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졸업한 '문교과 09'학번 윤성희라고 합니다.
졸업장을 받고, 지난 4년을 되돌아 보는 글을 하나 써봤어요.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 분들과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저의 글이 '응원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을것 같아, 부끄럽지만 이곳에 올려봅니다.
'졸업'하는 그 날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씩씩하게!! 화이팅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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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獨)하고 악(樂)하게
2013년 2월 20일 수요일. 드디어 대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꽃다운 20대가 아닌, 중년으로 가는 30대의 마지막 길목에서 받은 졸업장이었다. 그것은 그냥 ‘졸업장’이 아닌 ‘독(獨)하고 악(樂)하게’ 공부한 대가였다.
2009년 3월.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5년 만이었다. 난 15년 전,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 회사를 다니다 글이 쓰고 싶어서 사표를 냈었다. 지인들의 소개로 작은 방송사에서 작가 일을 배우고, 방송작가 학원을 다니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당시 작가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약점’이었다. 어디든 작가를 구하는 곳은 ‘대졸’을 원했고, 작가는 당연히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운이 참 좋았었다. 지인들의 소개로 ‘고졸’의 학력으로도 일을 할 수 있었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소개로 작가로서의 입지를 넓혀 갈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전공분야를 한정 짓지 않았다. ‘나는 방송만 할 거야’, 라든가 ‘나는 카피라이팅만 할 거야’라는 선을 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일의 한계를 그을 만큼 어떤 분야에 전문적이지도 않았고, 한 분야만 파고들만큼 ‘그 것만’할 수 있는 그릇도 아니었다. 늘 내가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 동경했고, 지금 하는 일보다 다른 일이 더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글’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뭐든 해보리라 마음먹고, 다양한 일에 도전했다.
인터넷 방송작가, 웹 카피라이터, 웹진 기자, 라디오 리포터, TV 다큐멘터리 작가, 라디오 작가, 작사가, 문화콘텐츠기획자... ‘글’과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했다. 첫 째를 낳고 프리랜서로 독립해서는 사보를 진행하고, 사사를 집필하고, 홍보 동영상을 기획하고, 전시관의 패널 카피를 썼다. 브로셔를 만들고, 이러닝 컨텐츠를 기획하고, 교육용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면서 ‘글’이 갖고 있는 한계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2년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 동안 수많은 글을 쓰고 일을 했지만, 과연 이 것들 중에서 ‘내 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있을까 싶어졌다. 방송 대본들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고, 사보의 글들은 ‘윤성희’라는 이름을 달지도 못 한 채 발행됐으며,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썼던 노랫말들은 내가 그 그룹을 빠져 나온 후 더 이상 내 글이 아니었다. 교육용 애니메이션 시나리오가 상을 받고, 내가 기획하고 쓴 이러닝 콘텐츠가 대박이 나도 그것은 그 ‘기업’의 것이지 내 것은 될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 글은 무엇인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내 글을 쓰면서, 나의 노하우를 만들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것, 그것은 ‘강의’였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다. 10년 후에는 강의를 하자고.
10년 후에 강의를 하려면 지식이 필요했다. 아무리 경력이 많아도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적어도 그들만큼의 지식은 있어야 했다. 자연히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고,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결혼을 한 여자가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반 대학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방송대를 선택했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가끔 출석수업도 하고, 학위도 취득 할 있는 좋은 환경이 내 처지에 딱 맞았다. 서른 다섯의 3월, 나는 09 학번이 되었다.
15년 만에 하는 공부는 쉽지 않았다. 아니 고등학생 때는 거의 공부를 안했으니, 공부다운 공부는 18년 만이었다. 동영상 강의를 듣고, 교과서를 읽고, 요점을 정리하고 스터디를 하고... 1학년 초에 선배들이 ‘교과서 세 번만 읽으면 장학금 탈 수 있다’고 했는데, 살림하며 일하며 애 보며 ’교과서 세 번을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잠을 줄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거나 친정 엄마가 애를 봐주는 시간에는 일을 하고, 아이가 잠든 밤 시간에는 공부를 했다. 일이 많은 날에는 낮에 다 쓰지 못한 원고를 쓰느라 새벽2시, 3시에 잠이 드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다 결국, 1학년 가을에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당시 나는 한 업체의 사보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즈음 제주도로 취재를 다녀와 1주일을 꼬박 투자해서 원고를 썼고, 게임 회사의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카피라이팅 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즈음에는 출석 수업까지 겹쳐 학교 수업도 들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회사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밤, 자려고 누웠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눈앞의 세상이 깜깜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때마침 욕실로 들어섰던 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결국 엉덩이뼈가 골절되었다. 그날 밤, 나는 난생 처음 119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한 달. 정형외과 의사는 뼈가 붙을 때까지 병원에 한 달을 입원하라고 했다. 물리치료도 주사도 필요 없는 그저 ‘안정’만이 최선의 치료 방법이었다. 남편에게 부탁해 교과서와 노트북을 갖다 달라고 했다. 중간고사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교과서를 소설책 삼아 읽고,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했다. 2주 정도가 지났을 때, 출석시험이 있었다. 병원에 부탁해 외출증을 끊고 시험을 보러 갔다. 뼈가 다 붙지도 않은 엉덩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은 곤혹이었다. 그래도 이 시험을 보지 않으면, 한 학기가 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며 두 발에 힘을 주고 버티고 앉아서 답안지를 작성했다. 며칠 후, 점수를 확인해보니 답안지는 모두 만점으로 채점되어 있었다.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1년을 보냈다. 2학년이 되자 ‘습관’은 ‘재미’로 변해갔다. 내가 얕게 알고 있던 지식을 깊게 알아간다는 재미, 어디선가 들었던 가벼운 이야기를 깊고, 진중하게 알아간다는 재미는 나를 들뜨게 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나니 이해도 잘 되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던 서울대학생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물론,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이라는 과목은 복병이었다. 동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음악과 그들의 악기를 외워야 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여백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채워진 시험지의 문제는 경악 그 자체이기도 했다. <세계의 풍속과 문화>는 또 얼마나 복잡했으며, 시험지를 받자마자 한 숨을 쏟아내게 했던 <인간과 과학>은 또 어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재미는 ‘어려움’을 만나야 ‘감동’으로 승화하는 법이다. -_-;;
4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3학년 때 일어났다. 뱃속에 자리 잡은 지 8개월도 안된 아이가 조산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 산부인과 의사는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냈고, 나는 그곳에 입원해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이의 움직임을 지켜봐야했다. 다행히 아이의 움직임은 잠잠해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는 나에게 ‘외출금지’를 선포했다. 출산 예정일이 될 때까지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출석시험을 봐야했다. 친정 엄마를 설득하고, 남편을 설득해서 택시를 탔다. 가만히 가서 시험만 보고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나는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시험을 봤다. 답안지를 쓰는 손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입학해서 처음으로 답안지의 앞뒤를 꽉 채우고, 한 장을 더 추가로 받아서 답을 작성했다. 외출을 금지당하고 집에 누워서 외운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_-;;
조산의 위험이 있던 아이는 무사히 제 때에 나와 주었다. 첫 째에 이어 둘째도 수술로 낳았던 터라 회복이 더디었지만, 아이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병원에 1주일을 입원해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첫 째 때는 완벽하게 하지 못했던 모유수유를 해보리라 다짐하며,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그러나 모유수유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수유를 해야 했고, 아이가 다 먹지 못한 젖은 유축을 해야 했다. 하루 일과가 밥 먹고 모유수유하고 유축하고, 밥 먹고 모유수유하고 유축하는 일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는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낳고 딱 3주 만에 기말고사를 봤다. 이건 미친짓이었다. 한 시간이 멀다하고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안고 시험을 본다는 것은 분명 미친짓이었다. 세 시간이 지나고, 다음 시험까지는 한 시간여의 여유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유축을 했다. 그리고 다시 시험장으로 출발. 이게 뭔 짓인가 싶어 한 숨이 절로 났지만, 성적표에 찍힌 4.2이라는 점수(4.3만점)는 나를 ‘독한’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다큐멘터리 3일’을 보다 나 보다 더 독한 사람을 봤다. 셋째 낳은 지 3일 만에 시험을 본 어떤 학우, 그녀는 평점이 4.3이란다. -_-;;;)
3학년이 지나고 4학년. 논문의 학년이었다. 석사 논문처럼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서 세종대왕의 다른 면을 보게 됐던 나는, 한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사는 ‘작가’로 한글과 세종대왕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했다. 「TV 역사 드라마를 통해 살펴본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이해 : <뿌리 깊은 나무>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다. 처음 기획했을 때만큼 열과 성의를 다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글창제에 관한 학자들의 여러 가지 견해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 세종대왕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4학년 가을, 논문이 무사히 통과되고 그 해 겨울에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마지막 학기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지만, 몸은 마음과 다르게 행동했다. 수업도 벼락치기로 듣고, 어떤 과목은 교과서만 읽는 것으로도 벅찼다. 기말고사 날 시험지를 받아 들고 열심히 ‘찍었’다. 대학 4년 생활 중에서 이렇게 많은 문항을 찍어보긴 또 처음이었다. 이번 시험이 지난 시간 동안 잘 쌓아온 평점을 깎아 먹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내가 찍은 수많은 문제들은 지난 평점만큼의 점수를 유지해 주었다.
모든 시험을 마치고 지난 4년을 돌아보았다. 교과서 읽기도 바빴던 1학년, 복병인 과목들 때문에 속상했던, 그러나 <논술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던 2학년, 다른 학과의 과목을 교양으로 선택해서 들으면서 시선을 넓혔던 3학년, 논문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웠던 4학년... 모든 날이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늦은 밤 홀로 책상 앞에 앉아서 교과서를 읽다 엉엉 울었던 날은 분명 힘들었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기쁨에 날 새는지 모르기도 했던 날들은 분명 축복이었다. 한 마디로 지난 4년은 정말 ‘독(獨)’하고 ‘악(樂)’했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1학년 때 꿈꾸었던 10년 후가 어떤 모습을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분명 대학 공부를 했음으로 인해 더 많은 기회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나의 모든 인생이 ‘독하고 악하게’흘러갈것이며, 나는 그런 내 인생을 사랑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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