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2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8 - 미국의 영화배우 폴 뉴먼(Newman, Paul) 사망 뉴먼 [Newman, Paul, 1925.1.26~2008.9.26]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폴 뉴먼 별세 오랜 암투병 끝 사망…애도 물결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명배우 폴 뉴먼이 26일(현지시간) 오랜 암투병 끝에 코네티컷주 웨스트포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3세. 할리우드 정상의 배우로 50년 이상 활동했던 뉴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고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베를린영화제 연기자상, 2006년 미국배우 조합상 TV영화, 미니시리즈부문 남자연기상, 2006년 제63회 골든글로브시상식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와 TV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쳐온 연기파 배우다. 뉴먼은 '내일을 향해 쏴라' 외에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컬러 오브 머니' '스팅' 등 숱한 화제작을 남겼으며, 배우이자 아내인 조앤 우드워드와 각종 영화에 함께 출연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뉴먼은 또 1969년 영화 '위닝'을 촬영하면서 처음 접한 자동차 경주에 매력을 느껴 이후 자동차 경주광의 면모를 종종 과시했으며, 말년에는 '뉴먼즈 오운' '책임지는 부자'라는 회사와 단체를 잇따라 결성해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최근 몇년 동안 암으로 투병해 온 고인은 작년 6월 "기억력과 자신감, 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연기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며 은퇴를 선언해 화제를 모았었다. 영국 BBC는 뉴먼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할리우드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로버트 레드포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면서 "나는 진정한 친구 한 명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영화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이용했던 폴 뉴먼은 모든 연기자들의 귀감"이라고 말했으며, 조지 클루니도 "뉴먼은 연기자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기준을 세워놨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워싱턴=연합뉴스) /한겨레 2008-09-28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2700.html
- 대구 개구리 소년들을 찾습니다. (공중전화 카드)
2002 - `개구리소년` 유골, 대구 와룡산서 발견 오늘의 역사 (9월 26일)[2002년] 1991년 3월 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마을 뒷산인 와룡산으로 놀러 나간 대구 성서국교 어린이 5명이 실종됐다. 이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으로 불리며 미궁에 빠졌지만 실종됐던 소년 5명의 유골과 신발 등 유류품이 실종 11년 만인 2002년 9월26일 오전11시30분쯤 발견돼 사건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와룡산 서남쪽 계곡으로부터 2.5km 지점으로 이들이 살았던 달서구 이곡동 집과 다녔던 성서초등학교로부터는 3.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은 당초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저체온(低體溫)으로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추가 발굴 과정에서 총탄과 소매가 매듭 지어진 옷가지 등이 발견되고 유골의 두개골에서 함몰 흔적과 구멍 등이 발견됨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도 비중을 두고 조사했다. 유골 복원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치아와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지 않아 소년들이 대구 와룡산의 발굴지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진 뒤 옮겨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유해 감식을 맡아온 경북대 법의학팀이 3명의 두개골에서 둔기로 맞은 수십 곳의 外傷(외상) 흔적이 발견됐다고 발표함으로써 타살로 가닥이 잡혀가는 듯 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터라 사건의 전말이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0926&cmd=0
2000 - 수영영웅 돈 프레이저 한미전 시구 [올림픽/야구]수영영웅 돈 프레이저 한미전 시구 ○…호주의 수영 영웅 돈 프레이저가 26일 열린 한국과 미국의 야구 준결승에서 시구,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프레이저는 마운드에 올라 미국의 포수 젠슨에게 공을 던져 한국과 미국의 결승티켓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http://news.donga.com/3//20000926/7586916/1
2000 - World Bank IMF Annual Meetings World Bank IMF, Czech Republic, 26-28 Sep 2000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 Airbus A 300-B4
1997 - 인도네시아 항공 에어버스 A300-B4기 수마트라 추락. 234명 사망 10년간 주요 항공기 사고 일지 중국 북방항공공사 소속 여객기 한대가 7일 밤 9시40분(한국시간.10시40분) 북부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해역에 추락해 한국인을 포함한 탑승자 112명 대부분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승객과 승무원 60여명을 태운 이집트항공 소속 보잉 737기가 튀니지 수도 튀니스 인근에서 동체 착륙 도중 추락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즉각 알려지지않고 있다. 지난 10년간 발생한 주요 항공기 사고는 다음과 같다. ▲94년 4월26일= 중화항공 소속 에어버스 A300-600기 일본 나고야(名古屋)공항착륙 도중 지상 충돌로 화재 발생, 탑승자 272명 중 264명 사망. ▲96년 1월8일= 러시아제 안토노프-32기 자이레 수도 킨샤사 시장 추락, 300 명이상 사망. ▲96년 7월17일= 파리행 TWA소속 보잉 747-100기 뉴욕 이륙 직후 공중폭발로 대서양 추락, 탑승자 230명 몰사. ▲96년11월12일= 사우디항공 소속 보잉 747-100기 인도 북부 4천m 상공서 일류신-76기와 충돌 349명 사망. ▲97년 8월5일= 대한항공 소속 보잉 747기 괌 밀림 추락, 226명 사망. ▲97년 9월26일= 인도네시아 항공 에어버스 A300-B4기 수마트라 추락, 234명 사망. ▲98년 2월16일= 중화항공 소속 에어버스 A300-600R기 타이베이(臺北)공항 착륙도중 활주로 이탈 후 민가에 충돌 폭발, 203명 사망. ▲99년 9월2일= 스위스항공 111편 뉴욕 이륙 후 대서양 추락, 229명 사망. ▲99년10월31일= 이집트항공 소속 보잉 767기 미 동부 해안 추락, 탑승자 17명몰사. ▲2000년 1월30일= 케냐항공 소속 에어버스 A310기 아비장 이륙 수분 후 바다추락, 169명 사망. ▲2000년 4월19일= 필리핀항공 소속 보잉 737-200기 사말섬 추락, 131명 사망. ▲2000년 7월25일= 에어 프랑스 소속 콩코드 전세기 파리 이륙 직후 추락, 승객100명, 승무원 9명, 지상 근무자 등 4명 사망. ▲2000.10.30 = 싱가포르항공 보잉 747기 대만공항 이륙시도 후 추락. 탑승객 179명 중 78명 사망. ▲2000.7.17 = 인도항공 보잉 737-200기 파트나공항 인근 추락. 57명 사망. ▲2001년 10월5일=시베리아 항공사 소속 투폴레프-154기 러시아 남서부 흑해에추락, 승객 66명, 승무원 11명 사망. ▲2001.11.12 = 아메리칸항공(AA) A300기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 이륙 직후 추락, 225명 사망. ▲2002년 4월 15일 : 중국 국제항공공사 소속 CCA-129편 보잉 767-200 항공기한국 김해공항 인근에서 추락, 128명 사망, 38명 부상.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2.05.08(수) 07:46 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3/2002/05/007100003200205080746001.html
- 우리별 1호
순수 국내기술로 설계 제작된 과학위성 '우리별 2호'가 1993년 9월 26일 오전 남미 프랑스 령 쿠루기지에서 발사로켓 ‘아리안 V59’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현지 기상악화로 발사가 하루 연기됐던 아리안로켓은 이날도 전기장치와 연료공급장치에 이상이 생겨 두차례 연기끝에 예정시각보다 18분 늦게 발사됐다. 우리별 2호는 발사된지 23분 3초 후 프랑스의 스폿3호와 스텔라호 위성에 이어 로켓에서 분리, 제 궤도를 따라 돌기 시작했으며 오전 11시쯤 처음으로 한반도 인접상공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나갔다. 우리별2호는 우리별1호의 문제점들을 수정-보완하고 국산 부품을 가능한 많이 사용한 위성이다. 총 개발비용 31억2천만원이 들었다. 국내에서 제작된 실험 모듈을 최대한 수용, 소형위성기술의 국내확산을 우리별 2호의 주요 개발목적으로 삼았다. 우리별 2호에는 지구표면 촬영실험기, 소형위성용 차세대 컴퓨터, 고속변복조 실험장치, 전송통신실험장치, 저에너지입자검출기, 적외선 감지기 실험장치 등이 탑재돼 있다. 크기는 352 X 356 X 670mm, 무게 47.5kg로 800km 원형 태양동기궤도를 돌고 있다. /조선
1993 - 캄보디아 주둔 UN군 철수 캄보디아에 주둔했던 유엔 평화유지군이 1993년 오늘 철수한다.
- 1997년, 홍콩 반환 기념
1984년 오늘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1968 - 몽고메리 장군, 전쟁문서 기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사령관을 지낸 몽고메리가 1968년 오늘 전쟁관련 문서를 대영제국 박물관에 기증한다.
1963 - 콩고민주공화국 총사령관 군사훈련 콩고민주공화국의 군 총사령관 모부투!
1960 - 최초 미국 대통령 후보 TV 토론 [어제의 오늘]1960년 최초 미국 대통령 후보 TV 토론 ㆍ‘이미지 메이킹’ 정치의 서막 정치인에게 이미지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자신의 정견과 정치철학을 유권자 대중에게 자세히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호감적 이미지를 내세워 먼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은 ‘이미지 메이킹’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이미지 메이킹에 있어서 선구적 인물이다. 그는 사진 속의 자신이 좀더 호감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보이길 원했다, 그는 사진의 각도와 조명 등을 세밀하게 조정했고 가늘고 긴 목을 가리기 위해 셔츠 깃을 올렸다. 또 얼굴이 너무 야위어 보이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턱수염을 기르고 색을 보정하는 등 ‘뽀샵’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9-25 18:08:09 200909251808091&code=100100&s_code=ap005
1959 - 스리랑카의 총리 솔로몬 반다라나이케(Bandaranaike, Solomon) 사망 반다라나이케 [Bandaranaike, S(olomon) W(est) R(idgeway) D(ias), 1899.1.8∼1959.9.26] 스리랑카(당시는 실론)의 정치가. 그가 총리로 재임하는(1956~59) 동안 스리랑카는 근대적인 정치개혁을 이룩했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5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실론으로 돌아온 그는 정계에 입문했으며, 1931년 신설된 국가평의회(입법부)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에는 여당인 통일국민당(UNP) 소속으로 하원에 진출했으며 보건·지방행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51년 서구지향적인 UNP와 내각에서 사퇴하고, 스스로 스리랑카('정결한 실론'이라는 뜻) 자유당을 창설, 1952년 재선되어 원내 야당지도자로 활약했다. 4년 후에는 4개 주요 민족-사회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인민연합전선(Mahajana Eksath Peramura/MEP)을 구축했고 총선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1956년 4월 12일 총리직에 취임했다. MEP는 대외적으로 중립주의를 표방했고 내정에 있어서는 강력한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국민 다수가 상용하는 싱할라어(語)가 영어를 대신하여 공용어로 지정되었으며 불교는 민족종교로서 국정수행의 중대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우호조약에 따라 영국은 스리랑카에 있는 그들의 군사기지를 포기했고 스리랑카는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59년 9월 25일 그는 시국에 불만을 품고 있던 승려 탈두웨 소마라마의 총격을 받아 이튿날 세상을 떠났으나, 1960년 총선에서 미망인인 시리마보 라트와테 디아스 반다라나이케가 총리직에 올랐다. /브리태니커
1950 - 국군, 서울로 진입 7월 15일부터 맥아더는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안을 구상,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으며,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月尾島)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다. 미국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탈환을 위하여 동진하였고, 미국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30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에게 <더 이상의 유혈과 파괴를 없애기 위해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남한지역에 있는 북한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발췌) (한국전쟁-경과) /야후 백과
1945 - 헝가리의 작곡가 버르토크 벨러(Bartók Béla) 사망 버르토크(바르토크) [Bartók, Béla, 1881.3.25~1945.9.26] 헝가리의 작곡가. 나지센트미클로슈 출생. 5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세 때는 자작 피아노소품을 연주할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899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토만(Thomán István)에게, 작곡을 쾨슬러(Koessler János)에게 배웠다. 이 시기에는 F.리스트, J.브람스, W.R.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으나, 1902년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초연을 듣고 작곡기법에 관한 깊은 계시를 받았다. 이러한 기법상의 영향과 민족의식의 결정이 이 무렵 작품의 토대가 되어 교향시 《코수트 Kossuth, symphonic poem》(1903) 《랩소디 Rhapsody》(1904) 등이 작곡되었다. 1905년부터 코다이와 함께 헝가리민요의 수집을 시작, 조국의 농민음악을 다룬 일련의 작품을 썼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는 인상파의 화성법,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즉 피아노곡 《알레그로 바르바로 Allegro barbaro》(1911), 발레음악 《허수아비왕자 The Wooden Prince》(1916), 오페라 《푸른수염공작의 성(城) Duke Bluebeard’s Castle》(1911) 등은 이 무렵의 작품으로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최초의 작품들이다. 그 후 두 곡의 바이올린소나타(1921∼1922)를 작곡한 시기부터는 새로운 작풍을 보이고 있으며, 그는 있는 그대로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법을 지양하고 인상파적인 기법, 쇤베르크의 음렬작법과 민족성이 융합된 독자적 작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작풍은 중기의 첫번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소나타》(1926)와 《제1피아노협주곡》(1926)에서 잘 구현되었다.
1943 - 일본의 천문학자 키무라 히사시[木村栄, Kimura Hisashi] 사망 키무라 히사시 [木村栄, Kimura Hisashi, 1870.10.4~1943.9.26] 한글 이름 : 키무라 히사시 원어 이름 : Kimura Hisashi(木村栄) 생년월일 : 1870년 10월 4일~1943년 9월 26일 국적 / 지역 : 일본 출생지 : 이시카와 현 카나자와 구분 : 천문학자 연구분야 : 위치천문학 저서 : 위도관측소에 관하여'緯度観測所に就て', 위도변화에 관하여'緯度変化に就て' 공적 : 1902년에 위도변화의 Z항을 발견(자전축 기울기에 관한 방정식으로 종전까지의 식에 Z를 추가함으로써 올바른 식이 되었다(⊿φ = Xcosλ + Ycosλ + Z ) 인물 소개 : 1899년 현재의 국립천문대 미즈사와 VERA관측소 소장으로 취임하고 1941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1911년 일본 박사원의 은사상을 수상하고 1937년 제1회 문화훈장을 받음. /천문학습관 http://astro.kasi.re.kr/Main/ContentViewForm.aspx?MenuID=2082
Hisashi Kimura (木村 栄, Kimura Hisashi, October 4, 1870 – September 26, 1943) was a Japanese astronomer originally from Kanazawa, Ishikawa. He devoted his career to the study and measurement of variation in latitude, building upon the work of Seth Carlo Chandler, who discovered the Chandler wobble. He was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Latitude Observatory at Mizusawa, Japan. He won the Gold Medal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 in 1936. He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o be awarded the Order of Culture when it was established in 1937. The crater Kimura on the Moon is named after him, the same for the asteroid 6233 Kimura. http://en.wikipedia.org/wiki/Hisashi_Kimura
1937 - 미국의 블루스 가수 베시 스미스(Smith, Bessie) 사망 스미스 [Smith, Bessie, 1894.4.15~1937.9.26] 미국의 위대한 블루스 가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노래를 시작했고 초창기의 위대한 블루스 가수였던 마 레이니의 후원으로 직업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수년 간 남부의 여러 주들을 여행해서 애틀랜타·사바나·버밍햄·멤피스 등지의 살롱과 소규모 극장 등지에서 실력을 쌓다가 컬럼비아음반회사의 사장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였던 클라렌스 윌리엄스에게 발탁되어 1923년 2월 첫 음반을 냈다. 그녀가 즐겨 부른 블루스 주제는 가난과 억압, 사랑(대부분 배신당한 사랑), 잔인하고 무정한 세상에 대한 패배, 그리고 이에 대한 관조 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 어법은 후기에 들어 급변하는 유행의 물결을 타지 못했고, 이것이 그녀에게 가장 커다란 비극이었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사회적 힘이 점점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그녀의 음악이 표현하는 감상적인 사실주의를 손상시킴에 따라 그녀의 명성과 음반 판매량도 줄어들었다. 점점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여 결국 매니저들이 그녀를 기피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노래 자체가 질적으로 타락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존 당시 '블루스의 여왕'이라 불렸고, 150여 곡의 음반에는 그녀가 청중들에게 준 감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음반에 녹음된 그녀의 노래들은 대개 소규모 그룹과 함께 부른 것이었고, 여기에는 루이 암스트롱, 플레처 헨더슨, 베니 굿맨 등과 같은 걸출한 연주자들이 포함되었다. 종종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은 채 노래를 불렀던 대담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미인 가수였던 그녀는 미국의 전흑인들의 좌절과 희망을 표현했다. 영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St.Louis Blues〉(1929)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큰 키, 단정한 자세가 담겨져 있는데, 이 영화는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상영 금지를 받았고, 지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백인이었다면 좀더 빠른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으리라는 말이 나돌았다. 에드워드 올비는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희곡 〈베시 스미스의 죽음 The Death of Bessie Smith〉(1960)에 담았다. 1972년에는 크리스 앨버트슨에 의한 전기 〈베시 Bessie〉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907 - 뉴질랜드, 영국자치령 선언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A.타스만이었다. 그러나 타스만은 상륙하지 않고 떠났으며, 그후 1769∼1777년 J.쿡이 여러 차례 두 섬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그리스도교 교화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뉴사우스웨일스(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지였으며, 고래와 바다표범 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1840년 W.홉슨경(卿)과 마오리족 사이에 와이탕기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마오리족은 보호를 받는 대가로 영국 국왕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해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 이민이 시작되었으며, 1882년의 냉장선 취항으로 오지에서도 농목업이 발전하였다.
1898 -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윈(Gershwin, George) 출생 거슈윈 [Gershwin, George, 1898.9.26~1937.7.11] [책갈피 속의 오늘]1898년 재즈 작곡가 거슈윈 출생 축제가 한창인 일본의 한 음대 강당. 재학생들로 구성된 ‘S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시작되자 캄캄한 무대 위에 한 줄기 조명이 비친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926/8635652/1
1897 - 로마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출생 바오로 6세 [Paulus VI, 1897.9.26~1978.8.6] 본명 Giovanni Battista Montini. 이탈리아의 브레시아 출생. 1920년 주교(主敎)가 된 후 교황청에서 근무하다가, 피우스(비오) 12세 때 교황청의 국무장관이 되고,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大主敎)가 되었다. 1963년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어, 전임자가 소집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음으로써, 과감한 가톨릭의 쇄신을 단행하였다.
1888 -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극작가, 평론가 T. S. 엘리엇(Eliot, T. S.) 출생 엘리엇 [Eliot, T(homas) S(tearns), 1888.9.26~1965.1.4] [책갈피 속의 오늘]1888년 美시인 T S 엘리엇 출생 버지니아 울프는 그에 대해 ‘포피스 정장을 입고 있는 것처럼 까다롭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에겐 좋아하는 가수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일면이 공존했다. 그의 집 벽난로 위엔 예이츠와 발레리 같은 대시인의 사진뿐 아니라 담배를 물고 있는 코미디언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1910년대 그와 교류하던 한 인사는 “슬그머니 다가가 붙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저만큼 앞에 서 있다”고 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T S 엘리엇. 그는 이름보다 대표작 ‘황무지’(1922년)로 더 친숙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황무지’의 한 구절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5부 433행의 장시(長詩) ‘황무지’는 시인의 실체만큼이나 난해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시대적 환멸과 허무에 관한 시로 읽히는가 하면 생태주의를 노래했다거나 심지어 불교시라는 주장도 있다. 엘리엇 자신은 “단지 개인적이고 전적으로 무의미한 인생에 대해 불평하고 그것에 리듬을 붙여본 작품일 뿐”이라고 했다. 시인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은 부유했으나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와 과보호가 이뤄졌다. 대학 시절엔 보스턴의 지루하고 삭막한 분위기에, 잠시 머문 파리에선 대도시의 소외감에 갑갑해 했다. 옥스퍼드대 유학 시절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정신질환이 짐이 됐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낮에는 직업인 은행일로 시달리고, 밤에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의 신경질을 견뎌야 했으니 결코 평범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시편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엘리엇은 “훌륭한 시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逃避)여야 한다”는 몰개성시론을 주창했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이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자신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동아닷컴 2005-09-26 03:06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0926/8231748/1
1874 - 미국의 사진작가 루이스 하인(Hine, Lewis) 출생 하인 [Hine, Lewis Wickes, 1874.9.26~1940.11.3] 미국의 사진작가. 사진을 통해 사회병폐에 대한 공공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학자로 교육받은 그는 1905년 뉴욕의 엘리스 섬에 북적거리던 이민자들을 찍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이 강제적으로 거주하고 일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의 공동주택과 공장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1908년 〈자선과 서민 Charities and the Commons〉(후에 〈관찰 Survey〉로 제목이 바뀜)으로 발간되었다. 1909년 어린이들의 노동을 기록한 많은 사진이야기 중 첫번째로 〈캐롤라이나의 어린 노동자 Child Labor in the Carolinas〉·〈때가 되지 않은 노동자 Day Laborers Before Their Time〉 등을 발표했고 이 사진 이야기들에 포함된 〈석탄채광을 하는 소년광부들 Breaker Boys Inside the Coal Breaker〉·〈캐롤라이나 면방적 공장의 어린 방적공 Little Spinner in Carolina Cotton Mill〉 같은 사진에서는 위험한 상황에서 장시간 일하고 있는 8세의 어린 노동자들을 보여주었다. 2년 후 그는 국립소년노동문제위원회에 기용되어 미국 내의 어린이 노동실태를 광범위하게 조사했으며, 동부 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착취당하는 어린이들과 그들이 사는 빈민굴에 대해 섬뜩할 정도의 사진들을 만들었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비밀리에 넣고 다니던 공책에 어린이들과의 대화를 조심스럽게 기록했고 그들의 집에 있는 성서에 적힌 생일을 찍었으며 자기 옷에 달린 단추 위치로 어린이들의 키를 쟀다. 제1차 세계대전말 적십자사의 사진가로 복무했고 휴전 이후 발칸 반도에 있는 적십자사에 남아 〈발칸 반도 어린이들의 짐 The Children's Burden in the Balkans〉(1919)이라는 사진이야기를 발표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공사를 기록하는 데 기용되었는데 사진에 대한 그의 열의는 위험한 것도 잊게 만들어 〈마지막 들보를 박다 Riveting the Last Beam, Empire State Building〉(1931)를 찍을 때 그는 적합한 사진 각도를 얻기 위해 기중기에 달린 고리에 몸을 매달고 공중으로 나갔다. 대형사진기를 조작하느라 두 손이 다 필요했기 때문에 다리만을 고리에 묶고 역사적인 사진들을 만들었으며 1932년 이 사진들을 〈일하는 사람들 Men at Work〉로 발표했다. 그는 정부사업에 대한 기록사진을 찍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1868 -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아우구스트 뫼비우스(Möbius, August) 사망 뫼비우스 [Möbius, August Ferdinand, 1790.11.17~1868.9.26] 독일의 수학자·이론천문학자. 해석기하학과 위상수학(位相數學)의 업적으로 유명하다. 위상수학에서는 특히 뫼비우스 띠발견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815년 라이프치히대학교의 천문학교수가 되었고 그뒤 1818~21년에는 그의 감독하에 설립된 대학천문대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1815년 〈행성들의 엄폐 계산에 대하여 De Computandis Occultationibus Fixarum per Planetas〉를 출판해 이론천문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밖의 순수천문학에 관한 출판물로 〈천문학 원리 Die Hauptsätze der Astronomie〉(1836)·〈천체역학 원리 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1843) 등이 있다. 그의 수학논문은 대부분 〈크렐레 저널 Crelle's Journal〉(1828~58)에 실렸는데 주로 기하학에 관한 것이고, 이중 많은 논문에서 〈중력중심의 계산 Der barycen-trische Calkul〉(1827)에서 주장되었던 방법을 응용·발전시켰다. 그는 이 연구에서 동차좌표를 해석기하학에 도입했고 또한 도형변환, 특히 사영변환(射影變換)을 연구했다. 그는 뫼비우스 그물로 알려진 형태를 논했는데, 이는 뒤에 사영기하학의 체계적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1837년 〈정역학(靜力學) 편람 Lehrbuch der Statik〉에서 그는 정역학(역학의 한 부문)을 기하학으로 다루어 점과 면의 영계(零系 null system)와 공간의 선체계(線體系 systems of lines)를 이끌어냈다. 뫼비우스는 위상수학의 선구자였다. 그가 죽은 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견된 논문은 그의 이름을 딴 뫼비우스 띠를 포함한 단측곡면(單側曲面 one-sided surface)의 성질을 논하고 있었다. 1885~87년에 그의 〈전집 Gesammelten Werke〉(4권)이 나왔다. /브리태니커
1849 - 러시아의 생화학자 이반 파블로프(Pavlov, Ivan) 출생 파블로프 [Pavlov, Ivan Petrovich, 1849.9.26~1936.2.27] [역사 속의 인물]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개를 통한 실험으로 조건반사의 개념을 정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02년에 타액이 입 밖으로 나오도록 수술한 개로 침샘을 연구하던 중 사육사의 발소리로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먹이를 줄 때 종을 치다가 먹이 없이 종소리만 울려도 개가 침을 흘리는 실험으로 1904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으나 동물을 학대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파블로프는 또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정치권력과 대립각을 세운 그의 행적은 과학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다. 그는 1849년 오늘 태어나 국제적인 명성이 드높았던 68세 때 공산 혁명을 맞았다. 73세 때 레닌에게 연구소를 해외로 옮기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급의 특혜를 거부했다. 다음해 미국을 방문해 공산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했고 2년 후 성직자의 자녀들이 군사의학 아카데미에서 축출되자 자신도 대학교수직을 사임했다. 그는 레닌에 이어 등장한 스탈린에게도 탄압 행위를 비난하는 항의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실험 연구소가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었지만, 공산주의자 학자가 연구소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그의 국제적 지명도 때문에 어쩌지 못하다가 철권통치의 강도를 더하기 이전인 1936년에 그가 87세로 숨지자 한숨을 돌렸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년 09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641&yy=2013
1843 -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조셉 퍼피(Furphy, Joseph) 출생 퍼피 [Furphy, Joseph, 1843.9.26~1912.9.13] 필명은 Tom Collins.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그의 소설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골생활과 향토색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독학한 노동자 특유의 절충주의 철학과 문학사상이 나타나 있다. 아일랜드계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난 퍼피는 타작하는 일, 짐승부리는 일, 금캐는 일 등을 하다가 1884년 셰파턴에서 형들이 경영하던 주물공장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톰 콜린스의 일기를 발췌한 형식으로 된 악한 소설 〈인생이란 그런 것 Such Is Life〉(1903)을 썼다. 그밖에 〈인생이란 그런 것〉의 원본에서 뽑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리그비의 사랑 Rigby's Romance〉(연재 1905, 단행본 출판 1921)과 〈하프새와 두루미 The Buln Buln and the Brolga〉(1948 사후출판)가 대표작이다.〈시집 Poems〉은 1916년에 나왔다. /브리태니커
- Alexandr I
1815 - 신성동맹 체결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국제평화와 질서유지를 그 목적으로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먼저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를 설득하여 조인에 참가시키고 터키를 제외한 유럽의 전(全)군주에게 가맹장을 보냈다. 터키 황제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참가요청을 받지 않았다. 이 동맹의 골자는 '각국의 군주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서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돕고, 자기 나라의 신민(臣民)에 대해서는 가부(家父)와 같이 동포애의 정신에 따라 이를 지도하며, 신앙 ·평화 및 정의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지극히 관념적 · 비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로마 교황, 그리고 영국 왕 이외의 모든 유럽의 군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신성동맹은 1823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먼로선언'을 하고 그 전후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공화제로 잇달아 독립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뒤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1825년 전유럽적 체제로서의 동맹은 와해됐다. /조선
- 'Self-portrait' - 'Guard Officer on Horseback' - 'The Raft of the Medusa'
1791 -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Géricault, Théodore) 출생 제리코 [Géricault, (Jean-Louis-André-)Théodore, 1791.9.26~1824.1.26] 1791년 9월 26일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18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18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조각작품도 몇 점 남겼다. /naver
1784 - 노르웨이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크리스토퍼 한스텐(Hansteen, Christopher) 출생 한스텐 [Hansteen, Christopher, 1784.9.26~1873.4.15] 노르웨이의 천문학자·물리학자. 지자기(地磁氣)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세기초 지자기의 세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자 한스텐은 런던·파리·핀란드·시베리아(1828~30)에서 지자기 측정을 계속했다. 1826년에 처음으로 자기장의 세기에 대한 믿을 만한 도표를 만들어 출판했다. 그러나 지자기에 대한 한스텐의 이론은 그가 수행한 지자기의 측정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한스텐 이전의 핼리의 이론처럼 한스텐의 이론도 1839년에 가우스에 의해 그 잘못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가우스는 한스텐이 그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한스텐은 노르웨이 최초의 천문대(1815)와 자기측정소(1841)를 세웠다. 1833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 1839년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브리태니커
1580 - 영국의 항해가 드레이크, 세계일주 마치고 귀환 드레이크-세계일주 항해 1577년 드레이크는 마젤란 해협을 통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그 너머의 해안을 탐사하기 위한 원정대의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 원정의 목적은 스페인 영향권에 있는 남쪽 지역의 주민들과 교역협정을 타결짓기 위한 것이었으며, 가능하다면 멀리 남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다고 풍문으로 전해지는 미지의 대륙까지 탐험하는 것이었다. 이 원정은 엘리자베스 1세가 직접 지원한 것으로 드레이크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드레이크는 여왕으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입히는 것뿐만 아니라, 여왕의 이권과 함께 드레이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얻었다. 이때 드레이크는 처음으로 여왕을 대면했으며 여왕으로부터 직접 "내가 당한 손해만큼 스페인 국왕에게 기꺼이 복수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12월 5척의 소형 선박에 200명 남짓 되는 사람을 이끌고 항해를 시작해 1578년 봄 브라질 해안에 당도했다. 원정함대의 기함(旗艦)인 '펠리컨호'는 약 100t에 불과했는데 드레이크는 나중에 이 기함의 이름을 '더골든하인드호'라고 바꾸었다. 이 배는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의 영역 안에서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충분치 못해 보였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드레이크는 자신에 항거하는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모자인 토머스 도티를 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그는 항상 규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으며, 탐험에 참가한 사람 모두가 자신에게 확고한 충성을 하지 않는다면 추호도 탐험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식량저장선 역할을 하던 2척의 배를 포기하고 식량을 다른 배에 옮긴 후 계속 항해해 1578년 8월 21일 마젤란 해협에 진입했다. 해협을 통과하는 데 16일이 걸렸으며 마침내 드레이크는 태평양을 2번째 보게 됐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영국 선박의 갑판 위에서 태평양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드레이크는 "하느님이 맞바람과 견디기 어려운 폭풍우를 내리는 것을 보니 우리에게 등을 돌렸는가 보다"고 기록했다. 강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드레이크가 탄 기함과 제2지휘함이 서로 떨어졌으며, 기함을 찾는 데 실패한 제2지휘함은 드레이크의 배가 침몰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따라서 끝까지 태평양으로 진입해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항해해 올라간 선박은 드레이크가 탄 기함 1척뿐이었다. 그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해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이 거의 방심하고 있었으며 적대국의 선박이 자기들의 해역에 들어와 있다는 점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드레이크는 발파라이소에서 식량을 노획했으며, 지나가던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상당한 재물을 보유한 선박 2척을 나포했다. '더 골든 하인드호'가 세계일주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를 떠날 무렵에는 금·은괴와 스페인 주화, 진주 및 값비싼 보석들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하기에 앞서 대서양으로 되돌아가는 북서항로를 찾아내기 위해 벤쿠버와 나란하게 북위 48。 방향으로 항로를 틀었다. 매서운 추위를 만나게 되자 그는 남쪽 해안으로 항해해 나가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정박했다. 그 주변지역을 뉴알비온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로 정했다. 아메리카 대륙 북쪽으로 통하는 항로를 찾으려 했던 드레이크는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지금의 캐나다 서부해안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1579년 7월 태평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항해해 갔으며 68일이 지난 후 한 제도(아마 팔라우 제도인 듯함)를 발견했다. 거기서부터 필리핀으로 계속 항해했으며 필리핀에 당도해서는 식수를 채우고 다시 몰루카 군도를 향해 떠났다. 몰루카에서 드레이크는 그 지역 통치자에게서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영국인들에게 향료교역권을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크의 원양 항해술은 탁월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태평양 바다에서 배가 좌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암초에서 헤어나왔으며, 자바에 잠시 기항한 뒤 희망봉을 향해 인도양을 가로질러 항해를 계속했다. 마젤란 해협으로 들어선 지 2년 만에 '더 골든 하인드호'는 지구를 1바퀴 돌아 다시 대서양으로 들어섰다. 처음 출발할 때 승선했던 100명의 선원 가운데 56명만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1580년 9월 26일 마침내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탄 배는 플리머스 항에 들어왔다. 이 배에는 보물과 향료가 가득 실려 있었으며 드레이크의 몫은 평생을 써도 좋을 만큼의 재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로 세계일주를 한 최초의 선장이었으며(포르투갈의 페르난두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해를 끝마치기 전에 죽었음) 태평양과 인도양, 남대서양을 항해한 최초의 영국인이 되었다. 스페인측은 드레이크가 스페인 제국 해역에서 해적질을 했다고 비난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템스 강 어귀 데트퍼드에 정박한 '더 골든 하인드호'에 몸소 올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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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