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문제가 생길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대해서 각기 자기 방식대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세 가지 반응 양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제를 아예 덮어 버리고 잊어버리는,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방법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들을 취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반응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딪히는 것입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 앞에 부딪히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에게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십자가,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 앞에서 그분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유다를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문제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부인하는 연극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십자가, 다가오는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를 예수께서는 똑바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로부터 도피하지 않으시고 그는 십자가라는 현실, 십자가라는 고통을 끌어안고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리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십자가를 직면하셨고 기도로 십자가를 지셨으며, 기도로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도 어렴풋이 다가올 시련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벌써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엇인가 선생님에게 커다란 일이 일어날 것이고 자기들에게도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 그리고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내 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45절을 보면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니느웨를 향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배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던 요나와 본문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망각에로의 도피, ‘에라 잠이나 자버리자’하는 일종의 도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 곁에 다가오십니다.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현실, 그 앞에 선생님을 부인하고 혹은 저주하고 도망갈 제자들의 모습, 이런 모든 모습들을 예견하시면서 그러나 그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현실을 경고 받고도 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곁에 다가오신 주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어찌하여 자느냐?”
3.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겠지만 오늘 강론에서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디에 마음이 더 갑니까?
첫 번째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이 말씀은 46절에도 반복됩니다.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이렇게 두 번씩 강조되었습니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기도의 소극적인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적극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정신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 그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십자가를 수용할 수 있었던, 주님의 결단의 가장 커다란 비밀은 그분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이 위대한 기도, 지상 최고의 기도라고 일컬어지는 이 기도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자기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만 언제나 자기 뜻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시험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방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에서 발견합니다. 본문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표현이 한 번밖에 안 나옵니다. 누가복음만 보면 한 번만 기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 26:39 이하에 예수님이 세 차례 똑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가진 기도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는, 너무 이성적인 기도 훈련을 받은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데 똑같은 말을 왜 반복하는가?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복과 중언부언은 다릅니다. 중언부언은 영혼이 실려 있지 않은 기도이고, 마음이 실려 있지 않은 기도이며,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이며 일종의 주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 제목이 절실할 때, 내가 절박한 상황, 절박한 문제 앞에 부딪혔을 때 어찌 기도의 반복이 없겠습니까?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 문제를 놓을 수 없는 절박함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결사적입니다. 우선 그분은 무릎을 꿇으셨습니다.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유대인의 보편적인 기도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서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박할 때 그들은 엎드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44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그는 의사였습니다. 의사의 예리한 안목으로 주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어떻게 통찰해 주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의사의 예리한 안목에 잡힌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평범한 상황 속에서는 평범하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범한 상황 속에서는 필사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에는 절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평범하게 기도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소리치면서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제자들이 다 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어떤 제자는 아마 주님의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그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소리치는 기도였습니다. 얼굴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결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이 있다면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보통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한 번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이 제목을 붙들고 결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5.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기도 간증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말해 봅시다.
한국 교육계에 신선한 새 모델과 자극이 되어 준, 살아 있는 고등학교의 표본, 거창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고 전영창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거창고등학교의 스승 전영창이야기). 인격 교육이 부재한 우리나라에서 살아 있는 교육을 지키고 있는 이 학교의 비밀, 이것은 전영창이라는 사람의 믿음과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이분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쓰러져 가는 부채 많은 학교 하나를 맡았습니다. 이것이 거창 고등학교입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부채가 많았고 아무리 갚으려고 노력해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4월, 학교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 찬송 그리고 담요 하나를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웅안현 어떤 산마루 언덕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1주일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사흘 동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미국 유학 갔다 와서 이 나라에 새로운 고등학교 교육을 해 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이 학교 하나 움직이지 못해서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사흘 동안 주야로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너무 너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드디어 사흘째 밤에 이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이 답답합니다. 응답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 그러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1주일 금식 기도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서 동아일보에다가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하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하나님을 협박할 수 있는 담대함으로 기도를 하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면서 가슴이 시원하더랍니다. 갑자기 그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1주일 금식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학교 서무과로 편지가 왔습니다. 조우 복이라는 미국의 크리스천 성도가 수표 하나를 보냈습니다. 2,050불, 이것은 그 당시 부채를 정확하게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1년 이 전영창 교장은 “하나님, 기왕이면 이것보다는 조건이 좋아야지요. 아직까지 제대로 된 강당 하나 없지 않습니까? 본관 건물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다시 한 번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어떻게 왔느냐 하면 유명한 미국의 수정교회 고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가 22만 불의 수표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학교를 끌어올리는 저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