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민족일보 다시읽기 [235]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박두진(시인)
사택마저 내놔야 할판
간소한 집 짓고 시업과 농사가 원
「.... 양지 바르고 조요한 산기슭이면 족하다. 이러한 곳에 나는 내손으로 설계한 열여덟 간쯤의 간소한 집을 짓고, 내 힘으로 지을만한 전답을 마련해서 시업과 농사를 겸한 생활을 해보고시다. 취미나 운치나 운둔의 일시적인 허영으로가 아니라 안분할 수 있으며 조그만큼의 억지나 부자연함도 없이 편하고 건실하고 즐거운 심정과 청신 발랄한 탄력 있는 의욕으로서의 시⋅농 일원의 생활을 해보고 싶다! 논밭의 거리는 주택에서 물론 가까워야 한다. 면적은 논이 댓 마지기 밭이 칠백 평쯤....」
「누구 누구들 가까운 친구들을 청해 와도 아무개는 인절미, 아무개는 증편, 아무개는 차시루떡, 아무개는 수밀도 화채, 아무개는 수정과로 이렇게 그 친구 친구의 줄기는 것을 주로 해서 장만해 내기로 한다. 또 도시의 친구들이 며칠씩 와서 묵으며 글과 그림의 구상제작을 마음 놓고 해 갈 수 있도록 한다. 그 뿐이랴 땀을 흘리며 밭에 엎드려 일하는 쉴 참에 시원한 바람맞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도시 혹은 먼데 친구로부터 보내온 다정하고 도톰한 편지를 받아서 뜯어보는 맛이라든지, 잉크냄새도 싱싱한 신간 잡지나 단권책들을 흙 묻은 손으로 받아보는 그 맛은 지금 상상만 해봐도 만족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미구에 낙향을 앞둔 알뜰한 「플랜」도 아니며, 안성 땅인 옛 고향 산마을의 추억도 아니다. 수년전 피난살이 속에서 씌어진 시인 박두진씨 자신의 수상문의 일절인데 지금의 시인의 어려운 처지로 보아 다시 한 번 「아이러니칼」하게 생각나는 말이다.
「하두 남의 집살이에 젖어 놔서, 셋집이나 어디나 가서 조금 있으면 그런데로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해방 전 금융조합 재직 당시 내 소유의 집이 있어 본적이 있읍니다만... 글쎄 내가 집을 살 형편만 될 양이면 우리 사회도 정상적인 궤도에 놓인다고 하겠죠.」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은 지 수년이고 또 세칭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박씨는 문학을 직업에 포함해 생각한다면 이 직종부면에는 결혼 못한 사람이나 생계가 서지 못해 성가가 늦어지는 예가 허다하지 아니한가?고 반문하면서 「문학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무력한 일인데-더구나 시는 돈이 되어야죠. 사실 가족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와 결혼할 때는 그만한 각오는 있었겠지만 그러나 정신적인 각오와 현실적인 인내와는 다르니 말입니다. 역시 자식을 키워봐야 제집의 필요성이 절실해 지지요.」
박씨는 현재 연세대의 신촌동 사택에 들어있으나 작년 여름 동교를 퇴임한 이후는... 그렇다고 정처도 없는 형편이라고 하면서 난처한 표정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그리스도」는 탄식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그와 같이 초연하지는 못하더라도-가족이니 뭐니 그들 때문에 소세계라도 있어야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지 집이란 뭐....」하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그것에 비한다면 집 없는 게 서러움 될 것조차 없다고 강파른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R기자)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민족일보 이미지]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
朴斗鎭(詩人)
舍宅마저 내놔야 할판
簡素한 집 짓고 詩業과 農事가 願
「.... 양지바르고 조요한 山기슭이면 족하다. 이러한 곳에 나는 내손으로 설계한 열여덟 간쯤의 간소한 집을 짓고, 내 힘으로 지을만한 田畓을 마련해서 詩業과 농사를 겸한 생활을 해보고시다. 취미나 운치나 운둔의 일시적인 虛榮으로가 아니라 安分할 수 있으며 조그만큼의 억지나 부자연함도 없이 편하고 건실하고 즐거운 心情과 청신 발랄한 탄력 있는 意慾으로서의 時⋅農一元의 生活을 해보고 싶다! 논밭의 거리는 주택에서 물론 가까워야 한다. 면적은 논이 댓 마지기 밭이 七백평쯤....」
「누구 누구들 가까운 친구들을 請해와도 아무개는 인절미, 아무개는 증편, 아무개는 차시루떡, 아무개는 수밀도 화채, 아무개는 수정과로 이렇게 그 친구 친구의 줄기는 것을 주로 해서 장만해 내기로 한다. 또 도시의 친구들이 며칠씩 와서 묵으며 글과 그림의 構想製作을 마음 놓고 해 갈 수 있도록 한다.
그 뿐이랴 땀을 흘리며 밭에 엎드려 일하는 쉴참에 시원한 바람맞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都市혹은 먼데 친구로부터 보내온 다정하고 도톰한 편지를 받아서 뜯어보는 맛이라든지, 잉크냄새도 싱싱한 신간 잡지나 單卷冊들을 흙 묻은 손으로 받아보는 그 맛은 지금 상상만 해봐도 滿足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미구에 落鄕을 앞둔 알뜰한 「플랜」도 아니며, 安城땅인 옛 고향 산마을의 추억도 아니다. 수년전 피난살이 속에서 씌어진 詩人 朴斗鎭씨 자신의 수상문의 일절인데 지금의 詩人의 어려운 처지로 보아 다시 한 번 「아이러니칼」하게 생각나는 말이다.
「하두 남의 집살이에 젖어 놔서, 셋집이나 어디나 가서 조금 있으면 그런데로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해방 전 金融組合 재직 당시 내 所有의 집이 있어 본적이 있읍니다만... 글쎄 내가 집을 살 형편만 될 양이면 우리 社會도 정상적인 궤도에 놓인다고 하겠죠.」
延世大에서 교편을 잡은 지 수년이고 또 세칭 「靑鹿派」 詩人으로 널리 알려진 朴씨는 문학을 職業에 포함해 생각한다면 이 職種부면에는 결혼 못한 사람이나 生計가 서지 못해 成家가 늦어지는 예가 허다하지 아니한가?고 반문하면서 「문학한다는 것이 經濟的으로는 無力한 일인데-더구나 詩는 돈이 되어야죠.
사실 家族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와 결혼할 때는 그만한 각오는 있었겠지만 그러나 정신적인 각오와 현실적인 忍耐와는 다르니 말입니다. 역시 자식을 키워봐야 제집의 필요성이 절실해 지지요.」
朴씨는 현재 延世大의 신촌동 사택에 들어있으나 작년 여름 同校를 퇴임한 이후는... 그렇다고 定處도 없는 형편이라고 하면서 난처한 표정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그리스도」는 탄식하셨는데... 물론 우리는 그와 같이 超然하지는 못하더라도-가족이니 뭐니 그들 때문에 小世界라도 있어야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지 집이란 뭐....」하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그것에 비한다면 집 없는 게 서러움 될 것조차 없다고 강파른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R記者)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