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 타고 금강산 구경
조 흥 제
나는 요즘 그동안 써 온 산행기와 여행기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중이다.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이 쓴 것도 마음에 드는 것이면 적어 놓은 것이 있다. 최남선 선생이 쓰신 금강산기를 읽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잘 쓰셨는지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나도 2007년에 7순을 맞아 애들이 금강산에 보내 주어 갔었다. 고성에서 휴전선을 넘어 갈 때 ‘저게 휴전선 표지’라고 했을 때 밖을 내다보니 흰 말뚝이 드문드문 박혔다. 그런게 서해안까지 2천여 개 박혀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금강산 입구에서 내려 김정숙 호텔 8층에 여장을 풀었다. 밖에 나가 2층 옥상에서 평양 소주에 북한 아가씨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고 팁을 주려고 하니 그들은 팁 자체를 몰랐다. 밤에 호텔 지하에서 북한 가수들이 나와 노래 부르는데 막간을 이용하여 관람객에게 시간을 주었다. 나도 나가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는데 박수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팔랑팔랑 뛰는 템포 빠른 노래 부르는 중에 느려터진 목포의 눈물을 불렀으니 어이없어하는 표정들이었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튿날 금강굴, 옥류동 폭포, 구룡폭포를 구경하고 다음날 귀면암, 만물상을 구경하고 오후에 삼일포를 구경했다. 절경이었다. 금강산 구경을 한 사람들은 금강산에 대면 설악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설악산 수렴동 계곡과 천불동 계곡은 금강산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금강산도 우리가 갔던 외금강보다는 내금강이 좋다고 하는데 최남선 선생이 구경한 곳은 내금강으로 해서 정상인 비로봉에 오르는 코스를 소개한 글이었다. 대한민국 관광객들은 내금강 출입은 못했다.
그 글을 읽으면서 3개월을 금강산만 구경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것도 혼자 간 것이 아니라 관청(官廳)에서 안내원과 수행원까지 여러 명이 동행시켰으니 구석구석 안 가 본 곳이 없으리라. 모르기는 해도 여성으로서 금강산만 그렇게 오래 구경한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행복하게 금강산을 구경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것도 개인의 안내를 받은 게 아니라 관청에서 안내하고 에스코트까지 받았으니.
79년도 제주도에 부모님 칠순 기념으로 모시고 갔을 때 택시 기사가 ‘저 곳이 만덕 할머니의 기념관인데 시간이 없어 못 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기사가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높은 탑이 멀리 보였다. 그 때는 ‘만덕’이라는 사람을 몰랐으나 그 후 여러 책자에서 소개하는 것을 보고 궁금증이 풀렸다. 그녀가 제주도에 큰 재해가 들어 도민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사재를 털어 구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기념관을 한번 방문 해 보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90년대 후반 ‘수필과 비평’ 동인 모임이 제주에서 열려 행사에 참석했다가 시간을 내어 제주 사람들이 ‘만덕 할머니’로 부르는 김만덕의 기념관을 가 보았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김석윤(金錫允), 조봉호(趙鳳鎬) 선생과 함께 모충사(慕忠祠)에 잠들어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니 우측에 있는 거대한 탑이 김만덕 기념탑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여자로서 이만한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
김만덕은 영조 때 사람으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 오빠는 친척집으로 가고, 만덕은 기생집 양녀로 들어갔다. 거기서 기녀 수업을 받아 성장한 후에 5년 간 기녀 생활을 하다 오빠와 친척들의 만류로 그 생활을 청산하고 객주 집을 차려 독신으로 살았다. 여러 사람을 대하다 보니 물정을 알게 되어 장사를 시작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무역을 하면서 박리다매(薄利多賣)와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아 많은 돈을 벌었다. 정조 때 제주에 큰 흉년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 구호 곡을 싣고 오던 배들이 풍랑을 만나 모두 침몰하였다. 주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맸고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때 김만덕이 나섰다. 사재를 털어 육지에서 쌀 5백석을 사 왔다. 김만덕은 그 중 50석은 평소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기탁했다. 관에서는 넓은 마당에 큰 솥을 걸고 죽을 쑤어 매일 천여 명의 극빈자들에게 주었다. 제주 목사 이우현은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물었다. 그녀는 성상(聖上)을 뵙는 것과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제주 여자들은 육지에 올라오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고 백성들은 대궐에 들어 갈 수 없도록 되어 있어 만덕의 소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아뢴 소청, 여기에 만덕의 비범함이 보인다. 그 배짱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양이다. 정조는 편법을 써서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내의원의녀수반이라는 벼슬을 주어 불러 올렸다. 만덕은 상궁에게서 궁중에서 지킬 예절을 익힌 후에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감마마를 알현했다. 상감은 물론 대신들도 그녀를 좋게 보았던 모양이다. 중전마마는 잘 보살펴 주었다.
이듬 해 봄 상감은 강원관찰사에게 특명을 내려 만덕의 금강산 관람에 소홀함이 없도록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강원관찰사는 여러 사람을 수행하게 하여 만덕에게 금강산 구석구석을 3개월여에 걸쳐 구경시켜 주었다. 궁중으로 돌아오니 좌의정으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이 김만덕전을, 병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은 김만덕 찬양 시를, 서예가 김정희(金正喜)는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을 써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김만덕은 조정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는 얘기다. 고향에 돌아 와서도 만덕은 여전히 무역을 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그 후에도 헐벗은 사람을 도와주면서 자선 사업을 하여 도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만덕이 죽은 후 자손이 없어 묘역을 제주 사람들이 보살폈다. 제주시의 확장으로 묘를 옮기게 되자 각계인사들이 나서서 그녀의 묘를 국가 유공자가 묻혀 있는 모충사로 옮겨 높이 20m의 기념탑과 60여 평의 만덕관을 건립하였다.
만덕관에 들어서니 그 안에 옷가지며 자수 등 그 때 제주도의 생활상을 재현 해 놓았다. 만덕 할머니의 대형 초상화가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의 기념관을 내려다보고 있다. 만덕 할머니가 한 일도 장하지만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제주도민의 정성에 다시 한 번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면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