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인간은 살아가면서 물과 관련한 수많은 경험들을 하게된다.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조차 없는 경험으로부터 그 후 기억이 뚜렷한 많은 경험에 이르기까지...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이불 위에 실수로 그려놓았던 지도(?)에 대한 경험,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실험실에서 서로 다른 색을 지닌 두 용액이 시험관에서 혼합될 때 신비롭게 느꼈던 경험들..... 이들 경험 중에는 어떤 형태로든 기억 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경험들도 있고, 기억에서조차 없는 잠재된 경험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후 물과 관련된 또 다른 체험 중에 자연스럽게 떠올려지곤 한다.
물에 흠뻑 적셔진 종이 위에 물감을 떨어뜨려 번져지는 과정과 우연히 만들어진 형태, 그리고 이 감각적 체험에 대한 반응들은 각자가 경험했을 잠재된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이야기 될 것이다.
수채화의 많은 기법들 중에는 우리가 어쩌면 태아 때부터 경험했을 지도 모를 물과 관련된 수많은 경험에 의한 반응들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기법들이 있다.
번짐, 흘려짐, 뿌려짐, 긁힘, 찍힘, 침전효과 등...
오랜 기간 수채화 작업을 하면서 내게도 있었을 이런 잠재된 기억들이 기법 속에서 여러 형태로 반응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반응들은 물감이 물에 용해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흰 접시 위에서 가지각색의 물감이 물에 풀어질 때의 그 매력적인 느낌은 다른 재료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매력들은 내가 그 동안 수채화 작업만을 몰두하게 된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내게 있어서 수채화의 다양한 기법들은 하나의 형식요소(formal element)로서, 이들이 화면의 각 부분에서 만들어내는 미적 효과에 관심을 갖는다. 이 형식요소들은 시각언어의 기초이며 이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열되고 서로 반응하여 작품에 전면적인 인상을 결정한다.
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첫번째 문제는 이러한 형식요소들과 이들을 구성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재의 선택과 그 선택의 배경에 관한 문제였다. 제재의 선택과 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형식요소들-이들의 관계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부조화와 분열을 줄이는 문제는 그 제재의 선택에 관한 충분한 고찰과 다양한 기법의 탐색이 작업에서 우선되는 문제였다.
수채화의 기법 중에 물의 농담에 의한 표현, 맑고 경쾌한 투명성, 일획에 표현되는 즉흥성 등은 다른 재료들이 갖지 못하는 수채화만의 고유의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수채화가 갖는 표현의 어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아내는 표현의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겪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에서 수채화 재료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수채화만의 고유의 세계를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제재에서 탐색을 해 보았다. 순수한 자연풍경이나 추억이 어려있는 집과 같은 풍경적 소재, 그리고 일상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출발한 정물적 소재,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채화의 ‘의미 있는 기법’들을 표현하고 또한 이 기법들의 표현은 이들 제재 속에 대상들을 수채화의 표현세계로 용해시켜 끌어들인 것이었다.
자연 풍경 속에서의 빛과 빛깔들, 멀고 가까움, 꽃과 나무의 활짝 펼쳐짐, 유유히 흐르는 물과 그 위에 비쳐진 그림자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푸근함과 부드러움 이러한 모든 미적 요소들이 수채화 물감에 용해되어 표현되어 질 때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본문에서는 여러 제재들의 작품에 대해 제작하게된 동기와 그 배경 그리고 다양한 기법과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상세한 방법 등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표현된 기법들이 작품을 제작하게된 동기나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수채화 표현의 또 하나의 일면을 보이려 한 점에 대한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그 동안 제작한 작품들의 작업과정과 심미관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더 폭넓은 수채화 작품들이 전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
Ⅱ. 실제 작품 제작으로 본 기법
1. 풍경적 소재
물에 용해된 자연의 따뜻한 품은 내 작업의 주된 소재이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는 조화와 영적 교섭이다.
인간의 소유물로서의 자연이 아닌 독립된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을 찾아 떠나본다.1)
내게 있어서 수채화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제재는 ‘자연’이었다.
‘자연’이란 친숙한 소재 안에서 기법의 적절한 구사를 통해 수채화의 의미 있는 세계를 보여주려 하였다. 이것은 대상의 단순한 외면적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동양화의 骨法2)과 같은 기법으로 그 안에 숨겨진 ‘율동적으로 생기에 넘치는 어떤 것’, 즉 ‘氣運’을 수채화 기법의 세계로 생동감 있게 끌어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풍경화 작품 속에서 인물이나 인물의 흔적을 배제하려 하였다. 간혹 그 흔적을 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 용해된 축소된 의미로 넣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과 인간의 양자간 틈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자칫 억지스런 낭만에 빠지게되고, 이들의 조화와 교류에 방해요소가 될 수 있음에서이다.
화면 속에 자연은, 자연 그 자체의 중요성과 독립성으로 존속시켜 두고, 인간의 존재는 화면 밖에서 이를 보고 관망하거나 감상을 통해 사색하는 존재로서 남겨두려 하였다.
1) 청송 가는 길 (91×73㎝)
이 곳은 2002년 새봄으로 이어지는 때의 주왕산 근처, 외딴 마을의 뒷동산 풍경이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만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그림자는 잔 설과 마른풀로 남아있고, 봄의 生氣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큰 소나무를 표현하였다.
뒷동산은 고향에서도 자유로움이 가장 충만한 곳이다. 이곳은 우리들의 동심이 숨겨져 있는 곳이며, 옛 고향친구들과의 추억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다.
2) 骨法은 중국의 南北朝時代의 畵論가로 유명한 史赫이 쓴 古畵品錄의 序文에 쓴 畵6法의 하나로, 붓을 운용함에 있어 骨法과 氣運이 있어야하며 이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야 그 근본을 그려낼 수 있음을 뜻한다. 骨法은 동양회화에서 리드미컬한 구조적 앙상블을 이루는 회화적 원리였다. 이것은 서예에서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체의 再現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뜻한다.
전체적인 구도는 ‘안락함’의 느낌을 위한 수평선 구도로서, 특히 먼 산의 어렴풋이 아른거리는 느낌과, 근경의 마른 잡초들의 중첩되어 있는 깊이감에 유의하여 표현하였다.
이러한 먼 산의 표현은 실제 거리에 의한 공기 원근법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존재하는 고향으로의 여행’의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이 먼 산의 처리는 우선 하늘을 옅은 담채?평칠(Wash)1)로써, 중경의 언덕의 위까지-하늘 부분만 채색할 경우 그 경계선이 부담스럽게 보일 수 있음- 채색을 한 후, 산의 밑 색을 몇 가지의 색으로 담채 번지기로서 깔고 시작하였고, 이 밑 색들은 먼 곳으로부터 전해오는 봄빛으로 그에 관련된 색상들이 어렴풋이 보이도록 했다. 이 색들이 충분히 건조한 후 다시 산 전면에 물을 칠하고 그 위에 어렴풋이 보이는 산 그림자를 담채 번지기로 흐리게 처리하였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화면을 수평으로 눕혀놓았는데, 눕혀진 상태에서 담 채(Wash)는 종이의 결에 따라 Granulation효과2)가 나타난다. 이 Granulation 효과로 인해 아련히 멀어지는 효과를 더 하였다. 이와 같은 습식기법은 물이 건조하면서 물감의 농도가 생각보다 옅게 드러나므로 이점을 염두에 두어 표현하였다.
근경을 이루는 화면 아래의 마른풀은 마스킹 용액을 사용하였다. 끝을 가늘게 다듬어 깎은 나무 젖가락을 이용해 드로잉 하듯 마스킹 한 위에, 담 채와 갈필(Brush Drawing)로 채색을 하고, 건조하면 다시 마스킹을 한 후에 다시 채색하기를 10여 차례-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한 작업은 이 마른 잡초의 중첩된 깊이 감의 표현을 위해서였다.
그 외 소나무와 밭의 일부는 세부 표현을 위해 Water Color Pencil과 물감을 혼용하였다.
1) 옅은 농도의 물감으로 변화 없이 채색하는 기법
2) 침전효과-물감과 물이 분리되어 침전되며 착색되는 효과
2) 운문 계곡 (76×54㎝)
이 작품은 청도 운문사 가기 전, 계곡의 가을 풍경이다. 이 작품에서는 햇살과 가을의 빛깔을 전경과 후경으로 나누어 나타내었다. 아침과 저녁 무렵의 먼 산들은 나무들의 형태들이 구분 없이 어둡게 보여, 근경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데 유리하다. 이 곳 먼 산은 햇살 없이 가을의 빛깔을 살려 단순하게 표현하였고 근경의 대상들은 명암의 표현으로 햇살의 효과를 살렸다. 원경의 어둡고 단순한 표현은 근경의 밝은 대상들을 돋보이게 하며 충만한 가을의 느낌과 원근의 효과를 살렸다. 그리고 이곳은 하늘과 먼 산을 서로 번져지도록 같이 처리하여 품같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느낌을 살리며 가을 빛깔의 여러 색들을 동시에 채색해 번지기로 표현하였다.
시냇물은 왼쪽의 근경에 물이 흐르면서 생기는 물결을 넣었고 화면의 오른쪽으로 가면서 먼 곳의 물은 수면 위에 투영된 모습으로 표현하여 두 가지의 효과를 주어 시냇물의 흐름과 고임을 형태를 표현하였다. 물살이 작용하는 중간 부분까지는 화면을 세로로 세워놓고 채색해 번져진 형태의 흐름이 가로로 생기도록 하여 동적인 느낌을, 먼 곳의 투영된 모습은 가로로 세워, 흐름의 형태가 세로로 번지도록 하여 정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수면 위에 비쳐진 돌들은 남기며 채색하기도 하고 채색 후 붓으로 닦아내기도 하였다.
3) 禪 (146×97㎝)
이 곳은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로 유명한 언양 반구대 인근에 있는 천전리의 풍경이다.
옛 고대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풍경 좋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이곳 돌들의 특징은 암각화를 하기에 적합하도록 반듯한 각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각석들이 깊은 계곡을 형성하여 수려한 경관을 지니며 위치적으로 번잡한 도시를 뒤로하고 조용한 구석에 자리한 곳이다.언뜻 보기에 흙 한줌 없는 곳 같은 돌 틈에서도, 자연은 풀 한 포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햇볕을 비추고 물을 제공하며 이를 키우고 있다. 이처럼 자연은 늘 자기 자리에서 하는 일들을 계속한다.
이 작품에서는 강한 햇살의 느낌을 살렸다. 각석에 비친 밝은 햇살로 인해 돌들의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드러난다. 이 돌의 표현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첫 번째는 가장 강한 햇살을 받은 High Light 부분과, 두 번째는 중간 밝기부분, 그리고 마지막은 빛을 등진 어두운 부분이다.
우선 High Light 부분은 강한 햇살의 표현을 위해 흰 여백으로 두거나, 거의 흰 색조에 가까운 옅은 담채로 단순하게 채색했다. 두 번째의 중간 밝기 부분은 가장 정성을 들인 곳으로 겹치기 기법으로 돌들의 세부 묘사와 질감 처리를 한 곳으로, 각 돌들은 각도에 따라 여러 단계의 색조로 채색해 돌들의 다양한 방향을 잡아주었다. 3번째의 빛을 등진 어두운 곳에는 중간부분의 세밀한 묘사에서 오는 답답함을
여러 가지의 기법표현으로 해소하였다.
실제 작업에서 가장 먼저 채색한 것은 3번째의 어두운 부분들로 오른쪽 돌들의 어두운 구석이 우선된 작업이었다. 이 작업순서의 의미는 우연에 의한 표현을 먼저 하고 그 후에 이에 맞추어 다듬는 부분들을 처리하기 위함이고, 이 부분의 처리는 우선 어두운 면의 전체를 물로 Strich1)하고 미리 만들어진 색들을 형태에 따라 번지기로 채색한 후에 소금 뿌리기로 돌 표면에 이끼를 표현하여 보았다.
물로 Strich를 한 이유는, 옅은 농도의 색에서 짙은 농도의 색까지 동시에 채색을 하고 곧바로 소금을 뿌려야하므로 시간에 ?i기는 작업이다. 물감들의 번짐도 그렇지만 소금 뿌리기는 시간을 놓치면 원하는 형태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소금 뿌리기에서 밑 색을 먼저 채색할 경우에는 소금뿌리기의 효과가 반감되므로 흰 종이의 상태에서 채색과 소금 뿌리기까지의 작업이 한번에 이루어져야 한다.
돌 틈의 풀 포기는, 생동감을 위해 연두 빛으로 운필의 속도감을 살렸고, 뿌리 부분은 마스킹 용액을 사용하였다.
화면 아래 있는 물의 표현은, 우선 돌들을 스케치하고 수면 위로 드러난 돌들과 수면 속에 잠겨있는 돌들의 경계를 뚜렷이 스케치하여 수면 위에 햇살이 비치는 부분을 제외한 물에 잠긴 부분을 옅은 밑 색으로 깔고 시작하였다. 이는 잠겨진 돌의 표현과 복잡한 돌들의 형태를 편히 그리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부분 묘사의 유의점은 수심의 깊이에 따라 돌들의 보임의 정도, 전체적인 tone, 그리고 색상들을 달리해야했던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인내로서 묘사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그 위에 잔잔한 물결을 표현하였다.
수면 위의 돌들과 수면의 경계부분에는, 돌의 어두운 그림자 진 부분만 흰 띠 같은 형태를 두어 고인 물의 느낌을 살렸지만 실재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형태이다.
1) 쓰다듬다, 비비다, 문질러 바르다 등의 뜻으로 수채화 작업과정에서 물이나 물감의 고른 흡수와 보습을 위해 종이 표면을 붓이나 스펀지 등으로 잘 문질러 바르는 과정이다.
4) 봄의 서곡 (76×54㎝)
이 작품은 울산 근교 한적한 곳, 개울가의 봄 풍경이다. 이 작품에서의 주제로 설정한 것은 벚꽃과 이를 투영하고 있는 물이다. 우리가 시냇물을 볼 때 바닥이 드러나 보이지 않고 사물들이 투영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때는 주로 아침이나 저녁시간에 해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을 때이다. 수면 위에 해가 비치는 한낮에는 시냇물의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여 이와 같이 투영된 모습은 볼 수 없다. 현장에서 스케치를 하거나 촬영을 할 때도, 이 시간을 포착해야 하며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므로 현장에서의 작품 완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주제의 표현을 위해 햇살의 느낌은 배제하고 각 대상들이 가지는 빛깔을 표현하는데 주력을 했다. 화면의 구성문제에 있어서 수평선 구도로 화면이 가로로 많이 분할되어 있어 주제가 되는 수면 위에 표현은 가로로 난 물결은 빼고 세로로 흘려진 듯한 투영된 모습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주제가 되는 벚꽃과 투영되어 보이는 시냇물의 처리에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다.
만개한 벚꽃의 활짝 펼쳐짐 - 이 탐스러운 극적 효과의 처리는, 우선 흰 벚꽃의 테두리부분을 깨끗한 물로 미리 적셔 놓은 상태에서 뒤 배경의 산을 봄빛의 여러 색을 번지기로 채색을 해서 배경의 색상이 벚꽃의 일부로 번져 들어온 효과를 주었다. 이 번짐의 형태는 반대로 흰 벚꽃이 배경으로 스며들어갔다는 느낌으로도 느끼게 되어, 벚꽃의 만발한 느낌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했다.
이 벚꽃과 주변풍경들을 한 몸에 담아 녹이는 듯 수면 위에 비친 모습은, 우선 수면 위에 부상해 있는 듯한 돌들을 마스킹 용액으로 처리(투영된 모습의 자유로운 처리를 위해)하고, 시냇물 부분 전체를 물로 Strich(작업에 관한 글2 참고)하여 여러 가지 색들을 위 부분에 떨구듯 칠해 놓고 화면을 적절한 각도로 기울여 흘려내려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세로 흘려번지기로, 가로로 여러층 분할되어있는 화면에 나무와 함께 세로로도 시각의 힘이 작용함을 위해서였다.
이 흘려번지기 때 유의한 점은 물감이 번져 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기울기를 수시로 조정했다. 이와 같이 처리된 물감은 붓으로 채색했을 때보다 종이에 흡수한 정도가 약하므로 한번에 원하는 형태가 나오도록 신경을 기울여야하고 다시 위에 덧칠할 때는 얼룩이 잘 지므로 유의하여 채색해야 한다.
이와 같은 습식 기법은 ‘부드러움’의 미학을 담고 있다. 그리고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잠재된 기억들을 자극한다. 부드럽게 번지며 흘러 내려간 형태들이 가슴속까지 젖어드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법들은 종이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보이며, 물감의 섬세한 농도 조절과 그 날의 일기 상태, 습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만족스런 수행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습작들을 통해 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 사용된 종이는 가장 애용하는 Saunders1)지를 사용하였다.
1) T?H Saunders(영) - 중성의 100%면(cotton)으로 빛에 노출되어도 변하지 않는 장점으로 아교로 표면 사이즈를 처리하였고 왕립수채화협회에서 시험하고 인정하였다. 비교적 흰 표백처리가 잘되어 수려한 색조를 띤다.
5) 겨울 여행 (76×54㎝)
2001년 2월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귀한 눈이 온다고 전화가 와, 갑작스런 함안의 스케치여행에 동행을 했다. 한적한 눈길을 걷다가 그저 그런 풍경하나가 눈길을 머물게 했고, 잠시의 사색에 젖어들게 했다. 예전에 한번, 어디선가 꼭 본 것과도 같은 낯익은 풍경...
대학시절 겨울방학 때마다 雪嶽山을 여행을 다닐 때마다 보고 느꼈던 느낌들과 같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 길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아침산행에, 발자국 내기도 미안한 마음으로 깨끗한 눈밭을 걸으며 보았던 주변의 이름 없는 풍경들, 눈 위에 뿌려지듯 쏟아지는 아침햇살의 그 감동스런 장면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남아있는 그 설악산에서의 감동을 함안에서 똑같이 느꼈다. 시공을 초월한 동감 같은!- 어쩌면 별로 볼 것 없는 흔한 풍경이랄 수도 있는데, 그때 그 감동을 살려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오랜 세월 전에 하얀 눈밭에서 느꼈던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해, 별다른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1) T?H Saunders(영) - 중성의 100%면(cotton)으로 빛에 노출되어도 변하지 않는 장점으로 아교로 표면 사이즈를 처리하였고 왕립수채화협회에서 시험하고 인정하였다. 비교적 흰 표백처리가 잘되어 수려한 색조를 띤다.
겨울의 신선한 바람에 날리는 억새와 눈밭에 뿌려진 눈부신 햇살, 그리고 겨울이지만 푸근히 맞이하는 듯한 숲,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나무들,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강한 햇살을 강조하여 표현했다. 원경의 산과 중경의 숲은, 자연의 푸근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원근법적 효과를 위해 나무와 나무들 간의 경계 없이 번짐으로 처리하였다.
이 부분은 하늘과 함께 모두 한번에 처리하였다. 이런 부분(넓은 부분에 다양한 제재들이 있는)을 한번에 처리하기는 시간상으로 쫓기며 작업해야 하므로 오히려 어려운 점이 많으며, 사전에 작업에 대한 충분히 계산과 준비가 따라야 했다. 우선의 작업은 칠해질 색들을 모두 접시에 만들어 놓았다. 색상과 농도 등을 여분의 종이에 테스트를 거쳐, 팔레트보다는 색별로 각각의 접시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채색 전에 부드러운 번짐을 위해 근경 위까지 물로 Strich하고 먼 곳으로부터 채색을 했다. 다만 중경에서 우뚝 솟은 나무는 경계효과를 주어 따사로웠던 아침햇살을 표현했으며, 이러한 넓은 부분의 번짐 효과에는 보습성이 좋은 Raphail 붓을 주로 사용하였다.
근경의 눈길과 원경의 일부를 형태 없이, 채우지 않고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채워진 작품이 갖는 답답함으로부터 해방하였고, 이 남겨진 여백들과 묘사된 부분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심미성을 찾고자 했다.
6) 그 외 풍경화
그 외의 풍경적 소재로는 고향을 소재로 몇 개의 작품을 하였다. 스케치 여행 도중 어릴 적 고향집과 비슷한 집이나 나지막한 동네 어귀를 보며 여지없이 옛날 그 고향의 동네, 그 시절로 마음의 여행을 떠난다. 동네를 가로질러 있는 꼬불꼬불한 小路, 담장과 대문, 밥짓느라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 그리고 그 향내, 이 모든 것들은 옛 고향의 정취와 함께 철없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부모 형제 그리고 그리운 친구들의 기억이 묻어있다.
첫댓글 아~~좋다.
우와~너무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