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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소굴에서 온 편지 스크랩 지난 세월(19) - 산골의 자유와 풍요
산적(주정필) 추천 0 조회 28 15.12.23 2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세월(19) - 산골의 자유와 풍요


내 스스로 그만두었던 인천의 그 사장과 기술부장이 나를 찾아 왔다. 한번만 도와 달란다.


난 한마디로 거절했다.


- 나는 이미 이 산골의 자유스러움을 즐기고 있다. 

- 비록 어제는 만원, 오늘은 오천원 벌고 있지만 난 여기가 너무 좋다.


그런데 사흘을 계속 찾아 오는거다. 인천으로 되돌아 가지 않고 인근에 있다가 다시 찾아

온거다. 삼국지에도 삼고초려라는 애기가 있지 않은가? 

그길로 사장 차를 타고 인천으로 올라가며 조건을 물어 보았다.


그 회사에서 수주한 금액이 2 천만원인데 6 개월동안 다른 작업자가 진행했지만 실패작이

되었고 2 달후면 클레임이 걸려 더이상 정부 공사에 참여 할수 없단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두달.


납품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수주 금액 전액을 내게 주겠단다.

그럼 내게 성의를 보여달라 했더니 500 만원을 바로 입금 시켜주며 입금증을 보여주었다.


눈이 펄펄 내려 앞이 안보일 정도의 눈보라를 뚫고 밤 12시경 우리가 그해 겨울을 지내던

밤나무 밭 관리사에 도착하니 울각시와 겨울 방학이라 내려와 있던 딸내미가 맞이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을게다.

영하 10 도 아래로 떨어지는 기온이었지만 펑펑 쏟는 눈과 칠흙 같은 어둠 때문에 길을 찾지 

못해 미끄러지고 엎어지며 해발 400 미터 고개에 올라갔던 탓에 온몸은 땀 범벅이었다. 

가마솥의 뜨거운 물과 간장통에 길러 놓은 물로 대충 씻고 울각시에게 애기를 했다.


두달간 인천에서 생활할테니 그리 알라고~

결혼한 이후 우리는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 직장을 주겠다 했어도 울각시와 딸내미와 떨어져 살기 싫어 포기했던 나 아닌가?

 

설계부터 다시 진행하여 보기 좋게 납품 시켜주었다.

난 두달만에 2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쥐게 되었다.

그대로 내려오기는 좀 미안해서 두달을 더 도와주고 무등산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화순 지역 일대를 안가본곳이 없을 정도로 뒤지고 다녔다.

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몇달째 돌아 다녔지만 집이 마음에 들면 돈이 맞지 않고 돈에 맞추니 집이 엉터리고...


그러던 차에 휴양림 소유로 된 작은 산자락을 분할해서 사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무땅이나 사면 집을 지을수 있는줄 알았다.

군청에 몇번 찾아가고 했지만 임야로 되어 있기에 안된단다.


그 무렵 나는 휴양림 매점을 그만두고 휴양림 한쪽 구석의 돌집에서 평상위에 전기 장판

깔고 임시로 거처하고 있을때 였다. 그런데 휴양림에 일을 다니시던 어느 아주머니가 자기집 

앞에 빈집이 있단다.


그 집을 보는 순간 나도, 울각시도 와~ 좋다~ 하며 탄성을 질렀다.

집앞으로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마당이 넓직한 남향집.

그길로 집주인에게 연락 했다.


원래 3천만원에 내어 놓은 집이었는데 팔리지 않았고 게다가 IMF 여파로 집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던 차에 5년간 비운집에 주인이 나타난거다. 1,350 만원을 요구하며 깍자고 하면 팔지 

않는다 했다. 집터가 130 평이었는데 100 여미터 떨어진 곳에 텃밭으로 쓰던 옛날 집터 80평 

포함이었다.


우리는 당장 계약을 하고 계약금을 건넸다. 좀이 쑤셔 매일 둘러 보러 오고 이건 이렇게 손보고

저건 저렇게 고치자며 애기를 하다 등기 이전도 안된 상황에서 집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사

를 했다. 그때가 2000 년 4월 이었다. 44 살이 되었던 해에 나는 처음으로 내집을 장만했다.




무너진 아궁이와 굴뚝을 손보고 고물상에서 가마솥을 구해 얹고 불을 때니 방이 따끈 따끈하게

온기가 올라왔다. 꼬박 한달 동안 우리손으로 이곳 저곳을 고치는데 동네 사람들은 헌집 고치지 

말고 말끔하게 양옥집 짓지 그런다며 흉을 보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혼해서 이사 다녔던 곳만 해도 20 차례가 넘었다. 주민등록 등본을 떼면 뒷장까지 빼꼭하게

이사 다녔던 주소들이 주르륵 나왔는데 이제는 이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네 위 개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물이 철철 넘쳐 흐른다 해서 붙은 이름인 2 미터 남짓의 

'철철바위' 폭포도 있었고 무등산 규봉암에서 타종하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안심 마을'

에 둥지를 튼거다.


우린 너무 좋아했고 텃밭에 온갖 채소들을 다 가꾸었다.

어머니 생전에는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어머니 몫을 챙겨야 했는데 이젠 그 숙명에서 벗어나 

돈이 생기면 고스란히 내 수중에 남아 있었다. 인천 살적엔 매번 월세 부담이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없었다.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함께 내려온 울 딸내미도 너무 좋아 했다. 


인천 회사의 추가 요청으로 모텔에서 지내며 몇달간 일을 해주다 사장과 면담을 했다.

재택 근무를 시켜다오. 설계 도면은 인터넷을 통해 보내줄테니 회로 기판 조립해서 우편으로

내게 보내주면 프로그램 작성해서 인터넷으로 보내주겠다.


그 요청이 받아 들여져 대문옆의 돼지막 헛간이었던 곳을 급히 고쳐 황토 벽돌 쌓고 내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 무렵 집을 구하기 전에 사두었던 산자락에 울각시는 포장마차를 차렸다.

처음에는 호두 과자 기계를 구입해서 산골 호두 과자를 팔았는데 차츰 동동주도 팔고 하는 포장

마차로 발전했다.


나는 새벽 4시쯤 일어나 회사일을 시작하면 점심 무렵쯤 손을 털고 일어났다. 꼬박 8시간 작업을

한거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걸려 오는 전화 받아야지 상담차 오는 손님과 기술 상담해야 하지

빼앗기는 시간이 많았지만 재택 근무하니 나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에 몰두 할수 있

어 생산성이 높았다.


점심 무렵쯤 포장마차에 가서 울각시랑 점심을 먹고 포장마차 앞의 도로 옹벽에 한시와 김삿갓 시

를 좋아 하는 울각시를 위해 페인트로 한문 싯귀를 적고 한글 번역을 적어갔다. 우리 소유의  산자

락 바위돌들을 캐내어 밭을 일구어 그곳에서 직접 가꾼 채소들을 손님들 보는 앞에서 뜯어다 도토리 

묵 무쳐 안주로 내어 주곤 하다 보니 차츰 포장마차 단골이 많아지고 울각시는 평생 직장을 구했다고 

좋아했다.


우리가 결혼한지 한달만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결혼 했던 처제와 동서가 머나먼 미국에서 찾아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선교사와 연애를 하다 미국 건너가 결혼하고

아들 딸 하나씩 낳고 키우다 늦깍이로 대학 들어가 회계학을 전공해서 오리건 주 정부 회계 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워낙 착실하게 일을 잘 했던 탓에 주지사 출마 권유까지 받았노라 했다.

나는 동갑내기인 처제에게 정치판에는 뛰어 들지 말라고 조언을 했고 지금은 아리조나주에 살고 있다.



위 사진은 80년대 후반 동서가 ROTC 마치고 한국을 자원해서 의정부의 CAMP STANLEY에 근무할 무렵이다.

처제는 울딸내미보다 한살 위인 아들과 한살 아래인 딸을 두었다.

지금은 둘다 시집 장가가서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TROY 랑 MONICA 가 보고싶다.


그때쯤이 우리에게 제일 풍족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했고 걱정거리도 없고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듯 잘 풀려 갈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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