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송경호 시문집 <<復菴集복암집 얼음 조각을 녹여 시를 쓰다>>
간재(艮齋) 선생 문하(門下)로 이기심성지학(理氣心性之學)에 정진한 복암 송경호 시문집!
復菴 宋敬浩(1867~1935) 선생은, 弑害당한 端宗의 3年喪을 치르고 전라남도 高興에 은거한 忠剛公 宋侃(1405~1480,礪山宋氏11世)의 후손인 鎭海(1839~1895,礪山宋氏24世) 公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家學으로 유학 경전을 익히고, 성장해서는 손위 형들과 함께 艮齋 선생의 門下가 되어 理氣心性之學에 정진한 것으로 비문은 전한다. 일찍이 고장에 鳳岡齋라는 書塾을 일으키고 학동들을 훈도한 선친 蘭亭公(諱 鎭海)으로부터 형들과 함께 수학한 후, 조선 말기의 어수선한 정국을 응시하며 고장에서 家業을 이어받아 역시 학동들의 계몽에 여생을 바쳤다.
작자 자신이 손수 정서하여 엮은 <복암집>은, 서간문 3편과 論說體 산문 5편의 雜著 이외에는 모두가 한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자면, 한시의 각 詩體들을 망라하여, 七言絶句 71題 89首, 五言古詩 3題 3首, 五言律詩 20題 22首, 七言律詩 121題 132首로 짜여 있다.
이들 한시 작품은 계절 따라 변하는 농촌 마을의 풍경과 주변 산하의 勝景, 그리고 훈도하는 학동들의 모습과 그들에 대한 기대감이 主潮를 이룬다. 간혹 국난이나 전쟁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는 등, 시절을 아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글 읽는 선비의 憂國之情을 토로하고 있지만, 詩語뿐이지 작자의 주석이나 배경적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아, 그 상황이 東學革命 때의 상황인지 淸日戰爭의 상황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譯者 序文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여 문물제도의 기록 도구로 사용해 왔으며, 고려 光宗朝의 과거 제도와 成宗朝의 유학 진흥책으로 말미암아 한문이 조야 일반에 널리 사용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 후 朱子學이 전래되어 新興 士大夫層이 형성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儒敎가 건국 이념으로 확립되자 한자 문화가 국가 지도층은 물론 일반 서민의 敎學과 習俗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국가적 인재 등용의 유일한 통로인 과거 제도로 인하여, 사대부 집안의 자제를 비롯한 일반 서민의 교육 제도가 모두 다 漢文 수학을 위주로 설정되어 있었고, 국가 사회의 모든 역사와 제도 및 문화 기록이 전부 다 한문으로 표기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私人 간의 서신 왕래나 생활 문자도 한자 또는 한문이 기록 도구로서 주를 이루게 되어, 많은 사람, 특히 사대부층은 대다수가 나름대로의 文筆 행위를 생활화하고 그 결과물을 후대에 유산으로 남겨 빛나는 정신문화의 거대한 寶庫를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선조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상과 올곧은 선비 정신이 담겨 있는 귀중한 玉稿들을 찾아내어 정성 들여 갈고 다듬어 찬연히 광채를 발하게 하는 작업은, 바로 우리 후대의 사명이자 의무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번거롭고 난해한 한문 기록을 제대로 해석할 人力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정에 간직된 정신문화의 보고들이 그대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빛을 못 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으며, 선조들께 크게 죄송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거론하는 <復菴集>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다행히도 남달리 선조를 숭모하여 오매불망 잊지 못해 온 자손들의 정성으로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된 것은 크게 다행스러운 일로써, 그야말로 조상의 음덕이라 하겠다.
復菴 宋敬浩(1867~1935년) 선생은, 弑害당한 端宗의 3年喪을 치르고 전라남도 高興에 은거한 忠剛公 宋侃(1405~1480년,礪山宋氏11世)의 후손인 鎭海(1839~1895년,礪山宋氏24世) 公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家學으로 유학 경전을 익히고, 성장해서는 손위 형들과 함께 艮齋 선생의 門下가 되어 理氣心性之學에 정진한 것으로 비문은 전한다. 복암이 사사한 艮齋 田愚(1841~1922년) 선생은,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는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을 이은 畿湖學派의 학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艮齋學派라 부르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여 당대의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간재는 오직 율곡의 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理는 天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氣의 작용으로 보았으며, 또 율곡의 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心則氣・明德是氣說을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율곡의 心爲氣主를 확대하여 心本性・心學性과 함께 性尊心卑・性師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많이 제창했다. 특히 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했는데, 이는 스승 任憲晦가 몸담았던 洛論系의 학설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간재는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학계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復菴이 배움을 청하며 인사드린 후 그 감격을 적어 艮齋에게 보낸 한 통의 서신 외에는, 사제지간에 주고받은 문답의 글은 보이지 않아 성리학적 探討는 考究하기 어렵다. 복암 선생은 일찍이 고장에 鳳岡齋라는 書塾을 일으키고 학동들을 훈도한 선친 蘭亭公(諱 鎭海)으로부터 형들과 함께 수학한 후, 조선 말기의 어수선한 정국을 응시하며 고장에서 家業을 이어받아 역시 학동들의 계몽에 여생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작자 자신이 손수 정서하여 엮은 <복암집>은, 서간문 3편과 論說體 산문 5편의 雜著 이외에는 모두가 한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자면, 한시의 각 詩體들을 망라하여, 七言絶句 71題 89首, 五言古詩 3題 3首, 五言律詩 20題 22首, 七言律詩 121題 132首로 짜여 있다.
이들 한시 작품은 계절 따라 변하는 농촌 마을의 풍경과 주변 산하의 勝景, 그리고 훈도하는 학동들의 모습과 그들에 대한 기대감이 主潮를 이룬다. 간혹 국난이나 전쟁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는 등, 시절을 아파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글 읽는 선비의 憂國之情을 토로하고 있지만, 詩語뿐이지 작자의 주석이나 배경적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아, 그 상황이 東學革命 때의 상황인지 淸日戰爭의 상황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럼 선생의 詩篇들을 간략하게나마 주제별로 나누어, 그 시적 情操와 현실 상황을 표출한 구절들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남쪽 골짜기에 봄물이 가득 차고 길은 제방으로 비꼈는데/ 이제 막 새 움이 트는 뽕나무에서 오디새 울고 있구나./ 봄나물 가득한 광주리엔 꽃송이도 꽂혀 있네./ 아, 어서 빨리 돌아가 집에 있는 아이 보살펴야지.─「卽景」
비단길처럼 우거진 풀밭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백발이 성성한 시골 늙은이가 멀리 물가에 있네./ 석양이 비낀 다락 위에 기대서서 바라보노라니/ 갈매기와 해오라기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하네.─「野望」
허공에 무수히 날리는 버들개지가 마치 눈송이와도 같아서/ 無情한 것인데도 흡사 有情한 것처럼 되돌아오네./ 날다가 우연하게도 꽃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으니/ 바로 석양빛에 날개 말리는 나비인 듯싶구나.─「柳絮」
한낮이 되자 나직한 섬돌가에서 해당화가 졸고 있고/ 서늘한 다락에서는 제비들만 성긴 발을 스치며 날고 있네./ 어디서 나는 牧笛 소리가 물가의 갈매기를 놀래키는고/ 훌쩍 날아올라서는 다시 다른 곳에 가서 내려앉는구나.─「旅寓」
아내는 밭에서 씨 뿌리고 남편은 산에 가 나무를 한다네./ 대나무 사립짝이 모두 닫힌 채 온 마을이 한적하구나./ 채소 꽃들이 활짝 핀 담장 가에 석양빛 저물어 가는데/ 제비 떼들 쌍쌍이 날아 들고 날고 하는구나.─「農家」
이처럼 자연 풍광에 대한 서정적 情操가 풍부한 시인은, 조선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종래 전통적인 立身出世의 길인 科試와 문장을 포기한 채, 향리에서 學童들을 가르치며 자신이 못다 이룬 理想을 훗날 그들이 이루어 주기를 기대하는 삶으로 목표를 바꾼 듯하다.
푸른 등불이 쓸쓸하게 반짝이는 산 아랫집/ 귀여운 아이들 두셋이 모여 앉아 글을 읽고 있다오.─「卽事」
그래도 열흘 이상을 삭막함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황량한 마을에 글 배우는 아이들이 있는 까닭이라네.─「潭龍齋僑寓述懷」
산그늘에 대숲의 빛깔이 싸늘한데/ 아이들은 난간을 에워싸고 있구나./ 텅 빈 책상 위에 책들만 곱게 쌓였는데/ 깔끔한 돗자리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네.─「幽居」
學童들은 등불 앞에 가지런히 앉아 책 읽기를 즐긴다네./ 저 龍門을 가장 먼저 뛰어넘는 이 누구일까/ 응당 當年의 同隊魚들을 이야기하겠지.─「卽事」
향리에 묻혀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초연하게 탈속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타고난 감수성과 愛民 정신은 간단없이 치열하게 작동하며 암울한 국가의 현실과 백성의 삶을 주시한다. 그리하여 궁벽한 농촌 현실과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국가의 失政과 관리들의 苛斂誅求를 신랄하게 고발하기도 한다.
아무리 쌀독을 기울여도 봄에 뿌릴 씨앗밖에 안 남았는데/ 관리는 어찌하여 저리도 세금 거두기에 바쁜고.// …… 그대들도 다들 忠臣과 賢良의 후손일 텐데/ 어찌 차마 저들 유랑민의 행렬을 보고만 있는가.─「有感」
한밤에 담 너머로 이따금 베 짜는 소리 들려오네./ 아, 아무리 농사짓고 베를 짜도 결국엔 다 헛일이지/ 여전히 세상에는 옷 없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걸.─「聞機」
이 깊은 한겨울 날씨, 이다지도 혹독하게 추운데/ 세상에는 겨울옷 마련 못 한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隨意口占」
해마다 끝도 없이 짠 베를 모두 저장해 두었다면/ 그 높이가 산봉우리 위로 수백 층은 솟아올랐으리.// 백계와 만단을 낮에 모두 해내지 못해서/ 해 저문 뒤 창문 밖에 다시 등불을 돋우었구나./ 내일 아침이면 아마 세금 독촉하는 관리가 이르겠지./ 찰칵거리는 베틀 소리에 쌓인 수심 얼마나 깊을까. ─「夜織」
이 땅에서 언제나 난리판이 식는 걸 볼 수 있을는지/ 가난한 집들이 농사짓기 어려운 게 너무 애처롭다오.─「留三和齋」
풍진세상에서 하나의 행복은 가을을 만나는 일/ 모든 집들이 거의 다 石廩의 봉우리를 쌓았네./ 지금은 단지 백성을 위하여 축수를 올리거니/ 해마다 길이길이 올해와 같이 풍년이 들기를.─「秋事」
아, 그 누구의 손으로 이 창생들을 구제할 건가./ 문득 聖化에 무젖던 明時를 회상한다오./ 北斗가 돌며 參星이 비꼈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서쪽 이웃의 홰치는 닭 울음소리를 내가 먼저 듣는구나.─「夜坐」
세상살이란 마치 百尺竿頭에 매달린 것 같아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또 새로운 고개가 나타나네./ 세상이 온통 서릿발인데 아직도 추위를 불러 댄다오./ 가는 곳마다 전전긍긍 목숨이 편안키만을 바라네.─「有感」
시인의 고통스러운 우려는 결국 현실로 맞닥뜨리게 되어, 나라 전체가 온통 전쟁터가 되고 마침내는 亡國民의 신세로 떨어진다. 이때가 시인이 20대인 1900년대로서, 일본을 비롯한 外勢가 물밀듯이 들어와 나라를 유린하고 淸日戰爭・러일전쟁에 이어, 乙巳保護條約과 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하고, 전국에서 義兵이 일어나는 등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암흑기였다. 이 참혹한 시기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았던 시인의 情操를 그의 시편에서 리얼하게 간취할 수 있다.
朝野가 언제쯤이나 조용해질 건가./ 風塵을 10년 동안이나 보아 오노라./ …… 中州가 근래에 一捷을 거두었다니/ 이제야 겨우 愁顔이 풀림을 느끼노라.─「感歎」
세계만방이 온통 어지러운데 우리나라가 그중 으뜸이구나./ 온 세상이 질펀하게 흘러넘치는 물처럼 출렁거리네./ 태양 주변에 妖氣가 서리어 하얗게 햇무리 지고/ 길거리에는 괴이한 말들이 핏물처럼 붉게 흐르네.─「蓮峰齋講會」
靑邱의 桑田之變을 어찌 차마 본단 말가./ 가련쿠나, 赤子들이 마소처럼 끌려가는 모습이여./ 석양 비낀 먼 산봉우리의 풀피리 소리 서글퍼서/ 저 북녘 長安을 바라보며 얼마나 눈물 흘렸던가.─「野歌」
이름 없는 들풀들이야 무심하게 우거져 있지만/ 나라 잃고도 남아 있는 몸이 너무도 부끄럽구나.// …… 우리 東國의 모든 문물이 滄桑으로 변하였으니/ 옛날을 회고해 보아도 막막할 뿐 누구와 함께할 수 있으리.─「述懷」
桑田이 바다로 뒤집어진 지금은 그 어느 시대인고/ 푸른 풀 우거진 江南이 지난날의 회포를 불러일으키누나.─「偶吟」
아, 우리의 이 東土가 크게 상전벽해가 되어 冠屨가 도치되고 異說들이 횡행하여, 이른바 선비라는 자들이 전혀 곁가지의 잘못된 길로 내달리고 있는바, 그리하여 六經도 五倫도 다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기에, 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말을 하자니 가슴이 찢어질 듯하네.─「與申敬泰」
결국 나라가 완전히 국권을 상실한 채 일본의 屬國이 되고, 老境에 접어들자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 시인은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술기운에 의지하여 나날을 살아간다. 노환으로 자리에 누웠다가 몸을 좀 추스를 만하면 또 일부러 술로써 자신의 감수성을 스스로 둔화시키며,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잠들곤 한다. 그렇지만 천성적인 志操와 그로 인한 義憤은 감출 수 없다.
눈을 들면 풍진세상에 의분이 북받쳐서/ 산수에 정을 붙인 채 술기운에 내맡겨 사네.
─「對客」
어지러이 이익이나 다투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거니/ 원컨대 부디 이 山을 배워서 初心을 저버리지 말아야지.─「見雲埋山望積金島感吟自警」
초라한 이 늙은이 모습 참으로 보기가 싫거니/ 그저 丹心이나마 당초의 뜻을 바꾸지 않으련다.─「自嘲衰相」
만약 고기 잡고 나무하는 즐거움을 안다면/ 어찌 三公의 자리와 이 江山을 바꾸고 싶어하랴.─「雲迷山人別莊」
대지에 가득한 세찬 물결이 桑田을 碧海로 만드는데/ 인적 없는 산속 밝은 달빛 아래 두견화가 빨갛게 피었구나./ 머리 들어 해를 바라보노니 지금이 그 어느 세상인고/ 아마도 이게 혹시 한바탕 春夢은 아닌지.─「偶吟」
불쌍하구나, 창생들이여 그만 熱火를 당하였거니/ 賢士들로 하여금 雲林을 사랑하게 만들지 말구려./ 宗廟社稷을 길이길이 편안하게 모실 방책은/ 오직 어진 신하들이 聖心을 바로잡는 데 있다네.─「感憤」
수심 끝에 만난 술이기에 천 잔도 부족한 듯하고/ 꿈속에서의 돌아가는 길은 머리털과도 같이 희미하구나.─「旅寓」
근래에 차츰 병 기운이 회복된 것 같으니/ 大酒豪를 따라서 깊숙이 술잔을 기울여야지.
─「卽事」
거기에다 응당 더하여 孤竹을 기르고/ 곁으로는 뒤엉긴 藤덩굴의 자람을 막아야 하리./ 草泉과 瑞石은 무궁토록 여기 있을 것이니/ 천년토록 유유히 佚老의 이름을 지키리라.─「次撫松亭原韻」
어지러운 세상사로 모두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립고 정겨운 벗들이 문득 꿈속에 돌아왔다네./ 작은 배를 몰아 파도 가르며 예전에 놀던 섬을 찾아가/ 향기로운 술잔에다 달을 마주하여 아름다운 산속에서 취하였다오.─「憶曾遊」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復菴集>은 시편들의 제작 상황이나 시기 등을 가늠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어, 국가가 외세에 휩쓸리고 혼란스러운 전쟁터로 변하며 결국 국권마저 상실해 가는 상황을 얼추 짐작은 하겠지만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 인용 시의 마지막 시편은 시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된 작품이 아닌가 여겨진다. 젊은 시절 청운의 꿈을 간직한 채 함께 공부하며 어울리던 그립고 정다운 친구들을 꿈속에서 만나게 되고, 지난날에 그들과 함께 호탕하게 즐겼던 아름다운 추억을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소환한 시인―이는 바로 人倫이 바로 서고 도덕적 사회가 되어 知己들과 즐거이 함께 어울리며 취하고 싶었던 시인의 간절한 소망의 形象化가 아닐까.
이번에야 겨우 출간으로 빛을 보게 되는 이 문집은 여러 대에 걸친 자손들의 자책적인 회한과 간절한 염원이 어우러져, 드디어 세상과 대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친(桂馥)으로부터 家寶처럼 물려받고 자신이 祖父의 문집을 번역・출간하겠다고 다짐하며 간직해 온 자손睍燮은 끝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면서 임종 자리에서 다시 그 아들(在得・在珍)에게 문집과 함께 고이 마련한 출판 자금을 건네고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책무를 유언 받은 아들은 증조부의 문집 출판 건으로 수년 동안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25전쟁 중에 전선에서도 시를 쓰며 자신이 조부의 디엔에이를 물려받았는가 자긍하면서 꼭 선친의 유언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셨던 분이, 결국은 그 짐을 다시 자식에게 넘겨야 했을 아버지의 애환을 易地思之로 되새길 때마다, 증손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달래며 버텨 온 것이다.
이 문집의 실무를 맡은 증손이 바로 시를 쓰며 출판사를 경영하는 宋在珍 학형이다. 송 시인은 역자와 40년 知己로서, 呼兄呼弟하며 자주 만나 밤늦도록 酒道를 즐기는 사이이다. 그럴 때마다 증조부의 문집 건을 넌지시 흘리곤 했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든가 하는 등의 말로 얼버무리며 그 상황을 넘기곤 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실토하자면, 淺學菲才한 내 실력으로 밑천이 딸려 그 작업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변명으로 눙치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눈 밝은 시인은 나의 그런 얄팍한 언술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도저히 방어할 수 없는 전술로 나를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는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형님을 譯者로 하여 문집을 출간하기로 했다.”며, 번역자로 내 이름 석 자를 박아 넣은 판권지와 함께, 거기에 수록할 번역시 몇 편을 보내왔다. 그 시들을 한문 原詩와 대조해 보니 적잖은 오역과 상황의 판단이 잘못되어 있어서, 이런 해석이 그대로 내 명의로 출간된다면 큰 망발이겠다 싶어 할 수 없이 내가 한번 검토해 보겠다고 하여, 결국은 전체적인 번역 작업을 떠맡고 말았다. 시인이 진정한 속내를 말하지는 않지만, 내 짐작에 그 자신이 일부러 그처럼 誤譯을 해 가지고, 내게 “이제 어떨 테냐?” 하고 들이댄 듯싶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문집의 번역 작업을 맡아 진행해 가면서 절실히 느낀 바는─한문의 해석, 특히 한시의 해석은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시인의 詩心이나 情操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을 때는, 시적 구조나 시법을 따져 가며 시인의 心象을 가늠해 보고자 머리를 싸매도 적절한 의미를 찾아내지 못할 때는, 할 수 없이 글자의 의미 그대로 축자 번역으로 옹색하게 마무리 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뒷날 후학에 의해 엉터리 오역임을 지적당할 것을 예감하면서 등골이 오싹하며 식은땀에 젖곤 하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開港으로 우리 역사가 ‘近代’라는 세계사의 시간표 속에 편입되며, 사상계의 변혁과 정국의 혼란으로 온 세상이 위기감 속에 빠져 있을 때, 그 시대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갈등하고 번민한 한 선비의 심적 고뇌가 형상화된 것이 본 문집이다. 그러한 시적 표상을 번역한답시고 덤벼든 무모함에 뒤늦은 후회와 自愧之心을 절감하며, 예로부터 시의 해석에 곧잘 膾炙되던 말―시의 완벽한 해석이란 불가능하다는 의미의 “詩無達詁”라는 상투어로, 나의 짧은 지식과 부족한 감수성에 대한 변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학계 제현의 叱正과 鞭撻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2022年 10月 譯者 李光昭 識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말~ 서정적인 시구들이
풍요롭게 펼치고 있어
시적풍미가 넘쳐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