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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을 찾아서] 퇴계 오솔길 - 청량산 육육봉을 바라보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 ‘미천장담’ 낙동강길 따라 왕복 10㎞ 내외 걸으며 퇴계 詩도 감상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가 길에서 다시 태어났다. 퇴계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 낙동강 상류 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가던 길을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로 단장해 새 코스로 내놓았다.
퇴계 이황(1501~1570)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성리학의 거봉이다. 그의 학문적 영향은 현재까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더욱 그의 인품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그의 인자한 성품을 대변하는 어릴 적 일화 한 토막. 퇴계가 8살 때 바로 위의 형 해가 손을 다쳐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와 상처 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어여삐 여겨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퇴계는 여전히 울먹이며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아니 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성품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과 하늘다리. 그 밑에 학소대의 기암절벽,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등은 한 편의 산수화를 펼쳐보는 것 같다.
그런 퇴계는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했어도 청량산이 있는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해 단양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다.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도 그가 고향 근처로 가기를 원해서 얻은 관직이었다.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 이후엔 명종이 65세인 퇴계를 직접 찾았다. 명종이 보낸 ‘왕의 전교’ 전문이다.
“내가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퇴계가 거절하자 명종은 다시 ‘왕의 유지’를 보내 불렀다.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오라.”
▲ 강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낙동강 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알리고 부디 병든 몸을 놓아 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명종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그것이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4~5년 전인 1565년과 1566년의 일이다.
훗날 기대승(奇大升)은 이런 퇴계를 두고 “중년 이후로는 바깥으로 달리려는 뜻을 끊었다”고 말했으나 제자 조목(趙穆)은 “온당치 못한 표현”이라며 “선생은 애당초 권세나 이익 따위의 분잡하고 화려한 것에 대해 담박했다”고 반박했다.
퇴계는 기본적으로 구도자였고,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도 한때 중앙정치에 몸을 담았으나 45세 때 발생한 을사사화에서 죽임을 당한 둘째 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귀거래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관직생활 중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한때 산어귀를 거니는 무리”일 뿐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은자여야만 산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권세나 이익 좇지 않고 청량산 좋아한 구도자
그는 혼란한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선 구도자의 심정으로 관직을 사직했다. 47세에 홍문관으로 조정에 들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관뒀고, 48세 되던 해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부임했으며, 그 해 10월엔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듬해 4월 소백산을 다녀온 뒤 <소백산유람록>을 쓰고 이름을 ‘서간병수(栖澗病?)’라고 적었다. 즉 시냇가에 깃들여 사는 병든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 해 12월에는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귀향했다.
▲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바로 옆으로 갈대가 우거져 더욱 운치를 자아낸다.
퇴계는 산수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산야기질(山野氣質)’의 소유자였다. 또한 산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고, 우러러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에게 산놀이는 인간 욕망을 억제하고 본성의 깊이를 규명하는 공부로 상징됐다.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를 마음 수행, 지식 수행으로 받아들였다. 청량산에 오르면서 그 마음을 잘 표현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 있다.
“글 읽기와 산놀이가 비슷하다 하지마는(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 읽기와 같으도다(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 공력이 다할 때는 으레 내려오고(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 얕고 깊음 아는 것도 모두 이에 있더구나(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 열 구름 앉아 보아 기묘함을 알았었고(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 근원지에 이르러선 비롯됨을 깨달았네(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 마루턱 찾을 것을 그대들에 기대하니(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 늙어서 전진 못하는 이 몸, 내 깊이 부끄러워라(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 (왼쪽부터) 오솔길은 풀밭길로도 연결돼 걷기에 더욱 좋다. / 강변길이 끝나면 호젓한 숲속길이 이어지는 퇴계 오솔길.
사실 산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힘이었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며,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도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산책을 예찬했다.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칸트도 매일 새벽 그의 산책을 보고 주민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 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이와 같이 걷기는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닌 머리와 마음을 일깨워주는 사색의 방법인 것이다.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퇴계는 13세 때 숙부인 송재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50리 강변길을 떠난다. 그 후 수 차례 이 길을 오가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사랑했다.
청량산 관련 시만 51편 남겨
1548년 퇴계는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당나라 한유(韓愈)가 형악(오악 중 형산)의 신에게 묵도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형산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산이 신령한 기운과 교감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조화와 자취를 진정으로 즐겼던 듯하고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 심정을 적절히 읊은 그의 시 ‘등산(登山)’이다.
“그윽한 곳 찾느라고 깊은 골을 넘어가고(尋幽越濬壑 심유월준학) / 멧 숲을 거듭 뚫어 험한 데를 지났노라(歷險穿重嶺 역험천중령) / 다리 힘이 피로함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無論足力煩 무론족역경) / 마음 기약 이룩됨을 기뻐하곤 하였노라(且喜心期永 차희심기영) / 이 메의 솟은 양이 높은 사람 흡사하여(此山余高人 차산여고인) / 한 곳에 홀로 서서 그 생각 간절코녀.(獨立懷介耿 독립회개경).”
걷기는 시각으로 시작해서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이어진다. 즉 명상과 달리 걸으면서 몰입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퇴계의 시 ‘등산’에서도 감각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퇴계 오솔길은 꽃과 나무와 야생화와 강이 우거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퇴계 오솔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의 시각을 충분히 휘어잡는다. 출발지점은 도산면 단천교다. 단천교 바로 옆에 ‘녀던길(옛길)’이란 이정표가 있고,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퇴계 선생께서 즐겨 다니시던 오솔길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 선생의 시적 감흥을 현장을 거닐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녀던길’이란 비석도 세워져 있다.
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순간적으로 감흥은 일어나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않는다. 약 2㎞를 비슷한 길로 계속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2㎞쯤 지나 퇴계의 첫 시비(詩碑)가 나오고 전망대에 이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청량산 깊은 골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사이로 곡예를 그리며 빠져나오는 낙동강 줄기는 정말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했다. ‘겸재 정선이 어떻게 이런 멋진 곳에 와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려선 강둑길은 갈대로 뒤덮였고, 덩그러니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그루가 운치를 더했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느라 발길을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강변의 조약돌은 갖가지 모양으로 눈길을 끌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갈대로 뒤덮인 모래밭을 지날 때는 살랑거리는 갈대가 귓가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다.
전망대나 농암종택에서 당일 왕복 가능
퇴계가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러 청량산에 가면서 “그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까지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한번 나온 감탄은 그칠 줄 몰랐다. 마침 날씨가 맑아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한 하늘다리까지 조망이 가능했다.
▲ 강변길은 사유지 문제로 곤란을 겪자 시에서 건지산으로 우회로를 만들었다.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서야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청량산의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해서 제법 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의 강줄기를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고 한다. ‘여러 지천이 모여 이룬 길고 깊은 소’라는 뜻이겠다. 퇴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도미천망산(渡彌川望山)’을 남겼다.
“굽이굽이 맑은 여울 건너고 또 건너니 /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 맑은 여울 높은 산이 숨었다가 나타나니 / 끝없이 변한 자태 시심을 돋워주네.”
퇴계만이 아니라 누구나 시적 감흥이 생길 법한 강변길에는 또 의외의 발자국이 나온다. 해변가에나 있을 법한 공룡 발자국 흔적이 이곳에도 뚜렷이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정말 공룡 발자국같이 생겼다.
길은 오솔길로 변했다. 풀들이 길을 덮은 호젓한 길이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을 법한 장소에 정자와 연못이 있어 탐방객들에게 휴식처가 된다. 퇴계 시비가 있어 잠시 쉬어가는 객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 백운동에 있는 시사단. 지방에서 최초로 과거시험을 치른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퇴계 오솔길은 시야가 확 트인 강변을 다시 만나자 외줄처럼 일직선이 된다. 강 옆에 우뚝 솟았지만 상단은 미끈하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잠시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한다. ‘경암(景巖)’이라 불리며 여기에서도 시 한 수를 선사했다.
“부딪는 물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 중류에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리.”
길은 계속되고 아름다운 풍광도 연속이다. 경암을 지나니 곧이어 한속담(寒粟潭)이다.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이 흐름을 멈춘 듯 담을 이룬 곳이다. 말을 타다 걷기도, 또는 가마를 타기도 했을 법한 퇴계는 절경에 반해 또 ‘한속담(寒粟潭)’이란 시를 읊었다.
▲ 미천장담 낙동강을 따라 퇴계 오솔길을 걸으며 학소대를 쳐다보고 있다.
“벌벌 떠는 여윈 말로 푸른 뫼를 넘어가서 / 깊은 골짝 굽어보니 찬 기운이 으시시 /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선경이라 / 기괴한 돌 긴 소나무 시냇가에 널렸구려.”
한속담 바로 옆에 거대한 수직절벽인 학소대(鶴巢臺)를 만난다.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먹황새)이 서식하여 학소대로 명명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의 분비물이 바위에 묻어 있는 듯하다.
이어 퇴계 오솔길의 마지막 지점인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농암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종1품 숭정대부에 이를 정도로 화려한 벼슬을 했지만 이런 이력보다는 무위자연의 삶을 즐기며 강호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한국 ‘강호문학의 창도자’가 바로 농암 이현보다. 그는 퇴계보다 30여 년 빠른 인물로 퇴계가 아버지처럼 모시며 따랐던 것으로 전한다.
후덕한 인품…시와 글에 남아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졌다가 2000년대 들어 현재의 위치에 재건됐다. 종택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강물의 벽이 벽력암이다. 벽력암은 태백에서 떠내려 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선성지(宣城誌)>에는 “벽력암 아래에 있는 깊은 연못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종택 바로 옆에는 그네도 있고, 널찍한 공터도 있다. ‘퇴계 오솔길’은 여기까지다. 이후 청량산 가는 길은 도로로 포장돼 있다.
퇴계의 청량산에 관한 기록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끝내자. 퇴계는 1552년 명종 7년에 주세붕의 <청량산 유산록>에 다음과 같은 발문을 붙였다.
“위대하여라, 선생이 이 산에서 얻은 것은! 홍몽한 상태로부터 음양의 기운이 나뉘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기운이 형체를 응집한 이래로 몇 천만 겁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갈무리한 승경과 땅이 감추어둔 기이한 구역이 바로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야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커다란 만남이 아니었겠는가. 하물며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정말로 이 선경의 모욕이요, 우리 유학자의 수치였다. 선생이 일일이 고쳐주시고, 통렬하게 씻어내주셨으니, 그로써 산신령을 위로하고 정채(精彩)를 빛나게 하신 업적이 얼마나 크냐!”
주세붕은 퇴계의 글을 보고 “정말 어린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퇴계는 그 점에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주세붕을 선배로서 깎듯이 예우했다. 넉넉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그 넉넉한 인품이 지금 500여 년을 지나 다시 그 길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말년에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다시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한 수 읊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그는 청량산 바로 앞에 있는 건지산 자락에 묻혔다. 죽어서도 청량산을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시 ‘송별’이 ‘퇴계 오솔길’ 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정자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대 가니 이 봄을 누구와 더불어 노닐고(君去春山雖共遊 군거춘산수공유) /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류) /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今朝送別臨流水 금조송별임류수) /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퇴계 오솔길에 가면 퇴계와 그의 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양반문화 본류로서의 안동
서민문화 상징인 하회탈 있기에 양반문화와 종택 건재 가능
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다. 왜, 언제부터 안동이 양반문화의 대표도시로 자리 잡았을까?
안동은 과거부터 ‘안동도호부’ 등이 있으면서 도시 규모가 컸지만 양반문화의 본류는 아니었다. 특히 고려시대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조선시대 들어서 사림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안동이 양반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안동은 사림의 본고장으로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유림들의 핵심 도시로 부상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전부 훈구세력으로서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 입장이었던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안동이었고, 안동은 사림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지방에서 학문을 쌓고 세력을 키운 사림은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더욱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다 원래 중앙에 있던 훈구세력과 부딪힌 사건이 을사사화·기묘사화 등의 당쟁이었다. 이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해 일부는 다시 낙향하기도 했지만 이미 사림은 무시할 수 없는 조선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사림의 본고장이라고 해서 양반도시가 된 것은 아니다. 안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많은 종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실은 여기에 양반문화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 퇴계 오솔길 중간쯤 나오는 경암.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쉬어갔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안동은 양반문화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서민문화의 상징인 하회탈로도 유명하다. 안동 서민들은 하회탈을 쓰고 양반문화를 통렬히 비꼬고, 풍자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일종의 ‘하회탈 카타르시스’를 즐겼던 것이다. 양반들도 그냥 허허 웃으며 같이 즐겼다.
양반들이 그런 서민을 박해했다면 더 이상 안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회탈을 통한 서민의 소리를 안동 양반들은 문화의 한 형태로 인정했다. 후덕한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 퇴계 오솔길의 시작지점이자 동시에 끝지점인 농암종택. 안동댐 건설 이후 이곳으로 옮겨 조성했다.
서민은 양반의 그런 아량을 존경하게 되었고, 양반은 서민의 문화를 인정하며 서로 공존했다. 안동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과 현대에 들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전쟁의 주역이었던 서민은 안동의 양반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려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안동, 즉 한국 최고의 종택을 보존한 도시가 되었고,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동 문화해설사 박점석씨
‘원조’ 문화해설사… “안동문화 자부심 가지고 설명하죠”
“안동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문화해설사도 안동에서 처음 생겼지요. 그런 자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안동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동시청 소속 문화해설사 박점석(50)씨는 지난 2000년 문화해설사란 제도가 안동에 처음 생기면서 바로 안동 문화를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주부로서 생활을 하다 지난 1996년 ‘뭔가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안동문화생활관을 노크한 게 계기가 됐다.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생활관은 전국 어디보다 열기가 뜨거워요. 어느 강좌든지 개강하자마자 바로 수강생이 만원이 될 정도예요. 그것도 안동문화의 힘이 아닐까요.”
박씨는 주부문화생활관에서 자원봉사로 일하다 문화해설사가 생기는 걸 보고 바로 지원했다. 이제는 문화해설사 생활이 만 10년째다.
“안동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이 배워요. 이것저것 살펴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죠. 안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잘 소개하면 그게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죠.”
이제 아들들도 다 커서 대학생이 됐다. 그 전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했지만 지금은 남는 시간을 충분히 안동 문화 공부에 할애하고 있다.
“안동에 오시면 꼭 저를 찾으세요. 안동 문화의 모든 것을 전달할 드릴게요.”
퇴계와 관련된 주변 명소로는 ‘퇴계 오솔길’ 바로 직전에 도산서원이 있다. ‘해동주자’라 불리는 퇴계 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았던 곳이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으로 건립했다. 현재 그 장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퇴계 선생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하던 곳인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됐다. 이곳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사액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직접 쓴 글씨다. 그 외에 선생이 거처하시던 완락재와 암서헌, 제자들이 공부하던 농운정사,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 등이 있다.
▲ 도산서원
도산서원 조금 못 가서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육사는 퇴계 선생의 15대 손이다. 육사는 안동 생가의 들판에서 눈 내린 날 강물을 바라보며 그의 유명한 ‘광야’를 지었다고 한다. 문학관은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친딸 이옥비 여사가 지키고 있다. 그녀도 일흔을 훌쩍 넘겼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안동 쪽으로 조금 가면 퇴계종택이 있다. 현재 퇴계종택은 그의 후손들이 안동댐으로 수몰된 종택들을 이곳으로 옮겨 건립한 건물들이다. 육사문학관과 퇴계종택 중간쯤에 있는 건지산 끝자락에 퇴계 선생의 묘지와 그 한참 아래에 그의 며느리 묘가 있다.
▲ 이육사문학관
답사 가이드
강변길 사유지 문제로 건지산 등산로 우회로 만들어 안내
‘퇴계 오솔길’은 출발지점을 도산서원 조금 지나서 나오는 단천교와 끝지점인 농암종택 양 방향에서 모두 답사할 수 있다. 당일 코스로 승용차로 단천교에서 출발할 경우 2㎞ 가량 차를 몰고 전망대에 주차하는 게 시간을 활용하기에 좋다.
전망대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코스는 바로 강변길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건지산 등산로로 오르는 길이다. 강변길은 아름다운 길이 연속으로 펼쳐져 한때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을 만들면서 갈대가 우거진 넓은 공터에 시민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소유주가 반대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시에서는 토지를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지주가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러 협상이 결렬됐다. 그래서 시에서 건지산 등산로를 만들어 산길로 둘러 정자까지 가서, 그곳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가는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변길로만 가면 단천교에서 농암종택까지 편도로 약 4.8㎞ 거리다. 단천교에서 전망대까지 거리가 약 2㎞이므로 전망대에 차를 주차하고 가면 3㎞가 채 안 되는 거리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갔다가 올 때 건지산 등산로로 오면 거리가 총 8.4㎞ 정도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둘러보려면 왕복 4시간은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길은 외길이라 헤맬 우려도 없고 건지산~강변길~농암종택으로 간다면 산길과 들길, 강변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교통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영동고속도로 원주·이천 방향으로 진입한 후 중앙고속도로 안동·남원주로 다시 갈아탄다. 이어 계속 내려가다 서안동IC에서 빠져나와 안동으로 진입해서 도산서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과 센트럴터미널에서 안동행이 있다. 3시간 걸리며, 요금은 1만5,600원.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3번과 67번 시내버스를 타면 농암종택과 도산면 단천교까지 간다. 버스요금은 1,100원이며 소요시간은 40분 남짓.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는 약 3만 원.
숙박과 맛집
퇴계 오솔길 주변엔 먹고 잘 곳이 없다. 가는 도중에 열화당(054-855-8332)이 있다. 숙박과 음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하지만 주중에 숙박하려면 예약해야 한다. 주인이 서울에 살기 때문에 수시로 집을 비운다.
출발점이자 끝지점인 농암종택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4~5명이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은 7만 원, 7~8명이 숙식할 수 있는 큰 방은 10만 원선. 농암종택은 그 후손이 직접 운영한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 안동시내에서 안동의 다양한 음식을 맛본다. 특히 안동찜닭과 안동국시 등은 서문시장에 가면 전문점이 수두룩하다. 안동찜닭은 경북 지정 으뜸 음식점으로 서문시장에 ‘안동찜닭 종손(054-855-9457 또는 010-6564-9989)’ 등이 있다.
그 외에 안동과 관련한 정보는 안동관광정보센터(054-856-3013), 경북종합관광안내소(054-852-6800), 도산서원관리사무소(054-856-1073) 등에 문의하면 된다.
[출처] [옛길을 찾아서] 퇴계 오솔길 - 청량산 육육봉을 바라보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 |작성자 풀향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가 길에서 다시 태어났다. 퇴계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 낙동강 상류 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가던 길을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로 단장해 새 코스로 내놓았다.
퇴계 이황(1501~1570)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성리학의 거봉이다. 그의 학문적 영향은 현재까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더욱 그의 인품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그의 인자한 성품을 대변하는 어릴 적 일화 한 토막. 퇴계가 8살 때 바로 위의 형 해가 손을 다쳐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와 상처 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어여삐 여겨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퇴계는 여전히 울먹이며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아니 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성품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과 하늘다리. 그 밑에 학소대의 기암절벽,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등은 한 편의 산수화를 펼쳐보는 것 같다.
그런 퇴계는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했어도 청량산이 있는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해 단양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다.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도 그가 고향 근처로 가기를 원해서 얻은 관직이었다.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 이후엔 명종이 65세인 퇴계를 직접 찾았다. 명종이 보낸 ‘왕의 전교’ 전문이다.
“내가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퇴계가 거절하자 명종은 다시 ‘왕의 유지’를 보내 불렀다.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오라.”
▲ 강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낙동강 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알리고 부디 병든 몸을 놓아 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명종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그것이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4~5년 전인 1565년과 1566년의 일이다.
훗날 기대승(奇大升)은 이런 퇴계를 두고 “중년 이후로는 바깥으로 달리려는 뜻을 끊었다”고 말했으나 제자 조목(趙穆)은 “온당치 못한 표현”이라며 “선생은 애당초 권세나 이익 따위의 분잡하고 화려한 것에 대해 담박했다”고 반박했다.
퇴계는 기본적으로 구도자였고,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도 한때 중앙정치에 몸을 담았으나 45세 때 발생한 을사사화에서 죽임을 당한 둘째 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귀거래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관직생활 중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한때 산어귀를 거니는 무리”일 뿐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은자여야만 산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권세나 이익 좇지 않고 청량산 좋아한 구도자
그는 혼란한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선 구도자의 심정으로 관직을 사직했다. 47세에 홍문관으로 조정에 들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관뒀고, 48세 되던 해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부임했으며, 그 해 10월엔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듬해 4월 소백산을 다녀온 뒤 <소백산유람록>을 쓰고 이름을 ‘서간병수(栖澗病?)’라고 적었다. 즉 시냇가에 깃들여 사는 병든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 해 12월에는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귀향했다.
▲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바로 옆으로 갈대가 우거져 더욱 운치를 자아낸다.
퇴계는 산수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산야기질(山野氣質)’의 소유자였다. 또한 산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고, 우러러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에게 산놀이는 인간 욕망을 억제하고 본성의 깊이를 규명하는 공부로 상징됐다.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를 마음 수행, 지식 수행으로 받아들였다. 청량산에 오르면서 그 마음을 잘 표현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 있다.
“글 읽기와 산놀이가 비슷하다 하지마는(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 읽기와 같으도다(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 공력이 다할 때는 으레 내려오고(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 얕고 깊음 아는 것도 모두 이에 있더구나(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 열 구름 앉아 보아 기묘함을 알았었고(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 근원지에 이르러선 비롯됨을 깨달았네(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 마루턱 찾을 것을 그대들에 기대하니(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 늙어서 전진 못하는 이 몸, 내 깊이 부끄러워라(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 (왼쪽부터) 오솔길은 풀밭길로도 연결돼 걷기에 더욱 좋다. / 강변길이 끝나면 호젓한 숲속길이 이어지는 퇴계 오솔길.
사실 산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힘이었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며,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도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산책을 예찬했다.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칸트도 매일 새벽 그의 산책을 보고 주민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 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이와 같이 걷기는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닌 머리와 마음을 일깨워주는 사색의 방법인 것이다.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퇴계는 13세 때 숙부인 송재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50리 강변길을 떠난다. 그 후 수 차례 이 길을 오가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사랑했다.
청량산 관련 시만 51편 남겨
1548년 퇴계는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당나라 한유(韓愈)가 형악(오악 중 형산)의 신에게 묵도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형산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산이 신령한 기운과 교감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조화와 자취를 진정으로 즐겼던 듯하고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 심정을 적절히 읊은 그의 시 ‘등산(登山)’이다.
“그윽한 곳 찾느라고 깊은 골을 넘어가고(尋幽越濬壑 심유월준학) / 멧 숲을 거듭 뚫어 험한 데를 지났노라(歷險穿重嶺 역험천중령) / 다리 힘이 피로함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無論足力煩 무론족역경) / 마음 기약 이룩됨을 기뻐하곤 하였노라(且喜心期永 차희심기영) / 이 메의 솟은 양이 높은 사람 흡사하여(此山余高人 차산여고인) / 한 곳에 홀로 서서 그 생각 간절코녀.(獨立懷介耿 독립회개경).”
걷기는 시각으로 시작해서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이어진다. 즉 명상과 달리 걸으면서 몰입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퇴계의 시 ‘등산’에서도 감각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퇴계 오솔길은 꽃과 나무와 야생화와 강이 우거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퇴계 오솔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의 시각을 충분히 휘어잡는다. 출발지점은 도산면 단천교다. 단천교 바로 옆에 ‘녀던길(옛길)’이란 이정표가 있고,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퇴계 선생께서 즐겨 다니시던 오솔길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 선생의 시적 감흥을 현장을 거닐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녀던길’이란 비석도 세워져 있다.
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순간적으로 감흥은 일어나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않는다. 약 2㎞를 비슷한 길로 계속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2㎞쯤 지나 퇴계의 첫 시비(詩碑)가 나오고 전망대에 이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청량산 깊은 골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사이로 곡예를 그리며 빠져나오는 낙동강 줄기는 정말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했다. ‘겸재 정선이 어떻게 이런 멋진 곳에 와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려선 강둑길은 갈대로 뒤덮였고, 덩그러니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그루가 운치를 더했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느라 발길을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강변의 조약돌은 갖가지 모양으로 눈길을 끌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갈대로 뒤덮인 모래밭을 지날 때는 살랑거리는 갈대가 귓가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다.
전망대나 농암종택에서 당일 왕복 가능
퇴계가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러 청량산에 가면서 “그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까지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한번 나온 감탄은 그칠 줄 몰랐다. 마침 날씨가 맑아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한 하늘다리까지 조망이 가능했다.
▲ 강변길은 사유지 문제로 곤란을 겪자 시에서 건지산으로 우회로를 만들었다.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서야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청량산의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해서 제법 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의 강줄기를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고 한다. ‘여러 지천이 모여 이룬 길고 깊은 소’라는 뜻이겠다. 퇴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도미천망산(渡彌川望山)’을 남겼다.
“굽이굽이 맑은 여울 건너고 또 건너니 /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 맑은 여울 높은 산이 숨었다가 나타나니 / 끝없이 변한 자태 시심을 돋워주네.”
퇴계만이 아니라 누구나 시적 감흥이 생길 법한 강변길에는 또 의외의 발자국이 나온다. 해변가에나 있을 법한 공룡 발자국 흔적이 이곳에도 뚜렷이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정말 공룡 발자국같이 생겼다.
길은 오솔길로 변했다. 풀들이 길을 덮은 호젓한 길이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을 법한 장소에 정자와 연못이 있어 탐방객들에게 휴식처가 된다. 퇴계 시비가 있어 잠시 쉬어가는 객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 백운동에 있는 시사단. 지방에서 최초로 과거시험을 치른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퇴계 오솔길은 시야가 확 트인 강변을 다시 만나자 외줄처럼 일직선이 된다. 강 옆에 우뚝 솟았지만 상단은 미끈하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잠시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한다. ‘경암(景巖)’이라 불리며 여기에서도 시 한 수를 선사했다.
“부딪는 물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 중류에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리.”
길은 계속되고 아름다운 풍광도 연속이다. 경암을 지나니 곧이어 한속담(寒粟潭)이다.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이 흐름을 멈춘 듯 담을 이룬 곳이다. 말을 타다 걷기도, 또는 가마를 타기도 했을 법한 퇴계는 절경에 반해 또 ‘한속담(寒粟潭)’이란 시를 읊었다.
▲ 미천장담 낙동강을 따라 퇴계 오솔길을 걸으며 학소대를 쳐다보고 있다.
“벌벌 떠는 여윈 말로 푸른 뫼를 넘어가서 / 깊은 골짝 굽어보니 찬 기운이 으시시 /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선경이라 / 기괴한 돌 긴 소나무 시냇가에 널렸구려.”
한속담 바로 옆에 거대한 수직절벽인 학소대(鶴巢臺)를 만난다.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먹황새)이 서식하여 학소대로 명명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의 분비물이 바위에 묻어 있는 듯하다.
이어 퇴계 오솔길의 마지막 지점인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농암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종1품 숭정대부에 이를 정도로 화려한 벼슬을 했지만 이런 이력보다는 무위자연의 삶을 즐기며 강호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한국 ‘강호문학의 창도자’가 바로 농암 이현보다. 그는 퇴계보다 30여 년 빠른 인물로 퇴계가 아버지처럼 모시며 따랐던 것으로 전한다.
후덕한 인품…시와 글에 남아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졌다가 2000년대 들어 현재의 위치에 재건됐다. 종택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강물의 벽이 벽력암이다. 벽력암은 태백에서 떠내려 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선성지(宣城誌)>에는 “벽력암 아래에 있는 깊은 연못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종택 바로 옆에는 그네도 있고, 널찍한 공터도 있다. ‘퇴계 오솔길’은 여기까지다. 이후 청량산 가는 길은 도로로 포장돼 있다.
퇴계의 청량산에 관한 기록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끝내자. 퇴계는 1552년 명종 7년에 주세붕의 <청량산 유산록>에 다음과 같은 발문을 붙였다.
“위대하여라, 선생이 이 산에서 얻은 것은! 홍몽한 상태로부터 음양의 기운이 나뉘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기운이 형체를 응집한 이래로 몇 천만 겁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갈무리한 승경과 땅이 감추어둔 기이한 구역이 바로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야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커다란 만남이 아니었겠는가. 하물며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정말로 이 선경의 모욕이요, 우리 유학자의 수치였다. 선생이 일일이 고쳐주시고, 통렬하게 씻어내주셨으니, 그로써 산신령을 위로하고 정채(精彩)를 빛나게 하신 업적이 얼마나 크냐!”
주세붕은 퇴계의 글을 보고 “정말 어린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퇴계는 그 점에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주세붕을 선배로서 깎듯이 예우했다. 넉넉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그 넉넉한 인품이 지금 500여 년을 지나 다시 그 길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말년에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다시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한 수 읊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그는 청량산 바로 앞에 있는 건지산 자락에 묻혔다. 죽어서도 청량산을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시 ‘송별’이 ‘퇴계 오솔길’ 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정자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대 가니 이 봄을 누구와 더불어 노닐고(君去春山雖共遊 군거춘산수공유) /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류) /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今朝送別臨流水 금조송별임류수) /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퇴계 오솔길에 가면 퇴계와 그의 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양반문화 본류로서의 안동
서민문화 상징인 하회탈 있기에 양반문화와 종택 건재 가능
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다. 왜, 언제부터 안동이 양반문화의 대표도시로 자리 잡았을까?
안동은 과거부터 ‘안동도호부’ 등이 있으면서 도시 규모가 컸지만 양반문화의 본류는 아니었다. 특히 고려시대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조선시대 들어서 사림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안동이 양반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안동은 사림의 본고장으로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유림들의 핵심 도시로 부상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전부 훈구세력으로서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 입장이었던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안동이었고, 안동은 사림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지방에서 학문을 쌓고 세력을 키운 사림은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더욱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다 원래 중앙에 있던 훈구세력과 부딪힌 사건이 을사사화·기묘사화 등의 당쟁이었다. 이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해 일부는 다시 낙향하기도 했지만 이미 사림은 무시할 수 없는 조선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사림의 본고장이라고 해서 양반도시가 된 것은 아니다. 안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많은 종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실은 여기에 양반문화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 퇴계 오솔길 중간쯤 나오는 경암.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쉬어갔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안동은 양반문화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서민문화의 상징인 하회탈로도 유명하다. 안동 서민들은 하회탈을 쓰고 양반문화를 통렬히 비꼬고, 풍자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일종의 ‘하회탈 카타르시스’를 즐겼던 것이다. 양반들도 그냥 허허 웃으며 같이 즐겼다.
양반들이 그런 서민을 박해했다면 더 이상 안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회탈을 통한 서민의 소리를 안동 양반들은 문화의 한 형태로 인정했다. 후덕한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 퇴계 오솔길의 시작지점이자 동시에 끝지점인 농암종택. 안동댐 건설 이후 이곳으로 옮겨 조성했다.
서민은 양반의 그런 아량을 존경하게 되었고, 양반은 서민의 문화를 인정하며 서로 공존했다. 안동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과 현대에 들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전쟁의 주역이었던 서민은 안동의 양반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려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안동, 즉 한국 최고의 종택을 보존한 도시가 되었고,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동 문화해설사 박점석씨
‘원조’ 문화해설사… “안동문화 자부심 가지고 설명하죠”
“안동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문화해설사도 안동에서 처음 생겼지요. 그런 자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안동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동시청 소속 문화해설사 박점석(50)씨는 지난 2000년 문화해설사란 제도가 안동에 처음 생기면서 바로 안동 문화를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주부로서 생활을 하다 지난 1996년 ‘뭔가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안동문화생활관을 노크한 게 계기가 됐다.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생활관은 전국 어디보다 열기가 뜨거워요. 어느 강좌든지 개강하자마자 바로 수강생이 만원이 될 정도예요. 그것도 안동문화의 힘이 아닐까요.”
박씨는 주부문화생활관에서 자원봉사로 일하다 문화해설사가 생기는 걸 보고 바로 지원했다. 이제는 문화해설사 생활이 만 10년째다.
“안동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이 배워요. 이것저것 살펴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죠. 안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잘 소개하면 그게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죠.”
이제 아들들도 다 커서 대학생이 됐다. 그 전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했지만 지금은 남는 시간을 충분히 안동 문화 공부에 할애하고 있다.
“안동에 오시면 꼭 저를 찾으세요. 안동 문화의 모든 것을 전달할 드릴게요.”
퇴계와 관련된 주변 명소로는 ‘퇴계 오솔길’ 바로 직전에 도산서원이 있다. ‘해동주자’라 불리는 퇴계 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았던 곳이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으로 건립했다. 현재 그 장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퇴계 선생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하던 곳인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됐다. 이곳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사액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직접 쓴 글씨다. 그 외에 선생이 거처하시던 완락재와 암서헌, 제자들이 공부하던 농운정사,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 등이 있다.
▲ 도산서원
도산서원 조금 못 가서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육사는 퇴계 선생의 15대 손이다. 육사는 안동 생가의 들판에서 눈 내린 날 강물을 바라보며 그의 유명한 ‘광야’를 지었다고 한다. 문학관은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친딸 이옥비 여사가 지키고 있다. 그녀도 일흔을 훌쩍 넘겼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안동 쪽으로 조금 가면 퇴계종택이 있다. 현재 퇴계종택은 그의 후손들이 안동댐으로 수몰된 종택들을 이곳으로 옮겨 건립한 건물들이다. 육사문학관과 퇴계종택 중간쯤에 있는 건지산 끝자락에 퇴계 선생의 묘지와 그 한참 아래에 그의 며느리 묘가 있다.
▲ 이육사문학관
답사 가이드
강변길 사유지 문제로 건지산 등산로 우회로 만들어 안내
‘퇴계 오솔길’은 출발지점을 도산서원 조금 지나서 나오는 단천교와 끝지점인 농암종택 양 방향에서 모두 답사할 수 있다. 당일 코스로 승용차로 단천교에서 출발할 경우 2㎞ 가량 차를 몰고 전망대에 주차하는 게 시간을 활용하기에 좋다.
전망대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코스는 바로 강변길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건지산 등산로로 오르는 길이다. 강변길은 아름다운 길이 연속으로 펼쳐져 한때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을 만들면서 갈대가 우거진 넓은 공터에 시민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소유주가 반대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시에서는 토지를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지주가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러 협상이 결렬됐다. 그래서 시에서 건지산 등산로를 만들어 산길로 둘러 정자까지 가서, 그곳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가는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변길로만 가면 단천교에서 농암종택까지 편도로 약 4.8㎞ 거리다. 단천교에서 전망대까지 거리가 약 2㎞이므로 전망대에 차를 주차하고 가면 3㎞가 채 안 되는 거리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갔다가 올 때 건지산 등산로로 오면 거리가 총 8.4㎞ 정도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둘러보려면 왕복 4시간은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길은 외길이라 헤맬 우려도 없고 건지산~강변길~농암종택으로 간다면 산길과 들길, 강변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교통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영동고속도로 원주·이천 방향으로 진입한 후 중앙고속도로 안동·남원주로 다시 갈아탄다. 이어 계속 내려가다 서안동IC에서 빠져나와 안동으로 진입해서 도산서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과 센트럴터미널에서 안동행이 있다. 3시간 걸리며, 요금은 1만5,600원.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3번과 67번 시내버스를 타면 농암종택과 도산면 단천교까지 간다. 버스요금은 1,100원이며 소요시간은 40분 남짓.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는 약 3만 원.
숙박과 맛집
퇴계 오솔길 주변엔 먹고 잘 곳이 없다. 가는 도중에 열화당(054-855-8332)이 있다. 숙박과 음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하지만 주중에 숙박하려면 예약해야 한다. 주인이 서울에 살기 때문에 수시로 집을 비운다.
출발점이자 끝지점인 농암종택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4~5명이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은 7만 원, 7~8명이 숙식할 수 있는 큰 방은 10만 원선. 농암종택은 그 후손이 직접 운영한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 안동시내에서 안동의 다양한 음식을 맛본다. 특히 안동찜닭과 안동국시 등은 서문시장에 가면 전문점이 수두룩하다. 안동찜닭은 경북 지정 으뜸 음식점으로 서문시장에 ‘안동찜닭 종손(054-855-9457 또는 010-6564-9989)’ 등이 있다.
그 외에 안동과 관련한 정보는 안동관광정보센터(054-856-3013), 경북종합관광안내소(054-852-6800), 도산서원관리사무소(054-856-1073) 등에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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