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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승화시킨 한국 1세대 여류 조각가 윤영자(尹英子)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섬세하게 승화시킨 한국 1세대 여류 조각가 윤영자(尹英子)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들었던 윤영자 작가의 아름다웠던 인생길을 되돌아보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류 조각가이자 구상조각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여류 조각가 윤영자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끈기와 지구력 및 그에 따른 근면성으로 힘센 남자들도 하기 힘든 고된 노동작업인 노동조각(勞動彫刻)을 근 70여 년간을 일관성 있게 추구했던 정열적인 예술가였다.
그래서 평범한 척도로서는 가늠키 어려운 그녀의 다기다양(多岐多樣)했던 조각예술과 큰 스케일은 이를 보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천부적인 예술가적 창조성과 작업가적인 체질은 그 세계에서도 매우 유별났다.
그녀는 우리나라 초기 여류 조각분야에서의 그의 선도적인 역할을 작가로서 홍익대학고 미술대학 초기를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보냈으며, 당시 그 세대의 예술가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윤 작가의 경우도 예술외적인 환경(전쟁으로 인해 휴학)으로 학업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 당시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두였던 윤효중과 윤경열 교수에게 직접 사사를 받으면서 조각예술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1953년 홍대 졸업과 동시에 숙명여고와 경기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계속 작품생활을 영위하였다. 그 덕분에 1957년부터 국전초대작가와 추천작가를 거치며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차츰 구축하였다.
그리고 한국은행 조각상을 제작하는 등 작가로서 뛰어난 능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우리나라 대표적 조각가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1962년부터는 국전 심사위원과 조각분과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곧이어 아카데미하우스의 아담과 이브 2인상과 권율상을 제작하여 조각계의 대표 작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후 이어 1966년 서라벌예대(현 중앙대학교) 미술과 부교수와 정교수로 재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서라벌예대 본관과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중앙 분수대 11인 조각상을 완성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조각상과 대광고등학교 상징상 등을 제작하며 자신의 예술의 혼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쏟아 부었다. 전국대학미전 심사위원장과 목우회 대상전 심사위원 및 충남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거쳐 대전 목원대학교 미술학과장을 역임하며 지방 미술 발전에 이바지한 바 매우 크다.
1983년 한국여류조각회 회장을 맡으며 우리나라 여류조각가들의 권리보호와 그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약하였으며, 특히 천안 독립기념관과 올림픽 기념상 및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상 등 국가적 행사를 위한 작품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작가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예술가적인 정열을 불태웠다.
조각가로서의 윤영자의 편여(遍麗)를 보면 이른바 협의의 조각가와 행사와 기념비적 조각가로서의 작가 윤영자를 이해할 수 있겠다.
윤영자의 작가적인 생애를 돌이켜봐도 이 두 가지 역할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지난 2016년 9월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그러한 작업은 계속 되었다. 인간적 형태를 창조하는 조형세계와 거기에 기념적 이벤트를 구축한 모뉴멘트 조각을 동시에 제작하였는데 조각가 윤영자 작가는 초기의에 조소(彫塑)적 조각 제작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나, 후기부터는 대규모의 기념비적인 모뉴멘트 조각들 제작에 뛰어들면서 조각보다는 디자이너로서의 창의성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조각 주제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이 主從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근대 이후의 모든 조각가가 즐겨 쓰던 주제로서 여성적인 본능인 애정과 사랑을 중심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작가는 70여 년간 다양한 재료와 형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 특히 모성애를 주제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이 여인상과 모자상은 당시 전세계 조각가들 사이에 불굴의 주제로서 거의 모든 조각가들이 다루었던 작접 테마였었다. 여인상은 생활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자 신의 피조물(被造物)이 어머니와 여인이었기에 그 여인상을 조각함으로서 아울러 자기 자신의 여성적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인상과 모자상도 우선 재료에 따라서 표현의 효과가 각각 다르다고 본다. 윤 작가는 초기에 석고로서 그것을 표현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돌로 교체되고, 그 돌이 다시 금속화하며 같은 주제이지만 그 표현적 효과와 느낌은 데포르마숑(Déformation-Deformation)하면서도 갈수록 더욱 단순화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재료적 과정을 통해 조각가 윤 작가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중간 지대에 위치해 있는 작품으로 변화가 되었다. 즉, 추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구상적인 요소가 많고, 구상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추상 요소가 많은 것이 그녀의 작품적 특성이 되었다.
사실 구상적인 인체를 볼 때에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공간적인 요소인 볼륨이나 선이나 운동감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추상적인 요소로서 정리되는데 자연의 생명체인 인간의 육체는 따라서 구상 인 동시에 추상적인 존재로서 조각가 윤영자는 그러한 흐름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자기의 데포르마숑(Déformation-Deformation)으로서 작품들을 변형하여 표현하곤 했다.
이를 통한 조각가 윤영자는 작가생활 45년의 긴 세월을 거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성장하고 변모하여 나중에는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진정한 예술가로서 위치를 점하였으며, 그 후 자신의 호를 딴 석주미술상(石州美術賞)을 창설하여 후진들에게 조각적 감성과 힘을 불어 넣어 주었고, 아울러 자신이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예술적 지지를 사회에 그대로 환원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는 작가라고 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사회적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해가 돋는 아침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저녁에 지는 석양에서 느낌도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의 마지막 모습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몸소 실천한 윤 작가의 모습에서 그와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따라서 인생이란 출발점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모습처럼 끝맺음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류 조각가 윤영자 작가 소개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대 미술학부 1회 입학 및 졸업을 하였다. 윤영자 작가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한국여성으로서는 조각수업을 가정 먼저 받은 이다.
1947년부터 윤효중 교수에게 사사했으며, 1949년 홍익대학교에 조소과가 창설되던 해에 입학한 세대다. 또한 대학에서 후학들을 기르고 대전지역 대표적 예술대학이라 할 수 있는 목원대학을 일정한 궤도에 올려놓는 등의 교육자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진 분이다.
한국의 선구적인 여류조각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는 윤영자는 국전을 무대로 주로 활동 해왔다. 국전 1회부터 30회까지 출품에, 특선4회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윤영자는 주로 여인상과 모자상을 주제로 여성적인 볼륨과 리듬감을 살린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을 고집했고, 이는 구상과 추상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윤영자 작가는 한국 1세대 여류 조각가로서 교육가, 예술후원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서라벌예대(현 중앙대학교), 대전 목원대학교에서 수많은 후진들을 길러내며 교육자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고, 퇴임 후에도 석주미술상을 창설하여 후진들에게 힘을 주는 등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예술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전 목원대학교와 숭전대학교(지금의 한남대학교)의 미술대학이나 예술대학 신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1970년대 초반 당시 미술, 음악 등의 예술대학이 개설되지 않았던 국립대학 충남대학교에도 지난 1980년대 초반 예술대학이 신설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지역 미술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2000년대 현직에서의 퇴임 후에도 미술과 조각계 발전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면서 특히, 여성 조각가 양성과 발전을 위해 석주미술상을 창설하여 후진들에게 힘을 주는 등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예술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尹 英 子 (Youn Young Ja/1924.02.21.~2016.09.12)
1924년 2월 21일 서울 출생
1947-49년 조각가 윤효중(尹孝重)과 윤경열(尹京烈) 교수에게 사사(私師),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창설되는 해 첫 입학
1950년 6월 25일 6.25 동란(動亂) 돌발 및 휴학
1953년 홍익대 미술학부 조각과 졸업
1956-58년 숙명여고(淑明女高) 미술교사
1958-60년 경기고(京畿高) 전임강사
1957-81년 국전(國展)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1962년 서울 한국은행(韓國銀行) 건물 환경조각 제작
1962-81년 국전(國展) 심사위원 및 조각분과 심사위원장 역임
1964년 ACADEMY HOUSE '아담과 이브 2人 像' 제작 권율장군상 제작
1966-72년 서라벌 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미술과 부교수 역임
1967-70년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11인 분수조각, 벽
1968년 정약용 선생 동상 제작 (남산), 김유신 장군 동상 건립(진천)
1969-88 년 전국대학미전(全國大學美展) 자문위원 및 심사위원 역임
1971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中央大學校 藝術大學)에 '전진(前進)하는 대학인상(大學人象)' 제작
1972년 대광고등학교(大光高等學校) 상징像 제작
1973-89 년 대전(大田) 목원대학(牧園大學) 미술학부(美術學部) 교수 및 미술학부장(美術學部長)으로 역임 및 정년 퇴임
1974년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신축 자문위원
1975-83 년 충청남도 문화상 충남 미술대전(美術大展) 심사위원
1977-99년 목우회(木友會) 대상전(大賞展) 심사위원
1978년 녹색(綠色) 명(命) 성취의 탑 (수원농촌진흥원)
1983-88 년 한국여류조각가회(女流彫刻家會) 회장 역임
1983-84 년 천안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 및 올림픽 기념(記念)상 제작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周年) 기념탑(記念塔) 제작
1986-91년 서울현대(現代)조각공모展 심사 및 운영위원 (서울신문사)
1987-90년 대한민국 미술대전(美術大展) 심사위원
1988년 연합통신 조형조각 제작 (서울)
1988-92 년 한국 기독교 미술인(美術人)협회 회장
1988년 이후 한국 미술협회(美術協會) 고문
1989-92 년 목원대학(牧園大學) 미술학부(美術學部) 명예교수
1990-91년 서울시 미술대전(美術大展) 추진위원 및 위원장 역임
1990년 이후 한국 구상조각회(具象彫刻會) 고문
1991년 삼성생명빌딩 조형조각 제작 (대전(大田))
서울市 文化賞 심사위원, 대한민국 美術大賞 심사위원
1992년 동아미술제(東亞美術祭) 심사위원, 金鎭 彫刻賞 심사위원
1992-93년 홍익彫刻會 會長
1993년 천주교 한국순교자 수녀관 (서울), 東亞生命 빌딩 조형조각 제작 (서울)
전북은행(全北銀行) 本館 조형조각 제작 (全北)
1993년 서초구청, 시민의 숲 (서울)
MBC 구상(具象)조각공모전 및 뉴 프론티아 美術公 대한민국 美術大展 운영위원
1993-94년 韓·獨 美術家協會 고문
1993-95년 사단법인 목우회(木友會) 이시장
1996년 재단법인 석주문화재단 승인(문화관광부)
1998년 한경직 목사 동상(대광고 한경직 목사 기념관)
2000년 경남 조각심포지엄(미술박물관 벽부조 현상공모)
2000년 이후 재단법인 석주문화재단 이사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및 목우회 고문 역임.
국립 현대미술관 운영 자문위원, 한국기독교 미술인협회 고문 역임
2016년 9월 12일 서울에서 폐렴으로 사망(향년 9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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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용한 정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매우 유용한 정보 항상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류 조각가였던 윤영자 작가의 생애에 대한 자료 정말 감사했답니다.
많은 정보가 되었답니다.
고 윤영자 교수님의 크나큰 업적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조각계의 발전과 여류 조각계에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윤 교수님의 활약 덕분에 한국 조각계에서 여류 조각 작가들의 활동공간이 더욱 커졌다고 맏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대전과 충남지역 등의 조각계에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했습니다.
이전에 조각의 불모지였던 대전과 충남예술계에 조각이라는 부문에 대한 발전이 윤 교수님의 노력 덕분에 많은 발전을 이뤘다고 봅니다.
윤 교수님 노력과 활약 덕분에 한남대학교( 이전의 숭전대학교)와 목원대학교, 그리고 충남대학교 내 예술대학에서 조각전공 부문이 생겼고요, 여기에 1980년 중반까지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이 없었던 충남대학교에 관련 대학들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지역의 예술 부문에서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하여튼 지금 현재에는 대전지역 모든 대학의 미술대학에 윤 교수님의 제자들이 현재 주류를 이뤄 후학 양성에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대전과 충남지역의 문화창달에 끼친 영향은 무시 못할 정도로 크답니다.
이는 대전 및 충남지역에서는 절대적이었답니다.
오늘도 날씨가 매우 차답니다. 건강들 잘 챙기시고 특히
중국산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고 파이팅하십시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그렇습니다.
님의 의견처럼 한국 여류 조각계와 대전 및 충남지역의 미술계에서 윤영자 교수님이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답니다.
특히 국공립, 사립 등을 막론하고 대전 모든 대학에 미술대학 개설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충남대학교의 미술대학과 음악대학 신설 등 예술대학 개설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이전에는 목원대학만 오직 음악대학이 있었는데 윤 교수님의 노력 덕분에 지난 1970년대 초반에 미술대학이 신설되고 숭전대학교(지금 한남대학교...원래 1960년대 후반 대전대학과 서울 숭실대학이 합병되어 숭전대학교 서울 캠퍼스와 대전 캠퍼스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가 20여년이 지난 후 서울은 숭실대학교로 대전은 한남대학교로 분리 독립이 되었음)에 미술대학이 신설되었답니다.
그런 후 윤 교수님 제자들의 활약 덕분에 지난 1980년대 초반에 대전에서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예술대학이 따로 없었던 충남대학교에 음악, 미술대학이 신설되어 제자들이 교수 등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지역 미술계 전반에 끼친 공로가 매우 컸었죠. 지역 미술계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도 부정 못 합니다.
오늘도 날이 매우 춥습니다.
좋은 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우리나라 여류 조각의 초석을 다진 윤영자 교수님의 업적에 존경을 표하고 후세 여류 조각가 후배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신 윤 교수님의 노력에 공감을 표합니다.
오늘도 파이팅하시고 즐겁게 하루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요즘처럼 중국산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고생 많이들 하시죠.
이럴수록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 중국산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방역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매우 유익한 의견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부동산분석가 감사합니다.
항상 귀중한 정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