을 가졌다. 과거의 경력에 매여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많아 취업에 여러 번 실패를 맛보더니 환상에서 깨어났다. 박봉이라도, 명예로운 자리가 아닐지라도 눈높이를 낮추어 단절되었던 경력을 이어 붙일 일을 구했다. 개인택시 운전, 환경관리공단의 공원 가꾸는 일, 건물 주차관리, 아파트 경비, 또는 기술을 배우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며 은퇴 후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9.없어진 신체 부위의 아픔을 느끼는 환상통은 이전의 기억 때문이다. 지난 연애가 눈부시게 황홀했던 만큼 더 오래 아픈 것처럼, 왕년의 경력이 화려할수록 환상통이 유난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현실을 직시하고 단절된 경력을 이을 수 있는 일을 찾을 때 통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들의 모습에서 새삼 발견한다.
10.나이에 상관없이 머리는 쓰는 방향으로 좋아진다는 뇌 가소성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남아있는 능력을 찾아서 갈고 닦다보면 인생 2막도 활기찬 삶이 될 것이다. 자신의 근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 터이니, 은퇴 후의 삶도 환하게 빛날 수 있으리라.
2. 반짇고리/임윤교
오래된 반짇고리가 있다. 대나무 살로 엮어 만든 이 반짇고리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겉모양이 추레하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간직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빛바랜 반짇고리에서 두런두런 옛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쓰던 이 반짇고리에는 색색의 헝겊과 크고 작은 실꾸리들이 가득했다. 바늘쌈지와 골무, 바늘꽂이와 검정가위 등이 타래실과 함께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그 시절 옷과 양말은 왜 그렇게 잘 해어졌는지 할머니와 어머니는 반짇고리를 줄곧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자녀를 많이 낳던 시대라 어느 집에서든지 옷을 늘이고 줄여 입히느라 바느질감이 넘쳤다.
엄마는 타래실을 풀어 실패에 감을 때마다 나를 불렀다. 내 양쪽 팔에 타래실을 끼우고 간격을 일정하게 지키라고 하시며 실을 감았다. 실이 풀려나오는 모양새가 보기 좋다가도 팔이 아파 올 때면 벌을 서는 것 같아 인상을 쓰곤 했다. 내가 몸을 뒤틀며 딴청을 부리면 어머니는 당신의 양쪽무릎을 세우고 실타래를 혼자 풀어내시곤 하셨다.
겨울이불 홑청을 시칠 때는 제일 큰 무명 실꾸리를 사용했다. 큰 바늘로 시침을 알맞게 뜨면서 “여자는 모름지기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있어야 한다.”며 하나하나 눈여겨보라고 하셨다. 그런 뒤,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어깨너머로 잠시 배웠던 그 바느질 요령이 지금껏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못다 살고 가신 엄마가 그리워서 울었고 여럿인 동생들이 가여워서 울고 지냈다.
커서도 마음이 헛헛한 날은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웠다. 그럴 때마다 더운 날씨를 무릅쓰고 반짇고리를 열어 옷감을 누덕누덕 꿰매었다. 누가 봤으면 오뉴월 염천에 무슨 일이냐고 할만도 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바람을 쐬어도 시원치 않을 날에 바느질이라니. 그러나 차분히 마음을 다잡고 앉아 실꾸리의 실을 한 올 뽑아 바늘귀를 통과 시키고 나면, 쉬이 바느질 삼매경에 빠져들어 갔다.
광목천 네 귀퉁이에 숱한 밤을 기울여 수를 놓을 때도 있었고, 해진 모시적삼 소매 자락에 세모시를 덧대어 짜깁기한 날도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할 때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고조로 집중하였다.
바느질은 답답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반짇고리를 가까이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엄마! 왜 그렇게 빨리 떠났어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 엄마가 살아계신 양, 내게 당면한 과제에 대해 혼잣말을 해 가면서 바늘에 꾹 힘을 주었다.
여러 개의 실꾸리는 부피가 있어 반짇고리 안에 다 담지 못하고 몇 개는 참한 나무 소반에 따로 담아두고 본다. 실꾸리는 시어머님이 살아생전 내 청에 못 이겨 만들어 주셨다. “야야 실꾸리를 만들어 머할라꼬 그라노?” “나중에 어머님 보듯 쳐다볼라 고요.”라며 능청스럽게 대답하였지만, 사실은 옛 실꾸리를 볼 수 없어 선택한 일이었다.
실패에 실이 불어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봉긋하게 중심부분이 솟은 실꾸리 모양이 만족스러웠다. 열 개의 실꾸리가 완성 되었을 때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해결된 것처럼 흐뭇했다.
사람은 떠나고 없어도 물건은 남아 만든 분의 흔적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시어머님의 손을 빌려 완성된 실꾸리들은 옛날, 엄마의 반짇고리 안에 있던 실꾸리랑 꼭 닮은꼴이다. 양쪽 가락은 고운색깔의 양단으로 싸매어져 아름답다. 무명실은 방추형으로 봉긋하면서도 탱탱하게 감겨 있다. 한 가닥의 실을 사선으로 엇갈리게 감아 빗살처럼 가지런하게 포개어 놓은 형국이다. 그 모양새가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요즈음, 옛 모양새의 실꾸리는 어디에도 없어 시선이 잘 가는 자리에 두고 본다. 어른을 향한 모정慕情이 실꾸리를 통해 나에게 이어지는 것 같아 애틋해진다.
두 어머니의 흔적이 어린 반짇고리를 들여다보며 두 분의 삶을 돌이켜 본다. 자식에게 더운밥 먹이는 게 소원이셨던 당신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질곡의 세월을 살아내셨다. 숨기려 해도 삐죽 불거져 나왔던 거친 삶의 상처들이 너무 많았다. 고운 헝겊으로 흉한 세월을 봉인한 채, 실오라기 애써 풀어내어 당신의 삶처럼 반듯하게 감아놓고 이제는 먼 길을 떠나버리셨다. 자식들 품에 안고 그 실꾸리의 실로 지난한 삶의 구멍 난 피륙을 몸소 기워내셨던 것을, 지금에 와서야 기억해내며 눈물 짓는다.
좋은 본을 닮아야 하건만 조금만 삶의 매듭이 풀리지 않아도 삭이지 못하고 지냈다. 인생의 오만가지 구비를 현명하게 풀어내신 두 어머님을 생각하면 자꾸만 얼굴을 붉히게 된다. 오늘도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두 분을 보듯 손때 묻은 반짇고리와 실꾸리를 만지작거린다.
3. 타인의 눈초리/백명철
1) 혼잡한 도로, 앞차가 급정거했다.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뒤 트렁크에서 수박이 구르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잖아도 싱싱하지 않은 수박이 더 상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것은 병상에 계시는 팔순의 숙모에게 초복(初伏)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 아침에 집을 나서며 산 것이었다.
2) 그 수박은 우리 동네 마트 입구, 드나드는 눈길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큼지막하고 무늬가 선명한 것이 가격도 예상보다 훨씬 쌌다. 며칠 전 3만원 가까이 한다는 아내의 푸념을 들었는데 1만 8천원으로 거의 반값 수준이었다. 그새 출하 물량이 갑자기 많아진 것인가 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모두 긁힌 자국이나 찍힌 곳 하나 없이 말짱했다. 특이한 것은 꼭대기 부위에 아기 손바닥만한 선전 로고가 붙여 있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에 로고를 제치니 마른 꼭지가 보였다. 미심쩍은 나의 눈길에 점원은 그저께 입고된 것인데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장담했다. 분명히 더 늦기 전에 팔아치우려는 땡처리 매물이었다. 얼핏 다른 가게에 들러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약속한 방문 시간에 촉박했다. ‘드시는 데야 아무 문제 없겠지’라며 찜찜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40분 거리의 숙모 아파트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3)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혼잡한 대로에 들어섰을 때부터였다. 거동이 불편한 병상의 노인에게 꼭지가 마른 하급품을 선물이라고 들고 가다니 아무래도 경우에 어긋난 일이었다. ‘형편없는 좀생이,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마라.’는 양심의 눈초리가 흘겨보는 것 같았다.
4) 결국, 가는 도중에 싱싱한 다른 수박을 살 요량으로 대로변을 살폈다. 시야를 밝게 하기 위하여 선팅한 차문을 내리고 열심히 둘러 보았으나 과일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차는 막히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막무가내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약속 시간은 이미 20분 정도 지났다. ‘에이, 이왕 산 것이니 그냥 가져 가면 안될까’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던 점원의 자신만만한 얼굴도 떠올랐다. 마침내 나는 시침을 떼고 그냥 가져가기로 맘을 먹었다.
5) 교통은 지, 정체가 계속되었다. 마침 주말이어서 나들이가 많은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이 30분 정도 지났을 때 간병인 아주머니로부터 ‘어디쯤 오고 있는가’고 묻는 전화가 왔다. 매사 꼼꼼한 숙모께서 채근을 했을 것이다. 갑자기, 시간에 쫓긴 조급한 내 머릿속에 수박을 건네 받을 간병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50대 후반으로 입주 간병 경력이 많은 독신녀이다. 안내 센터의 소개로 두 달 전쯤에 숙모 댁에 들어왔다. 활달한 성격으로 숙모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서로 죽이 잘 맞는 모습이라 평소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6) 간병인과 통화 후 불현듯 머릿속에는 수박의 마른 꼭지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수박을 곧바로 자를지 아니면 냉장고에 보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머니는 마른 꼭지를 당연히 볼 것이다. 겉으로야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겠지만 싱싱하지 못한 수박을 사온 조카의 모습에 실망하고 혀를 찰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더욱이 그녀가 겪은 다른 집과 자연스레 비교도 될 것이다. 왠지 앞으로 그녀를 볼 때마다 마른 꼭지가 떠올라 지레 주눅이 들것 같기도 했다.
7) 결국 숙모댁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행인에게 물어서 좁은 뒷 골목 전통 시장을 찾았다. 다행히 과일가게가 있었다. 수박은 싱싱했으나 크기가 작았다. 대신에 어른 주먹 만한 복숭아가 가득 담긴 3만원짜리 상자가 보였다. 가게 아주머니가 삐져주는 조각을 먹어보니 부드럽고 향긋했다. 결재 카드를 내밀자 현금만 받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만원이 부족했다. 1킬로쯤 거리에 있는 은행 인출기를 다녀온 후에야 겨우 그 복숭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이, 참 다네요. 어머니 좀 더 드세요” 간병인이 건네주는 포크를 받아 쥔 숙모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약속 시간에 많이 늦었지만 상급품 복숭아를 산 것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돌아오는 길에, 꼭지가 마른 수박을 두고 갈팡질팡했던 행적이 떠올랐다. 숙모에게 초복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은 어른에 대한 마땅한 도리였다. 그런데 싱싱하지 않은 땡처리 하급품을 산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찜찜한 마음에 중도에서 가게를 찾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자 더 이상 수고하기가 싫어서 그냥 드리려고 했던 심사는 또 얼마나 얄팍하고 무신경했던가. 만약 간병인이 없었다면 마른 꼭지의 수박, 어쩌면 유통기한이 지난 그것을 치켜들고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결국 숙모가 싱싱하고 향긋한 복숭아를 드시게 된 것은 간병인의 눈초리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9)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타인의 눈초리에 민감한 편이다. 이런 성격은 특히 직장생활을 할 때 알게 모르게 구속하는 거미줄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년이 일 년 정도 남았을 때는 조직의 눈초리가 사라진 ‘일상의 자유’가 실제 어떤 것일까 은근히 궁금했다. 퇴임 후의 세상은 한마디로 자유로웠다. 거의 매일 마음 놓고 자정이 지나 잠자리에 들고 늦은 아침에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무위도식의 생활이 서너 달 정도 지나자 택배 물품을 들고 종종 뛰는 젊은이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포도 농사에 목숨줄을 걸고 있는 시골 동생 마주 보기가 괜스레 미안했다. 이런 눈초리 때문이었던지 그 후 곧 나는 게으름의 늪에서 빠져나와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타인의 눈초리는 결국 퇴화한 나의 양심이 아주 어긋나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죽비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