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동차의 새로운 개통 소식을 들었다.
1호선 전철이 천안에서 온양 온천까지 개통된 것과 국철이 청량리에서 양수리 넘어 국수리까지 개통됐다는 소식이었다. 7호선 전철 온수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그 소식이 전해온 것이다.
아하! 이제는 전철이 천안은 물론 아산 온양 온천까지 가게 되었구나. 내가 그리도 자주 가고 싶어하던 양수리도 전철 한번만 타면 가게 되었구나.
순간 마음속에서 쾌재라 하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잇몸에서 찌르르하고 신호가 왔다. 잇몸에서 통증이 연거푸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이 아픈데 장사 없다고. 통증이 머리를 강타하고 정신마저 분산시키는 듯했다. 아이구 나 죽네. 나는 정신없이 약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음날이었다. 나는 전철을 용산에서 내려 갈아탔다. 용산역은 음에서 양으로 바뀐 느낌이었다. 천장에서 부서져 내리는 불빛에 역 전체가 환한 불바다 같았다. 상가가 꽉 들어차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개찰구 왼쪽으로 국철로 갈아타는 입구가 있었다. 높은 계단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국수리로 가는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걸음이 전동차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열려져 있던 문이 스르르 닫히는 게 아닌가. 이런 이런…….
나는 발을 구르고 안타까워했다. 옆에 서 있던 남자도 발을 구르고 있었다. 다음 전동차는 1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전에는 20분마다 출발했는데 국철이 국수리까지 연장되고 나서 10분 간격으로 당겨진 모양이었다. 살벌한 겨울바람이 목을 휘감고 늘어졌다. 그때였다. 믿기지 못할 현실이 벌어졌다.
금세 출발할 줄 알았던 국철이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게 아닌가. 기관사가 추위에 떨고 서있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다시 문을 열어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전동차 안으로 뛰어들며 나도 모르게 외쳤다. 살면서 그때처럼 고마운 순간도 없지 싶었다. 전동차 안은 이미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훈훈한 열기가 가슴에 전해 오면서 전동차가 출발했다. 눈이 쌓인 좁은 벌판이 창 밖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전동차가 왼쪽으로 꺽어지더니 낯선 풍광이 나타났다. 칠이 벗겨진 낡은 기와집이 굴뚝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먼지가 쌓이고 곧 허물어질 듯 보이는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은 세월을 40년 이상 되돌려 놓은 듯했다. 가난이라는 대명사(代名詞)가 언 듯 떠올랐다. 기찻길 옆이라 재개발도 되지 않고 그냥 방치해 놓은 모양이었다. 하긴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지나는 전철의 소음을 겪으며 살아야 하니 누가 그런 곳에서 살고 싶겠는가.
전동차는 그 좁은 담벼락을 지나 동진(東進)했다. 기찻길이 여러 갈래가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고층아파트가 보였다. 벌거벗은 나뭇가지 뒤로 형성된 아파트군은 이상하리만치 고즈넉해 보였다. 이촌역을 지나 서빙고역에 닿자 88고속도로를 끼고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지하철은 지날 때 엄청난 소리가 나는데 이 전동차는 지상으로만 달리기 때문에 별 소음이 안 들리는 거야, 왜냐하면 소리가 분산되기 때문이지."
옆자리에 앉은 중년남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 귓가에 들려온다. 전동차는 이제 잠수교를 지나 응봉역을 향하고 있다. 초등학교가 눈앞에 다가온다. 전동차는 도심의 뒷켠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왕십리를 지난 전동차가 목조다리를 건너고 있다. 답십리를 지나 청량리를 달리면서 복잡한 시장 골목과 가나안 교회가 보인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치익 폭폭. 칙칙 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가 생각났다. 나는 가방에서 찐빵을 꺼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아얏."
나도 모르게 째지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통증을 잊고서 마구 씹어댄 것이다. 잇몸에서 찝찔한 액체가 흘러 적셨다. 잇몸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이다. 머리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 같은 통증으로 얼굴 전체가 고통의 도가니로 변한다. 음식도 조심해 먹어야 한다. 덕분에 나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 해소하던 것을 중지해야 했다.
폭식은 나의 주된 습관이었다.
눈만 뜨면 하루종일 먹어댔다.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더 많이 먹었고 마음이 슬프거나 절망스러워도 마구 먹었다. 불안해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 가득 찬 마음속에 음식물을 들여보내면 약간의 위로가 느껴졌다. 실컷 먹고 나면 포만감으로 마음속에서 슬픔이 증발되는 것 같았다. 이래 저래 난 죽기살기로 먹어댔다. 그러던 어느날 몸에서 신호가 왔다.
위장이 더부룩해지고 잇몸에서 자꾸만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찾아간 치과에서 젊은 의사가 말했다.
"풍치입니다."
"네, 풍치라뇨? 그게 무슨 병인데요?"
"일종의 잇몸병인데 치주염이라고도 합니다. 잇몸에 염증이 발생해 생기는 병인데 특별한 치료약이 없습니다. 수술이 있긴 한데 그나마 완전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하는 게 낫습니다. 그냥 놔 두었다간 염증이 잇몸 전체로 번져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도 못 막습니다. 그러니 수술을 하세요."
"수술이라면 어떡케."
나는 수술이라는 말에 오금이 저려왔다.
"잇몸을 째고 농을 제거하는 수술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수술을 받으십시오."
처음에는 수술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었다. 잇몸을 째다니, 농을 제거하다니, 그러나 한시가 급하다 하니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 주일 후 대학 병원에 가 마취 주사를 맞고 수술에 들어갔다. 마취 주사를 잇몸과 얼굴 안쪽에 6-7대는 맞은 것 같다. 얼굴 전체가 굳어지는데 마치 석고상이 된 것 같았다.
30분쯤 지나자 의사가 칼로 잇몸을 째는데 악력(握力)이 느껴졌다. 강한 힘이 잇몸을 누르는데 턱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잇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혀를 적시는데 찝찔했다. 잇몸을 째고 날카로운 금속기구로 이뿌리에 있는 농을 제거하는데 턱 전체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기구가 이뿌리를 건드릴 때마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늘로 잇몸을 봉합하는 모양이었다. 푸욱! 하고 바늘의 깊이가 느껴지면서 팽팽한 실이 얼굴을 스쳤다. 껌 같은 이물질이 잇몸 위에 붙여지고 수술이 끝났다. 수술대에서 내려오는데 지옥을 여러 차례 왕래한 기분이었다. 병원을 나가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이 아팠다. 마취가 풀리면서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는데 입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신경질이 나면서 통증이 자꾸만 정신을 분산시켰다. 사랑니를 빼고도 진통제 없이 잘 견딘 나였는데 풍치수술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 끔찍한 수술을 네 번에 걸쳐 받는데 그 부위가 부어 올라 얼굴이 완전 기형으로 변했다. 계속 진통제를 먹는데도 통증이 일 주일이나 이어졌다.
어느날 나는 또다시 전동차를 타고 한강변을 지나고 있었다. 봄기운이 남실남실 창 밖으로 전해져 들어왔다. 파릇한 새싹이 나른한 봄기운과 함께 나를 지겹도록 설레게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창을 보고 있었다. 군포에서 여대생을 살해한 38살 먹었다는 희대의 살인마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여대생 뿐 아니라 전처와 다른 여자를 포함 8명이나 죽였다고 한다. 여자만 보면 살해 욕구가 끓어올라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 4번이나 결혼 경력이 있는 그는 악마의 본체 그 자체였다. 끓어오르는 살해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니, 인간 의 탈을 뒤집어 쓴 사탄이었다.
곧이어 북한의 남측에 대한 도발성 발언이 뉴스창에 떠오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북한은 군사적 위협조짐을 시시각각으로 전하고 있었다. 서해에 군사위협을 일흐키더니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남측 수뇌부를 공격하고 군사적 도발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한파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알파만파 번지더니 파열음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 경제 성장을 낮춰 잡더니 이제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고 있다며 매체마다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내놓는 경제 정책마다 현실성 없고 부적절 하다고 비난 일색이다.
세상은 냉정한 현실논리 앞에 납작 엎드린 채 마음을 닫고 있다. 출판 시장은 얼어붙어 기사회생의 기미마저 보이지 않는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예술이냐고, 독자들은 서로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인은 현실에 가장 둔감한 모양이다. 씨도 안 먹힐 예술타령이나 주워대고 있으니. 봄바람이 불면서 나는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낭만이라고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면서…… 나는 전업작가다. 여기서 전업작가라 함은 글을 써서 밥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고 글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창작, 곧 예술행위를 자기의 직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언젠가 참석한 문인들 모임에서 한 시인이 말했다.
"시인과 소설가는 잘 어울릴 수 없다. 시인들은 환상적인 이야기만 하는데 소설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만 한다."
맞는 말이었다. 소설은 현실적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이야기만 쓰니까. 그렇다면 예술은 환상적인 것인가, 아님 현실적인 것인가. 아무래도 결론은 환상적인 것에 머문다. 그렇다면 시(詩)가 더 예술적 문학인가.
소설과 영화 속에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청량리가 눈앞에 다가서고 있다. 플랫포옴에 내려 하늘을 올려다본다. 회색 하늘이다. 임시로 만든 철 계단을 오르며 나는 마음이 설렌다. 오른쪽으로 민자역사가 한창 건축 중이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전광판이 보인다. 중앙선 열차 도착 역명이 전자 불빛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고 있다.
승차권 예약 판매소가 설치된 곳에 수많은 발걸음이 머물고 있다. 인터넷으로 승차권을 판매하는 곳이다. 이젠 인터넷을 하지 않고서 도무지 움직이지 못할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의류와 패스트푸드점이 좁은 공간 안에 여럿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덩그마니 혼자 남겨진 발걸음도 있다. 수많은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가 청량리 역 광장으로 흐르고 있다. 싸아한 바람이 떠나는 자와 남아 있는 자 사이에 흐른다. 나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며 한 문장을 떠올린다.
"나는 항상 떠나는 자이고 싶다."
왜? 라는 질문 앞에 엉뚱한 상상이 떠오른다. 작가니까. 작가는 항상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서사화 하고 드라마화 하는 게 직업이니까. 롯데백화점 앞 풍경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시외로 빠지는 버스정류장과 노점상, 백화점으로 빠지는 인구와 588거리, 청량리 시장은 인생드라마의 현 주소 같다.
카메라 앵글이 액션!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람들 발걸음을 일일이 추적하는 것만 같다. 인파와 차량이 한데 뒤엉켜 한 커트 한 커트를 만들며 인생을 추억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고래사냥'이 이곳 청량리역 주변상황을 묘사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대학 시절 과 친구들과 함께 간 디스코텍에서 남자 DJ가 말했었다.
"여러분 사랑을 하려면 588로 가세요."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내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망할 자식.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금기둥이나 되거라."
나는 시외로 빠지는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다. 덕소, 양수리, 의정부, 청평, 마석으로 떠나는 버스가 줄줄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그중 아무 버스나 올라탄다. 어차피 내겐 계획이란 게 없다.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떠남과 만남을 결정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나를 맡기고 마는 것이다.
여행의 특징은 자아(自我)를 잊는 데 있다. 자기 본성을 잊고 시간과 공간의 타율에 나를 잠시 맡겨두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미 내 소설 속에 수없이 등장했던 청량리가 버스 창 밖으로 밀려나 북진(北進)하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의 대부분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거나 아예 푹 잠에 빠진 사람도 있다.
버스가 석계역을 지나고 있다. 어둔 그림자가 이곳엔 많이 띄인다. 몇 년 전 이곳 근처에서 풍물시장이 열렸었다. 노천 음식점과 각종 장사치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을 때 마치 시골 장을 연상케했었다. 굴다리 밑으로 옹기장수가 항아리를 산더미를 쌓아놓아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을 지날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하며 애를 태웠었다. 가을이면 그곳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던 단풍과 고즈넉한 분위기도 한몫 했었다. 그때는 세월이 온통 정체된 것 같더니 벌써 이십 년이 흘렀다. 월계동을 지나던 버스가 어느새 경기도로 들어서고 있다.
'미래창조'
고가도로를 지나는 밑에 상호간판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미래창조,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단어인가. 거대한 아파트 군단이 수락산 자락을 끼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도시가 이방인의 가슴을 왈칵 열어제치며 달려든다. 수락산 끝자락에 살았다던 시인 천상병의 귀천이란 시가 생각난다.
귀천
나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도시의 편리함과 낯섬에서 오는 해방감이 거리 거리마다 물 흐르듯 가슴에 전해온다. 역사(驛舍) 지하도에는 의류상가가 거미줄처럼 형성돼 있다. 계단을 나와 지상으로 나오면 핸드폰 기기를 파는 상가가 곳곳에 눈에 띈다. 고급 의류상가와 패스트푸드점 뒤로 중앙시장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무한정 빨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극장가가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었나 사방을 헤매어 보지만 여전히 극장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상가가 차지하고 있다. 중앙시장도 일대 변모를 계속해 높다란 천장을 한 채 행인들을 굽어보고 있다. 찐만두와 냉면을 팔던 음식점은 베이비 옷 전문점 자리를 달리했다.
산지에서 직접 날라 왔다는 농산물이 트럭에서 내려져 소매상으로 배달되고 있다. 시장 골목이 끝나는 곳에 롯데리아 건물이 보인다. 일층은 한우 전문 음식점이고 이층과 삼층이 롯데리아다. 그 맞은편에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경쟁자로 떡 버티고 서 있다. 그 사이에 일차선 도로가 역 부근까지 뻗어 있다.
16년 전, 나는 그 롯데리아 3층에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글을 쓰거나 소설을 구상하곤 했었다. 언젠가 될지 모르겠으나 나의 문학 인생을 꿈꾸며 미래창조에 골몰했었다. 나는 지금 그곳 계단을 오르며 그때 꾸었던 문학의지를 재생시키고 있다. 도로 건너편 뒤, 역사(驛舍)가 미군부대와 함께 보인다. 이제 미군부대는 도시에서 사라져 빈터만 남아 있다.
어둠과 안개가 건물과 도로 사이를 흐르고 있다. 낭만과 정신적 부요를 꿈꾸는 방랑객들의 발걸음도 그곳을 오가며 헤매고 있다. 해방감과 이탈감 속에서 무의미한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때 나도 그들 발걸음 속에 휘묻혀 고뇌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의 감정의 실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감정은 항상 오리무중이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위선인지 연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모호한 감정을 두고서 목숨걸 듯 모험하는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과 귀를 막고도 나는 나 자신과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건네주는 기쁨이 소중했는지 모른다.
슬픔과 고뇌에 지쳐 있던 내 마음 속에 처음으로 건네졌던 기쁨이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실이었다. 빈한하고 쓰린 가슴속에 처음으로 기쁨과 행복감이 물결쳤었다. 그 이전까지 행복과 나는 전혀 무관한 사이였다. 압박감과 편집증에 짓눌려 제대로 숨 한번 못 쉬고 살았으니까. 지쳐 있던 가슴에 기쁨이 넘쳐 나자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너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거니?"
나는 무조건 내 감정이 소중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극도의 이기심이 상황에 대한 분별력을 떨어뜨렸는지 모른다. 나는 스스로 꾸며낸 내 감정에 집착했고 이성(理性)을 상실했다. 그런데 집착하면 할수록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건 이미 예고된 불행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많이 울어보기도 처음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불협화음이 보일 무렵, 나는 강남역에서 전철을 타고 시청 앞에서 1호선 전철로 바꿔 타고 있었다. 문득 소요산이 가고 싶었다. 아니 도봉산이나 수락산이라도 상관없었다. 산으로 올라가 도심의 때를 말끔히 벗어내고 산 공기에 맘껏 취하고 싶었다. 땅굴 같은 지하도를 지나 전철이 지상을 달리기 시작했다.
석계, 성북역, 창동, 장수원, 호원, 그리고 마지막 종착역에 닿았다. 전철이 지날 때 도심의 우중충한 분위기와 벌판과 도심의 외곽지대가 순서대로 지나갔다. 전철이 ○○○역에 닿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내렸다. 역사를 나와 거리를 걷는데 해방감이 가슴에 터질 듯 다가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화장품 할인코너와 안경점이 나타났다.
도로는 동두천과 포천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이 도시는 처음 와 보는 낯선 곳이다. 도시의 화려함도 그렇다고 농촌의 정겨움도 아닌, 도시와 농촌의 중간지대 같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거리가 칙칙하고 어두웠다. 상가 골목 끝으로 중앙시장이 보였다. 리어카에 짐을 잔뜩 부려놓은 노점상들이 가운데 길목을 차지하고 앉아 행인들의 발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왼쪽으로 극장가가 보였다. 소규모지만 연이어 극장이 보였다. 그중 한곳에 무작정 발걸음을 내밀었다. 매표구에서 표를 받아들자마자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내 시야를 덮자마자 들려온 건 엄청난 굉음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었다. 화면이 압권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홍콩 거리에 바바리 코트를 걸친 남자 배우가 장총을 어깨에 매고 걸어가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거리를 스치는 순간 여기저기서 복병이 나타났다.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아! 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화면에 몰입했다. 영화는 폭력적인 장면과 함께 젊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드는 남자, 그는 가슴에서 총탄을 연거푸 꺼내 장전하면서 적을 초토화시켰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지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과 그를 비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나를 위해 과연 저 남자 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모든 위험을 뛰어넘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일까.
노우.
내 안에서 강한 울림이 있었다. 부정적 대답이 내 안에서 울리자 갑자기 나는 몹시 슬퍼졌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헛꿈만 꾼 걸까.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처럼 시선을 고정시키는 출중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에겐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매서운 눈빛에 마른 체격을 한 그는 누가 봐도 강성(强性) 이미지였다.
나는 그 카리스마를 사랑했다. 위압적이고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당당함과 굳건함을. 그에게는 태산과 같은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나약한 남자는 죽어도 싫었다. 소심하고 유약해 여자에게서 모성애를 유발하는 남자는 꼴불견으로 취급했다. 못나고 무능한 남자도 질색이었다.
내 이기심과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내 이상형이었다. 그의 감정에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어느날인가부터 그에 대한 감정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너 좋아해? 혹시 너 혼자만의 짝사랑 아니니?"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영현이가 말했다. 그녀는 일평생 도움이 안 되는 친구였다. 시기와 질투로 이간질의 명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내치지 않고 받아주는 것도 이상했다. 때때로 그녀의 말은 비수를 꽂듯 절망의 화살이 되어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쪼개지듯 아프면서 정신이 공황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감정에만 충실했지 나를 향한 그의 마음에는 전혀 무관심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런 멍청한 경우가 또 있을까. 나는 거리를 헤매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하늘이 건물마다 그림자가 되어 드리워져 있었다. 도로 편에 롯데리아 건물이 보였다. 일층은 엑서서리 전문상가고 이층 삼층이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놓고는 무심코 거리를 내다보았다. 일차선 도로와 그 뒤로 보이는 역사(驛舍)가 한꺼번에 압축돼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어깨를 웅크리고 걷는 남자와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여자와 힘없이 걷는 노인 부부가 차례로 내 눈에 들어왔다.
70년대를 연상케하는 엿장수가 울릉도 호박엿을 외치며 차도를 건너고 있었다. 나는 창 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노트로 향했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글을 써 나가던 중 눈물이 노트 위로 툭 떨어졌다. 스스로 연민의 감정에 취한 것일까. 난 그때 그의 감정의 실체를 보았다.
무관심.
나는 거리를 바라보며 몇 개의 문장을 끼적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1차선 도로를 건너고 지하상가를 쇼핑했다. 그때 내 옆으로 커다란 짐보퉁이를 들고 지나는 여자가 보였다. 얼핏 보아 그는 50대 중반쯤으로 걸인이었다. 오갈 데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노숙자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주근깨로 가득 덮인 얼굴이 광기로 번득였다.
발을 질질 끌고 걷는 걸로 보아 동상이 걸린 듯 보였다. 그녀가 내 곁을 지나 저만큼 멀리 가는가 싶더니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막 오를 때였다.
"저기 저……."
머뭇거리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데 순간 두려움으로 가슴이 덜컥했다.
"네? 저요?"
"네, 혹시."
그녀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러나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주머니에 손이 갔다. 나는 천 원짜리 지폐 몇장을 꺼내 그녀 손위에 올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여자는 눈물이 글썽한 채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지하도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엄청난 후회감이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후회가 충격이 되어 머리에 각인되는 순간, 현재와 과거, 미래를 무한정 오가면서 혼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과거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 가다만 옛길이 있었다.
다음달 나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 두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 2년 차를 다니던 중 휴학 중이었기 때문이 곧바로 복학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의미와 무의미, 허무와 참 만족 사이에서 무던히도 방황하고 있었다. 결론 내지 못할 그 질문 앞에 서서히 지쳐가던 어느날, 돌연 신학대학원에 재등록 한 것이다. 무려 사백만 원이 넘는 등록금과 까다로운 학부과정이 있었지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석사 논문이 통과됐고 영광스런 졸업장과 함께 강남에 있는 모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교회는 전에 근무하던 출판사와 인접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출판사가 곧바로 보이고 가끔씩 그곳을 지날 때 면 옛 동료들과 마주 칠 때도 있었다.
"여기는 웬일?"
그러면 나는 난감했다. 불신자인 그들에게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고 일일이 설명하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출판사 직원에서 목회자로 신분이 완전히 바뀐 걸 그들이 어떡케 이해해 줄지 몰랐다. 그 출판사를 지나 교회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과거라는 세상 짐에 눌려 허덕댔다.
대학 청년부 담당 교역자로 시무하던 중, 우연히 동료 교역자들과 함께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백화점은 강남의 부유층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제품마다 동그라미가 얼마나 많이 쳐져 있는지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었다. 간단한 일용품 하나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데 입이 떡떡 벌어졌다.
동료 전도사의 어머니가 그 백화점 맨 위층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식당을 방문하기 전 작은 선물을 마련하는데 너무 가격이 비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강남 사람들은 수입이 어느 정도길래 저런 고가의 제품을 힘도 들이지 않고 척척 사는 걸까.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에서 성공한 하이클래스 멤버가 그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회장 목사는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다녔다. 재벌 그룹에 속하는 교인이 선물했다고 한다. 일류대 출신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고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다. 내가 전도사로 시무하게 된 것도 학벌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평판이었다.
그날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거하게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는 타오르는 조명으로 완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압구정동 전체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었다. 골목마다 성형외과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도로마다 외제 승용차가 굴러 다녔다. 젊은이들 역시 하나같이 고급 일색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지상에서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거리에 가슴에 보퉁이를 든 노파가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칼은 재를 뒤집어 쓴 듯 헝클어지고 지저분해 보였다. 몸빼 바지는 시궁창을 뒹굴다 나왔는지 얼룩이 지고 젖어 있었다. 슬리퍼도 한 축이 떨어져 나가 건들거렸다. 검정색 점퍼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냄새가 풀풀 났다. 완전 거지 형상이었다.
노파가 극장 앞을 지나 지하철역을 향해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동호대교 쪽에서 불어왔다. 고가도로 밑에는 여전히 외제 자동차가 씽씽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두눈에 흰자위만 보였다. 풀어헤친 머리는 남량특집에 나오는 귀신이 연상될 정도였고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어 주근깨가 다닥다닥했다.
주근깨인지 안 씻어 그런지 몰라도 불쌍하다기보다 무서웠다. 여자에게서 악령의 공포가 느껴졌다. 신(神)은 저 여자의 고통을 알고 있을까. 전능하다는 신의 능력으로 저 여자를 고통에서 건져줄 수는 없는 걸까. 여자는 몸이 사선(斜線)으로 기울어진 채 걸어가고 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위태한 걸음걸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한 채 돌아간다. 그리스도는 저 여자의 고통을 알고 있을까. 인생을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주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저 여자를 구해 줄 수는 없는 걸까. 나는 나의 신분을 잊고서 허공에 대고 외쳤다.
여자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은 얼굴 위로 눈물방울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어."
나는 손 대신 돈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심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닌 사랑임을.
"얼마 안 되지만 식사라도 하세요."
여자는 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들고서 또 울었다.
"고맙습니다."
그 다음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난 어쩌면 위선자인지도 모른다. 회칠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빈. 말뿐인 허장성세.
목회자는 사람 대하는 게 직업이다. 수많은 동료 교역자와 교인들을 대하면서 말에 대한 무한대의 책임을 져야 한다. 수많은 눈길들이 지켜보면서 책임을 묻고 질문을 던진다. 일거수 일투족에 의미를 던지고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났을 때에는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대접받는가 하면 외면당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가도 하루아침에 삯군으로 전락한다.
수없이 사랑과 위선의 가면을 써야 하고 함부로 감정을 표출했다간 언제 퇴출당할지 모른다. 때로 수모도 감수해야 하고 무불통지의 지략도 발휘해야 한다. 칭찬받는다고 우쭐대선 안 되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힘센 교인 앞에 머리 숙이고 그렇다고 가난한 교인이라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언제 어느때 삯군으로 몰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딜 가더라도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말실수는 통하지 않는다. 말 한번 잘못 내뱉었다가 낭패 보는 일은 허다하다. 교만한 말은 절대금물이고 항상 겸손과 온유로 포장해야 한다. 위로와 사랑이 가득 담긴 말로 믿음을 심어주고 웃사람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사방에서 수많은 눈길이 지켜보고 있기에 잠시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교역자로 시무하는 동안 자아(自我)가 점점 타아(他我)로 바뀌는 것 같은 착각에 휘말렸다. 상대의 분위기에 따라 내 감정을 조정해야 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느라 초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스트레스는 위험수위를 넘어섰고 이대로 가다간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여행가고 싶은 욕구가 불쑥 불쑥 차 올랐다.
작가와 교역자.
얼마나 상반된 직업인가. 작가가 자유의 상징이라면 교역자는 부자유와 의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자유의 바다에서 놀다가 감옥 안으로 뛰어든 느낌이었다. 그것도 정신없이.
서서히 아니 급속도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소설 탈고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잠시도 창작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스케줄이 항상 빡빡했다. 성경묵상과 기도, 상담만으로도 나는 이미 한계상황을 지나고 있었다. 자유가 마음속에서 소진되면서 탈출구가 필요했다. 창작의 바다에 푹 빠져 다신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감했다. 나의 본업은 창작이다. 자꾸만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내 안에서 그 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바리새인의 겉옷을 벗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유의 옷을 입히고 싶었다. 결국 나는 삼 년을 버티지 못하고 교역자의 옷을 벗고 말았다. 당회장실에 막 사퇴서를 제출하고 나오던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교회 뜰을 걷고 있을 때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성도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필연과도 같이 내 귓가에 전격적으로 들려왔다.
"H대의 김형국 교수 말야, 작년에 이혼했다며?"
'너 그 소식 어디서 들었어."
"그거 모르면 간첩이지, 그 카사노바 교수가 그간 얼마나 염문을 뿌리고 다녔게,
시를 씁네 하고 수많은 문학도를 울리더니 드디어 부인에게 꼬리를 밟혔다는 게야,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뭐?"
"김형국 교수가 그냥 잘못했다고 빌고 넘어 갔으면 좋았을 것을 묻지도 않은 과거를 밝혔다는 거야."
"과거? 무슨 과거?"
"뭐, 자기가 결혼 전에 좋아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를 잊기 위해 현재의 부인과 결혼했다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왜 하냐, 차라리 그냥 이혼하고 말지."
"그런 카사노바한테 과연 진정한 사랑이 존재했을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여자였을까."
"아마 작가였다지."
"내가 알기론 평론가라 하던데, S여대 전임강사라고 하던데."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해, 암튼 그 카사노바가 독신이 되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염문을 뿌리고 다닐지 기대된다 기대돼."
천둥치는 듯한 그 소리가 내 귓가에 전해 오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면서 정신이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다. 후회가 엄청난 후회가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일어났다. 오리무중과 진실이란 단어가 서로 숨바꼭질하면서 내 심중을 어지럽혔다. 수많은 억겁의 시간이 순식간에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잇몸에서 찌르르하고 신호가 왔다. 찝찔한 액체가 잇몸 사이에서 흘러나오더니 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치를 하는데 피가 한웅큼 나왔다. 자세히 보니 앞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뻐덩니처럼. 입을 다물었는데 드라큐라처럼 송곳니 끝부분이 허옇게 보이는 게 아닌가. 풍치가 수술한 지 7년 만에 재발한 모양이었다.
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또다시 풍치수술 받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왼쪽 입술이 위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어 얼굴 전체가 기형으로 보일 정도였다. 특히 웃을 때면 튀어나온 송곳니가 유난히 적나라하게 보였다. 거울을 보면 흉하게 튀어나온 송곳니 때문에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할 수 없이 풍치수술을 받은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또 풍치수술 해야 하는 건가요?"
가슴이 무진장 떨렸다.
"풍치는 아니고 이 뿌리가 약해져 그런 거니까 임플란트 해야겠습니다. 우선 가짜 이빨 본부터 뜨시고."
"네에 임플란트요?"
순간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 엄청나게 아프다는 임플란트 말인가요?"
"예, 그럼 이렇게 흉하게 튀어나온 이를 그냥 둘 작정이신가요? 빼고서 임플란트 하고 나면 감쪽같아질 겁니다."
의사는 너무도 태연하게 당연스럽다는 듯 말했다.
"다 다음에 할게요."
나는 너무도 놀라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임플란트라니, 잇몸을 째고 턱뼈를 드릴로 뚫어 인공이를 심는다는 수술 아닌가. 말만 들어도 너무 끔찍했다. 임플란트 하면 우선 연상되는 게 엄청난 통증과 수술 비용이다. 수술 과정이 워낙 고난도의 기능을 요하는 것이라 그만큼 힘들고 비용도 비싸다. 의료보험 혜택이 안 되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를 한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수술을 한 뒤, 3일 밤낮을 누워 지냈다고 한다. 수술 후유증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요즘은 임플란트도 많이 발전해 레이저 무통 클리닉이란 게 생겼다고 한다. 단번에 레이저로 구멍을 뚫고 임플란트를 심는 방식이다, 전혀 통증도 없고 시술 방법도 간단하다.
또 한 방법으로 브릿지라는 게 있다. 이는 이를 빼 심은 다음, 양쪽 이를 깍아 매다는 형식으로 하는 방법이다. 불편한 건 양쪽 이를 깎아서 하기 때문에 보철물에 치석이 더 잘 낄 수도 있다. 그래서 7년마다 다시 보철물을 해 달아야 한다. 무통 클리닉, 즉 레이저 임플란트는 잇몸뼈가 튼튼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보통 임플란트 환자의 경우, 풍치가 심해 잇몸뼈가 녹아 있는 상태가 많아 뼈를 보충해 준 다음 시술이 가능하다. 보통 인공뼈나 합성뼈를 사용하는데 우선 심을 공간을 확보한 후 뼈를 보충한 다음 드릴로 잇몸뼈를 뚫는다. 그리고 임플란트를 심고 뚜껑을 닫고 잇몸을 꿰맨 다음 가짜 치아를 붙인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임플란트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지인(知人)들에게 전화를 걸어 임플란트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시술 비용과 고통의 강도에 대해서였다.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보험혜택이 안 돼 약값마저 비싸다고 했다. 예금통장을 뒤져 간신히 비용을 마련했다. 튀어나온 앞니가 흉해 하루라도 빨리 시술
받고 싶었다.
임플란트를 전문으로 한다는 치과에서 시술을 받기로 했다. 우선 구강 전체를 찍는 파노라마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치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임플란트 심을 위치와 뼈의 양과 밀도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엑스레이 사진 판독 결과 나는 레이저 임플란트가 아닌 기존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풍치로 잇몸뼈가 녹아 흘러 뼈를 보충해 준 다음 시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랫니와 달리 윗니라 치료 기간이 더 길었다. 보통 아랫니는 턱뼈가 튼튼해 3-4개월이면 보철물을 올릴 수 있지만 윗니는 뼈가 약해 6개월이 걸린다. 시술 후 중간 중간 레이저를 쪼여주면 뼈가 더 잘 아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앞니는 심미적인 효과를 위해 더 많이 손이 간다고 한다. 입을 벌리면 곧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설명이 끝난 뒤 곧바로 시술에 들어갔다.
마취를 한 뒤 30분쯤 지나 또다시 마취를 했다. 강한 집게 같은 걸로 이를 빼는 모양이었다. 잘 빠지지 않는지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으윽. 저절로 신음이 났다. 이가 빠지자 잇몸을 절개하고 다음 수순이 이어졌다. 아마도 인공뼈를 집어넣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자 이번에는 드릴 소리가 났다. 뼈 깊숙이 드릴로 뚫는데 이와 귀가 가까워서인지 그 소리가 천둥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드릴로 뼈 뚫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한참을 뚫고 나자 임플란트가 식립되는가 보았다. 나사 같은 게 뼈속으로 들어가더니 뚜껑을 조여 닫는 소리가 났다. 안전을 확인하고 잇몸을 꿰매는 가 보았다. 팽팽한 실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 위에 본을 뜬 가짜 치아가 붙여졌다. 1 시간 여 만에 시술이 끝났다. 앞니 부분이 얼얼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풍치수술보다 훨 안 아팠다. 중간 중간 레이저로 쪼여주기 때문에 출혈도 심하지 않았다. 숙련된 베테랑 의사라 그런지 시술이 순식간에 끝난 것이다. 수술실 밖으로 나오자 간호사가 얼음팩을 주었다. 수술 부위에 대고 찜질을 하라고 했다
"당분간 죽을 드시고 단단한 음식이나 뜨거운 것을 삼가 드세요, 출혈이 심하면 지혈제 드시고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약국으로 갔다. 지혈제와 소염진통제 값이 무려 칠천 원이었다.
"임플란트 하셨나봐요, 보험혜택이 안 돼 약값이 비쌉니다."
"아! 짜증 나."
나는 수술 부위에 얼음팩을 갖다 대며 신경질을 부렸다. 통증이 잠시 정신을 분산시켰다.
"아! 하나님."
밖으로 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포장마차였다. 호떡과 떡볶이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먹는 데 대한 욕구가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 온 건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폭식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무언가 먹고싶은 걸 먹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엄청난 신(神)의 은총이자 배려였다.
나는 아픈 이를 감싸고 포장마차 앞을 지나갔다. 지하도를 건너자 이번에는 커피 전문점과 피자 전문점이 나타났다. 향긋한 커피향과 피자 냄새가 그야말로 죽여줬다. 저절로 발걸음이 가는 걸 나는 억지로 되돌렸다. 붕어빵 장사와 구운 옥수수, 만두와 튀김냄새도 코를 찔렀다.
아아! 세상은 온통 먹을 것 천지였다. "당분간 죽만 드세요." 간호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계속 눈앞에 먹을 것이 나타났다. 그러나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통증은 점점 가라앉는데 배에서는 연신 꼬르락 소리가 났다.
거리는 완연한 봄이었다. 아직 칙칙하긴 했지만 봄기운이 땅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자들은 얇은 스커트 자락을 날리며 거리를 지나갔고 성급한 젊은이들은 벌써 반팔을 입은 경우도 있었다. 사거리 쪽에서 청소년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그들은 험한 말을 내 쏟으며 종횡무진 차도와 인도를 오갔다.
"야! 이빨 까지 마."
"구라 까고 있네."
"또 노가리 까면 죽을 줄 알아."
"빡세게 까부실까부다."
"씨발 니기미 다 쥐기는 수가 있어."
청소년들을 이번에는 짝을 지어 욕을 해댔다. 듣기에도 끔찍한 욕설이 공중에 메아리처럼 떠다녔다. 절망과 공포에 찬 말은 파괴력이 되어 심중에 와 박혔다. 행인들이 슬금슬금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 급한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였다. 느닷없이 내 안에서 욕설과 허언(虛言)들이 떠올랐다.
위선과 가증에 찬 거짓말들도 떠올랐다. 특히 임기응변식으로 둘러댄 수많은 거짓말들이 내 뇌리 속에 똑똑히 떠올랐다. 남의 고통쯤 아랑곳 않고 여행과 방종에 빠져들던 옛 모습도 떠올랐다. 나에게 따지고 반항하던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천사의 방언을 하면서도 속으로 저주와 악담을 퍼붓던 기억도 떠올랐다. 노숙자들을 대할 때마다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던 기억도 났다.
실연의 상실감으로 신(神)의 품을 찾아들었던 나는 신(神)을 속이고 나 자신마저 속이던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니었던가. 걸인의 손에 지폐 몇 장 쥐어주고 나서 나는 어딜 가나 선한 사마리아인 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또 입버릇처럼 회개를 외쳤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 주여 내 입술의 죄악을 도말하소서.
성전 마당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여자가 있었다. 때가 덕지덕지 묻은 검정색 점퍼에 발가락이 비쭉 나온 슬리퍼를 신고서 여자는 연신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한참을 뒤지더니 마침내 일회용 도시락 용기를 건져 올렸다. 그것을 손에 쥐고서 먹을 것이 남아 있나 살피는 모양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도시락 안에는 하얀 쌀밥과 깻잎이 놓여 있었다. 그 일회용 도시락을 들고서 여자는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저어, 이거."
나는 지폐를 여자의 손에 쥐어주려 했다.
"아직 밥이 따듯합니다 같이 드시죠."
나는 돈을 건네다 말고, 부끄러움에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돈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또박또박 여자는 말을 잘라 하면서 문득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아! 당신은 당신은……."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서 쾅!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나는 부끄러운 손을 거두고 겨우 한마디했다.
6개월 후, 나는 드디어 가짜 이를 떼 내고 송곳니를 해 달았다. 그동안 무시로 흔들거리던 가짜 이는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만든, 하얗고 고른 이를 임플란트 보철 위에 붙이고 거울을 보여 주었다. 진짜 이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똑같았다. 신기했다.
"마음에 드세요?"
"네에, 어쩜 이리도 똑같죠?"
간호사가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진정 직업의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탄식처럼 내뱉던 기도가 생각났다.
오! 주여 내 입술의 죄악을 도말 하소서.
8월이었다. 거리를 지나는데 습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며 날아갔다. 아파트 앞 화단에서는 활짝 핀 분꽃 향기가 사람들 가슴속으로 퍼져갔다. 그런가 하면 건너편 중앙시장에서는.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거리는 맹렬한 더위와 음식 냄새가 뒤엉켜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멀리 달아났던 식욕이 생각난 듯 다가왔다. 나는 방금 치과에서 나온 사실도 잊은 채, 포장마차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폭식하는 습관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