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9)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of Magdala came to the tomb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removed from the tomb.
So she ran and went to Simon Peter
and to the other disciple whom Jesus loved, and told them,
“They have taken the Lord from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put him.”
말씀의 초대
부활 시기 동안에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의 말씀이 선포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처음부터 줄곧 그분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뵙고는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제1독서). 콜로새서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권고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제2독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보고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다른 곳에 모셨다고 생각한다. 빈 무덤을 본 이들이 곧바로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부활 신앙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체험으로 가능하며, 그것마저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동반되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화답송). “나는 죽지 않으리라.”는 이 한마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죽음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죽지 않는 신들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 냈는데,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는 천부적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 있음에도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 때문에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은 채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 차라리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안락사, 존엄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결코 “나는 죽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삶을 사랑하지만, 늘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 안에서도 부활 축제를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 상태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선포하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와 같은 증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압니다. 세상이 자기들의 스승이신 주님을 죽였고, 자기 자신들마저도 죽일 수 있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도 그들은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을 만난 이들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 또한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제2독서 참조). 부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도 사도들의 마음처럼 빛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청해야겠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인격적으로 사랑하던 요한만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서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감상에 젖어 모성애의 시각에서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 사도처럼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이 빈 무덤을 관찰합니까? 아니면 요한 사도처럼 인격적인 사랑의 시각에서 이 무덤을 바라보고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양승국신부
은혜로운 부활의 첫 새벽에
참으로 은혜로운 부활의 첫 새벽입니다. 공포의 대상, 미지의 대륙이었던 죽음이 예수님의 발 아래 완전히 정복된 은총의 아침입니다. “나는 더 이상 여기 무덤에 있지 않다. 나는 정녕 되살아났다.”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님 음성에 세상만물이 용약하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처참한 십자가의 길에서도 끝까지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부활신앙의 진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로 내려 가시면서도 만왕의 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매순간 부활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 정답이 나옵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건너가면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크고 작은 십자가 앞에서도 세상에 굴하지 않고 미소와 여유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환우, 오히려 저를 위해 기도하고 저를 위로하던 한 환우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형입니다!”라는 판결문이 울려 퍼지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외친 한 순교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참된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 완전하고 충만한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이 예수님 부활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 빈 무덤 사건,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앙 안에서 큰 획은 긋는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냥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시신으로 그냥 무덤 안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무덤에 대한 의미 부여가 대단합니다. 작은 조각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회당이나 법당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창시자 예수님의 무덤이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빌리셨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빈 무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의 세력조차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아픔을 자기 아픔보다 더 크게 느끼는 사람
-박영식신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당시 무덤을 도굴한 사례가 많았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신을 도둑맞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익명인 ‘다른 제자’와 함께 마리아 막달레나의 보고를 듣고 걱정하며 무덤으로 달려왔다. 이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다다랐다. 위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제일 먼저 믿고 따를 수 있었다. 또 베드로와는 달리,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게 하신 것을 보고 호숫가에 계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 뵈었다(요한 21,7).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사상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독자성이나 개성이나 특성을 인정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는 다른 상대방의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느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다 알고 계신다(1코린 13,12).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그분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그분이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실 때 고통의 강도와 인격적인 모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과다출혈과 호흡장애와 내분비 결여로 말미암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인류를 향한 치열한 사랑으로 가득 하신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입장에 서야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이 나에게 무슨 뜻이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의 고난은 나와 무관한 것에 지나지 않고, 강 건너 불 구경하 듯 할 따름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애정을 느끼며 사랑해야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다. 성령의 힘으로 사랑의 불꽃이 우리 마음속에 활활 타올라야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속으로 파고들고 예수님 부활 신비를 깨달 수 있다.
“가장 깊은 진리는 가장 깊은 사랑에 의해서만 열린다.”(H. 하이네)
“알뜰히 사랑을 바쳤음에도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주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G. 와싱턴 카버)
“내가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L. 톨스토이)
익명인 그 다른 제자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예수님과 맺은 친밀한 관계에 힘입어 그분의 신비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빈 무덤만 보고도 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죽음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자기를 만나러 오실 것을 굳게 믿은 이상적인 신앙인이다. 한없는 사랑은 한없는 생명을 창조한다. 이기심이라곤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사랑을 베푸셨다. 이미 십자가 위에서 부활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사랑은 모든 삶과 운동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다른 제자처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이 우리 마음속에 깃든다.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서공석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느 생명과 같이, 예수님도 죽음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12,46). 이 세상의 믿지 않는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모두가 절망의 어둠 안에 있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해 달리는 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빠릅니다. 그는 무덤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줍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이 아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그분이 사셨던 삶에 대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빈 무덤만 남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고,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예수님을 당신 안에 살려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사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죽여 없앴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에게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 성령, 곧 당신의 숨결을 주셔서 예수님이 좋은 일, 살리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을 받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절대적인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주신 인간의 생명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얽매이고, 우리의 명예욕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킨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신앙인의 길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관찰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그런 삶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유대교의 관행에 얽매이지도 않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이 말하던 병자들을 그 병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라고 초대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신 실천들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과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높여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면서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실천, 고치고 살리는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 안에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읽어냅니다. 그런 신앙인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우리가 하는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